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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광신도 우화 : 카미카제

작성자잇빨중사|작성시간14.02.17|조회수2,578 목록 댓글 7

 

 

Kamikaze attacks USS Comfort hospital ship

 

more than 700 souls aboard, WWII

 

 

미 육군 도리스 가드너 중위와 매리 로덴 간호병은 둘 다 위스콘신 출신의

처녀로 미 해군 병원선인 USS Comfort에 타고 있다가,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도중 일본군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다. 둘 모두 살았지만 간호사 여섯

명 포함 총 28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다쳤다. 어떤 사람은 피해가 그보다 더

크다고도 한다. 당시 2차대전에서 미 육군의 간호병으로 59,000명이 복무

하고 있었다. 이 글은 그 간호사들을 위한 글이다.

 

 

이 병원선은 카미카제 공격으로 크게 손상되었지만

 괌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By Ed Marek, editor

 

 

 

 

 

사진에서 왼쪽이 도리스 가드너이고 오른쪽이 매리 로덴이다. 매리 로덴은

이제 연락이 닿지 않는다. 이 육군 간호사는 전쟁 초기에 1천 명으로 시작해

종전에는 10배가 넘는 인원이 된다. 이들은 "Angels of WWII"라 불리며 아군

은 물론 적군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치료하고 보살폈다. 위스콘신 출신 간호

사는 총 9천 명이었고 그 중 딱 한 명이 전장에서 사망했다.

 

사망자는 간호장교 엘런 에인스워스 소위로 안지오에서 1944년 2월 16일

사망했다. 그녀가 있던 의무부대에 폭탄이 떨어져 터졌기 때문이다. 그녀

는 다쳐 며칠 간 치료하다 사망했고 상부는 은성훈장을 수여했다. 이 에인

스워스 소위는 미군 역사에서 은성훈장은 받은 여군 4명 중 하나로 은성훈

장은 세 번째로 높은 훈장이다. 독일군은 에인스워스 소위가 다친 그 병원

을 여러 번 폭격했다.

 

 

USS Comfort (Hospital Ship)

 

 

USS Comfort  1919. 태평양전쟁의 병원선 콤포트는 1차대전

병원선 이름을 이어 받아 새롭게 건조된 배다.

 

태평양전쟁은 41년 12월 진주만공습으로 시작되어 6개월 뒤 미드웨이

에서 미군이 큰 승리를 거뒀고, 이후 중부 태평양의 여러 섬들에서 전투

가 일어났고 그 다음 뉴기니아와 필리핀으로 이어졌으며 마지막 오키

나와에서 45년 3-4월에 전투가 있었다.

 

미국은 일본 큐슈에서 320마일이나 떨어진 이 오키나와를 여러 이유로

침공했다. 일단 일본에게 힘을 보여주어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 위함

이었고 게다가 일본은 오키나와를 자기들 본토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미군에게 커다란 물적 인적 소모를 요구했다.

그 다음은 일본의 본토

중앙 섬이었다.

 

미 해병 2사단이 오키나와 남동쪽 해안에 위장-상륙했고 그러는 동안 해병

2개 사단과 육군 2개 사단이 서쪽에 상륙. "Operation Iceberg." 해군도 여러

부대가 이 침공에 참여했다. 침공 준비로 44년 12월부터 45년 4월까지 해군

함포와 공군의 폭격이 이어졌다. 미군은 오키나와 상륙 이전에 그 앞을 가로

막는 작은 섬 류큐스를 점령해야 했다.

 

 

 

바로 이 시기에 미 해군에 대한 일본군의 카미카제 공격이 큰 위협으로 등장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위협은 처음에는 엄청났으나 점차 그 위험성은 줄어든다.

 

 

 

44년 11월 Essex-25로 날아와 충돌하는 카미카제.

 

국립기록보관소. 일본이 미군 함정과 충돌공격용으로 개조한 배들.

 

 

이제 자체 항공력이 크게 줄어든 일본군은 막대한 미 해군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오키나와에서 자살공격 카미카제를 그 방어력

의 일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인근에 약 13,000척 미군 함정이 모여들

었다. 전함에 상륙함 기타 침공에 필요한 배들이었고, 일본은 이 엄청

난 함대를 정지시킬 방법이 없었다. 엄청난 함포사격과 폭격에 이어

지상군이 각 해안에 돌격했다. 상륙 4개 사단의 상황 정말 복잡했고

정말 놀랍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러 파의 상륙부대가 들어가고

나자 포병과 보급부대가 뒤따라 상륙했다. 그러자 선두 부대가 섬 안

쪽으로 진출을 시작했고, 이어 부상자들이 뒤로 끌려나와 해안으로

와 후송을 기다렸다.

 

 

사진의 배들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증강병력을 실은 배와

보급선 부상자를 후송하는 배들로 엄청났다. 해군 순양함과 구축함

들은 가까운 바다에서 포격 요청을 기다리고 있었고 항공모함들은

전투기들을 계속 이륙시켰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 내내 모든 배들은 카미카제의 위협에 시달렸다.

전함들의 포는 해안을 향했지만 작은 포와 대공포들은 상공을 조준

하고 있어야 했다.  

 

USS Relief (AH-1)

 

USS Comfort (AH-6)

 

그 함대의 중간에 두 대의 병원선 릴리프와 콤포트가 있었다. 당시 병원선

은 태평양 전선에서 13척이 활동하고 있었고 위 사진의 뒤에 붙은 번호가

그걸 의미한다. 번호는 15번까지 쓰였다.

 

최초 상륙 시에는 이 병원선이 공해상으로 멀리 물러나 있다가 명령을 기다

렸다. 부상자 후송이 시작되면 해안으로 향하는 것. 그러나 이 당시에는 상륙

부대에 전투의무병들이 같이 동참했기에 일정한 부상은 처지가 가능했다. 그

리고 그 이상은 의무병들이 후송 판정을 내리고 그러면 해안에서 병원선으로          

후송되는 절차다. 그 임무를 릴리프와 콤포트가 맡은 것.

 

부상을 당한 병사들 중에서 해안에서 다친 병사는 오히려 최고의 상황이었다.

내륙으로 진격하면 해안까지 후송이 점차 어렵고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는 의무병이 알아서 해야 한다. 상륙정들은 해안에서 보급품을 부리고

나서 부상자를 실어 병원선으로 갔다가 수송함으로 복귀해 다시 보급품을 싣

는다. 그리고 수송함에도 의무부대가 있기에 일단 수송함으로 데리고 갔다가

상태가 심각하면 병원선으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에 가까웠다. 경상

까지 모두 병원선에 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대가 내륙으로 진격하면 먼저 의무대가 전선과 해안 중간에 의무대가 설치

되고 거기서 1차 진료를 한다. 위 사진은 유럽전선에서 부상자를 경탱크에 싣는

장면인데, 일단 탱크는 방호가 탄탄하고 속도도 꽤 빠르며 진흙탕도 통과한다.

그 외에 지프는 부상자 1-3명을 태우기에 많이 쓰였다.

 

 

그러자 부상자 옆에 항상 지프차가 있으란 법은 없는 게 인생이다. 특히나

태평양전선의 정글에서는 더욱 그렇다. 들것 사진은 필리핀 레이테 전선의

후송 사진으로 우기에 물은 불어나고 굉장히 힘은 후송을 시키고 있다. 태

평양 정글에서의 후송은 정말 험난한 일이었다. 많은 태평양의 섬들은 내륙

이 산악지형이고 필리핀 루존도 그렇다. 일본군은 그런 산악에 참호를 파고

미군을 위협했고 편하게 일어서면 일본군 저격수가 노리니 후송은 정말

힘들었다.  

 

레이테 섬의 한 미군 의무부대

 

의무대는 약간의 경계병 외에 의무부대와 보급품이 전부고 항상 부상병을

이동시킬 준비를 해야 한다. 치료 후에 전선으로 돌아가는 병사들도 있다.

이런 의무대는 보통 텐트를 친다. 해안에서 전선까지 여러 개의 의무대가

들어서고 상태에 따라 그 중 하나에서 치료가 끝나게 되며 해안에 있는 의

무대는 보통 급조 야전병원이고 여기에는 군의관이 있다. 필리핀과 오키

나와에서는 의무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건물로 들어가곤 했다.

 

태평양의 전선에서 비행장은 정말 중요한 목표였다. 전투기와 폭격기 발진

기지도 되고 보급품을 받으며 부상자도 후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편한 지역만 있는 게 아니다. 아래 사진은 이오지마에서 부상자를 후송하는

것인데, 해안의 야전병원이나 중간의 의무대로 가는 중간에 또 맞은 경우까

지 있었다. 아래 사진의 이오지마 해병은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 들것으로

데려오다 중간에 사망한 경우다. 

 

 

 

 

위 사진은 이오지마 해안의 의무병들로 전사자와 부상자가 섞여 있다.

그들은 신원을 확인하고 군번표를 회수하고 최대한 그 여건에서 부상자

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상륙함에서 밧줄로 배로 옮겨지는 사진도 역시

이오지마다. 이들은 수송함 의무대나 병원선 둘 중 하나로 간다. 병원선

으로 오는 많은 부상병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온다. 의무병

들은 일단 해안까지 살려보려고 최선을 다 한다.

 

아래 사진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톤 항구로 병원선에서 부상자들을 내릴

준비를 하는 사진이다. 항구에 이들을 운송할 트럭과 앰뷸런스들이 대기하고

있다. 자, 그럼 이제 병원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일정한 설명이 필요하다.

 

 

 

병원선은 전함의 회색과 구분되게 흰색으로 칠을 한다. 그리고 녹색 라인을

물과 수평으로 칠하고 양쪽에 적십자사 마크를 그리며 갑판 상부와 굴뚝에도

적십자사 마크를 그린다. 이는 병원선임을 명확히 알리기 위함이다. 병원선은

밤에도 조명을 밝게 켜서 육안으로 확실하게 인식시킨다. 이 병원선에는 부상

자와 의료병력 외에 전투병력을 태우지 않기에 국제법인 제네바 협약과

헤이그 협약에 따라 공격하면 안 된다.

 

 

 

밤에 조명을 켜야만 이러한 협약에 보호를 받고 등을 끄면 보호가 되지

않는다. 가끔 부상자를 올리고 내리기 위하여 뒤에 연막차장을 치는 경우

도 있다. 병원선들은 비무장 상태로 호위함 없이 홀로 항해도 하기에 이

조건을 잘 지켜야 한다. 그러나 바다가 매우 매우 거칠 경우 식별이 불가

능한 경우도 생기고 태평양에서 열대성 폭풍이 오면 더욱 식별이 힘들어

진다. 그래서 식별을 오판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콤포트의 경우는

그런 실수가 없었다.

 

[이 병원선 공격이 국제법상 불허되는 이유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부상병이 탄 배라, 공격받을 경우 탈출이 불가능하거나 불가피하게

 생명을 방치하는 크나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으로 독일해군

 의 유보트도 병원선 식별은 매우 중요했다. 인도적인 룰을 어길 경우

 상대는 더욱 가혹하게 나온다. 나중에 본문에 나오지만 병원선에

 대한 카미카제의 고의-공격은 원폭공격의 결정에 크지는 않지만

 영향을 주었다. 잇빨 주]

 

 

병원선 릴리프의 경우 1919년 12월에 진수되었고 1920년에 정식 해군

병원선으로 취역했다. 원래 병원선으로 건조되었고 부상자 약 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1923년에 대서양 함대를 따라 다녔고 이후 태평양함대

에 소속된다. 1941년 대서양으로 잠시 갔다가 43년 다시 태평양으로 돌아

와 솔로몬군도 다섯 개의 공세작전에 참여했고 44년 9월 펠렐리우 침공에

도 참가했다. 이후 캘리포니아로 정밀검사를 위해 갔다가 11월에 다시 태

평양으로 돌아왔다. 뉴 헤브리즈 전투와 에스피리투 산토에도 있었으나

큰 피해 없이 운영된다.

 

병원선 콤포트는 43년 3월에 진수되어 곧 해군 병원선으로 취역한 새

배였다. 환자용 침상이 400명으로 건조되었다.

 

 

아래 사진은 워싱턴에서 바탄에서 탈출한 적십자사 간호사 여섯 명이 기념식

을 갖는 장면이고, 그 간에 과정을 증언하는 장면이다. 노란색 화살표의 간호

장교 해치트는 진주만공습과 동시에 일본군이 필리핀을 공격했고, 이후 많은

병력이 코레히도와 바탄으로 몰렸고 맥아더는 호주로 탈출했다. 웨인라이트

준장은 맥아더의 명령으로 수 많은 병사들을 동남아시아에서 호주로 탈출시

켰다. 맥아더는 당시 탈출할 사람들 명단을 작성해 웨인라이트에게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 탈출에 카탈리나 수상 항공기도 동원되었다.      

 

1942년 4월 29-30일에 호주에서 출발한 어선들이 보급품을 싣고 코레히도에

도착했고 돌아올 때는 사람들을 싣고 탈출했다. 당시 어선에 육군과 해군장교

10명과 간호사 10명, 민간인 여성 3명이 타고 탈출했다. 이때 소형 쾌속정을

타고 탈출한 다른 배도 있었다. 이들은 민다나오에서 재급유를 받고 오후 7시

호주를 향해 출발했으나 좌초해 결국 2주간 일본군 침공을 피해 도주하다 모두

일본군 포로가 된다. 결국 거기서 탈출한 쾌속정은 한 척이다. 이 배는 험난한

고난을 겪고 결국 호주 다윈에 도착했다.

 

 

사진의 간호사들은 바로 그 배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 6명이다. 화살표의

해치트 중위는 나중에 유럽전선으로 가 노르망디 침공에 참가했다. 중위

는 다른 간호장교와 달리 바탄과 코레히도를 점령한 경험 많은 간호장교

였다. 유럽전선의 간호사와 간호장교는 태평양에 비하면 편한 일이었다.

 

이후 미 해군 잠수함 스피어피쉬(SS-190)가 마닐라만을 항해하다 43년

5월 3일 또 다른 육군과 해군장교 12명 이상과 육군 간호사 11명, 해군

간호사 1명, 해군의 아내 한 명을 구조했다.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탄

의 '죽음의 행군'과 수용소에서 상당수가 사망한다. 간호사의 경우는 일본

군이 산토 토마스 국제 수용소로 보내 민간인들과 같이 수용했다.  

 

43년에 미 병원선 머시(Mercy)가 북아프리카에서 부상병들을 태운 그림.

 

 

병원선 콤포트는 환자 400명 규모로 태평양전선 전투상황에서 테스트 된

바가 없었다. 그리고 오키나와로 가게 된다. 700개의 침상/소파/의자가 실

렸고 필요하면 침상을 더 비워 승무원들은 바닥이나 갑판에서 잠을 자며

환자를 더 받을 수 있었다. 배는 매우 안락하게 설계되었다. 콤포트가 취역

한 것은 44년 6월로 로스엔젤레스에서 건조되었고 관할은 육군이었고 건조

는 해군이 감독했다. 그래서 승무원은 해군이고 의료인력은 육군이었다. 콤

포트는 미국을 떠나 호주를 거쳐 태평양전선으로 들어간 것이 6월 21일이다.

 

함장은 퓰츠 중령으로, 이 배는 해군이나 육군이나 모두 자신들 배라고

생각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배의 통제권이 육군으로 갔다가 해군

으로 갔다가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병원선 콤포트가 취역하던 날 기념으로 찍은 사진

 

사진에서 칼리 클락 대위는 카미카제 공격 때 전사했고 동성훈장이 추서

된다. 병원선 안의 제대는 미 육군 제205병원선보충대로 조셉 린스맨 중령

이 지휘관으로 모든 의무 업무를 지휘했고 본인 자신도 매우 숙련된 외과

의사였다. 배의 의료인력들은 전체적으로 숙련되고 경험이 많았다.

 

 

 

배를 취재했던 기자의 기사에 의하면, 이 배의 총 700개의 침상이 있었고

수술실 2개와 함께 장비들은 당시로썬 최신식이었다고 하고 정신병동까지

있었다. 일본군과 야만적인 전투를 치루고 정신적인 내상을 입은 병사들이

상당히 있어  설치된 정신병동이었다고 한다.

 

콤포트는 캘리포니아를 떠나 호주 브리스번에 도착했다가 레이테 침공에서

나온 부상자들을 뉴기니아에서 치료했고 이후 루존 침공에 참가했다. 44년

말의 레이테 침공은 정말 어려운 전투였다. 간호사들은 부상자들로부터

호된 시련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온통 진흙탕이라고 했죠. 그냥 사방이 진흙탕이라고요. 더 이상 흐르는

식수는 없었고 샤워는 오일이 섞인 드럼통을 급조해서 만든 것으로 하고요.

그 어디도 진흙이 안 묻은 곳이 없다고요. 지금 말하는 건 거기 있던 야전병원

간호사들 이야기입니다. 많은 간호사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필리핀의 바다에서 침공 전에 대규모 해전이 먼저 벌어졌다. 당시 일본해군은

매우 지저분하게 마구 행동했고, 이 전투의 와중에 병원선 콤포트도 일본군이

쏜 어뢰 한 발이 간신히 빗겨가는 사건을 경험한다. 다른 해전에서 콤포트는

미군 쾌속 항공모함과 일본군 함대 중간에 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일본 전투기들이 콤포트에 기총소사를 퍼부었으나 큰 피해는 없었다.

 

[잇빨 주: 당연히 이건 주간전투 이야기고, 적십자사 마크를 보고도 기관총

 으로 공격한 일본의 엘리트들이 탄 전투기는 황군의 영웅이자 국제적으로

 무식한 정신병자라는 공통의 등식이 성립된다. 서양식으로 교육 받은 일본

 의 중등-고등학교 교육에서 적십자 마크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건 이치에

 절대로 맞지 않는다. 그리고 적십자사 마크가 수도 없이 쓰인 1차대전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1차대전 참'여'국이다.

 

 눈 먼 나라에서는 소경이 왕이다 - 현재 일본 상황]

 

 

45년 3월 말로 향하면서 릴리프는 괌에 이어 오키나와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3월 28일 릴리프는 괌에서 나와 콤포트와 함께 항해를 시작해

오키나와 군토를 향해 갔다. 군토는 일본의 섬들이 모인 군도로 ‘지마’는

일본말로 섬을 뜻하고 군토는 오키나와 본 섬을 의미한다. 당시는 오키

나와 군토(군도)라고 불렀다.

 

릴리프는 유럽전과 태평양전쟁을 모두 경험한 첫 번째 병원선이었고

보통은 비무장 상태로 홀로 항해했었다.

 

3월 31일, 두 병원선은 폭풍을 맞아 잠시 견인되기도 했다.

 

 

미 전함 몬터레이가 44년 12월 폭풍 속을 항해하는 장면.

 

 

오키나와 침공은 45년 4월 1일 시작되었고 2일 차에 두 병원선은 오키

나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양 배는 약 1킬로미터 거리로 운항했고 릴

리프의 함장이 콤포트의 항해까지 같이 컨트롤했다. 전투구역에 들어

가자 병원선 승무원의 눈에는 강력한 함포 포격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

고 상공에는 양쪽 항공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두 병원선은 곧 일본군 전투기를 조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 일본군 전투기들이 공격을 시작했고 폭탄이 두 병원선 중간

에 떨어졌고 전투기는 기관포를 발사했다. 양 병원선 사이에 기관포탄이

터지는 물보라가 일어났고 폭탄은 릴리프를 빗겨가 바다에서 폭발했다.

피해는 없었으나 폭발로 릴리프의 함체가 옆으로 약간 밀렸다.

 

 

위 지도를 보면 버크너 장군의 미 10군의 4개 사단 상륙지점이 보이고 육군

2개 해병대 2개 사단이었다. 오키나와 침공은 섬 서쪽 해안에 상륙해 반대편

해안까지 전진하는 형태였고 위의 사각형 블록의 그림을 보면 미군의 16개

레이더 초계함이 섬을 감시하는 것이 보인다. 이 레이더 초계함들은 아군 전

투기를 전투-통제하면서 적의 배나 전투기가 오는 것을 경고하고 전파했다.

 

미 구축함 위키스(DD-578)도 레이더 함정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이를 통해

적기를 먼저 보고 발포했다. 위키스는 병원선 릴리프 바로 옆에 있었는데 위

키스를 공격한 전투기가 투하한 폭탄이 릴리프를 간신히 빗겨갔다. 몇 시간

후 다른 일본 전투기들이 나타났으나 공격은 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 2일 차에 릴리프와 콤포트는 모두 오키나와 해안에 닻을 내

리고 부상자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일본기가 종종 나타났으나 쏘지는 않았다.

 

밤이 되자 해상의 배 중에서 이 병원선 두 척만이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조명 때문이었다. 단독으로 떨어진 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승무원들은 “크리

스마스 트리 같다” 말하곤 했다. 이때는 밤이면 해안에서 벗어나 바다 멀리로

나갔고 아침이 되면 앵커를 내리는 장소로 돌아와 부상자를 받았다.

 

이런 방식으로 두 병원선은 4월 8일까지 반복했다. 그리고 4월 9일이 시작되자

다시 앵커 내리는 곳으로 갔다. 등은 모두 껐고 병원선을 보호하기 위해 연막차

장을 해군함정들이 쳐 주었다. 이것은 병원선의 일종의 특권이었다. 병원선이

항구에 가까워오면 등은 끈다. 미 해군 대위 앤 버래티투스 대위는 자신의 태평

양전쟁 자서전에서 앵커 내리던 이 때를 이렇게 말했다:

 

“밤새 불을 켜고 바다 위에 있다가 부상자를 싣기 위해 해안에 도달해 앵커를

내리면, 항상 경보기가 울고 스피커를 통해 카미카제 공격을 경고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 [Kamaretta red, 함정들은 연막을 올려라.] 그럼 만은 연막

으로 가득 차 카미카제들이 아래를 볼 수가 없어진다.”

 

윌리엄 벤톤은 당시 미 해군 캘러한에 타고 있었고 이 연막차장을 올리곤 했

었다. 상륙함이 물에 진수되면 곧바로 연막이 올려주었다. 두 병원선도 이때

는 등을 끄고 바로 이 연막을 통해서 몸을 숨기며 닻 내리는 위치로 이동했다.

 

벤톤의 말로, 이 연막이 갑자기 걷힌다고 한다. 연막은 아무리 뿌려도 고작 몇

분 밖에 가지 않는다. 어떤 경우 연막이 걷히는데 곧바로 적 전투기가 가깝게

나타나 공격하곤 했다고 한다. 함정 캘러헌은 기총사격을 받아 취사병 한 명이

죽었지만 수칙에 따라 응사하지 않았다.

 

당시 나이가 많았던 벤톤은 16-19세에 불과한 신병들이 당황하는 걸 보고

킥킥 웃곤 했다. 이들은 많아야 18-19세에 입대해 고작 20세였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일찍 입대해 경험으로 닳고 닳은 사람들도 있었다.  

 

사진에 나오는 일본군 카미카제 조종사는 목표를 찾지 못해

이동하다 미 해군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고 있다.

 

 

두 병원선은 이 곳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적 공격 경보를 들었다. 그리고

승무원들은 카미카제가 다른 함정을 공격하는 걸 목격했다. 모두 충돌한

것은 아니고 정한 목표를 향해 날아가다 대공포에 맞아 바다에 추락하는

것들도 있었다. 한번은 추락하는 카미카제 전투기가 병원선 바로 위를 스

치면서 날아가 바다에 떨어졌다.

 

콤포트는 4월 9일까지 예정이었고, 이제 부상병이 모두 차면 이들을 싣고

괌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릴리프는 10일까지면 병상이 찰 것 같았다. 두

배 모두 괌으로 돌아가서 부상병을 내리고 4월 22일까지 오키나와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콤포트는 23일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괌으로 가는 도중

릴리프는 콤포트가 적기에게 항공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전문을 받았다.

그러나 피해는 거의 없었고 공격물은 바다에 떨어졌다.

 

1945년 4월 28일이 되자, 일본군은 대규모 항공 기습을 시도해 폭격기와

카미카제 전투기를 포함 약 200대가 떴다. 목표는 오키나와 근처의 미군

전함들. 미군은 이날 적기 96대를 격추시켰고, 전함 젤러스가 폭탄과 카미

카제 공격을 받았고, 전함 워드스워드도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으나 전상자

는 없었다. 이 날은 일본 천황의 생일로 168대의 일본기가 이륙해 공격했고

작전은 키큐수이-4번 작전이다. 그 168대 중에서 베티 폭격기가 4대였고

카미카제는 59대였다.

 

4월 28일 릴리프는 오키나와에서 50마일 거리에서 부상자를 가득 태우고

사이만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기술을 보면 달밤에 맑은 날씨였다고 한다.

 

간호사였던 바바라 톰블린의 말.

 

“병원선 콤포트 함교에 있던 해군 파수병 엘머 브린드호스트가 공격하는

일본기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 내가 눈을 들어 보니 일본기 첫 번째가 다

이빙을 하고 있었고 그때는 너무 어두워서 아군인지 적군인지 잘 몰랐다.

10분 후에 다시 적기를 봤는데 그건 가파르게 하강하며 정확하게 우리

배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 일본기는 콤포트 함체 상판을 들이받았고 함교에 파수병 브린드호스트

는 파편으로 인해 오른팔과 다리를 다쳤다. 이 카미카제 공격 당시 충돌한

갑판 바로 아래의 수술실에서 군의관들이 있었다. 이 카미카제의 엔진이

수술실 산소탱크를 들이받아 비극적인 폭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이날 수술실에 있던 그래디스 트로스트레일 중위는 복도에 서 있다가 폭발

을 느꼈고 이후 평화롭게 고요해졌다고 기억한다. 중위는 하루 동안 의식이

없었다. 그녀가 중간에 기억나는 것은 한 취사병이 구획의 구멍 난 곳을 통

해서 기어오르는 걸 본 것이다. 그녀는 폭발로 격벽이 날아갔다고 생각했다.

다시 육군 병장이 구부러진 금속 사이를 기어와 그녀를 밖으로 꺼냈다.

 

이어 발레리 굿맨 소위가 간호사들과 함께 부상자에게 페니실린을 주사하려

할 때 두 번째 적기가 배를 때렸다. 격벽이 날아가면서 그녀는 금속 캐비넷

밑에 다리가 깔렸고, 그녀는 산소탱크가 폭발한 것에 약간의 기억이 남아 있

다. 그 폭발로 옆에 있던 간호사가 즉사했다. 이때 사망한 사람은 육군 군의관

4명, 육군 간호사 6명, 해군 1명, 육군 8명, 그리고 부상 환자 7명이다. 환자

10명이 다시 다쳤고 병사 31명, 해군수병 7명, 간호사 4명이 다쳤다.”

 

빌 페이든 간호사로 그날 콤포트에 타고 있었다. 페이든은 카미카제가 배의

오른쪽 수술실을 때려 충돌했고 물이 밖에서 솟구쳐 들어와 배가 전복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콤포트는 전투지역을 벗어나면서 등을 켰다. 콤포트 옆에

붙은 배는 하나도 없이 혼자였다. 카미카제는 배 상판의 적십자사 마크를 정

확히 때렸다. 페이든은 미네아폴리스 공영 라디오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배는 우현으로 45도 정도 기울었고, 수술실에 있던 군의관과 간호사는

모두 죽었습니다. 수술실 침상에 누워 있던 환자 한 명만 살아남았으나

심한 화상을 입었어요. 그날 밤 난 방에 있었는데 강철 케이들이 내 등

으로 떨어졌어요. 내 발과 양수펌프 중간에 깊은 구멍이 나 있었고

그리로 곧 태양 여명 빛이 들어오더군요. 결국 배는 수평을 되찾았어요.”

 

이 충돌로 수술실과 함께 엑스레이 기계가 부서지고 두 군의관이 기상실

근처로 날아갔고 그 두 명은 목숨을 건졌다. 한 명은 의무부대 지휘관인

린스맨 중령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실버그레이드 소령이었다. 당시 치과

군의관 밑에서 배우고 있던 의무병 조지 본드래섹 상병의 말이다.

 

"비행기가 때릴 때 난 클리비스 스미스 의무병과 같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난 환자들의 맥박과 체온을 재고 있었죠. 난 그때 내 시계를 행정실 책상에

놓고 온 것이 생각 나 거기 가서 시계를 가지고 다시 병실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죠. 그때 자살 비행기가 배를 때렸습니다. 그건 내 머리 위에서 충돌해

밀고 들어와 내 앞 6미터 근처에서 멈췄어요. 스미스 의무병과 병실의 침대

에 있던 환자 여섯 명이 죽었습니다. 내가 시계를 가지러 가지 않았으면

스미스와 함께 같이 죽었을 거예요."

 

도리스 가드너가 딸의 도움으로 쓴 책을 보면 카미카제가 때리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병원 근무를 하던 곳의 핵심적인 곳을 때렸어요.

그래서 군의관과 간호사와 환자들이 즉사했죠. 배의 심장부가 멈추면서

등이 나가 컴컴해졌습니다. 모든 것이 멈췄죠. 내 기억에 그 공격으로 한

백 명이 죽었어요. 중상자와 위독하던 환자들이 또 다시 비극을 맞아

죽은 거죠.”

 

전함 캘러헌에 타고 있던 윌리엄 벤톤의 증언으로 돌아가 보자.

 

“병원선 콤포트는 오키나와 해상에서 매일 밤 등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함의 양 옆과 갑판과 굴뚝에 적십자사 마크가 있었죠. 배는 잘 다녔고

쉽게 눈에 보였습니다. 하얀 색으로 칠했으니까요. 낮에도 물론 잘

보였습니다.

 

어느 날 밤, 대규모 적기가 몰려왔고 일부 일본놈 비행기가 병원선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저들이 왜 병원선을 공격하지? 무슨 생각이야?

그렇게 봤어요. 그 일본기가 다이빙해 병원선에 충돌했고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어요.”

 

윌리엄 벤톤은 다른 추가적인 이야기도 증언했다. 콤포트가 일대를 떠나기

직전 LST 한 척이 나하 비행장 근처 벼랑에 있다가 일본군 해안포대의 포격

을 받았다. 승무원들은 LST를 버렸다. 그러자 미군 전함들이 그 해안포대를

포격해 파괴했고 승무원들은 LST로 돌아왔고 승무원들은 다소 여유 있게 배

가 침몰하기 전에 40밀리 포탄들을 하역했다. 결국 LST는 견인되어 나와서

병원선 콤포트가 있는 근처로 끌려 왔다.

 

LST는 불을 켠 상태로 있었는데, 일본 전투기가 이 상륙함을 병원선으로

보고 완전히 침몰시키기 위해서처럼 재차 공격을 시작했다. [병원선을 고

의적으로 공격했다는 의미다. 잇빨 주] 결국 LST는 일본군 ‘공격’을 다섯

번이나 맞고 결국 침몰했다. 벤톤의 말:

 

[글의 ‘공격’이 카미카제 충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잇빨주]

 

“이런 일은 정말 영화에서도 못 본다. 어떤 기분이었는지 모를 거다.

일본 놈들은 자기자신을 파괴하고 있었고, 우린 그저 자폭하는 그들은

단지 도와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 이후 카미카제가 병원선을 공격

했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다.”

 

당시 중순양함 포틀랜드에 타고 있었던 윌리엄 토마스 제네루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 사건을 언급했다. 레이테 만 전투 동안 포틀랜드는 수리가오 해

협을 지나다 다양한 종류의 일본 군함들과 전투를 벌였다. 그때 일본군 구

축함이 하나 눈에 보였는데 포틀랜드는 그걸 추격했다. 아침 이른 시간이

되어 제네루스 눈에는 격파되어 불타고 있는 일본군 구축함을 목격했고

그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순양함(포틀랜드)은 일본군 생존자를 구하기 위해 갔다. 우리는

하던 대로 생존자를 구조했는데 우리 수병들 중에는 이 일을 매우 기뻐

하던 수병들이 있었다. 우리는 24시간 전에 일본놈들이 우리 병원선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병원선 콤포트에 대한 그들의 잔혹한

행위를 마음에 담은 채 그놈들을 구조했다.“

 

이날 공격으로 콤포트에 타고 있던 도로시 밀드레드 스탠키 소위가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루디 루이스 중위는 이렇게 썼다. “도로시는 내가 본 중

정말로 열심히 일하던 간호장교였어요. 그래서 자연스레 비행기가 때릴 때

근무 중이었죠. 무슨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고통 없이 저 세상으로 갔죠.”

 

아서 알트바터는 릴리프 탑승자로 이 사건을 역시 책에서 기록했다:

 

“우리는 필리핀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콤포트가 자살공격 비행기에게

맞았다는 겁니다. 함교와 수술실을 뚫고 들어가 많이 죽고 다쳤다고 하더

군요.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일본놈들이 정말 무슨 일도 저지를 놈들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배가 맞지 않기를 빌었어요. 우린 약간 기뻤어요.

콤포트가 견인되어 괌으로 갔다가 사이판까지 갔고 우리도 일단 스케줄

을 조정해야 했거든요. 결국 우린 오키나와에서 빠졌어요. 콤포트가 맞으

면서 우리의 수호천사처럼 도움을 준 셈이죠.”

 

이 콤포트의 폭발을 목격한 미 해군함 퍼디는 몇 대의 구축함을 묶은

구축함대 기함이었다. 퍼디는 즉각 휘하 함에 콤포트를 도우라는 명령

을 내려 급파된다.

 

마리 루이스 소위는 당시 간호장교로 콤포트에 타고 있었다. 사고 후 배

안의 청소를 하면서 일본 전투기의 파괴된 조각들이 있었고 일부는 그걸

기념품으로 가졌다. 루이스도 한 조각을 가져가 상급자에게 가져도 되겠

냐고 물어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카미카제 전투기 조종석에 놀랍게도

소총이 한 자루 있었다. 상관은 그 소총을 가졌다가 루이스에게 주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루이스는 전쟁의 한 조각으로 그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원래 병원선은 홀로 다니지만 이때 콤포트의 SOS 신호를 받고 군함

서너 척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콤포트는 이제 괜찮다고 전문을 보냈고

군함들은 원래 임무를 향해 돌아갔다. 다음 사진들은 콤포트가 피해를

입은 장면들이다. 카미카제는 배 중앙의 적십자 마크를 정확히 때렸다.

사진은 이미 일정한 수리가 끝난 시점이다.

 

 

화살표가 카미카제가 때린 장소다.

 

 

다친 간호사들이 콤포트에서 내리고 있다.

 

관들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은 군목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승무원과 간호사들.

 

 

진주만 공습 당시 미 육군의 여성 간호병력은 1천 명이었다. 그리고 6개월

뒤 12,000명으로 늘어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59,000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종전까지 이들은 최전선에 가깝게 일했다. 태평양전선에서 지휘관들

은 여성 간호병력이 전선에 가깝게 가는 걸을 마음 내켜하지 않았다.

 

짙은 정글에 잔인한 일본군의 공격에 무서운 위협을 받거나 심지어 전사

할까봐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당시 태평양전선 여성 간호병력들은 남자

군인들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요구했기에 용모나 행실에도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숙소에서 병원 시설까지 호위병이 붙기도 했다.

 

육군 간호병력은 상징적인 일을 해냈다. 여군은 미군의 4%도 되지 않았

지만 병사들의 부상과 질병을 치료하고 돌보고 후송시켰다. 어떤 사람들

은 그녀들을 태평양전선 의무병의 전설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녀들은 문명

이 멀고 먼 늪지 정글과 열대성 열기에서 병사들을 치료했다. 지금까지 보

고된 적이 없는 새로운 말라리아와 싸웠고 도시에 흔한 방부제도 귀한

상태에서 도전에 임했다.

 

 

Angels of Mercy.

 

God Bless you all, then and now.

 

-----------------------------------------

 

 

추가 내용: 2012년 3월 2일, UP 통신사는 콤포트에 타고 있었던

장교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 장교는 일본 카미카제 전투기가 공격

하기 전 5분 동안 콤포트 상공을 돌았고 그 다음에 대형 적십자

표식을 향해 하강을 시작했다고 한다. UP report:

 

“(적) 조종사는 등이 환히 켜진 상태의 콤포트 상공을 5분 동안 원을

그리며 돌았고 그 다음에 하강해 우현 수술실 쪽을 들이받았다. 그

결과 68명이 죽거나 다쳤고, 당시 수술실에 다섯 명이 일하고 있었고,

육군 군의관 도지 브래논 소령과 다른 군의관은 창문 쪽으로 날아갔다.

수술실 근처의 군의관 6명, 간호사 6명, 환자 몇 명과 배의 수 병 명이

사망했다. 그들은 잔해 사이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발견된다. 에블린

바첼러 소위는 육군 간호장교였는데... 그녀는 수술대에 누워 있던 환자

에게 날아가 (완충작용으로)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이는 여러 정황을 통해 병원선임을 알고 고의로 공격했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잇빨 주]

 

 

Burial at Guam, May 3, 1945

 

이 글의 후반부에 한 간호가 이야기가 나오는데 글이 너무 길어서 생략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시점의 미국 한 병원의 이야기인데, 한 간호사가

박봉에도 너무나도 헌신적으로 일을 하기에 의사는 그녀에 대해 신상을

약간 알아봅니다. 그 간호사는 2차대전 중 군 간호사로 활동했고 다름

아닌 병원선 콤포트의 카미카제 공격 당시 탑승했던 간호사라는 걸 알게

됩니다. 콤포트 사건을 자세히 알게 된 의사는 매우 놀랐다는 내용. 

 

 

미드 퍼시픽 9화 오키나와 전투에서 나온 대사

 

햄: 어서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어.

 

유진 슬래지: 아니 난 끝까지 갔으면 좋겠어.

                   그래서 모든 일본놈들을 싸그리 다 죽여버리고 싶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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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선봉 | 작성시간 14.02.17 원래 왜구 해적새끼들 종자가 그런 것 같습니다...
  • 작성자청록 | 작성시간 14.02.18 병원선까지 카미카제를 공격한 인간말종들... 도저히 이해 불가한 종족들이네요
    종전후 70년이 다되가도록 머리숙여 사죄하고 참회하는 독일과 너무 대비 되는상황입니다.
    저런 말종이 이웃 나라라에 위치한다는 자체가 가슴이 답답합니다
  • 작성자독도수호 | 작성시간 14.02.18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27사 | 작성시간 14.02.18 저희들이 만든 히로뽕(Philopon, 메스암페타민) 먹여서 자폭공격 시키고 옥쇄 시키고. 그러면서 그거 시킨 놈들은 한 놈도 옥쇄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게 문제. 천황이니 국가니 하는 그런 개구라에 속은 인간들만 병신쪼다 되고.
  • 작성자travelord | 작성시간 14.02.18 미국 간호사들이 양차세계대전에서 피흘린 덕에 미국간호사들의 위상이 보장받는다는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의무를 넘어 헌신하는 적극성이 필요한데, 여성성의 직업. 특히 간호사들에게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지요. 병원에서 정말 기본적이고 소중한 간병행위도 보호자에게 넘기려 하고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본 독일간호사가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간호사가 간호를 무시하고 의료인이 되려한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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