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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r Story

잇빨중사의 노몬한 전투

작성자잇빨중사|작성시간09.09.01|조회수9,775 목록 댓글 12

 

잘 알려지고 검색하면 내용도 많은 이 '노몬한 전투'

라는 것을, 잇빨중사라는 이름을 붙여 한번 올려보는

것은 색다른 저만의 감회가 있습니다.

 

과거 9사단 사단본부 앞 마을에 살았던 시절, 정말

허술하게 지었던 집 하나를 아버지의 순직 보상금인

가로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루를 두고 건넌

방에는, 9사단 사령부 헌병대 중사분이 살고 계셨습

니다. 아내분과 아이들과 같이 말이죠.

 

이 헌병대 중사분으로 인해서 여러가지 타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접하게 되는데, 월남전

K레이션도 경험하고 했으나, 그중 군사 서적들도

몇권 있었고, 대부분이 한자로 된 서적들이었죠.

 

고등학교가 서울에 떨어져 있고 일산 읍내에서 또

멀리 떨어져나온 저로써는 그런 책들이 좋은 친구

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 읽은 것이 '노몬한 전투'였고, 저자는 아마도

일본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한자가 매우 많은

책이었죠. 이상하게 저는 이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노몬한이란 말의 어감때문이었는지, 전혀 모르던 역사

한 페이지를 읽어서인지 새삼 놀랍고 신기했었죠.

가장기억에 남는 구절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도보로 후퇴하던 일본군들은 너무 지친 나머지

 정강이에 뜸을 놓으면서 행군했다..."

 

군시절, 천리행군 나가기 전이나 혹은 야전에서

전술종합을 끝내고 천리행군 직전에 의무 섬하삼

바로 이 정강이 바깥쪽 위의 혈자리에 쑥 뜸을

주시곤 했었죠. 피로가 빨리 풀린다고. 그럴 때

가끔 그 노몬한 책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이번에 히스토리넷에서 미국인이 쓴 다른 글보다는

조금 자세하고 전략적인 내용이 포함된 글을 보면서

다른 사이트의 글도 참조하여 한번 추억 삼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원래 잘 알려진 내용에서 약간 틀린 내용

도 있는데 이해를 부탁드리고, 틀린 부분의 지적도

모두 공유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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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olia 1939

 

- 스탈린의 꼼꼼한 대응전

 


칼하(Khalkha) 강줄기는

북에서 남으로 평탄지에 흐른다.

 

이곳은 풀이 무성하고 조용한 몽골이고,

 

이는 만추리아(Manchuria: 만주)

동쪽 약 160킬로미터 지점. 

 

1930년대, 허수아비 만주국을 세운 만주의 일본군은 이

강을 국제법상 국경선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만주와 인접

한 외몽골은 그때에, 소련의 섭정정치를 받는 이른바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소련식의 군대 문화등은 아직도 몽골에 많이 남아 있다.

 

키 포인트가 된,  

이 국경의 동쪽 16킬로미터 지점에 이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근처에 ‘노몬한’이란 마을이 있었다. 정확한 국경은 있었지만,

유목민 몽골인들은 수 세기 동안 가축떼를 몰고 강을 건넜

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므로 그 넓디 넓은 평야에서 1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는

국경의 범주로 보기 애매했다. 그러나 일대를 통제하고 있던

일본의 정예부대 관동군은 이를 보는 관점이 전혀 달랐다.


(Khalkha: ‘할하’라고도 함)

 


1939년 4월, 당시 츠지(tsuji) 마사노부 소령은, 악명 높고

가끔은 총명한 육군 작전부의 상급 장교였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1931-32년 동안 이 황폐한 땅에 국경선을

긋는 초안을 마련한 바 있었다. (츠지, 혹은 쓰지.)

 

그러나 국경 분쟁이 일어나면서  원리원칙에 의하여 정확한

국경선을 지킬 것을 주지했다. 일본은 국경에 관한 규칙서를

공식적으로 만들어 원칙 이상을 조금도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

 

그 지역의 이름도 바꾸어 이름을 만추코(Manchukuo)란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이 땅이 자신들의 만주국의 영토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원칙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국경선은 완벽하게 규정짓기 힘들고,

 지역 사령관은 그들의 국경을 잘 설립해야 한다.”


그러나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싸워라. 국경선에 관계없이.

 누구도 소련이 힘(위성국)이 들어오는 것은 허용 않는다.”는...

 

소련의 방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 되고 말았다.

 

일본이 명명한 만추코 일대는 소련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위성국인 몽골인들이 수 세기동안

쓰던 땅이라는 의미였다. 위성국 몽골은 소련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또한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즉 소련이

만들어지자, 발기의 표적으로 유럽을 노리는 예비 수의 하나로,

소련 영토 주변에 붙어 있던 차후 나라들을 위험제거 차원에서

위성국으로 만들었고, 몽골은 그 대표적인 곳이었다. 현재는

독립을 했지만 아직도 소련색의 문화나 기타는 아직 많이 몽골

남아 있다. 그리고 일본군이 만주국을 세워서 야욕을 품자

몽골에 병력을 파견해서 국경에 배치했다. 소련은 여전히 일본이

과거 영욕으로 러시아를 가볍게 보는 게 기분 별로 좋지 못 했다.

 

쉽게 말해 소련은, 유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등 뒤에서

일본의 공격을 받을 확률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1939년 5월, 관동군의 미치타로 코마츠바라 소장은,

이러한 국경논쟁에 관하여 응답했다. 그는 그 지역을 담당한

관동군 제23사단장이었다. 그는 참모들과 회의를 열고 이

국경에 관한 새로운 원칙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는 몽골군의 기병대가 노몬한(Nomonhan) 근처의 칼하

강을 건너서 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는 관계자들을

모아 주의 깊게 회의를 한 후, 단단한 계획을 세웠다.

 

코마츠바라는 책을 많이 읽는 사색적인 사람이었다. 피로에 지친

국경 경비임무에서 강한 응답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가의

몽골/소련군을 밀어내기로 한 것이다. 수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습격한 외몽골군을 곧바로 격파하기로 결정이 났다.”


이 결정은 나중에

2차대전 전략에 매우 중요한 하나의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이 전투는 좀 더 강력한 국경분쟁의 도화선이 되고 만다.

 

10만 명 이상의 병력과, 수백 대의 탱크와 전투기로 4개월

간의 전투가 시작된다. 이는 일본군 측에서는 ‘노몬한 전투’로

기록되고, 소련과 몽골 측에서는 ‘칼힌 골(Khalkhin Gol) 전투’로

기록되게 된다. 


이 전투의 양쪽 브레인은,

일본군 츠지 소령과 소련의 주코프 장군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독일의 소련 침공에 지대한 영향을 준 전투가 되어버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내륙의 외딴 곳

에서의 이 전투가,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묻혀 버렸다는 것이

다. 또한, 이 노몬한 전투는 독일의 나치와 소련이 불가침조약일

인 1939년 8월에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 이 조약을 밑바탕으로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새로운 세계대전에 불씨를 당겼다. 

 

 

노몬한의 전략적인 키워드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차후 적이 될

독일과 일본을 외교적으로 교섭하며 군사행동을 준비했다. 독일은

영국/프랑스/소련과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결국 이말은

거꾸로 폴란드를 침공해서 먹겠다는 말이었다. 외교문서는 항상 그

반대의 뜻을 함축한다.  외교문서에 굉장히 유연한 단어와 문구를

쓰는데, 이는 엄청난 독소조항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스탈린은 독일과 일본을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을 상대하기

에는 벅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노몬한 근처에서 일본군을 폭풍 속으로

몰아넣는 군사행동의 보증수표가 되었다.

 

 

 

 

 

1차 분쟁의 시작


1939년 5월 28일 새벽,

관동군 23사단장 코마츠바라 장군은 작전을 실행했다.

 

그러나 그는 일련의 소부대 배치에서, 5월 중순 결단성 없는

판단을 내린다. 그는 다케미슈 야마가타 대령에게 2,082명의

병력을 주고  이 몽골군 침입자를 짓밟으라고 명령했다.

 

이 야마가타의 부대는 관동군 23사단의 한 대대를 중심으로

불려졌다. 포병연대의 75밀리 포와 소형 속사 기관총반들이

포함되었다. 


220명의 정찰부대가 트럭과 장갑차를 타고 출발했다.

지휘관은 중령 야오조 아주마(Yaozo Azuma)였다.

 

 

 

예상보다 준비된 몽골군 배후의 소련군


야마가타 대령은 칼하 강의 교량에 소련이 소대 규모의 병력을

방어로 축성한 것을 깨달았다. 그곳은 노몬한 서쪽 1.5킬로미터

거리였다. 그는 강변 동쪽(소련이 강을 건넌 상태)에서 적에게 덫

을 놓아 격멸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주마의 정찰부대에게 명령

해서, 강변 동쪽 제방을 따라서 남하하여 교량을 탈취하라고 했다.

 

그것은 몽골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야마가타의

포병의 지원을 받는 보병은 정면으로 공격했다. 야마가타의 부대

는 소련군을 강까지 밀어내고 아주마 부대를 기다렸다. 그 중간에

소련군을 가두어 격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정보로 인해, 전투 기간 내내 일본군은 재앙의 연속

이었다. 야마가타는 몽골군이 점령하고 있는 교두보가 몽골군의

전통적인, 풀이 무성한 초원지대의 경-기병이라고 착각했다.

 

사실상, 이 몽골군은 소련의 보병을 증강 받고 있었고, 전투공병,

“tankettes”라고 불리던 기갑차량과 76밀리 자주포로 무장하고

있었고, 이들 연합된 병력은 1천명이나 되었다.


그날 아침, 야마가타의 주력군은 노몬한 소련과 몽골군에 대한

최초 공격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소련/몽골군을 교량 쪽으로 밀

어냈다. 그러나 야마가타의 진출은 소련군 포병과 기갑에 가로

막혔다.

 

그동안, 아주마의 정찰부대는 교량으로 전진했는데, 그곳에는

포병과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소련의 보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련군의 장갑차는 진짜 전투용 차량이었다. 중형 탱크와 비슷

한 포탑이 달려 있었고 탑에 45밀리 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당시, BA-6 소련 장갑차

 

 

아주마의 부대는 포병도 대전차화기도 없었고, 교량의 소련군과

싸울 능력이 불충분한 부대였다. 야마가타가 멈칫하고 있는 사이,

아주마의 부대는 자신이 두 개의 강력한 소련군과 상대하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고, 점차 포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소련이 급하게 이 지역에 파견한 제149보병연대는 전초대

였다. 그들은 트럭을 타고 전투지대에 들어와서 아주마의 부대와

상대했다. 야마가타의 부대는 아주마 정찰대의 몇 킬로미터 거리

에서 고착되었고 그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

 

결과는 피할 수 없었다.

아주마의 정찰부대는 전멸했다.

 

오직 4명 만이 밤에 탈출했다.

그 4명 중에는 아주마 중령도 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완전한 재난이었다.

 

당시 관동군의 기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코마츠바라 장군은 마음에서 양심을 가책을 느꼈다.”

 

 

 

 

복수는 두 개의 무덤을 판다 (중국속담) 

 

6월 19일,

소련군의 폭격기들이 국경선을 넘어 12마일을 날아와 일본군

보급기지를 폭격했다. 그러자 관동군과 코마츠바라 장군은

1차 전투의 복수를 가속화하게 되었다. 관동군 본부의 츠지

소령은 빠르게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다.


츠지 소령은 전쟁기간 내내 악명이 높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겨우 37세였다. 그는 별로 감동적이지 않은 150을 조금

넘는 작은 키에 뚱뚱했고 얼굴이 검어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는

아래 부하들을 강권을 통치하면서 지적이었으나 자신을 과신하

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이상주의자이고 씩씩했으나, 광적이고 잔인하기도 했다.

그는 생각과 행동을 모두 하는 인물로, 전투계획에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기도 했다.


츠지와 동료들은 이 복수작전을 23사단보다는 관동군의 최고

사단이라는 7사단에게 맡기기로 했다. 23사단은 1938년에 만

들어진 1년 된 사단이었고 전투 경험이 별로 없었다.

 

52세의 23사단장 코마츠바라는 관동군 내에서 확실히 소련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무관으로 근무했었

고, 관동군 내의 소련정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으나, 전투

경험은 별로 없었다.


관동군 육군사령관인

켄키치 우에다 장군은 츠지 소령의 작전계획

중 딱 하나를 거부했다.

 

그는 23사단이 선두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23사단의 실전

경험이 미숙한 것은 인정하지만, 코마츠바라는 분명히 노몬한

지역에 우선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우에다는 이렇게 말했다.

 

“23사단이 주축이 되어 다른 부대가 배속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우에다 장군은 23사단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 상반의견을 종합하면, 우에다는 소련의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에서 일본군큰 피해를 볼 가능성을 안 것 같았고, 그 피해

를 정예인 7사단에 주고 싶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우에다는 그의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그(코마츠바라)에게 자살임무를 맡기는 거야.”

 

그의 명령에 참모들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츠지의 공격계획은 23사단을 보강하고,

마사오미 야수오카 준장에게 강력한 타격군을

주어 조공을 한다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탱크연대를 만들고, 자동화 포병연대, 그리고

7사단의 걸출한 정예연대인 26연대를 23사단에 배속시켰다. 또한

제2공군전대를 포함하여 총 공격병력은 약 1만 5천 명과, 116문의

포와 대전차포, 87대의 탱크, 180대의 항공기가 포함되었다.


작전지역의 몽골/소련군은 어림잡아 1-2개의 보병연대와 두 개의

작은 기갑부대 그리고 2-3개의 항공전대, 또한 몽골군 기병이라고

일본군은 생각했다. 그러므로 관동군은 승리를 확신했고, 표현하기

‘푸줏간에 걸린 팔다리가 잘린 닭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요 관건은,

임박한 자신들의 공격에 상대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칼하 강 서쪽을 항공기로 공중정찰했고, 이로 인해서

몽골/소련군이 경계태세에 있지 않다고 보았다. 일본군 항공기가 나타

나도 그들은 경보를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거기다 매우 위험한 상대인 소련의

게오르그 주코프 장군이 새롭게 지휘관으로 나선 상태였다.

 

 

 

주코프 장군의 등장


6월 1일,

42세의 강건한 주코프 장군은

당시 벨로루시 지역의 군사 부사령관이었다.

 

그리고 모스크바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았다. 주코프 장군은

스탈린소련군 장교들을 숙청할 때의 최근 방법을 떠올리며

불안하게 전화받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기갑부대 지휘관은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감방에서

처형당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 대신에, 스탈린은 노몬한을 맡겼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곧바로 그곳을 날아가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그곳의 지휘권을 인수하라고 스탈린은 명령

했다. 그러자 그가 데리고 있던 참모들이 그에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그곳에 도착하거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보고 우리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몸에 구멍이 뚫리기 전에.”

 

(참모들은 그가 숙청의 과정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 하다.)


실제로 제1차 노먼헌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이 지역 소련군

장군은 스탈린에 의하여 숙청당했다. 특히 제정러시아의 귀족

출신 장군은 거의 100% 숙청대상이었다.


6월 5일, 주코프는 몽골 내의, 노몬한 서쪽 160킬로미터 지점의

소련군 제57군단의 본부가 있는 탐삭 불락에 도착했다. 그는 군단

장 케클렌코와 간단하게 논의를 끝냈으나, 군단의 다른 참모들은

그 일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한 참모만이 그 전투지역

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주코프는 그를 대동하고 전선으로 향했다. 


전선을 시찰한 주코프는 모스크바에

 

‘노몬한 사건은 단순한 국경충돌로 보이지 않는다.

 일본군은 곧 단계적으로 교전을 확대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 소련군 57군단은 그런 전투를 치르기에 특히 지휘력

부적합하다고 했고, 주코프는 강의 동쪽에 거점을 만들어 만일

일본군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57군단장 페클렌코는 바로 직위해제 당했고

주코프가 그 자리에 대신 앉았다.

주코프의 군단은 강하게 증원되었다.


제36기계화보병사단,

7-8-9기계화 보병여단,

11탱크여단,

150밀리포로 무장한 중포병부대,

제8몽골인민군 기병사단,

항공기 100대 이상의 전술항공단이 보강되었다.

 

 

 노몬한의 주코프 장군


그리고 이 총합은 소련육군의 ‘제1군(1st Army Group)'이 되었다.

 

 

 

일본군의 2차전 준비


츠지 소령의 공격계획은 5월 28일 전개되었던 야마가타의

계획보다 좀 더 야망이 가해진 것이었다. 주력군인 23사단이

Fui(푸이) 고지라고 불리는 강 동쪽의 고지군을 점령하고,

11마일 북쪽의 소련 교량을 점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교량을 통해서 일본군이 강을 건너고 다시 남하하여

다른 교량까지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수오카의 단독

부대 또한 ‘푸이’ 고지군 근처전개하고, 동시에 강의 남쪽으로

남하하고 코마츠바라와 야수오카 부대는 중간에 덫을 놓아

소련군을 격파한다는 계획이었다.

 

쉽게 말하면 소련 쪽 영토로 더 들어간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는 소련군을 우습게 보고 과거처럼 한번 손을 보겠다는 생각

으로,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다시는 대들지 못하도록 코를 납작하

게 만들어보겠다는, 결과적으로 비극의 씨앗이 되는 공상이었다.


츠지는 개인적으로 공중정찰을 하면서 소련의 공군이 증강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소련 공군에 대한 선제공격이 필요하

다고 생각했다. 이 요청관동군은 바로 받아들였고, 6월 27일

일본군은 공습을 감행한다.

 

130대 정도의 일본기가 새롭게 도착한 지상의 소련군 항공전대를

공격했다. 츠지는 그 폭격기 중 한대에 탑승하여 공격을 관람했다.

약 25대의 소련기가 파괴되었고, 100대 이상이 이륙하는 도중이나

공중전 도중 격추되었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이 우세함을 내세우기 위해 전공이 과장된 것이

었다. 1차 전투까지만 해도 일본 공군은 소련공군을 상대로 전력이

우세했고, 공중전에서 꽤 많은 일본군 에이스를 창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소련군의 항공기 댓수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다.

노몬한 전투 전과 1-2차 전투를 합해서 최종 집계로 보면 소련

전투기가 더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보충을 하기가 힘들

었다. 일본의 공중전 에이스들을 이기려고 노력했던 소련은, 스

페인 내전에서 실전 내공을 쌓은 조종사들까지 노몬한으로 보냈다...

 

 

 

일본군의 초전 승리 그리고... 


관동군의 성공이 계속되었다.

7월 1일 밤, 23사단은 아무런 전투 없이

‘푸이 고지군(Fui Heights)'을 점령했다.

 

다음날인 7월 2일, 코마츠바라는 빛나는 전술을 다시 감행했다.

71연대의 한 대대가 칼하 강을 건너서 서쪽 제방에 도착한 것

이다. 일본군 전투공병이 강에 보트형태의 가교를 야간에 놓았다.

 

동이 트자, 코마츠바라는 자신의 23사단을 이끌고 소련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강을 건너 서쪽 강변에 모두 도착했다. 그러나 그

가교는 탱크의 중량을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대신 사단

포병이 대부분 같이 강을 건넜다.


동이 트자 소련군은 일본군의 대규모 침공 사실을 눈치 챘고, 조공

야오수카의 부대가 푸이 고지군을 통해서 동쪽 강변을 공격하고

있었다. 당시 폭풍으로 인하여 번개가 쳤는데, 이 섬광에 야오수카

부대의 87대 탱크가 소련군의 눈에 보였다. 이어 일본군 포가 불을

뿜었고 방어군인 소련군 149보병연대는 흩어지게 되었다. 

 


일본군의 탱크가 공격을 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주코프는 11탱크

여단, 7기계화여단, 24기계화연대, 제6몽골기병사단의 제대에 명령

을 내려, 강 서쪽의 바인 트사간으로 향하게 했다. 그곳은 푸이 고지군

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거친 지형이었다. 그러나 코마츠바라의

부대는 이미 그곳을 점령한 뒤였고, 이미 더 이동하고 있었다.

 

 

노몬한 당시 RT-5 소련군 경전차

  


어렴풋한 여명의 아침에, 일본군 23사단의 선도부대는 바인

트사간을 지나서 가다가 북쪽에서 이동하는 소련군 11탱크

여단 선봉대와 만났다. 이 조우로 양쪽이 모두 놀랐다. 소련

탱크가 바로 공격을 시작했고, 일본군은 방어를 배치했고

노새로 끌고 온 대전차포를 준비했다.


결국 주코프가 대규모 일본군이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의 방어대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점거하고

있는 교량을 탈취당해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결과로 일련의 일본군 보병의 공격에, 포격과 약간의 공중폭격

으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은 소련

제 탱크와 장갑차의 가솔린 엔진이 가연성물질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들은 몰로토프 칵테일 선조격인 화염병을 손으로 만들

기도 했다.


한 일본군 보병은 이렇게 회상했다.

 

“12대 정도의 소련군 탱크가 덜컹하고 소리를 내면서 놀랐고,

 (화염병에 의한) 불이 붙으면서 그 연기가 태양을 가렸다.”

 

실제로 이 화염병으로 적지 않은 소련 전차가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나중에 탱크의 엔진들이 디젤로 교체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혈전


코마츠바라의 부대의 공격은 소련의 반격으로 주춤했다. 코마츠

바라의 23사단은 서쪽 강변의 모래땅 참호를 팠기 때문에 조금

허술했고, 물러곳이 없었다. 이 일은 두고 두고 욕을 먹게 된다.

 

강을 중심으로 서쪽은 몽골, 동쪽은 관동군이었는고, 소련 쪽으로

강을 건넌 서쪽은 반대편에 비하여 지대가 높았는데, 코마츠바라는

거의 모래땅인 평탄지에 방어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탱크

캐터필더의 수렁과 같았다.


공격이 오도가도 못하게 되자, 코마츠바라는 야수오카의 부대에

희망걸었다. 야수오카가 교량을 점령하면 코마츠바라의 부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공세는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강의 서쪽

(몽골 쪽) 제방동쪽보다 180미터 정도나 높았다. 그래서 코마츠바

라의 부대는 멀리 야수오카 부대의 진행상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용기를 북돋는 장면이 아니었다.


야수오카 부대의 최초 간단한 성공 후에,

점차 강력한 소련군의 포병, 탱크, 보병과 마주했다.

 

당시 일본군의 89식 탱크는 높이가 높았고 장갑이 두껍지 않았

으며, 소련군 탱크의 45밀리 포에도 손쉽게 관통되었다. 89식은

포열이 짧았고 포탄의 포속이 매우 느렸다. [포의 발사속도는

파괴력에 차이를 만든다.]

 

대조적으로 소련의 BT-7탱크는 나중에 T-34의 원형이 되는 탱크

로,  그 경사장갑은 일본군의 포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

군의 전차가 소련에 비하면 장갑이 모두 얇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꺼운 것도 있었다.

 

그러나 짧은 포신과 그로 인한 포탄의 포속은, 상대 전차의 장갑과

충돌 시 위력이 약했다. 그리고 기갑에 ‘경사장갑’이라는 현대적인

기호가 소련전차 설계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때였다.

 

원래 소련명칭 BT-탱크란 기동선의 우위를 두고 장갑이 조금 약한

전차들이었다. 소련의 전차도 포에 취약했으나, 문제는 대수와 전술

에서 압도당했다는 것.


한번의 짧은 교전으로 소련군 제9기계화여단은 일본군 89식 탱크를

20대나 파괴했다. 보다 가볍고 기동이 빠르나 무장이 약한 일본군의

경전차는 선봉에서 뒤로 물러났다. 오후 늦게, 야오수카 부대의 전진은

정지되었고, 그들은 소련군의 공중폭격에 대비하여 참호를 파야 했다.

 

 

노몬한에서 포로로 잡힌 소련군을 바라보고 있는 일본군들...

 

 

 

고착전의 시작


결국 일본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반으로 갈리게 되었고, 자신들

에게 잠재적인 재난이 닥쳐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본군

23사단가능한 가장 빠르게 강을 건너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다행히, 주코프는 코마츠바라의 사단이 상처

입기 쉬운 상태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고, 이로 인해서 강변

에 경계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7월 3일 밤,

주코프가 포위와 정면공격을 저울질하고 있을 때,

일본군 23사단은 비교적 안전하게 강을 건너 동쪽

제방으로 원위치했다. 

 

 

소련군의 치밀했던 정보전과 보급전


강 양쪽에 피가 난무했으나, 관동군은 목표성취에 실패했다.

이는 일본군 정보력이 매우 취약했던 이유도 큰 이유 중에

하나였다. 소련군의 병력을 너무 낮게 추산했다. 이때 소련군

일본군을 교란시키는 정보전을 전개했고, 일본군은 많은

분량의 정보를 얻었으나 사실상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소련군은 병력의 우위뿐만 아니라 상상 이상의 강력한 전투력

일본군에게 보여주었다. 일본군은 가벼운 성과를 초기에 얻

좋아했지만, 이후 엄청난 전술적 경악을 경험했다. 소련의

화력은 정말로 결정적이었다.


주코프는 나중에 이렇게 노트했다.

“우리의 트럼프 카드는 기갑대형이었다.”

 

이것은 일본군의 값비싼 수업이었고,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숭상하는 무사도 역시 물리적 힘에

강력한 힘을 쓰지 못했다.


노몬한 전투를 단계적으로 확대되어 단순한 국경분쟁의 수준을

넘어섰다. 스탈린은 외교적인 모양새를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서 일본군을 단단히 혼내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럽상황의 영향, 스탈린의 사색 


1939년 여름, 유럽은 분명하게 전쟁으로 미끄러져 들고 있었다.

히틀러는 동쪽으로 가기 시작해 폴란드에 도착했고, 스탈린의

악몽은 하나였다. 바로, 독일/일본을 동시에 상대할 수도 있다는

것. 그의 이상은 원래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이었다.


파시스트 - 군국주의의 전쟁(독일, 이탈리아, 일본)

부르조아 - 민주주의의 전쟁(영국, 프랑스, 그리고 아마도 미국)이었다.


스탈린의 소련은

이러한 저들간의 전쟁으로

자본주의자들이 고갈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고,

이는 6개월 전에 스탈린과 맺은 뮌헨 협정 위반이었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할 경우 독일과

싸우겠다고 포고했다. 소련은 병력을 불리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비밀리에 독일과 교섭했는데, 그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것을

예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1914년의 실수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동안 노몬한에서는 전투가 계속 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스탈린

퍼즐 속으로 점차 들어오고 있었다. 극동의 최고로 자처하는

일본군을 스탈린은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구가 생각이 난다.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서민들이여, 유서를 써라.” )


노몬한에서는 강을 사이에 두고

일본군과 소련/몽골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7월 초의 전투가 지속되던 때에, 일본군은 만주의 포병들을

거의 다 끌어오다시피 했고, 대규모의 야간 공격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더 많이 끌어오고 있었다. 

 


7월에 주코프의 제1육군(1st Army Group)은

57보병사단,

82보병사단, 

6탱크여단,

212공수여단,

2대의 몽골기병사단,

그리고 수많은 보병과,

기갑, 포병부대를 보강하고 있었다.

 

8월 중순이 되자, 1육군의 윤곽이 완성되었다.

주코프는 4개 보병사단 규모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2개의 기갑사단과

216문의 대포,

498대의 기갑차량,

581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인해 보급품과

장비의 추진은 정말 큰 스케일이 필요했다.

 

 

소련의 막강한 보급전

 

그는 시베리아 동쪽 바이칼호 관통철도를 통해서 5만 5천 톤의

군수품을 400마일(640킬로미터)이나 이동시켰고, 4,200대의

트럭도 들여와 보급에 충당했다. 이러한 일본군보다 충만한

보급은 노몬한 전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일본군의 정보력이 약하기는 했으나 장님은 아니었다.

 

일본군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소련군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규모를 몰랐다. 그저 간단한 가정뿐이었다.

 

일본 제국 육군의 성경은 철도에서 200킬로미터 정도가 최대한의

작전거리였다. 200킬로미터 이상은 보급의 문제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몬한이 바로 딱 그 거리였다.

 

만주의 관동군 전체는 오직 800대의 트럭 밖에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소련군의 보급 작전의 규모는 상상을 할 수 없었다.

소련군의 대규모 공격은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관동군의 7사단도 철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입에

며칠이나 걸려야 가능했다. 관동군의 일부 참모들은 소련군이

공격할 경우 7사단을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관동군은 전략예비사단을 서쪽 멀리 보내는 것을 다른

이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7사단 28연대를 노몬한의

수바라 부대에 배속시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7사단은 원래 만주 동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1개 연대

보강으로 코마츠바라의 23사단이 완전히 쓸만해 지지는 않았

다. 주코프는 이 1개 사단을 조금 넘어서는 노몬한의 일본군 부대

과감히 공격하여 쳐부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몬한의 관동군은,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 200킬로미터

 거리에 있었다.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땅이

 너무 넓었을 뿐이다. 그런데 차량의 부족으로 일본군은

 이곳을 도보행군으로 이동시키기도 했다.)


주코프는 일본군 23사단의 전개 상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원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군의 방어선이 꽤 꼼꼼하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이 23사단이 이 황무지와 같은 지대에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았다. 이것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분쇄 역공 준비


마침내 5월 28일 이후,

연대장으로 일본군과 싸우고 있던 레미조프(Remizov)가 과감히

일본군 전선을 관통하여 적진을 정찰하고 돌아왔다. 그는 주코프

가 원하던 정보가지고 돌아왔다. (나중에 이 레미조프는 소련의

인민영웅이 된다)

 

그는 전선의 자세한 정보를 얻어왔는데, 일본군 23사단은 칼하

강 동쪽 몇 킬로 지점에 주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

고 일본군 보병은 기갑의 지원과 이동성이 약하다고 레미조프는

보았다. 또한, 당시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기갑병력은 주로 방어

선의 남쪽과 북쪽에 배치되어 있다고 그는 보고했다.


주코프는 복잡한 공격안을 고안했다.

그는 소련 제1군을 세 개의 타격군으로 나누었다.


중앙공격대는 주코프 자신이 맡아, 포병과 항공의 지원 아래 코마츠

바라주 병력을 정면에서 공격하고, 나머지 두 개는 북쪽과 남쪽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 두개는 주로 기갑부대였다. 이 두 부대가 측면을

돌파한 뒤에 안으로 조여 일본군을 격파한다는 생각이었다.

 

 

심리전


전술적인 기습을 위해 주코프와 참모들은 기만전술을 고안했다.

 

그들은 일본군이 예상한 병력보다 작은 병력으로 보이게 기동했고,

야전전화기와 무전기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것 같은 위장 전문들

송달했다. 그리고 겉치레로 소련군 병사들에게 보내는 것 같은

위장 전단을 살포했다.

 

‘보병이 방어를 위해 알아야 할 사항’이라는 제목이었다.

 

그리고 거대한 확성기로 밤새도록 탱크와 비행기 엔진굉음을

내보냈다. 그러므로 전방의 일본군은 공격의 징후라고 오판했고

확성기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러나 며칠간 이것이 계속 되자,

이들은 이 한밤의 세레나데에 익숙해졌고 나중에는 무시하게

되었다.


공격 날의 밤이 되자,

소련군의 기동 소음이 시작됐으나

일본군은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8월 19일,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약속을 확신하고,

주코프에게 공격을 개시하라고 마지막 그린라이트를 주었다. 

 


8월 20일 새벽 5시 45분,

독일의 외무장관은 불가침조약에

서명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그러자 200대의 소련 폭격기들이 칼하 강 상공에 나타났고, 일본군

거점폭격하기 시작했다. 폭격기들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소련 포병

의 우레같은 포격이 2시간 45분간 이어졌다.

 

그 시간은 소련의 폭격기들이 돌아가 재급유와 재무장해서 돌아오는

시간과 맞춘 정확한 길이였다. 폭격기들이 다시 돌아왔다. 두 번째

폭격이 끝나자 다시 소련 포병이 15분간의 탄막 포격을 했다.


코마츠바라의 23사단은 강력한 폭격 아래 참호에서 뒤죽박죽이 되었고,

이는 그 어떤 일본군 부대도 경험하지 못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육체

정신적으로 나타났다. 코마츠바라의 23사단은 완전히 산산 조각났다.

일본군 포병부대장은 이 폭격을 ‘지옥의 징’이라고 묘사했다.

 

 

소련군의 최후 공격


오전 9시,

소련군의 기갑과 보병이 전선에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강변의 안개가 짙게 피어올라 소련군의 접근이

보이지 않았고, 소련군은 소총 유효사거리 안쪽에서 갑자기 나타

났다. 일본군의 당황과 무질서 속에서 일본군 포병은 오전 10시

15분까지 지원포격을 하지 못했다.

 

이미 일부 방어선은 소련군에 무너졌고, 일부 일본군도 정신을

차리고 완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40마일에 걸친 일본군

방어선은 흉포한 전투가 휩쓸기 시작했다.


첫날의 전투에서,

포타포프 대령이 지휘하는 탱크로 중무장한 남쪽 타격군은 수바라

사단의 남쪽 측면을 점거했다. 그리고 일본군을 향해 12킬로미터

안쪽으로 구부려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코프의 중앙 타격부대

는 일본군의 강한 저항으로 800미터밖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면 공격으로 인해서 수바라는 측면에 증강군을 보낼 수 없었다.

알렉신코의 북쪽 타격부대는 푸이 고지군의 약 3.5킬로미터 부근의

만주군 기갑부대를 손쉽게 넘어섰다. 그런데 이 푸이 고지군은 원래

지형적으로 강한 거점 형태였고, 이는 북쪽 측면의 일본군의 파워

포인트가 되었다. 북쪽 부대는 이 고지군에 막혔다...


관동군 본부는 처음에 주코프의 공격을 범위를 파악하지 못했고,

코마츠바라의 방어선이 견고하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7사단은

계속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


8월 21일에서 22일 사이,

주코프의 남쪽 타격군은 계속 밀어붙여 남쪽 측면을 넘어 일본군

방어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남쪽 타격군의 지휘관 포타포프는

큰 저항 없이 강변 동쪽 17킬로미터 지점의 일본군 거점을 장악했

다. 이는 일본군남쪽 퇴각로를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전히

중앙의 일본군은 강하게 버텼다.  북쪽의 고지군의 일본군이 문제

였다. 주코프는 이렇게 인정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는

 매우 강한 저항을 그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8월 23일,

관동군은 점차 놀라서

7사단에게 노몬한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명령은 너무 늦었다.

 

그날, 코마츠바라는 72연대와 7사단의 28연대에게 반격을 명령했

으나, 이날 아침의 짙은 안개로 인해서 시야가 가려졌고, 안개가 걷

히자 일본군 72연대는 자신들이 소련군 탱크 대열로 전진하고 있었

음을 알고 경악했다. 일본군 보병은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거의 모든

중대장과 대대장이 전사했고, 연대장과 대부분의 참모들도 전사했다.


28연대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소련군의 포격으로 그들은 소련군 앞

500미터 정도에 돈좌되었다. 공격은 당연히 불가능했으나 퇴각은 용인

수 없었다. 일본군들은 압도적인 폭격에 대비하여 참호를 팠다.

 

전쟁 후에, 일본 육군 역사기록서는 수바라 사단장에게 보내온

두 연대의 보고서를 자세히 기술했다. 한 사단 참모는 이렇게

기록했다.

 

“깊은 불안이 엄습해왔다. 우리는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해가 지자,

이 두 개의 일본군 연대는 퇴각을 명령받았지만

이미 박살난 상태였다.


거의 같은 시간, 소련과 독일의 불가침 조약의 뉴스가 도쿄

전해졌다. 군사적 동맹이던 독일에 대한 희망은 끝장났다.

일본은, 소련이 자신만을 상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일에 압력을 넣고 있었던

도쿄의 육군 지휘부는 모욕을 당했다.

 

결국 노몬한에 있는 일본군은 잔혹한 운명을 맞았다.


알렉신코 대령의 북부타격군은 3일간 푸이 고지군의

일본군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 그러나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고지군에는 에이치 아오키 중령이 지휘

하는 800명의 일본군이 버티고 있었다. 병력과 힘은 소련이

우세했지만, 방어거점은 모든 방향으로 요새화되어 있었고,

벙커와 참호를 연결하는 경계선들은 철조망을 두르고 있었다.

이에 소련군 공격자들은 상당히 많은 피해를 보았다.


주코프는 격노하여 북부공격군 알렉신코를 전화로 호출했다.

주코프는 왜 폭풍과 같이 전력을 다해 몰아치지 않는지 의구심

표시했다. 주코프는 바로 그를 직위해제했고 부지휘관에게

지휘권을 인수시켰다. 몇 시간 후, 주코프는 다시 전화를 걸어

“왜 아직도 고지군에 몰아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주코프는 자신의 참모를 하나 북부공격대에 급파해서 고지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북쪽 공격부대에 212공수여단

포병, 그리고 화염방사탱크를 보강시켰다.


일본군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이었다.

소련군의 포탄은 1초에 2-3발씩 떨어졌다. 땅과 하늘이

고동쳤고, 일본군 병사들은 계속해서 불교 주문을 암송했다.

 

일본군의 포병이 파산된 상태에서 그들 앞의 소련 화염방사탱크

막을 길이 없었다. 그것을 본 일본군 장교는 이렇게 표현했다.

“짧고 붉은 화살 같은 화염은 마치 뱀의 혀 같았다.”

 

아오키 중령과 200명의 생존자들은 대부분 부상당한 상태로

명령 없이 푸이 고지군(Fui Heights)을 버렸고, 전투지대를

넘어 동쪽으로 후퇴했다.

 

 

 

점차 기울어짐...


푸이 고지군이 점령되자, 소련군 북부공격군은 점차 남으로

휩쓸면서 노몬한으로 향했다. 다음날, 북쪽 공격대의 11탱크

여단은 남쪽 공격대8탱크여단과 노몬한 근처에서 연결되

었다. 결국 강철의 원형 포위선굳게 닫혔다.


일본군의 남쪽과 북쪽의 측면이 와해되자 코마츠바라의 사령부

제대가 무너지고 흩어졌다. 일본군 방어선은 여러 곳이 절단

되었고 방어를 계속 하는 곳은 고립된 세 곳 정도였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증원군이 포위선을 뚫어주어 밖으로 후퇴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관동군은 길게 늘어져있었고 트럭의 부족으로

7사단을 전투지대로 빨리 이동시킬 수가 없었다. 광활한

벌판을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는 제대도 있었다.


8월 27일, 마침내 관동군 7사단이 소련군 포위선의 북쪽

구획에 도착했다. 하루 동안 7사단은 전투를 벌였지만 소련

군의 기갑부대를 뚫을 수가 없었고, 결국 7사단은 철수한다.

 


포위된 일본군에게 태양이 잔인하게 떨어졌고,

기온은 섭씨 37도에 달했다. 수통이 말라버렸다.

들판의 열기가 이글이글 타올라 정면이 아지랑이

처럼 보였다. 일본군은 땀에 젖고 피로했으나,

강으로 가서 수통에 물을 채울 수가 없었다.

 

결국 동쪽구역의 일본군 지휘관은 자동차의 라디에이터를

열어 식수를 마련해야 했다.  그 더럽고 역겨운 냉각수까지

마셔야 하는 상황의 일본군은 매우 절박했다.


8월 27-28일 통해서, 소련군의 전투기, 포병, 기갑, 보병

들은, 남은 세 개의 일본군 거점에 가차 없는 공격을 감행

했다. 남은 일본군 거점을 점차 부피가 줄어들었고 차차

조각으로 분쇄되었다.

 

그러나 포위당한 일본군들은 용감하게 싸웠고 소련군에게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군 23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완전히 박살났고 몇 명

만이 항복했다.


8월 30일 자정을 조금 지나서,

소련군의 탱크들이 급유를 위해서 잠깐 뒤로 물러났고 보병도

전투 10일 만에 뒤로 빠졌다. 수바라 장군과 400명의 생존자들

은 이때를 틈타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왔다. 일본군 작전기획자

츠지 소령도 그들과 함께 빠져나왔다. 4개월간의 전투로 인해

서 일본군 5만 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국제 정세에 죽이고 사는 전투


이런 상황은 계속되었다.

 

거기다 독-소 불가침 조약은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을

가능케 했고, 9월 1일 독일군은 전격전으로 폴란드를

침범했다. 소련군도 폴란드 국경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산발적인 지상과 공중의 전투가 노몬한

에서 지속되었고, 전투가 완전히 정적에 이른 것은 9월

16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소련군은 파열하듯 폴란드 국경을 넘어 들어갔다.

조약은 거짓말이었다. 스탈린은 원하던 유럽 서쪽

으로 가기 전에 동쪽에서 한번 싸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2년이 지나고, 일본군은 여전히 중국에서 싸우고 있었고,

그것은 광대한 전략상의 자원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1941년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석유 조달금지로 인해서, 일본 내의 공장의 기계들이

멈추고 있었다.

 

그 동안, 독일은 유럽중앙과 서부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어 소련을 침공했다. 이어 세달 간 독일군은,

1914-1918년의 1차 세계대전보다 더 깊숙이 소련 영토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대량으로 파괴되고 포로로

잡혔다.

 

우크라이나가 붕괴되었고, 레닌그라드가 포위되었으며,

독일군은 모스크바로 향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소련군이

그렇게 몇 주 만에 붕괴할 줄은 몰랐다. 일본의 결정이

필요한 때였다. 


히틀러는 일본도 소련에 대항해서 같이 싸우라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노몬한의 복수를 해라. 그리고 극동의 소련군을 공격하라.”

라고 떠들었다.

 

그리고 만약 스탈린이 자신들(독일)의 손에 무너지면

 ‘너희들 일본’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일본 육군은 북쪽으로 향하는 공격을 생각했으나,

해군은 크게 반발했다. 해군은 본 게임 전에 네덜란드

/프랑스/영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식민지로 삼고

있는 인도네시아에는 석유가 있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식민지들은 2차 대전을 수행하

느라 식민지는 무방비상태였다. 방해되는 것은 오직

태평양의 미 해군 함대뿐이었다. 그 남쪽의 코스는 결국

미국과의 전쟁이었다.


1941년 중순에서 말, 도쿄에서 제국회의가 열렸다.

츠지는 당시 중령이 되어있었고, 제국 군사본부의

작전 참모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육군

성의 최고 지휘관은 이렇게 말했다.

 

“츠지,

 그는 미국과의 전쟁을 열열이 주장하는 주인공 같았다.”

 

결정은 곧바로 진주만의 미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서막이었다.


주일 독일대사는

이러한 일본의 결정을 베를린에 타전했다.

 

“내 보고서에 여러 번 언급을 했지만,

 노몬한 전투 이후, 당시 일본군은

 소련군의 능력을 독일군과 동격으로

 본다. 그래서 일본의 육군 지휘관들은

 소련과 지상전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

 하고, 또한 매우 손해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이 남향으로 전쟁을 전개한다는 결정이 나자,

도쿄에 있던 소련의 1급 스파이 리차드 소지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다.

 

이 정보를 듣고 남을 믿지 않던 스탈린도 과감하게

극동의 소련군을 돌려 독일군과의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총 15개 보병사단,

3개의 기갑사단,

1,700대의 탱크,

1,500대의 항공기가 극동에서

소련영토를 서쪽으로 가로질러

독일군을 면접하러 이동했다.

이것은 엄청난 증강이었다.


이 병력으로 주코프 장군은 12월 첫째 주 모스크바 방어에

들어가고, 같은 시간 일본군은 진주만을 공격했다. 2차대전

에서 매우 중요했던 운명의 몇 주간이었다.


주코프는 노몬한 전투의 승리로 스탈린의 신뢰를 받았고,

동부전선이 고착된 1941년 말, 그의 사령부 전체를 맡겼다.

주코프는 그의 적군을 승리로 이끌었고 베를린까지 도달

했다. 그는 최고 인민영웅이 되었고, 스탈린의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1955년에는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노몬한 전투 후의 명함은 극명하게 갈렸다.

 

태평양 전쟁이 다가오자 츠지는 다시 재등용되었고,

그는 말레이-싱가포르 전선의 작전을 계획했다.

 

싱가포르에서 수 천 명의 영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학살한 주동자도, 바로 이 작은 키에 뚱뚱하고 검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또한 난폭하고 부하들을 강권으로

지배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츠지’였다.

 

츠지 마사노부 

 

필리핀에서는 ‘바탄의 죽음의 행군’을 연합군 포로들에게

하도록 부추긴 것도 바로 이 키 작고 뚱뚱하고 검은 얼굴

이었다. 그는 과달카날에도 관여했다.

 

일본이 항복하자, 그는 태국에 숨어들어 불교 승려로 위장

했다. 전쟁범죄 재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그의 공을 자랑하는 책을 여러 권 썼다.

일본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미스테리한 행적을 보여주었다. 그는 10년간

완전히 사라졌다가 라오스의 정글에서 1961년 나타났다.

미군이 전쟁을 개입하려는 초기였다.


(아마도 ‘츠지’는, 윌라드 대위에게 만도로 살해당했으나 결국

회복한 커츠 대령의 오지 왕국에 들어가, 10년간 일본어 강사로

활동한 듯 하다. 그러나 일본인의 속성상, 커츠 대령에게 영어를

배우려고 접근하지 않았을까 한다. 교본은 모름지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영어 대본. 다만, 데니스 호퍼의 모든 카메라에는

필름이 없어서 애석하다.)  


(성격이 나쁠 수는 있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은 포악/잔인한

사람이라고 한다. 영어로 하면 Dog Dick man... 물론 본인이 만든

영어임. 츠지는 일본의 무사도로 볼 때 적어도 세번은 할복하고도

남아야 할 인물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저런 인물들이 또 등용된

다는 놀라운 사실.)


코마츠바라 소장은 1939년 11월 23사단장에서 직위해제 당했다.

그리고 다음해 초에 퇴역했다. 그리고 10개월 뒤 54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했다. (자살로 추정하기도 한다)

 

명령 없이 푸이 고지군에서 퇴각한 아오키 중령은 병원에서 오래

있었고, 이후 미쳐버린 관동군이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자, 이에

옳지 못한 처사라고 반항했다. 결국 그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종전

후, 살아남은 연대장들은 사회적으로 할복을 강요당했고, 이를

거부한 26연대장은 강제로 군적이 축출되었다.


노몬한 전투 이후에,

몽골/만주 국경선은 소련이 주장하는 대로,

일본은 받아들였다. 정확한 휴전은 8월 22일이었다.


이 전투로 소련군도 1만 5천 명 정도의 손실을 입었고,

전차와 장갑차는 270대 정도 손실을 입었다. 소련군에

동원된 부대 중에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차출된 병력과

중앙아시아인도 꽤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의 운명이다. 이들은 노몬한 전투 후에 바로

모스크바 전선으로 주코프를 따라서 이동해서 전투에

참가했고, 일부는 스탈린그라드까지 갔을 것이라고 추측

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만주의 일본 관동군 외에, 만주국의 관군 격인

‘만주군’에는 몽골인, 중국인, 한국인, 심지어 백색 러시아 인

들도 포함된 다국적 인종이 강제로 군적에 편입되었다. 


보통 태평양 전쟁 중,

과달카날에서의 일본군은 노몬한과 같은 무익한 전술을

답습했다고 많이 언급된다. 쉽게 말해서 미 해병대의 탱크에

무작정 돌격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기고 끝.

 

감사합니다.

 

 

 

        잇빨중사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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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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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군 | 작성시간 09.09.07 다시 몽골쪽(즉 러시아 군진쪽)으로 와서 다시 며칠전에 서있던 반대편 중국쪽(일본군진)자리를 보았다는 이 무슨 황당한 정치놀음. 그런데 하루끼씨도 일본인인지라 자신의 나라에 대한 반성의 표현은 없습니다 죽어간 자신들의 동포들을 추억할뿐 이지요 그리고 거대한 초원의 중국과 몽골 민초들의 삶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둘파파장 | 작성시간 09.09.08 닛뽄인들은 그냥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나 보고 어쩌라고, 하는 이런 정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냥 안 가르치고 안 배우니 그저 모르는 그런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 작성자二八中死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0.01 반성의 기미도 없고, 이후 본토전에서 야만전의 우려가 있어서, 몰살책을 택한 미군에 대한 이해는 고려를 못하고 있는 모습들이죠. 그리고 원폭 추모행사만 질질 짭니다. 아무리 인명이 중요하지만 닭과 달걀은 구분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들이 여러 곳에서 한 짓은 일말의 죄의식도 없으면서 원폭행사에서는 세계평화를 외치면서 닭똥티어 스트림... (바로 그런 모습이 원폭을 불렀다고 생각하는 니뽄인이 있을까요?)
  • 작성자치우1 | 작성시간 15.02.07 일본이 소련으로 안가는바람에 소련군은독일로진격...만약일본/독일이전쟁승리했으면...우리는백척간두의위기에 서있습니다...
  • 작성자치우1 | 작성시간 15.02.07 이제는 화생방....더러운 전쟁입니다..누구도완벽한승리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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