축자영감설을 믿는 자들은 바보들인가?
NJ를 읽노라면 가끔 아직도 축자 영감설을 믿는 자들은 바보라는 느낌이 든다. 정강길씨 글에 따르면 그들은 사탄을 숭배하는 자라는 느낌까지 받는다.
본인은 통합측 교회에 다녔다. 1970년대 중반부터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장신대에 입학하자 그들의 신앙이 변질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그들에게 동조하였으나 나중에 성서비평이 그릇됨을 확신하고 성서비평을 더 자세히 배우기 위해 독일에 유학왔다. 장신대는 60년도부터 칼바르트 신학을 수용했고 점차로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였다.
독일에는 보수와 진보가 확연히 나누어져 있다. 국가 교회 (Landeskirche = 주 교회)는 거의 진보목사들이고 독립교회는 거의 보수파다. 즉, 독립교회는 성서비평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세운 교회이다. 벌써 1950년대만 하더라도 신학엘리트들은 거의 전보 진보주의 학자였고, 보수주의 학자들은 신학대학에 몸을 둘 수가 없어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서히 독립교회에서도 신학자 배출을 위해 힘을 기울여 이제는 국제적 명성을 갖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신학교도 약40개 - 50개로 늘어났다.
또한 보수주의 신학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특히 해석학, 변증학 분야에서 발전을 많이 보았다. 한국 진보측에서는 보수측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것은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다. 즉, 보수주의측 목사들이 정말로 인간 쓰레기요 오물과 같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이 많은 것이 이유가 된다 (NJ의 댓글을 보면). 또한 무지와 죄악으로 인해 성서의 기록을 해석학의 기본을 무시하고 일대일로 적응시켜 혼란을 야기시킨 것이 아닌지?
독일에서는 진보, 보수가 서로 증오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성숙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자신들이 갈 길을 가면 된다.
합리성에서 보면 보수가 진보보다 훨씬 뛰어나다. 물론 진보측 에서는 이 말을 비웃겠지만.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합리성의 차이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이다. 진보와 보수는 세계관이 전혀 다르며 따라서 완전히 다른 종교이다. 따라서 한국도 독일의 전철을 밟아서 진보와 보수가 완전히 구분되어 나름대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된다. 당장에는 안되겠지만.
독일에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 이라는 자매(할머니)가 잇다. 그는 독일신학교의 신학교수로 봉직 중 부흥회에 참석했다고 거듭난 사람이다. 교수직을 버리고 신학교수들이 가장 멸시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즉 성서비평학의 허구성을 밝히고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다. 이러한 일은 기적에 가깝다. 과연 에타 자매는 바보일까?
헴펠만(Heinzpeter Hempelmann)형제는 독일에서 리벤첼 신학교 학장인데(몇 달전부터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휴직) 이전에 그는 많은 책을 저술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보수신학으로 돌아와서 자유주의적인 자신의 책을 모두 정죄했다.
진보신학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세계관의 흐름이 바뀌면 그들의 신학도 바뀐다. J-E-D-P 설도 곧 고전이 될 것이다. 특히 19세기 20세기에 성서에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그것들이 성경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성경의 기록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나마 입증해 주고 있다.
세계사를 기술할 때 성경의 기사를 참조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성경에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고, 성경의 기술은 어떤 역사책보다 객관성에 있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단지 관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 기록된 앗시리아의 사르곤 왕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그의 석비를 발견되기 까지는 역사학자들은 믿지 않았다. 메르넾타왕 (BC 1224-1214) 석비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기원전 1214년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1993년에 발견된 아람어로 된 텔 단 묘비에 „다윗 왕가 (house Israel)“의 „아하시아“ 왕과 „여호람“ 왕 이라는 말들이 등장한다. 그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존재를 의심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이 조그만한 마을의 족장 정도로 생각했다. 앗시리아의 „살만에셀“왕의 오벨리스크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예후“가 „살만에셀“ 왕에게 무릅을 끓고 절을 하는 것이 새겨져 잇다.
이러한 발견은 상당히 많고 앞으로도 발견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서학자들이 이러한 것을 보고도 이러한 그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바꿀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발견되는 오류나 중복으로 여겨지는 많은 부분들을 성서비평학자들이 실제로 오류와 중복으로 본다는 것은 너무 안이한 자세가 아닐까? 당시의 문화들, 저자의 의도, 저작기술, 방법들을 연구할 때 거의 모든 의문점들이 해결된다. 오늘날 근동의 많은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고대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의 문화를 좀더 자세히 연구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들이 성서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한국의 보수신학이 좀더 체계적으로 가르쳐 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신학이 아무리 성숙해도 과감하게 비리 정화를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미래가 없다고 본다. UBF와 같은 이단이 준동하여 유럽과 미국의 매스컴을 타고, 한국 네이게이터가 이단화 되어 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한국 보수교회의 책임이 크다. 성서비평은 종교 다원주의의 입문이다. 성서비평을 하다 보면 조만간 종교 다원주의로 빠지게 된다.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질문: song72@gmail.com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Songd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5.24 저는 축자영감설은 verbal inspiration의 옳바른 번역으로 이해합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어떤 표현이 사용되고 잇는지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언어사용문제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어감이 이상하다고해서 표현을 버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는 유기적 영감설도 축자영감설(verbal inspiration)로 이해합니다. 세대주의자는 독일에 별로 없읍니다. 신학으로서 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기계적 영감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
작성자holyjoy 작성시간 07.05.25 '축자영감'이란 말은 오히려 '기계적 영감"과 연관되어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verbal inspiration에도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plenary verbal theory of inspiration이 있고, 다른 것은 dictation verbal theory of inspiration이 있습니다. verbal이라는 말 자체가 '축자적'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해를 불러오는 표현입니다. 자칫하면, 코란경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해를 괜히 불러 올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축자'라는 말을 꼭 쓰고 싶다면, '만전축자'(plenary verbal)이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어떨지...송단님이 워필드나 핫지의 영감이론들을 계승
-
작성자holyjoy 작성시간 07.05.25 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Kinker교수의 견해가 워필드나 핫지, 혹은 메이쳔 등으로 이어지는 성경영감이론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군요.
-
작성자holyjoy 작성시간 07.05.25 그리고 독일에서는 '유기적 영감설'도, '축자영감설'로 이해된다고 했는데, dictation verbal theory도 유기적 영감론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입니까?
-
작성자Songd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5.25 dictation은 기계적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말을 없어진지 오래됬읍니다. Kinker를 비롯한(저를 포함하여) 독일 보수신학자들은 워필드... 등과 일치합니다. 단지 해석의 기술이 많이 발전되었지요. 70년대에 제가 배운 바로는 축자영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읍니다. 지금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