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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해병 7연대 Dog Company

작성자잇빨중사|작성시간16.04.26|조회수3,738 목록 댓글 20

요즘 새 글을 찾아서 번역하는 건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에 좀 축적된 한국전

글을 올립니다. 여러 글을 보며 다소 경중

의 독후감이 있겠으나, 청춘을 내던져 우리

땅에서 싸운 분들이라는 생각으로 읽을 때

일종의 경외심과 경각심은 있어야 하겠죠.

 

잇빨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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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프랭크빌

 

 

[프레드 프랭크빌은 이탈리아 이주민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3형제 중에서 큰 형은 1940년 육군에

입대해 나중에 중령까지 달았고, 둘째 형은 1942

에 해군에 입대했고, 막내인 프랭크빌은 1950

해병대 예비군으로 입대했다가, 한국전이 발발

하면서 현역으로 전환되었다.]

 

 

 

 

나는 미 해병대 한국전 제3차 보충병으로 195012

첫 주에 도착했다. 마산 주둔지로 갔더니 해병1사단이

없었고, 며칠 후에 도착했다. 나는 7연대 Dog Company

를 받았고, 장진호에서 돌아온 우리 도그 중대는 15

정도만 남아 있있고 - 장교는 한 명도 없었다. 남은

몇 명도 오랜 전투로 무척 지쳐 보였다.

 

사단은 511월 초 4차 보충병이 도착하면서 전선으로

복귀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 중대는 장교 보충병도 안

들어와서, 2차대전 참전자 중대선임하사가 임시 중대장

직을 했다. 우리 한국 파병 7연대는 35%가 해병 예비군

출신으로 boot camp도 거치지 않았고 이전 군대경험도

없었다.

 

 

Pohang Guerrilla Hunt - 1~2: 유엔군은 인천상륙 후에

부산방어선에서 북상할 때 북한군 10사단을 그냥 지나쳐 진

격했고, 그들은 게릴라가 되었다. 이들은 민간인 옷으로 갈아

입고 피난민 틈에도 섞였다. 그래서 우린 피난민 중에 군대

연령을 빼내 조사했다. 이 포항 게릴라 소탕은 정말 춥고 배

고팠으며,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육체적인 고난이었다. 거의

매일 춥고 배고픈 상태로 이 산 저 산 오르며 정말 힘들게

작전했다.

 

51210 : 지가동 근처에서 중대 전투정찰을 하는데,

fire team 선두로 가고 있었다. 매우 가파른 바위산에 작은

산길이었다. 확 굽어진 길을 가는데 우리 뒤에서 자동화기가

폭발했다. 북한군은 사격군기를 지켜 선두가 지나가자 대열

중앙에 사격했다. 그들은 포병 관측장교와 장교들이 지나가는

 대열을 골랐다. 우린 얼어붙은 땅에 엎드렸고, 총알이 얼음

을 때린다.

 

한 명이 맞고 여러 명이 다쳤는데, 관측장교 찰스 힌맨 소위도

있었다. 힌맨 소위는 나와 해병 예비군부대에 같이 있던 사람으

,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다친 경력이 있다. 이날

힌맨 소위와 소대장 한 명이 같이 맞았다. 먼저 소대장이 맞아서

힌맨이 소대 지휘권을 인수했는데 넓적다리에 맞았다. 맞은 상태

에서 적에게 포격을 유도했다. 이 공으로 힌맨 소위는 은성훈장

을 받았다. 힌맨 소위는 맞은 상태에서 후송을 거부하고 인수한

소대를 지휘하며 포격을 유도했다.

 

212 : 드믄 야간정찰을 하는데, 달도 없고 정말 컴컴했다.

전등도 모드 끈 상태에서 한 마을에 들어갔다. 한 가옥을 돌아서

는데 내 눈에 빨간색 불이 확 타올랐다. 석탄 불빛이었고 - 총을

들었는데 기능고장이 났고, 하여간 난 방아쇠를 못 당겼다. 누군

가 당기지 못하게 한 것 같다. 석탄 불을 피운 한 할아버지와 할

머니였다. 마을은 소개된 상태였는데 집을 떠나지 않은 분들이다.

내가 안 쏜 건 기적이었다.

 

닐리스 구글리아노: 오후에 옆 마을에 북한군이 많다는 말을 들

었다. 우린 빨리 잡기 위해 파카와 침낭을 두고 야전상의 차림에

출발했다. 얼음이 언 냇가를 지나는데 얼음이 깨지면서 허리 깊이

물에 빠졌다. 이후 산을 오르는데 기온은 떨어지고 바람이 불어

내 군복과 몸이 얼기 시작했다. 광풍이 불었고 적은 안 보인다.

 

몇 시간 후 화기중대가 파카와 침낭을 가져왔는데, 장교 것이 없

었다. 서로 교대로 사용해야 했다. 나와 가장 친해지는 미조리 출신

닐리스 구글리아노는 38구경 콜트 리볼버 권총을 어깨에 차고 있었

는데, 화기중대에 그 권총을 주고 침낭과 맞바꾸었다. 구글리아노가

가져온 침낭이 아니었자면 내 목숨을 구했다. 적어도 발이 동상으로

날아갔을 거다. 이날 밤이 지나고 몇 명은 걸을 수 없었고, 이날 동상

으로 영원히 발이 불구가 된 친구도 있다. 동상 무척 걸렸다.

비전투손상 1,700명이 동상이었다.

 

구글리아노에 대한 내 표현은 모자라다. 45kg 군장 때문에 내가

힘들어가자 구글리아노가 대신 지어주곤 했다. 힘이 말 같은 사람

이고 나와 같은 참호를 썼다. 구글리아노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이탈리아 소녀 토니와 사귀었는데, 그녀는

정말 맛있는 음식을 소포로 보내와서 나도 많이 나누어 먹었다.

현재 닐리스 구글리아노는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

토니와는 여전히 연락한다. 토니! 정말 고마웠다!

 

 

 

 

Operation Killer 215 : 해병1사단은 무어 장군의 9군단

소속이 되었는데, 이때 중공군은 횡성을 점령하고 원주 부근

까지 내려왔다. 9군단 전투편성은 24사단 1기병연대 한국군

6사단, 영국군 27코몬웰스여단, 그리고 우리였다.

 

수송수단을 기다리는 동안 우린 군장에 앉아서 프랑스군이

트럭 타고 오는 걸 봤다. 그들은 트럭을 정지하고 도로 우리

반대편에서 잠시 휴식했다. 그런데 한 작은 한국 소년이 그

들을 지나쳤는데, 프랑스군 운전병이 소년이 쓰고 있던 모자

를 빼앗아 자기가 썼다. 그 모자는 앞에 해병대 마크가 찍힌

것이다.

 

소년이 모자를 되돌려달라고 하자 운전병이 소년을 떠밀어

땅에 쓰러졌다. 그렇게 몇 번 실랑이가 있었고, 우리 해병

두 명이 그리로 걸어가 운전병 머리의 모자를 벗겨 소년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프랑스군 병사들이 우리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또한 우리 해병들도 일어나 걸어왔다. 프랑스군은

트럭으로 돌아갔고 우리 해병들도 군장으로 돌아갔다. 소년

은 모자를 되돌려 받자 무척 행복해했고, 우리는 우리 일처럼

기분이 좋았다.

 

224 : 군단장 무어 장군이 헬기 추락 사고로 죽었고,

리지웨이 장군은 후임으로 올리버 스미스 장군을 임명했다.

역사상 육군과의 연합 군단장으로 해병대 장군이 오른 것은

처음이었고, 우리는 스미스 장군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33 : 7연대는 횡성 남쪽의 고지대에 올랐고, 우리 목표

536고지와 222고지가 보였다. 밤을 보내기 위해 참호를 팠다.

땅이 얼어서 우리 소형 야전삽으로는 정말 골프공 크기 하나

파기 힘들었다.

 

그렇게 힘겹게 파는데 중공군이 포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

정말 강력했다! 우린 땅을 끌어않았고 비명소리를 내며 포탄

이 날아와 동토였다. 땅이 바위라 엎드린 우리에게 충격이 전

해지고 기절한 사람도 있다. 그 충격파는 몸을 때렸다. 정말

끔찍했다.

 

포격은 두 시간이었는데, 나에게는 정말 영원처럼 보였다. 1소대

는 소나무밭 밑에서 참호를 파서 좋다고 했는데, 나무들이 부러지

고 파쇄되면서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1소대는 포격이 시작되

기 전에 44명이었는데, 포격이 끝났을 때 14명으로 줄어 있었다.

포격이 지속되는 동안 나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분을 향해 수없는

약속을 드렸다. 살려만 준다면 수도사가 되어 살겠다고.

 

나중에 알았지만, 그렇게 우리를 정말 괴롭힌 것은 횡성에 있던

중공군 노획해서 사용한 아군 15503야전포병대대 야포였다.

만약 포가 노획될 위기가 왔다면 지휘관은 반드시 파괴했어야

한다. 적 노획 직후 이 육군의 야포로 우리 해병들이 죽어나갔다.

 

미 육군 기록 14횡성 전투에서 인용한다:

 

[리지웨이 장군은 지휘력이 미약해 많은 고가 장비를 잃었음을

 주시했다. 알모드 장군도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했고, 특히나

 15포병대대와 503포병대대에서 적이 노획한 자주포 14문을

 큰 손실로 생각했다. 보병 2사단의 인적 손실로 상당했다. 리지

 웨이 장군은 이렇게 장비와 병기를 적에게 노획시키는 지휘관

 은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7연대 D중대는 주로 보충병들이 열심히 일했다. 당시 탄약과

식량 보급품을 쌓아놓고 보초를 세워 경계시켰는데, 전투 중

손실된 것이 있어 정찰을 나가 보급품을 발견해 회수했다.

때 우리는 땅에서 쇠고기가 든 20/60파운드 박스들을 발견했

는데, 우리 분대의 각 fire team20파운드 소고기 박스 하나씩

가져가 먹었다. 최고였다! 우린 햄버커 패티처럼 해서 C-레이션

크랙커에 얹어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런 음식은 정말

오랜만에 먹었다.

 

37 : 밤새 눈이 내렸고, 이른 아침에 소나무에 쌓인

눈을 보니 참 풍경이 좋았다. 우리는 우편물이 담긴 자루

를 들고 횡성 방향 우리 아래 있는 Easy Company에 전달

하기 위해 갔다.

 

우리가 E중대에 갔을 때, 중대는 강력한 방어진지의 적과

싸우고 있었고, 그 두 고지 사이 구역은 횡성 진출과 차단

에 중요했다. 우린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를 지켜봤는데,

갑자기 검은 물체들이 눈 위에 쓰러졌다. 그 물체들은

해병이었다.

 

해군 A1 스카이레이더 4대가 날아와 적 고지에 네이팜들을

투하했다. 이 공중폭격으로 고지의 적 저항은 순간 정지되었

. 우린 우편을 전달하려 다시 올라갔다. 판초에 덮인 해병

전사자들이 누워 있다. 여섯 명. 해군의 폭격 5분에 적 거점

을 파괴해버렸다. 전투에서의 생존은 운과 타이밍이다. 어떤

경우 우리 소대가 공격했는데 적의 방어가 전혀 없었던 때도

있었다.

 

우린 고지에 올라 네이팜이 때린 참호선을 봤는데, 그건 단테

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과 같았다. 중공군들이 숯처럼 변해 있

었다. 그들이 들고 조준하던 총도 나무로 된 개머리판도 숯으로

변했다. 참호선 전체가 검었다. 망자들의 피부는 검은색과 적색

으로 끔찍했다. 네이팜 정말 무서운 무기다.

 

 

50년 12월, 부산 도착. 글쓴이

 

 

Massacre at Hoengsong : 우편물을 내려놓고 계곡을 내려갈

때 우리 fire team이 선두에 섰다. 횡성으로 향하는 고도가 높은

29번 국도를 따라 걷는데, 길가에 도로 양편에 차량과 야포들

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도랑에 탱크들도 보인다.

 

그리고 트럭들을 지나치면서 우린 내복만 입은 시체들을 보기

시작했다. 시체가 정말 많았고, 우린 충격을 받았다. 우린 서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어떤 곳은 50구가 넘는

시체가 내복 상태로 쓰러져 있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동계피복

을 벗겨간 거다. 이들은 투항했지만 적이 동계피복 장구를 빼

앗기 위해 살해했다.

 

그곳에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우리가 도착하기 약 25일 전이

었다. 적은 이렇게 살해한 아군 시신을 길가에 정확히 일렬로

늘어놓았고, 그 길이만 1.5km 정도 된다. 늘어놓은 시체가

멀리서 보면 열차 철도처럼 보인다.

 

싸우다 죽은 사람도 상당수 보였지만, 그렇게 포로 살해로

죽은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눈밭에 쓰러진 시체들. 얼마 뒤

아군 탱크들이 나타났는데 바닥의 시체를 제대로 못 봤다.

우리가 고함을 질렀지만 탱크가 시체의 머리 부분들을 타고

넘어가 버렸다. 우린 햄버거 박스들을 던져버렸다. 시체가

궤도에 밟힐 때 뿜어진 투명한 적색 액체가 바로 그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식욕이 사라졌다!

 

나중에 우린 American Support Force 21이란 걸 알았다. 포병과

보병과 탱크로 구성된 부대인데, 거기 한국군 8사단이 배속되어

있었다. 한국 8사단은 자기들 사단 자체의 완전히 독립적인 지휘

통제권을 요구했다. 상부는 2사단이었으나 정확힌 명령체계가

없었다. The Force 21은 미군/한국군의 지휘통제가 엉켜버렸다.

이 미군과 한국군 혼합부대는 맥아더 사무실에서 나온 일종의

시험이었고, 알몬드 장군은 반대했었다.

 

전혀 믿을 수 없는 한국군과의 연합은 미군에게 자살명령과

같았다. 한국군은 아무런 통보도 없이 패주해 도망쳤다. 우리

해병도 측면의 한국군과 통신팀이 교신을 유지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측면에서 도주했다. 우리 해병도 한국군

과 무전기로 지속적인 통신을 유지했었다.

 

육군 2사단의 Force 21은 한국군 8사단을 구성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래도 미군은 8사단이 미군을 보호하는 역할을 할 거

라고 생각했다. 2사단은 한국군 8사단의 붕괴에 깜짝 놀랐고,

큰 피해를 입은 한국 8사단은 2사단에 알리지 않고 퇴각했다.

 

이 횡성의 학살 전상자는 정확히 추산하기 힘들다. 미 육군의

공식기록인 한국전쟁 14횡성전투에 따르면, 19512

11-13일 동안 미군과 네덜란드군 총 2,018명이 죽었다고 나

온다. 네덜란드군 100명이 Support Force 21에 참가했다. 네덜

란드군 100명 중에서 99명이 전사했고 한 명은 다쳤다.

 

네덜란드군 역사서에 나와 있다. 네덜란드군 역사상 최초

100% 전상에 99% 전사 기록이다. 육군은 자주포 (105/155)

20문을 잃었고, 탱크 6, 차량 280대를 잃었다. 한국군도

자주포와 많은 고가 병기를 잃었고, 3-5-8사단에서 9,844

명이 전사했다.

 

2004년 사망한 베트남 참전자이자 기고가인 게리 터백은

[횡성 학살]이란 기사를 군사잡지에 올렸다:

 

[강인한 해병 7연대 병사들도 이런 충격적인 장면에 쇼크를

먹었다. 자신이 보는 것을 믿지 못했다. 해병대의 마초적인

말투는 교회 목사님처럼 낮아졌고, 1951년 횡성 북쪽 좁은

계곡의 춥고 고용한 날 그것을 목격한 해병이다.

 

아무도 그 대규모 공세를 예상하지 못했다. 횡성 북쪽에 중공군

4개 사단과 북한군 2개 사단이 공격했다. 211, 이들과 상대

한 한국군은 급격히 무너졌다. 그날 밤 한국군을 지원포격하던

미군 15야전포병대대는 한국군 퇴각으로 보호가 사라진 채 밤에

중공군을 맞았다. 포병대대원 204명이 전사했고, 이는 한국전쟁

사상 하룻밤 최대 전사자였다.

 

한국군 퇴각으로 미군 지원부대는 중공군에게 바로 노출되었다.

중공군은 그 좁은 계곡길을 유엔군의 퇴각로로 보고 집중공격

했다. 중공군은 계곡 양쪽에서 퇴각하는 부대를 향해 사격장처럼

쐈다. 사격과 박격포 공격, 그리고 백병전까지 벌어졌다.

 

한 대대장은 이렇게 말했다.산 한쪽에서 공격해 도로 반대편

으로 밀렸더니 뒤에서 적이 내려와 공격했다.’]

 

 

Fighting Withdrawal : 퇴각 중에, 2사단 38연대 M중대 박격포반

관측반과 찰스 롱 병장이 300고지에 남아 있다가 중공군에 휩쓸

렸다. 그러자 찰스 롱은 진내 포격을 요청했다. 그렇게 소총과

수류탄을 싸우던 찰스 롱은 마지막으로 무전기로 실탄이 떨어

졌다. 본 진영에 고폭탄 40발 포격을 요청한다송신했다. 벌떼

처럼 몰려드는 중공군과 싸우다 진내 포격으로 전사한 찰스 롱

에게는 사후 최고훈장이 수여되었다.

 

미군 보병은 아군 자주포, 보급 트럭 등을 퇴각시키기 위한

퇴각로 확보에 노력했으나, 중공군은 이미 사방에 있었다.

그러자 아군 포병들은 포를 수평으로 놓고 지근거리 직접

사로 싸웠다.

 

이렇게 퇴각하던 미군은 중공군 2천 명의 어머어마한 규모의

도로차단점을 만난다. 그곳 외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렇게 횡성을 향해 퇴각전투를 벌이다 미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횡성에 도착한 미군은 다음 날 다시 퇴각을

시작했다.

 

37, 우리 해병7연대가 횡성 북쪽으로 3주 만에 다시 들어

갔을 때, 동토에 여전히 3주 전의 섬뜩한 전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직도 차량들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곳은

매장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묘지였다. 씬들이 도로에 논에 누워

있었고 운전석에서 맞아 전사한 사람들도 있었다.

 

도로에 한 셔먼 탱크가 막고 있었고 궤도 한 쪽이 날아가 있었다.

해치는 열려 있고 탱크장은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고 있고, 탱크장

의 야전상의에는 무수한 총알구멍이 나 있다. 손을 뒤로 묶여 머리

에 총을 맞은 미군도 있었다. 도로에 시체가 넘치는데,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누군가 그랬다.

 

해리 트루먼이 Police Action이라고 했지.

 이 학살의 계곡을 보고 말해라.

 Nice Going, Harry!”

 

횡성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38연대 17연대, 야전포병

대대 15-503-48-96-674대대. 82대공포&자동화기대대.

그리고 187공수연대전투단.

 

15포병대대 - 전사 106, 포로 102

503포병대대 - 전사 27, 포로 39

38보병연대 - 전사 328, 포로 134

 

15포병대대는 대대장과 주임상사가 포로로 잡힌 직후 살해

되었고, 주임상하 할러웨이에게는 최고훈장이 상신되었으나

수훈십자훈장으로 내려왔다. 이 횡성의 학살에서 전사도

포로도 아닌 실종자도 상당히 많다.

 

7연대 2대대 : 37, 7연대 2대대는  횡성 근처 작은

마을을 지났다. 서너 시간 걸었는데 거기서 우린 논에 미군

시신을 몇 구 봤고, 도로 가까이서 계속 나타난다. 그리고

육군 마크가 찍힌 트럭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 얼어버린

미군 시신 네 구가 더 있었다. 그리고 트럭과 탱크가 더

나타난다. 시신은 백 구가 넘어섰고, 일부 시신은 불에

탔고 일부는 발가벗겨져 있었다.

 

미군 시신 열에 하나 중공군 시신이 있었다. 정부 공식 자료

에 의하면 이 계곡 좁은 길에서 육군 약 7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살해되었다.

 

거기서 내가 본 것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잔혹했다. 우리 트럭과 탱크들이 일부 시신을 타고 넘어가버

렸고, 그걸 본 우리 모두는 충격을 받았다. 길을 가고 싶었지

만 얼굴이나 팔이나 손을 딛지 않고 통과할 수가 없다. 여길

지나면서 내 군화는 붉게 물들었다.

 

난 더 이상 볼 수가 없었고, 앞서 걷는 해병의 어깨를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모르겠다.

 

 

Map of Hoengsong

 

 

당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지휘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한국군 사단장도 이 대량살육 책임의 일부다. 북한에 원자폭탄

을 투하해야 했다. 알몬드와 한국 8사단장 최영희의 의견 불일

치는 비극으로 유도했다. 맥아더 장군과 알몬드 장군이 이 학살

의 책임이 가장 크다. 최영희의 8사단은 중공군에 으깨어졌고

29번 도로를 따라 도주했다.

 

그리고 19441216일 벌지전투 말메디에서 독일군 친위대

가 미군포로 81명을 살해한 것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포로 학살은 언론매체를 타고 대중에 큰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62개월 후, 이와 같은 포로 살해가 벌어졌다.

 

1951년 봄과 초여름에 우리가 싸운 중공군은 2사단 마크가

달린 야전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죽은 그들의 미군 야전

상의에서 원래 야전상의 주인의 편지와 사진들을 발견했다.

우린 그걸 모아 그들의 고향으로 보내주려고 했다. 그 사진

과 편지를 보는데 우리 눈에 눈물이 흐른다. 심장이 끊어지

는 것 같았다.

 

우린 그 병사들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이렇게 쓰고 싶었다.

당신의 아들과 남편과 형제와 친구를 죽인 그 개자식들을

우리가 죽였습니다라고... 그러나 다른 문제가 생길 것으로

고려해 편지는 쓰지 말자고 했다. 우린 그런 편지와 사진을

근처 영현등록중대 중대장에게 전달했다.

 

Chinese Possums(중공군의 속임수) : 311, 우리 소대는

횡성 북쪽으로 전투정찰을 나가 적을 찾았다. 어둠이 내리고

우린 야간방어로 전환해 참호를 팠다. 그곳은 어느 산 정상 근처

였는데 모든 능선들이 넓은 평탄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 평탄지

에서 약간 높은 곳으로 가면 능선을 따라 참호선들이 길게

이어져 있다.

 

우리가 참호를 조금 파고 있는데, 그때 갈색 중공군의 파도가

고지를 향해, 그리고 우리 참호선을 향해 뛰어오는 게 아닌가.

우린 군장을 던지고 같은 참호선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것은 생존의 레이스였다. 중공군이 먼저 그 참호선에 들어가

우리에게 쏘면 안 된다. 우리를 보자 중공군은 우리 포병과 공중

지원을 의식했는지 바로 엎드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린 당시

포병과 항공지원이 없었다. 중공군도 이때 눈치를 챈 것 같다.

중공군은 숨었다가 다시 참호로 뛰기 시작한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중공군이 거기 들어가면 우리보다 고도가

유리하다. 문제는 그 참호선 높이가 높아 우리가 다가설수록

소총을 조준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해병 몇 명은 그런 턱받이에 튀어나온 중공군 총을 잡아

끌어 빼앗았고, 우리 몇 명은 그 참호선 끝에 간파되지 않고 점

프해 들어갔고, 중공군을 쐈다. 그들은 마치 도미노처럼 쓰러

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갇혔고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으며,

참호선은 일종의 구금 장소가 되었다.

 

몇 분 동안 일어난 사건에서처럼 내 아드레날린이 그렇게

솟구친 적은 없었다. 기억은 좀 흐릿하다. 우린 한 명씩 쏠

필요가 없었다. 중공군들은 항공폭격에 안전한 곳을 찾아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풀장에

다이빙하듯이 몸을 날려 엎드렸다. 내가 속으로 말했던

기억이 난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좀 웃겼다. 중공군들은 계속해서 우리 앞에서 쓰러졌고,

달려와 감자 자루처럼 쌓인다. 우리가 쏠 때마다 두 명

이상씩 쓰러졌다. 우린 빠르게 참호선 끝에 들어갔고,

참호선 바닥에 엎드린 갈색 퀼트식 누빈 군복이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사격했다.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우린 다시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참호를 향해 목숨 걸고 달렸던 것 때문에 아드레날린이

진정되지 않아 잠이 안 온다. 아침이 될 때까지 조바심이

가라앉지 않았다.

 

동이 트고 우린 참호선을 수색하며 무척 놀랐다. 시체들이

그대로 있었으나, 생각만큼 많지는 않았다. 우리 소대장은

무척 능률적이고 호기만만했는데, 일어서 걸으며 소리쳤다.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 내가 말해주지. 동이 틀 때

놈들은 고지 밑의 우리 대대장 텐트로 가서 손을 들고

항복하려 했어."

 

우린 명랑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대장은 유머가 아니

었다. 만약 그 중공군들이 대대지휘소를 쓸어버렸다면 소대장

은 군법회의 감이었다. 우린 웃음을 참으려 했으나, 소대장은

더욱 더 화가 나고 있었다. 모두 대검 가지고 있지? 이제 놈

들에게 그걸 사용해라. 모든 시신을 총검으로 찔러봐라. 알았

?” 우린 그러지 않고 대검을 깡통 따는 데 썼다. 소대장은

존 웨인 영화를 너무 본 것 같았다.

 

그 참호선 전투에서 우리 중대 두 명이 죽고 여섯 명이 다쳤다.

우리와 싸운 중공군들은 생각보다 과격하지 않았다. 중공군은

밤새 죽은 척 엎드려 있다가 밤 동안 고지로 가서 항복했다.

대대장은 방어선이 뚫렸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일이었다.

 

사단 예비대 : 317일 사단 예비대로 빠졌다. 처음이었다.

대대 예비대 수준까지만 했었다. 다만, 예비대로 빠지면 포병

이 가까워 잠에 좀 시끄럽다. 그래도 우리한테 안 쏘는 게

어딘가.

 

우리 예비대 구역 근처에 92기갑포병대대가 들어와 방열했는데,

갑자기 카메라를 든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지프가 나타났는

, 썬그래스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맥아더 장군이 나타났다.

분 머물렀는데 카메라 후레쉬가 계속 터졌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몇 주 후에 잡지 성조기에 기사오로 올랐다. [맥아더 장군의

최전선 시찰...] 소설 쓰나?

 

51년 중순부터 C-레이션이 2차대전 것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2차대전은 그냥 은색 깡통이었는데, 한국에서 처음 카키색 깡통

과 함께 새로운 메뉴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chicken and rice,

버거/감자와 고깃국물, 소시지 패티, 스파게피와 미트볼, ham

and bean 등이 추가된다. 그리고 경계근무를 서게 될 때 고참들

이 육군 취사반에서 음식을 훔쳐 오라고 시켰다. 나도 보초 근무

때 팬케이크와 메이플 시럽 긴빠이 명령을 받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Three-man Foxhole : 예비대 구역에서 6일 쉰 324일 다시

7연대 D중대는 전선으로 복귀했다. 당시 공격하고 후퇴하고의

반복이다. 당시는 보통 2인호를 파고 앞에 부비트랩을 설치했

는데, 땅 파는 건 정말 힘겹게 매일 반복된다.

 

그래서 이때는 땅도 녹았겠다 침낭을 펴고 누울 정도로 크게

팠다. 그러나 날이 따뜻해져도 참호를 새로 파는 건 항상 좀

그랬다. 북한군이나 중공군이 종종 땅에 시체를 묻어서 파다

보면 끔찍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체를 매장하고 그 뒤에 나

뭇가지나 잎사귀로 위장해 놓는데, 자신들의 피해를 감추려

고 한다. 이때도 참호를 파고 나서 근처에 위장한 중공군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당시는 일단 능선에 참호를 파고 기다린다. 며칠 아무 징후가

없으면 다음 능선이나 고지로 정찰대를 내보내고, 거기 북한군

이 없으면 전진해 다시 거기에 들어가 일단 방어편성을 한다.

이때 근처 농부에게 선물을 주고 물어보는 게 아주 효과적이다.

당시 중공군은 대변용 휴지를 사용했으나 북한군은 사용하지

않아, 그걸 보면 어느 쪽인지 알 수 있다.

 

우린 종종 선물을 남기고 돌아왔다. C-레이션 깡통에 안전핀

을 빼고 수류탄을 넣어 보이는 곳에 두 개 이상 놓는다. 그러면

하나는 그냥 빈 깡통이고 하나에는 수류탄을 넣는데, 먼저 하나

를 흔들어 보고 수류탄이 든 것을 흔들어보면 수류탄이 빠져나

오면서 격발된다. 물론 들면 바로 떨어지게 깡통은 뒤집어 놓

는다. 4초 안에 어떻게 해야 되지.

 

그런데 참호로 돌아오니 숨을 쉴 수가 없다. 참호 바닥의 잎사귀

들을 치우니 고무 같은 것이 보인다. 삽으로 팠더니 누빈 중공군

군복이 나온다. 간밤에 죽은 중공군 위에서 잔거다. 동료에게

그랬다. “3인 참호였네. 근무는 2인만 섰고.” 우린 옮겨서

참호를 새로 팠다.

 

적 징후가 없어 나갔던 한 정찰이 기억난다. 구름이 낀 추운

날 한 마을에 다가섰다. 그런데 한 초가집 처마에 한 여성과

어린아이가 거의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있다. 난 소년에게 껌

을 줬다. 껌을 처음 본 것 같았다. 아이가 주저하자 엄마가

그걸 까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중공군이 와서 말하기를 미군이

마을에 들어오면 다 죽일 거라고. 우리가 죽일 거라고 생각해

통곡한 거였다. 빈약하지만 우리 레이션을 주고 마을을 친구

처럼 떠났다.

 

몇 마일 거리 다른 마을에 가니 역시 같은 말을 들은 주민들이

무척 겁을 먹는다. 그런데 마을사람 중에 무릎 아래 다리가 절단

된 군대 연령의 젊은 남자들 여러 명을 봤다. 우리가 조용히 물

어보니 주민들은 그게 동상으로 수족을 절단한 중공군이라고

실토했다. 그들은 짚에 앉아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마취제 없이

절단해 주었다고 했다. 우린 그들에게 다가가 담배를 주었다.

경계하던 중공군도 그제서야 마음을 풀었고, 우린 조용히

친절하게 마을을 떠났다.

 

초여름에 한 가옥을 수색했던 기억이 난다. 집 안에 여성과 두

-세 살 정도 아이 둘이 있었다. 아이들과 엄마 모두 깨끗한

옷을 입고 깨끗한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엄마가 중간에 아이

는 양쪽에 누워 있었다. 콜레라 같은 병으로 사망한 것 같았다.

그리고 옆방에는 성인남자가 자살한 듯 목을 매 달려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죽자 깨끗한 옷을 입혀 뉘여 이불로 덮어주고

자살한 것으로 보였다. 아내와 아이 없이 살 생각이 없었나보다.

이걸 본 우리 모두는 너무 슬펐다.

 

A Hero on Hill 430 : 513월 마지막 주, 소대장이 나보고 전령

을 해보라고 했다. 전령은 우리 부대에서 다른 부대로 전황이나

전갈을 들고 뛰어야 한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정말 위험하다.

통신 목적으로 하는데, 일단 참호전우에게 미안하다. 우린 전령

을 꺼렸는데 4fire team에서 두 명이 비기 때문이다. 분대장도

두 명이 빠지는 걸 싫어한다. 분대도 우리 가족이고 분대를 떠

나면 고향을 떠나는 것 같아진다.

 

다른 해병이 내 자리로 들어가고 난 전령이 되었다. 내키지 않

았다. 41일에 우리 7연대는 1기병사단에 배속이 되었다.

자기 육군이 된 것. 육군에는 한국 노무자들이 실탄과 식량을

지어다 준다. 그리고 해병에는 없는 스테이크 깡통이나 체리

파이 같은 음식이 나온다. 의무병도 medic이라 불렀는데,

해병은 corpsman이다.

 

4538선을 북상해 새롭게 전선이 형성된다. 이때는 Easy

Dog가 합동으로 작전했다. 우린 능선 남쪽에서 접근하고 E

중대는 능선 서쪽에서 접근해 같은 목표로 올라갔다. 430고지.

오르기는 쉬운 지형이다.

 

어느 밝은 날, 우린 고지를 오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구름이

낮게 깔리면서 안개가 들어서 시계가 극히 제한적이 된다. 그리

고는 또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밝아졌다. 그러니 좋다가 말았다.

맑으면 고지 위에서 방어하는 사람 유리해진다.

 

내가 있던 분대가 선두로 올라갔는데, 은폐된 적 기관총들과

조우했다. 정상 부근에서 강력한 중기관총 사격 소리와 함께

수류탄들이 펑펑 터진다. 난 선두에서 40미터 후방 소대장과

같이 있었다.

 

보통 한국의 능선을 오르게 되면 길이 좁아져 1열로 가게 된다.

그런데 다시 안개가 끼면서 시계가 무척 떨어진다. 적은 보이지

않는데 총알들이 날아와 나뭇가지를 때린다. 안개로 인해 서로

볼 수가 없었고, 그러면서 적과 우린 매우 가까워졌다. 난 앞

사람을 따라갔는데, 2피트 높이에서 나를 막아주는 모양이 된다.

 

기관총은 계속해서 엄청나게 날아온다. 소음은 마치 누군가

나에게 욕하는 것처럼 계속,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런데 또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무척 밝아진다. 무슨 영화도 아니고.

 

정상에서 의무병 리차드 드워트가 욕을 퍼붓는 것을 봄과 동시

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무릎에 맞았고 등에 커다란 고통을

받아 충격을 먹었다. 드워트가 쓰러진 곳 바로 옆에 적 기관총

벙커가 있었다. 벙커는 무척 크고 사방으로 개안구가 열려 있

었다. 의무병 드워트는 다친 해병을 돌보다 네 번이나 사격을

받아 여러 번 총알에 맞았다.

 

생각조차 안하고 난 벙커로 달려가 무릎으로 슬라이딩하면서

분명히 보이는 얼굴들에 대고 총을 쏜 다음, 드워트를 살폈다.

드워트는 죽었다. 난 다쳐 욕설을 퍼붓는 해병에게 가서, 총알

을 피할 수 있는 바위 무더기 뒤로 끌어다 놨다. 그 해병은 계속

해서 저주의 고함을 질렀고 장신이 반 쯤 나갔다. 그러자 프레드

 하디가 좀 그만 떠들라고 소리를 치다가, 결국 그에게 다가가

고지 밑으로 더 끌어내 거기 놔두었다.

 

우린 제압한 벙커들을 지나치며 무리 별로 돌격했고,

오르니 중공군 소총수 무리가 있었다. 이 중공군들은 벙커

에서 총을 쐈는데, 정말 전 세계 최악의 사수들이었다.

우리가 거기 닿기도 전에 그들은 도주했다.

 

우린 전사자와 부상자를 모았고, 우리 기관총 사수 중 하나인

척 컬리도 들것에 누웠고, 전사한 드워트도 들것에 뉘였다.

수통에는 총알구멍이 나서 물이 죄다 쏟아져 없었다. 들것으로

보니 오래된 우리 분대원이 한 명 들것에 죽어 누워 있다. 그리

고 나를 대신해 분대에 들어온 해병도 전사했다. 이걸 생각하면

오늘 날까지도 감정이 복잡하다. 내가 죽을 운명이었는데 그가

들어와 죽었다. 그러나 전사자들이 아니었다면 우린 더 죽었을

지도 모른다.

 

벙커를 수색하면서 보니 본토 록아일랜드 병기창에서 제조된

수냉식 30 브라우닝 기관총 2정이 있었다. ‘US ARMY’ 태크도

붙어 있다. 그리고 록아일랜드는 바로 내 고향이다. 중공군은

우리 고향 친구와 이웃이 만든 기관총으로 우리를 쐈다. 기관

총은 한 달 전 횡성에서 2사단이나 한국군 사단에게 노획한 게

틀림없다. 특히나 말도 없이 병기를 버리고 도주한 한국군...

서쪽에서 접근하던 E중대장은 기관총을 처치해주어 고맙다고

무전으로 알려왔다. 기관총들로 돈좌되어 꼼작도 못하고 있었다.

 

의무병 리차드 드워트와, 오랜 내 분대원, 그리고 나를

대신해 들어간 해병, 그리고 그날 시체백에 들어간 다른

해병들. 그들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518, 리차드 드워트의 양어머니가

중대장 맥킨 대위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내왔다:

 

[맥킨 대위님께...

 

대위님의 편지가 아주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아직 마음속에

고통은 남아 있지만, 리차드가 어떻게 명예롭게 죽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리차드의 친부모가 아니고 우리가 자식이

없어 입양했습니다. 그러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린 리차드를 사랑합니다.

 

리차드의 친모는 너무나 가혹할 정도로 자신만 아는 사람으로,

리차드를 홀대하며 키웠지요. 그래서 우리가 어릴 때 받아서

키웠어요. 우린 어린 시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정말 애정으로

살폈답니다. 그러면서 리차드는 우리의 아이가 되었지요.

 

사실 법적으로는 친모의 자식이었고, 친모는 법적으로 입양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인생을 공유했고, 리차드는

스물하나가 되어 법적으로 우리의 자식이 되었어요. 리차드는

우리가 잊을 수도 없고, 항상 우리 마음 속에 계속 같이 갈 것

같습니다.

 

중대장님이 정말 무겁고 힘겨운 책무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며,

보내오신 편지에 대해 정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Respectfully yours,

Mrs. Albertina Roy...]

 

 

맥킨 대위

 

Medal of Honor :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해군의무병 드워트

는 그 영웅적인 희생에 걸맞는 것을 받지 못했다. 우린 모두

불만이 컸다. 그때 우리는 참 대단한 장교 두 명을 보충병으로

받은 뒤였다.

 

알빈 맥킨 대위는 2차대전 당시 해병 항공대로 참전했었고,

리론 윔피 소위 역시 2차대전 해병보병으로 오키나와에서

싸우다 다친 사람이다. 윔피는 우리 새 소대장이었고 맥킨

대위는 새 중대장이었다. 그리고 드워트는 마치 큰형 같았고

우리와 강하게 결속된 전우였다.

 

윔피 소위

 

맥킨 대위는 드워트가 전사하는 전투에 있었지만, 윔피 소위는

그 직후에 도착했다. 그래서 우리 소대원들은 윔피 소위에게

드워트에 대한 상훈을 요청했고, 우리 소대원 네 명이 정확한

진술을 받았다.

Medal of Honor Citation - Richard David DeWert

 

"소대 선두로 1fire team이 선두에서 가고 있었고, 적의 격렬한

자동화기 탄막에 막히면서 큰 전상이 발생했다. 의무병 드워트는

중상을 입은 해병 데저트를 구하려 앞으로 달려나가 안전한 곳으

로 끌었고, 이때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나 오히려 의무병 자신이

치료를 무시했다.

 

다시 돌아온 드워트는 앞에 방치된 또 다른 부상자를 보고 용감

하게 앞으로 나가 다시 뒤로 끌고 왔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쓰

러진 해병을 구하러 앞으로 나갔으나 이미 사망했고, 이때 드워

트는 어깨에 중상을 입었다. 이때 다시 응급처치를 거부하고 다른

네 번째 부상자의 부름에 달려가 응급처치를 했다. 그리고 이때

적의 집중된 사격에 치명적인 부상을 또 입었다.."

 

그러나, 드워트는 최고훈장을 받지 못했다. 물거품이 된 것이다.

오히려 나는 45일의 공으로 은성훈장을 받았다. 내가 앞으로

달려가 적 벙커에 적을 사살한 공이었다. 그때 나는 벙커 옆의

부상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해 달려나간 것이고, 나는 몰랐지만

그때 내가 부상자를 뒤로 끌 때 수류탄들이 터졌다고 했다.

 

 

Dog Company Map

 

 

The Raid - 51410: 전날 491고지의 중공군을 습격

하라는 말을 들었다. 여기서 명령에 습격이라고 하면 정해진

시간과 특정 장소가 나오며, 교전 시간도 정해져 있어 일정

시간 교전하고 복귀한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사단 정보과를

위해 포로를 잡아온다. 이 습격에는 포병과 박격포 항공지원을

준다고 했다. 이건 우리 D중대 단독 습격작전이었고, 화력

지원이 빵빵해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동이 트자 고지를 내려가 계곡에서 탱크들과 만났다. 브렌돈

오도넬 소의의 소대가 첨병소대로 섰다. 나는 3소대로 윔피

소대장이었고, 우리가 기 박사라 부른 통역관도 함께 갔다.

 

계곡의 작은 시냇물을 한두 개 탱크를 타고 지났고, 중공군이

박격포를 쏘기 시작하자 탱크를 해치를 닫고 우린 내렸다.

래도 탱크는 보병에게 엄청난 위안을 준다.

 

계곡을 떠나 401고지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 모든

화기가 중공군을 향해 퍼부었고, 중공군은 충격을 먹었다.

일부는 참호에 남아 있고 일부는 도망하기 시작했다.

 

이때 많은 중공군들이 2사단 마크가 달린 미 육군 야전상의를

입고 있었다. 이날 우리는 두 고지 정상까지 올라 중공군을

무척 많이 죽였다. 그들은 우리 들에게 달려들었고 우린 조준

해서 쐈다.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흥분되는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느낀 것은, 중공군 죽이기는 참 힘들며, 그들이

진짜로 우리 해병대를 무서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

중공군 포로 질문을 통해서 알았다.

 

 

Sgt. Robert Vincent Damon

 

중대 기관총사수들이 엄호사격을 하다 실탄이 떨어져가자

척 컬리/커티스 메이슨이 자원해서 고지 밑으로 뛰어가

탱크병에게 30기관총 실탄 좀 달라고 했다. 탱크병이 탄통

4개를 줬다.

 

이날 해병 20명이 다치고 한 명이 전사했는데, 전사자는 대단

한 해병 로버트 데이몬 병장이었다. 2차대전 참전자로 은성훈장

을 받은 바 있으며 - 현역으로 전환되어 한국전에 왔다. 데이몬

병장은 부하들 복지에 무척 신경 쓰고 모두에게 동등하게 대하

는 부사관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Mother Damon’이라 불렀다.

 

특히 어린 해병들을 무척 걱정했다. 그래서 어린 해병이 지치면

군장을 들어주기도 했다. 데이몬 병장은 항상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다니다 갈증이 심한 해병에게 주곤 했다.

 

로버트 데이몬은 적 벙커에 돌격하다 전사했다. 데이몬은 1903

스프링필드 소총에 10배율 스코프를 달고 다녔다. 그건 돌격용

총이 아니다. 그건 저격용이었고, 당시 데이몬은 권총을 뽑아

들고 돌격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이 응사했고 데이몬은 전사

했다. 사후 은성훈장을 받았다.

 

491고지에서 우린 아 육군 야전상의를 입고 있는 중공군

전사자의 호주머니를 뒤졌다. 거기서 미 육군병사들의 편지와

사진과 지갑을 회수했다. 횡성에서 전사한 육군 병사들의 것

이다. 우리가 491고지를 떠난 건 오후 4시로, 포로 7명을 데

리고 갔는데, 그 중에 미 육군 야전상의를 입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잇빨 주: 어떤 뜻이 포함되어 있는지 대충 아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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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몬 병장은 1922년 생으로, 부모는 모두 교수였다. 데이몬

도 워싱턴대학을 졸업했고, 다시 부름을 받아 한국에 왔다.

주만 공습 당시 기지 경계병으로 이 사건을 경험했고, 이후 사

이판과 티니안 전투를 치렀다. 이후 일본 점령군으로 있다가

귀국했다. 전사 당시 아내와 아들과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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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소대 출신으로 현재 은퇴한 변호사인 페리 딕키의 기억이다.

데이몬 병장은 딕키의 분대장이었다.

 

"우리 오른쪽에서 기관총과 소총이 폭발하면서 나무를 때린

도탄과 먼지 부스러기들이 사방에서 날리며 내 얼굴을 때렸

. 이때 로버트 데이몬 병장이 내 왼쪽 어깨를 툭 쳤는데,

따라오라는 뜻이다. 데이몬 병장과 나는 왼쪽으로 이동하며

고지를 올랐다.

 

100미터 가는데 갑자기 데이몬 병장이 소리쳤다. "Shoot 'em!!"

병장은 03 스프링필트 저격소총을 가지고 있었고 조준경이 달려

있었다. 그 총은 6발 장전이며 볼트액션이라 한 발씩 계속 장전

해야 한다. 병장은 자기 앞 2미터 수풀에 튀어나온 총열을 보고

소리친 거다. "Shoot 'Em!" 순간 내가 봤고 그 수풀에 내 총을

쐈다.

 

내가 10미터 앞의 그 적을 쏘고 나자 내 M-1에서 철컹 하면서

약실이 비었다. 난 바로 엎드려서 새로 실탄을 장전했다. 다시

일어나 허리 총으로 쏘면서 전진했는데, 다행히 내 총알은 그

적병의 미간을 관통해 머리 위쪽이 날아가 버렸다.

 

이어 사방에 수류탄이 떨어지면서 터지기 시작했다. 난 나무

뒤에 엄폐하다 바로 위족의 작은 바위로 달려가 엎드렸다.

가 엎드렸을 때 수류탄 세 개를 묶은 것이 보였고 내 오른쪽에

떨어졌다. 난 고개만 반대편으로 돌렸는데, 그 폭발에서 내가

살아남은 것이 나조차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머리를 왼쪽으로 돌렸을 때, 데이몬 분대장은 한 벙커 위에

서서 입구를 향해 38구경 리볼버를 쏘았다. 그렇게 서너 발 쐈

, 벙커 안에서 여러 발 응사가 날아왔고 데이몬 병장은 가슴에

맞았다. 그때 병장은 계속 방아쇠를 당겨 리볼버가 돌아가는

상태에서 벙커 안으로 쓰러졌다.

 

병장은 일어나 나를 향해 한두 발자국 걸어오다 얼굴을 땅에

대고 하향으로 쓰러졌다. 병장은 약간 숨을 헐떡이더니 입에

서 피가 솟구쳐 나왔고, 이내 사망했다.

 

병장의 시신은 나로부터 1.8미터 벙커 입구는 3미터 정도였다.

벙커가 직접 눈에는 안 보였으나 벙커에서 사격은 없었다.

이몬 병장을 쓰러트린 벙커의 적은 더 이상 우리가 없다고 생각

한 것 같다. 난 가진 수류탄 두 발 중 하나를 던졌는데, 입구를

지나가 굴러 떨어졌고, 두 번째를 다시 던져 벙커 입구 안으로

넣는데 성공했다.

 

내 위치는 적 벙커에서 안 보였으나 일어서면 맞을까봐 무서

웠다. 중공군들이 벙커에서 나오면서 아무 데나 보고 총을 쐈

. 나는 손과 팔을 노출해 응사를 시도했는데, 마지막 발을

쏘고 클립이 방출이 안 되는 기능고장이 났다. 재장전이 필요

했다. 난 돌격은 못했고 벙커를 주시했다.

 

내 걱정은, 이 전투정찰이 교전이 벌어질 경우 곧바로 퇴각할

거란 사실이었다. 나와 데이몬 병장을 두고 중대가 퇴각할까

걱정된다. 우리 중대에서 나와 데이몬 병장이 가장 앞쪽에

있었고, 앞에 아무도 없었다.

 

난 절대로 포로는 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고, 어두워지면

혼자서 중대를 찾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시선을 밑으로

돌렸는데, 거기 며칠 전에 보충병으로 온 레이몬드 맥컬럼

이병이 있었다. 맥컬럼은 이게 첫 전투였고, 전투 전에 항상

내 뒤를 따라다니며 훈련 받은대로만 하라고 내가 충고했었다.

벙커에서 50미터 아래 맥컬럼이 있었다.

 

난 맥컬럼에게 뒤로 돌아가 도움을 요청해달라고 수기신호를

했다. 맥컬럼은 내 신호를 이해하고 사라졌다. 잠시 뒤 거스

펠트 일병이 올라와 내 바로 밑에 바짝 붙었다. 거스는 수류탄

을 무척 잘 다루는 친구로, 나보다도 굉장히 숙달했다.

 

거스가 안전핀을 뽑고 스푼(안전손잡이)을 날리고 한번 씩

웃더니 벙커를 향해 투척했는데, 수류탄은 벙커 입구로 들

어가 폭발했다. 거스와 나는 일어나 벙커로 갔고 반죽이 된

벙커 안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그 다음 적 위치는 100미터

거리였는데 응사가 없었다. 이때는 전투가 아니라 무슨

훈련 같았다.

 

몇 명이 더 올라왔고, 우린 퇴각을 시작했다. 데이몬 병장의

시신을 끌고 내려왔다. 데이몬은 내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내 분대장이다. 내려 올 때 난 내 고장이 잘 나는 소총을 부숴

버리고 데이몬 병장의 저격소총을 들고 내려왔다. 데이몬 다음

으로 내가 분대장이 되었고, 데이몬 병장은 사후 은성훈장과

퍼플하트를 받았다."

 

이날 전투정찰에서 적 사살 27, 적 포로 7명을 잡았다. 우리는

한 명이 전사하고 22명이 다쳤다. 491고지를 내려올 때 백린

수류탄으로 심각한 화상을 입은 해병도 있었다. 이 전투로 나도

 은성훈장을 받았다. 난 여전히 데이몬의 가족과 연락한다.

Adrenalin Rush : 글 앞 쪽에 고지 아래 있던 참호선을 언급

했다. 이 참호선은 매우 깊고 상당 길이에 지붕이 얹어져 있

었다. 참호선 중앙은 사방을 다 볼 수가 있다. 내가 분대장이

되었을 때 맥킨 대위가 오전 10시 그 아래 참호선에 들어간

다고 했다.

 

이 참호선의 끝 쪽에 폭스중대가 아군 후방감시처럼 있었는데,

이 참호선이 폭스중대를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윔피 소위가 폭

스중대에 우리 일정을 알렸고, 나에게 선도분대로 중공군 참호

에 접근하라고 했다.

 

참호선에 접근할 때, 윔피 소위가 지붕이 있는 참호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그러자 곧 수류탄 응사가 날아와 우리

뒤 바위에서 터졌다. 그러자 윔피 소위가 두 번째 수류탄

안전핀을 뽑았고 숫자를 센 뒤에 같은 곳에 던졌다.

 

수류탄이 터지자, 소대장은 다른 해병들과 그 참호 오른쪽

으로 들어갔고 난 분대원을 이끌고 왼쪽으로 들어갔다.

중공군은 윔피 소위와 무리를 피해 도망치려고 우리를 향해

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야만의 순간이 다가왔다. 2차대전

참전자들은 말하곤 했었다. "네가 적을 죽이지 않으면

병신처럼 덜덜 떨다가 죽어가는 거다." 난 그 말대로

했다.

 

우리가 벙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윔피 소위도 들어왔다. 다치

고 죽은 중공군들이 있었는데, 이때 윔피 소위는 다친 중공군

을 죽이려는 한 해병에게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소위는 해병의

야전상의를 잡고 벽으로 밀고는 소리쳤다. 저들이 포기해야

너도 끝내는 거야, 내 말 들려?!!" 소위는 해병의 소총을 빼

앗았다. "이 소총, 내가 말하기 전까지 절대로 돌려주지 마!"

 

거기서 약간 떨어진 곳에 다른 벙커가 있었고 윔피 소위는

달리면서 수류탄을 또 투척했다. 벙커를 수색해보니 중공군

두 명이 있었다. 이때 포로 둘을 잡아 담배를 주었고 머리에

붕대도 감아주었다. 이로써 우리는 측면의 위험을 제거했다.

 

여기서 내가 ‘adrenaline rush'라고 썼다. 극도의 흥분이나

최고조의 감정이 오면 이난의 몸에는 아드레날린 러시가

나온다. 운동선수가 그렇듯 우리도 전투에서 이걸 경험

한다.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아드레날린이 나오면

심리적으로 여러 상황을 이겨내며, 죽을 것처럼 보이는

고지를 향해 공격한다.

 

그러므로 해병이 부상 중공군을 쏘려는 건 그러한 아드레날린

러시 상태다. 윔피 소위는 이 아드레날린 러시를 금방 진정시키

는 능력이 있어서 그 해병을 질책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번

물어봤었다. 그러자 소위가 그랬다. 놈들이 죽겠다고 하면

죽이는 거야. 우린 해병이라고. 살인범이 아니야.” 그 말은

정말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참호 끝

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소위가 있었던 게 다행이다.’ 전투

에서 막상 그냥 해버렸지만 이후 창피한 느낌이 드는 경우

가 존재한다.

49년이 지난 1998년 맥킨 대위는 과거 윔피 소위에 대한

상훈 상신을 위한 서류를 나에게 보냈다. 당시 맥킨은 대령

이었다. 난 기꺼이 내가 본 바를 정확히 기술해 보냈다.

 

사실 그때는 우리가 몰랐다. 당시 밤새 내리다 그친 그날

아침, 다른 유엔군들은 병력이 모이고 차량들이 들어와

전선이 후퇴하는 시점이었다. 윔피 소대장이 소대 선두

에서 달려 참호선으로 수류탄을 던진 전투는, 우리 D중대

가 유엔군 전선 퇴각의 후위 엄호 행동이었다. 다른 부대

들이 빠져나갔을 때 우리 D중대는 완전히 중공군에 포위

된 상황이었고, 이 전투 후에 우리도 고지를 내려와 퇴각

행렬의 후위에 섰다.

 

일종의 퇴각작전 역공격 행동이다. 우리 D중대가 중공군

눈에 띠는 고지에서 이러한 화동을 했고, 이는 아군의 전략

적 후퇴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윔피 소위에

대한 은성훈장 혹은 해군십자훈장이 상신되었으나 중간에

사라졌다.

 

이후 윔피 소위는 그날 전투의 공으로 은성훈장을 49년 만에 받았다.

 

 

Whistling on the Phone : 51년 늦봄에 고무 재질 에어

매트리스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차가운 땅에 깔고 자면

정말 편안한 고안품이다. 유일한 문제점이라면 4-5인치

바닥에 깔 생각을 하고 참호를 좀 더 파야했고, 몇 파운드

군장에 무게가 늘어난 점.

 

어느 밤, 나는 참호 바닥에 신형 에어매트리스를 깔고 편안

하게 누워 자는데, 희미한 마늘 향기가 맡아진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팝콘 튀긴 것 비슷한 마늘 체취가 난다. 바람이

불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안다. 이러한 적의 탐침은 우리

방어선을 건드려보는 것으로, 만약 우리가 자동화기를 쏘면

기관총 위치를 그들이 파악한다. 그래서 이럴 경우 우리는

보통 박격포를 요청한다. 그들의 습성을 알기에 우리 해병

은 사격군기 준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정면으로

돌격해도 우린 사격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당시 우리는 각 소대에서 방어선 앞 50미터 정도에 전초로 내

보내고, 중대장 직통 유선전화기를 깔았다. 그 기억나는 밤,

나는 전초에 셋 중 하나였고, 적의 정찰대가 우리 방어선 일대

에 들어왔다. 한 명이 쏴버려 했다. 그러나 둘은 반대했다.

만약의 경우 우리 전초와 본 방어선 중간에 적이 끼면 복귀가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말도 못하고 야전전화기를 돌려 조용

히 휘파람을 불었다.

 

물론 휘파람을 적 정찰대가 들으면 죽음이다. 동이 틀 무렵

우리는 잽싸게 방어선으로 돌아와 전투를 준비했다. 중대지

휘소에서는 어떤 자식이 유전전화기에 휘파람을 불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모두 나만 바라본다. 우린 셋 다

무고하다고 주장했다.

 

 

515: Task Force Zebra

 

Task Force Zebra23연대전투단에 여러 제대가 배속된

형태였다. 518일 시작되어 자운리 근처 1051고지

일대를 정찰했다.

 

516, 중공군이 나타나자 한국군 사단은 무질서하게

퇴각했고, 일대 다른 미군부대는 남아서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떤 병력은 총도 없이 퇴각해서 지나갔고 이를

본 다른 부대 장교들이 퇴각을 막으려고 했다.

 

Task Force Zebra는 나머지 유엔군들이 퇴각할 수 있도록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차단조로 들어갔다. 엄청난 차량들

이 도로에 꽉 들어섰고, 이 광경을 본 중공군이 병력이 탄

트럭에 기관단총을 난사했고, 예전의 끔찍한 장면이 다시

한 번 재현된다.

 

그리고 횡성의 학살에 이어, 322일 자운리 도로를 따라

들어간 첫 미군부대가 바로 우리 7연대 도그 중대다. 5

18일 전사한 아군 시체를 300구 넘게 봤고, 일대 지형은

그런 공격에 미군이 방어나 기동이 전혀 불가능한 곳이었다.

 

이 대량학살 역시 한국군이 미군을 보호하지 않고 퇴각한

데 기인한다. 불행히도 미군 장성들은 한국군 도주로 전선

이 붕괴된 횡성학살의 경험을 까먹었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병사들이 고급장교들을 향한 분노가 안 일어나겠는가?

 

Death by Truck : 우린 22일 들어가기 전에 2사단 23연대

전투단이 거기서 중공군에게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길가에

그 학살의 트럭과 지프들이 길을 따라 그대로 있었다. 어떤

트럭들에는 시신들이 앉은 채로 토치로 구운 것 같은 상태

로 있었다. 당시 2사단은 이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중공군에

의해 일대는 차단되어 있었다.

 

날이 따스한 관계로, 그 불에 탄 채로 죽어간 병사들 시신

에서 나는 냄새는 - 모습이 끔찍해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우린 그들을 조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걸어서 그 장면을

통과했다.

 

두 달 전인 3월 횡성 북쪽에 이어 두 번째로 그런 걸 봐야

했다. 그 장면을 보고 나는 내가 해병인 것에 감사했다. 당시

전선에서 62일 째였고 옷은 누더기에 깡통에 든 쓰레기 같은

것을 먹고 이질 설사에 시달렸지만 우리에게 세계 최고의 전투

지휘관들이 있었다. 그 장교들은 우리와 같이 희생했고

우리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후방으로 빠질 때 보통 트럭을 이용했는데, 좁은 도로에서

이 트럭들이 고장나거나 서면 도로는 그냥 막혀버린다.

있는 병사들이 앉아 있는 트럭은 적에게 그냥 표적과 같다.

리지웨이 장군도 이 점을 알았고, 전선에서는 더 이상 트럭

을 남용하지 말고 그냥 해병대처럼 걸어 다니라고 말했었다.

 

모든 기록을 열람해 보면 리지웨이 장군이 전선을 고착하는데

주력해 전면적인 공세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195012

사고로 사망한 전임 워커 장군은 패튼의 부하였고, 무조건적인

북한 공격으로 대단원의 파국을 맞았다. 북한은 산악지형이라

2차대전 유럽처럼 탱크들이 기동할 공간이 없었다.

 

유럽의 전쟁은 전술로 승리한 게 아니다. 보급과 대규모 기갑

사단들의 기동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워커장군이 사령관일 당시

8군과 10군단은 서로 60마일이나 벌어졌다. 워커가 기갑전을

펼치기에는 지형이 너무 달랐다. 이에 비해 리지웨이는 공수부대

출신이라 워커에 비해 차량에서 내려 고지대를 점령하는 전술을

썼다. 그러나 전술의 성공도는 리지웨이가 더 높았다.

 

맥주 트럭 : 51년 여름, 전선에서 교대하고 나오는 병력들은

걸어오기도 하고 육군 트럭을 세워 타고 가기도 했다. 세워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는데, 보통 뒤에 보급품이 있으면

안 태워주고 없으면 태워줬다.

 

하루는 지나가는 트럭에 탄 병사들이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든다.

그러더니 트럭이 섰고 뒤에서 한 병사가 맥주를 하나 꺼내 내밀며

마시라고 했다. 그래서 한 해병이 고맙다고 손을 내미는데, 육군

병사가 우라질 놈(Screw you)." 맥주를 뺀다. 해병은 수류탄을

꺼내 트럭 안으로 던졌다. (물론 안전핀은 안 뽑았다.) 수류탄을

본 병사들이 놀라 트럭에서 마구 뛰어내렸는데, 그 중 일부는

잘못 떨어져서 신음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해병들은

트럭에 올라 맥주를 긴빠이했다.

 

 

Operation Mousetrap : 리지웨이 최초 공세작전은 킬러작전

이었고 쥐덫작전은 515월 초에 시작해 한 달간 지속됐다.

여기서 해병에 관련된 전투는 516-17일 동안 중공군 연대

를 격파한 모래고개 전투. 이 작전은 미 해병대 전투역사

기록을 인용한다:

 

"516일 밤, 해병5연대와 한국 해병대 중대급 정찰기지들이

있던 곳에 중공군 1개 연대가 들어왔다. 당시 7연대 1대대가

춘천 도로를 따라 정찰했고, 2대대는 전초를 유지했는데, 3대대

는 도로 확보에 매우 중요한 모래고개란 곳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공군도 모래고개를 핵심 목표로 봤다.

 

중공군은 어둠을 이용해 한국 해병대 뒤로 스며들어와 곧바로

모래고개로 향했다. 보기에 모래고개는 지키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7연대 섹터는 갑작스런 기습을 새벽 3시에 받았다. 그러자

해병11(포병)연대는 방어포격을 시작했다. 모래고개의 해병

거점은 포병의 강철 커튼으로 누빈 솜옷을 입은 중공군을 막

았고, 이때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때 빅토리아 스토야노우 중위가 중대 방어선 밖으로 나가

반격을 시도한다. 동이 틀 때까지 고개에서 혈전이 벌어졌고,

해병 포병의 야포와 박격포와 함께 통이 트자 항공폭격이

날아왔다.

 

중공군은 약 530명을 잃은 것으로 보이나, 실제 남겨진 시체

112구에 포로 82명이었고, 무반동총과 기관총 등 병기도

노획되었다. 심지어 76밀리 대전차포도 노획되었다. 전투는

미 해병대가 적전으로 우세해, 7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다쳤다.

 

날이 밝은 18, 해병1사단은 재빨리 방어진을 재편성해

중공군 공세에 대비했다. 이 배치가 끝났을 때 해병1사단

은 총 4개 연대였다. 한국해병1연대/7연대/1연대/5연대.”

 

 

개인적인 쥐덫작전의 기억들 : 육군 2사단 32연대 구역을

5월 중순 우리가 들어갔고, 우리 중대는 A중대와 함께 몇 마일

을 계속 걸었지만 적이 없었다. 우리는 두 고지 중간의 계곡에

들어갔고, A중대는 서쪽 우리 D중대는 동쪽에 참호를 팠다.

우린 참호선처럼 교통호도 팠다.

 

그리고 밤 10, 중공군 대대급이 그 좁은 지역을 때렸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일단 압도하는데, 그들은 엄청난 피해

를 입으면서도 우리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주력한다. 전투

동안 낙하산 조명탄과 조명수류탄이 밤새 터졌다. 공격은

두 중대를 모두 때렸지만 주력은 A중대로 집중되었다.

중공군은 그냥 총알과 목숨을 맞바꾼다.

 

동이 트고 우리 앞에 쓰러진 중공군 시체는 한 750구 된다고

들었다. 우리는 시체들을 수색해 병기를 거두고 지도나 기록

등 정보과로 갈 것들을 찾았다. 그리고 불도저를 불러 큰 구

덩이를 파고 중공군 시체를 거기 밀어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대량살육의 증거들이 사라지고 맨땅이 되었다. 우린 다시 전선

으로 걸어서 복귀했다. 중공군은 작은 구역에 엄청난 인원으로

돌파를 시도했고, 우린 거의 방어선처럼 판 참호선에서 진짜

보병의 방어전투를 했다.

 

날씨는 여전히 춥고 비가 내리고 정말 힘들었다. 항상 젖어

있던 기억이다. 그리고 민간인들에는 콜레라가 무척 창궐했다 

 

   

어느 날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걷는데 한국식 초가집들이 보였다.

그리고 저 앞에서 연기가 조금 올라온다. 윔피 소위가 앞으로 달려

가며 소리쳤다. 하지 마! 그만둬!” 가보니 초가집 몇 채에 막 불

이 붙고 있었고, 윔피 소위는 소대원들에게 불을 끄라고 지시했다.

 

우린 야전상의를 벗어서 불을 끄기 시작했다. 결국 불은 껐지만

우리 야상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난 윔피 소위가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걸 본 적이 없었다. 윔피 소위는 불을 지른 두 명에게 소리쳤다.

"양키들이 남북전쟁 동안 이렇게 우리에게 불을 질렀지. 난 여기서

그러는 용납 못 해." 리론 윔피 소위는 진정한 남부의 아들이었다.

 

 

Adventure at the Water Hole : 펀치볼 일대의 고지군을 공격했다.

오르는 길은 길고 너무 더웠다. 정상에 도달하기도 전에 물이 바닥

났다. 일단 물을 구해야 했다. 각 분대에서 2인이 5갤론 통 하나씩

군장에 넣어 짊어지고 수통 여러 개를 달아 아래로 물을 구하러

갔다. 그 물 떠오는 과정은 왕복 5-6시간이 걸린다.

 

나는 핸크 블랜켄쉽과 같이 갔다. 아팔라치아 산맥에 살던 친구로

성격 좋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다. 내려가면서 핸크는 불평했다.

"왜 맨날 우리가 물 뜨러 가야 되냐고!" “계급이지 뭐...”

우린 동의했다.

 

우린 계속 내려갔고, 두 산이 만나는 골짜기가 보였다. 그런

곳에 필시 물이 있다. 앞에 다른 분대 물뜨는 팀이 가고 있었

, 우린 그 골짜기를 가보고 물이 없으면 다시 돌아와 동료들

(water team)을 따라가자고 했다. 만약 거기서 물을 발견하면

우린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우린 가파른 곳을 나무를 잡고 힘겹게 내려갔다. 그 짙은 수풀

을 헤치며 한 시간 정도 내려가니, 두꺼운 나무들과 함께 물이

보였다. 우린 철모를 벗고 총을 나무에 기대고 물통과 수통에

물을 담기 시작했다. 아주 차가운 물로 발목 깊이에 폭이 3미터

정도의 시냇물이었다. 난 수통을 차가운 물 속에 담그고 수통

컵으로 물을 마시고 머리에도 조금 부었다.

 

그때 핸크가 갑자기 말했다. 프레드, 저기 봐.” 고개들 들어

보니 시내 상류 20미터 부근에 중공군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의

상태로 봐서는 우리가 농담을 하며 나무를 잡고 내려오던

것을 봤다.

 

중공군 중 한 명은 소총을 거총하고 우리를 조준하고 있었고,

한 명은 열심히 물을 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수통을 한 다발

가지고 있다. 난 충격을 받았다. 아니 씨발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그리고 총을 거총한 중공군을 응시하면서 왜

쏘지 않는지 또한 놀라웠다.

 

핸크가 입을 열었다. "We are dead."

 

중공군 병사는

조준하던 눈을 소총에서 뗐다. 내가 핸크를 불렀다.

 

물통과 수통에 물을 채우자. 그리고 여길 뜨는 거야.”

 

그러나 핸크가 의문을 품었다.

저들이 우릴 쏠 거라고.”

 

쏠 거였으면 우리가 나타났을 때 바로 쐈어.

우린 그냥 물만 떠가면 되는 거야. 지금 총을

잡으려고 하면 바로 쏠 거야. 그냥 물을 담고 뜨자고.”

 

수풀이 짙어서 조금만 돌아서 걸으면 시야에서 서로

사라질 것 같았다. 우린 조용히 물을 채우고 장비를

챙겨 천천히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수풀 속에서

멀어지자 재빨리 고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에 헐떡이며 휴식했다.

그 물가에서는 평화가 있었다.

 

우리가 고지에 올라가니 기다리던 동료들이 물 마시려고

줄을 선다. 몇 시간 동안 물 떠오는 건 정말 힘들었다.

마시는 동료들에게 물 뜨러 갔다가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

를 했다. 목숨 걸고 떠오는 거니 이제 교대로 하자고.

그러나 이후로도 또 우리 둘만 시킨다.

 

소대장한테 가서 이 일을 말했다. 중공군이 먼저 우리를

봤는데 안 쐈다고. 소대장이 그런다. "그들도 새로운 아침

맞이하기를 바라는 거야." 그 중공군 병사 두 명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516, 우리 중대는 펀치볼 전투에 일부로 참가해,

73일 동안 C-레이션만 먹었다. 메뉴도 딱 세 가지 -

깡통으로 된 콩, 맛 더럽게 없는 비프 스튜.

 

드디어 예비대로 빠져 잠도 아무도 안 건드리고 자고 편지

쓰고 쉬었다. 해변 근처라 일대 지형 연구도 했다. 근처에는

육군 2사단 9연대가 있었다. 같은 나라에서 왔는데 육군은

물자가 우리보다 훨씬 풍부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지프

를 몰고 긴빠이에 나섰다. 우린 군복/식량/기관총 등이

필요했다.

 

해병은 이것을 손쉬운 획득(acquisition facilities)이란 은어로

불렀다. 물자가 근처에 보이면 청구하는 절차의 시간을 줄

이는 것이다. 육군은 눈 먼 장님처럼 우리에게 당했다. 육군

에 신청서 내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우린 그걸 빌린다(Borrowed)

라고 정당화했다. 육군은 물자가 풍부했고, 우린 망실한

장비를 채워야 했다.

 

32년 전인 1차대전에서 해병 5연대와 6연대가 육군 2사단

배속한 역사가 있었다. 해병연대는 1차대전 Belleau Wood

에서 전적을 쌓았고, 당시로써는 2사단이 역사상 처음으로

해병연대를 휘하에 둔 기록을 남겼다.

   

한국 해병대 : 예비대 지역에서 훈련할 때 우리는 한국 해병대

를 받아서 전술과 교리를 가르쳤다. 이때 우리 해병 중에서 일

본어를 하는 사람이 조금 있어서 한국 해병대 교육에 의사소통

이 일정하게 도움이 되었다. 만주 경력이 있어 중국어와 일본어

를 동시에 하는 소령도 있었다. 그래서 한국 해병대에 파견하는

포병 관측장교는 중국어나 일본어를 좀 아는 사람을 보냈다.

 

한국 해병대는 장교가 병사를 개머리판으로 때리기도 했는데,

병사들은 끄떡도 않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국 해병대 장교 중에는 만주에서 동북군에 근무했던

사람도 있고 러시아 백군에서 싸웠던 사람도 있었다.

 

514월의 중공군 춘계공세 때, 우리 해병1사단 우측에는

육군 2사단이 있었는데, 그 바로 중간에 한국 해병대가 있

었고, 이들은 2사단이 퇴각했지만 거기 남아서 자리를 고수

했다. 물론 한국 2개 해병연대도 결국 패주했고 우리 7연대

는 홀로 남았었다.

 

도그 중대에서 근무할 어느 시기인가 바로 옆에 한국 해병대

가 있었다. 우리는 능선에 있었고 그들은 1미터 거리 우리 앞

다른 능선에 있었다. 이때 한국 해병대 1개 소대가 전방으로

진출해 그 앞 능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우린 거기서

그들 전투를 지켜봤다.

 

우리가 본 것은 정말 믿을 수 없었다. 한국 해병대가 능선 정상

중간에 이르러 적의 소총과 자동화기 사격을 받았다. 한국 해병

대는 작은 둔덕에 간신히 버티면서 공격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대장이 둔덕 뒤에서 앞으로 나와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소대원들은 그 둔덕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앉아 있었는데, 소대장이 돌아다니며 무언가 소리

치고 있었다. 한국말을 모르니 정확한 의미는 몰랐다.

 

총알이 날아와 부근 땅을 때리는 게 보인다. 그 상황에서 총알

을 무시하고 지휘관이 어떻게 거기 서 있는지도 놀라웠고,

소리를 치는데 아마도 돌격!” 이런 구호 같았다. 그러자 소대

원들이 갑자기 모두 일어서더니 고함을 지르며 정상을 향해

돌격했고, 결국 그 능선을 점령했다. 우린 한국 해병대가

화끈하다는 걸 알았다 

 

이 당시 전선이 고착되고 있었는데, 10군단장은 전선에서

뭔가 하기를 바랐다. 평화협정이 진행된다고 들었지만 우린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 그쪽이나 서로

지뢰로 인해서 사람이 죽고 있었고, 우리는 전선 중간

무인지대에 정찰을 계속 나갔다.

 

우리 3소대도 어느 뜨거운 날 정찰을 나갔다. 계곡에 마을이

하나 있었고 아무도 살지 않았다. 가옥을 수색했지만 아무도

없었고 우린 더 진행해 다른 마을을 만났다.

 

그 마을에서 갑자기 오두막 뒤로 한 여성이 뛰어가는 걸 봤다.

나와 한 명이 그 초가집을 향해 뛰었고, 가보니 여성이 두 명

이었다. 두 명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들은

울면서 계속 손을 부비며 빌었다.

 

여성 한 명은 나이가 있었고 한 명은 19세 정도로 젊었다.

우리는 진정하라고 했지만 둘은 공포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자 나이를 먹은 여자가 젊은 여자를 일어서라고 하는

것 같았고, 나이 먹은 여인이 젊은 여인의 옷을 벗기고는

땅에 사지를 뻗고 눞게 했다. 다른 해병들이 도착했고 한

명은 나체로 누워 있고 - 울고 있는 두 여인을 보았다.

나이 먹은 여인은 몸을 앞뒤로 흔들며 무언가 간청했다.

 

윔피 소위와 통역관 임영수가 왔다. 젊은 여성은 나체로

누워 있고 나이 있는 여성은 무릎을 꿇고 울면서 손을 부

비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윔피 소대장이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나도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저 여인이 그냥 우리를 보고 옷을 벗었어요."

 

통역관이 물어보니 가족이 산에 있다고 한다. 가족이 너무

배가 고파서 집에 마른 완두콩을 가지러 왔다고 했다. 그들

의 증언은... [중공군이 그러기를 미국인에게 잡히면 강간

하고 죽인다고 했어요. 우린 살고 싶어요. 어떻게든 살고

싶어요.] 왜 젊은 여인이 옷을 벗었는지 우리도 이해했다.

 

그들이, 우리가 죽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또한 우리가

가진 C-레이션을 나누어주자 우리 손에 키스를 하면서

계속해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 순간 나는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기쁨의 눈물을 보았다. 우리는 웃으면서

밤에 만나자는 등 외설적인 농담을 했다.

 

[잇빨 주: 다소 내용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미국식

으로 역설적인 농담을 한 것 같다. 우린 그런 사람들 아니

... 이런 뜻이 될 수 있지만, 이런 농담을 한국식으로

받아들이면 무척 모욕적이다. 그런 뜻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9월에 해병1사단은 감무봉 일대에서 격전을 치렀다. 이는

잊혀진 전쟁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격렬한 전투였고, 해병

 역사가들은 해병1사단 역사상 최고의 혈전 중 하나로 기록

했다. 감무봉 능선 전투는 총 10일간 이어졌으나, 초봄부터

해병대 작전에 문제가 있었다.

 

그 전까지는 항공지원을 해병 제1항공단이 맡아 근접항공지원

을 했으나, 이것이 제5공군으로 넘어가면서 대체된다. 이때부터

공군은 해병대의 근접항공지원 세 건 중 하나는 응답하지 않았

. 나타나도 늦거나 이미 의미가 없을 때였다. 가파른 고지의

경우 후사면은 아군 포병이 소용이 없고, 이런 상황에서 항공

폭격에서 효과적인 네이팜이 없는 것이다.

 

해병 1사단장 제롤드 토마스 소장은 상부에 전선 50마일 북쪽

해안에 상륙작전을 건의했다. 북한군 측면을 치자는 것. 토마스

소장은 1944년 오마하 해변에 상륙했었던 미 8군 사령관 밴플

리트 장군을 찾아갔다. 밴틀리트는 의미가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워싱턴에 올렸지만 거부당한다. 러시아가 참전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내 동생도 해병대에 입대해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당시 부대는 분대장 대부분이 일병이었다. 원래 병장이 하던

것이고, 상병이었던 fire team leader들도 대부분 일병이었다.

소대 첨병은 보통 병장이 했는데, 상병이 하고 있었다. 신병

들이 너무 많아지자 지휘관들도 난감해했다.

 

게다가 계급이 높아도 전투경험이 전혀 없다. 전장에서는

계급보다 따를 만한 고참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병

으로 분대장을 할 때, 내 분대에 상병 두 명과 병장 한 명

이 분대원으로 있었다.

 

519, 나는 도그중대 분대장에서 대대 S-2(정보) 계원으로

전출되었는데, 대대본부로 갔다가 자매중대인 E중대로 배속 발령

이 났다. 감무봉 전투는 주로 E중대장 근처에 따라다니며 치렀다.

그리고 D중대장 맥킨 대위는 대대 중화기중대장으로 갔고 윔피

소위도 81밀리 박격포 소대장으로 갔다.

 

914, E중대와 함께 감무봉 근처 고지에 있는데, 맥킨

대위가 중기관총과 81밀리 박격포를 거치할 자리를 찾아

올라왔다. 나를 보니 E중대에서 뭐하냐고 묻는다. S-2

계원으로 전출되었다고 말했다. 너 전출하려고 더러운

수작을 부린 거 아냐? 여기서 뭐해? 너 나랑 저 위에

올라가자.”

 

슈미트 중대장에게 말했더니 D중대 배속으로 맥킨 대위를

따라가라고 한다. 7연대 D중대장은 당시 톰 버크 중위가

맡고 있었고, 전임 중대장 맥킨이 중화기를 끌고 올라

오자 무척 반겼다.

 

내가 고향과 같은 도그 중대에 돌아갔을 때 친구 조 맥켄나

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도 모른다. 우린 의무대-야전병원,

병원선까지 조회했으나 아무 흔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일

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맥켄나에 대한 기록이 없다.

맥켄나는 분명 749고지에 올랐다.

 

나는 8명으로 수색대를 만들어 찾아보겠다고 했고, 맥킨 대위

는 허가하면서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740고지 길에 5연대

병력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올라오면서 우리가 누구이며

뭐하고 있는 건지 백 번도 더 물었다. 740고지 정상에 올라

조를 찾기 시작했다.

 

맥켄나와 같이 공격하던 딕 커틴이 한 장소로 데려갔고, 거기

서 맥켄나와 같이 다중 수류탄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커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조 맥켄나를 발견했다.

수풀 속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고, 보기에 즉사한

것 같았다. 수류탄 파편 하나가 철모 바로 밑 뒤통수에 박혀

있었다. 조는 그렇게 4일 동안 엎드려 있었다. 우린 들것으로

조를 하산시켰다. 슬펐다.

 

조셉 앤드류 맥켄나는 1931년 생으로 고등학교 때 달리기 선수

였고, 1949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맥켄나의 형 두 명이 2차대전

에서 전사했다. 형 프랭크는 육군항공 소위로 44년 독일에서

전사했고, 형 제임스는 사이판 해변에서 해병으로 싸우다 전사

했다. 다른 형 레오는 과달카날에서 다쳤다. 조의 삼촌도

해병대로 남태평양에서 실종되었다.

 

나중에 여동생 메리 맥켄나를 만나보니 오빠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했다. 메리 입장에서는 전쟁에서 오빠 세 명이

죽었고 삼촌도 전장에서 돌아가셨다. 조는 매우 유쾌한 성격에

종종 집에서 보내오는 소포의 음식을 나누어주곤 했다.

 

조 멕켄나가 죽고 나서, 조의 어머니가 소대에 쿠키를 소포로

보내오셨다. 당시 조는 샌프랜시스코에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조가 전사했으니 이제 더 이상 편지를 보낼 필요

가 없다고 써서 보냈다. 이후 편지를 몇 번 더 보냈으나, 우린

 더 이상 뜯어보지 않았다.

 

전사한 맥켄나와 같이 사진을 찍은  전우들

 

753고지 아래로 운구되는 맥켄나.

 

감무봉 능선에서 우리 7연대는 1연대와 교대해 내려왔다.

연대가 전선에 73일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감무봉 능선에

7연대에서만 사후 최고훈장 두 개가 수여되었다. 우리

와 교대한 1연대 폭스중대에서도 사후 최고훈장이 하나

나왔는데, 대상자인 조셉 비토리 상병의 이야기는 거의

믿기 힘들 정도였다.

 

폭스중대가 사격에 돈좌되어 1인치도 못 나갈 ,

조 피토리가 브라우닝 자동소총을 들고 혼자 반격했다.

비토리의 용기는 자칫 대대 전체가 붕괴될 위험을 버텨

주게 했다. 814일에는 에드워드 고메즈 일병이 같은

기관총반원을 구하기 위해 날아온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전사해 최고훈장이 내렸다.

 

이때 우린,

우리의 상대가 정말로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와 교대한 1연대는 이후 4일 동안 850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때 5연대 2대대장 휴스턴 중령은 대대 선두

에 서서 돌격을 했다. 이것이 미 해병대의 한국전쟁

마지막 공격작전이었다. 이후 22개월 동안 참호와

전초로 이뤄진 전투가 이어진다.

 

749고지에서 적은 약 2,500명이 죽었고, 해병1사단은 254명이

전사하고 약 1,900명이 다쳤다. 518-10월 동안 이런 종류의

전투가 한국에서 벌어져 미군 전상 22,000명이 발생했다. 이런

소식이 미국 언론에도 나왔으나 당시 미국인들은 이 전쟁에 관

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사단장 토마스 장군은 상륙작전도 거절

하고 이렇게 많은 부하들이 쓰러지자 무척 쓰라려했다.

 

이때부터 북한군도 전술의 변화가 있었다. 우리가 고지를 공격

하면 절대로 후퇴하지 않고 참호와 벙커에서 죽을 때까지 사수

했다. 이전 전투보다 더욱 단호하게 나왔다. 난 정보과 소속으로

E중대에 있었고, 포로획득에 관한 정찰 등에 관여했으나, 적과

아군 전사자 숫자를 세는 일을 맡아야 했다. 그때 본 일부 해병

들은 그냥 고등학생 같았고, 충격으로 눈을 크게 뜬 채 죽어 있

었다. 그런 전사자들을 돌아다니며 군번을 확인하고 기록했다.

 

Poc Hogan : 51년 가을, 적이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해서 우리

도그 중대가 전선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중공군을 피해 피난민

들이 내려오는데 그 대열이 2마일이나 되어 통과하기를 기다렸

. 그런데 한 소년이 길가에 혼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우린 완전군장에 실탄까지 휴대해서 행군하고 있었다. 당시 차량

도 없었고 소년을 놔두고 가면 죽을 것 같았다. 그러자 중대장이

데리고 가자 했다. 레이션의 사탕과 음식을 주자 아이는 미소를

띠고 침착해졌다. 아이는 우리 품에서 잠들었고 우리와 전장에 같

이 있었다.

 

대열의 후방에 따라오게 하고 철모를 씌웠으며 자리를 잡으면

중대지휘소에 있게 했다. 그 소년을 만난 것은 우리 발음으로

폭 호건이란 지명이어서 우린 아이를 그걸 이름으로 불렀다.

참 재밌는 아이였고 항상 행복해했다.

 

Poc Hogan

 

소년은 전쟁 끝나고 4년 후 가족과 상봉했다. 1987년 한국을

아내와 함께 방문했을 때, 나타나서 우리를 반겼다. 소년은

성인이 되었고 무척 감동이었다. 당시 호간의 아내와 어머니

도 뵙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4.2 Mortars : 511010, 맥킨 대위가 다시 군장을

꾸렸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4.2인치 박격포중대 중대장

으로 간다고 했다.

 

참 운도 좋으십니다, 중대장님.”

 

넌 안 그러냐? 너 나랑 같이 가자. 폭 호간도 데리고.”

 

맥킨 대위는 7연대 D중대장으로 같이 있었고, 화기중대장으로

같이 있었고, 대대 정보참모를 하다 다시 4.2인치 박격포중대로

발령이 났다. 박격포중대장은 다르게 말하면 소령으로 진급했

다는 뜻이다.

 

한 시간을 걸어 산 측면의 박격포중대로 갔다. 거긴 무슨 부랑자

수용소 같았다. 빈 박스들이 넘치고 분대 텐트들과 식당 텐트가

보인다. 맥킨 대위는 나를 자신의 지프 운전병으로 임명했고,

중대장 텐트 바로 뒤 텐트에 폭 호간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밥을 먹고 폭 호간과 텐트에 들어갔는데, 12명이 누워 있다가

일어나더니 일제히 나에게서 180도 얼굴을 돌렸다. 기분이 나

빴고 난 꼭지가 돌아 안 좋은 말을 내뱉었다. 한 해병이 나서더

니 병장이라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란다. 그래서 그

랬다. "이런 식으로 우릴 대한 걸 중대장이 알면 안 좋을 걸.

그리고 내가 지금 너보다 위야."

 

언성이 높아지는데 맥킨 대위가 들어왔고 고요해졌다. 맥킨

대위가 나에게 일대를 부중대장과 함께 둘러보게 지프 좀 써도

되냐고 물었다. 난 지프를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난 쓰셔도

좋다고 했다. 그걸 본 12명이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

지휘관 지프 운전병은 굉장히 상위 보직(지휘관과 친한)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맥킨 대위가 원래 운전하는 걸 좋아해서 내가 별로 몰 일도

없었다. 4.2인치는 생활이 쉬웠다. 외곽 경계만 서고 다른 건

없었다. 보병에 비하면 편했다. 외곽경계를 서주면 병사들이

이틀에 5달러를 준다. 그들 대부분이 귀국이 얼마 안 남은

병사들이었다.

 

Going Home : 당시는 동해안이라 전방의 견고한 적 요새화

고지에 바다에서 전함 뉴저지가 함포로 화력지원을 했다.

런데 적이 얼마나 견고하고 축성했는지 3천 파운드 포탄이

때려도 건재했다.

 

19511127, 귀국할 병사들을 태울 트럭이 온다고 했다.

트럭들이 우리 박격포중대 앞에도 섰는데, 그 귀국자 중에는 나

와 맥킨 대위도 있었다. 살아서 돌아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트럭들은 2대대를 돌며 귀국자를 태우고 해안으로 갔다. 그런데

문득 우리가 루크의 성채라고 불린 적 고지가 눈에 들어온다.

 

불길한 징조였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군은 우리 트럭들을 향해

야포와 박격포를 날릴 게 뻔했다. 귀국하는 마당에 죽는 거 아닌

지 엄청 불안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날은 쏘지 않았다.

 

Last Day in Korea : 한국에서 마지막 날은 참 비참했다. 춥고

배고프고. 떠난다고 파카와 야상 내피 등을 반납했는데 정말

추웠다. 병사 2천 명이 해안에서 동계피복 없이 덜덜 떨며 배를

기다렸다. 맥킨 대위가 트럭 운전병에게 가솔린 통을 가져오라

고 해서 모래에 붓고 불을 질렀다.

 

배는 일본 고베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발해 1230

샌프랜시스코에 도착했다.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캠프 리준

해병2사단 8연대로 갔다. 이때 일병으로 분대원을 했다.

때 해병대에서 한국전 참전자는 존중을 받았다. 19522

나는 다시 현역이 해제되어 예비군으로 돌아갔다.

 

 

 

 

[해병7연대 D중대 전상]

 

전사 156, 부상으로 인한 사망 16.

실종 17(3명은 종전 때 포로로 귀환).

부상 퍼플하트 942. 퍼플하트 2156, 321.

최고훈장(Medal of Honor) 1.

해군십자훈장 5,

은성훈장 33.

동성훈장 27.

 

한국 방문 : 제대 후에도 난 알 맥킨 대위와 계속 연락했고,

대위는 해병대 예비군으로 계속 남아 대령까지 달았다.

대위에게 매해 11일에 50년 넘게 전화했고, 종종 아내와

함께 찾아갔다.

 

맥킨 대령

 

어느 날 방문했더니, 대위가 서울에 서는 과거 통역관 임영수

와 연락이 닿는다고 했다. 임영수는 비용을 자기가 지불할 테

니 한국에 오라고 초청했다. 그리고 이때 한국정부가 한국전

참전자에 대하여 일주일 동안 무료 방문 프로그램을 내놓아,

대위와 나는 1987년 한국을 방문했다. 대위는 임영수에게

방문 사실을 알렸고, 또한 우리는 폭 호간을 찾을 수 있나

물었다.

 

임영수

 

한국의 공항에 내려 걸으면서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공항은

정말 최신식이었고 사람들의 차림이 무척 현대식으로 잘 입었다.

차량은 6차선 도로를 달렸다. 한국은 새로 태어났다. 35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호텔에 가니 임영수와 아내, 그리고 이미 나이를 먹은 폭 호간

이 있었고, 정말 울컥했다. 무료 티켓을 받아 호텔 레스토랑에

서 마음껏 훌륭한 음식을 먹었다. 호간은 자기 집으로 가서 가족

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호간은 결국 가족을 찾았고, 자신의

농촌 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고아로 버려졌던 아이가 성장했

, 어머니를 찾았고 가정을 꾸렸다. 너무 감사했다. 우리를

초청한 한국정부도 고마웠다.

 

폭 호간을 데리고 간 다음 날 밤에 전투가 있었는데, 우리는

소년을 보호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박격포중대로 간 이후

에도 중대는 소년을 잘 챙겨주어 학교도 보냈다. 그리고 몇

년 후 가족을 만난 것이다.

 

그날 호간의 집에서 한국 소주를 엄청나게 즐겁게 많이 마셨다.

우리의 이야기는 책으로 써도 될 정도의 줄거리였고, 그 마지막

에 해피엔딩이어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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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레드 프랭크빌...

 

프레드 프랭크빌 - 프레드릭 P. 프랭크빌 씨는 2013

12월 자택에서 명을 달리했다. 1948년 고등학교를 졸업

했고 해병대에 입대해, 한국전쟁 해병1사단 7연대 D중대

로 참전했다. 56년 아내 셰리와 결혼해 슬하에 11녀를

두었다.

 

 

고 프랭크빌과 아내

 

[]

 

 

이 사진은 고 프랭크빌 씨가, 전사한 중공군의

미제 야상에서 미군 소유품을 찾던 중 발견한

중공군의 사진이다. 사진을 보며, 전쟁사란 즐

기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마음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잇삘중사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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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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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소낙비 | 작성시간 16.04.28 오늘도 정신없이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잇빨 !
  • 작성자TOMCAT | 작성시간 16.04.28 북한군이나 중공군은 전력이 약한 한국군 방어지역을 골라 공격을 했다고 하던데 미군이야 2차대전으로 단련할 애들이지만 한국군이야 이제 걸음마 시기인데 그걸 감안하지 않은 지휘에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 작성자길동무 | 작성시간 16.05.02 지난 한국동란시 우리국군의 방어력이 무기력했던것도 사실인것 같네요, 미군들이야 2차대전 경험으로 무수한 지휘력을 습득했지만 우리는 무지상태에서 싸웠고, 무기도 형편없었고 , 그렇지만 후퇴시 그래도 개인소총을 갖고 있어야지 소총도없이 무질서하게 후퇴한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지 않네요
  • 작성자예비역중위 | 작성시간 18.12.10 오늘의 평화로운 일상이 어느 분들의 덕이었는지 다시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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