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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우유주사 넋두리 둘

작성자바닷가|작성시간12.08.10|조회수613 목록 댓글 2

지식이라는 것


머리 속에 음가만 알고 있는 지식

실제로 몸을 써서 머리 속의 지식을 적용하는 일


의사들의 지식 자체는 무협지에서 흔히 나오는 무공 수련 단계에서 절치부심 하던 중에 뜻밖에 얻게 되는 영약이나 보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몸 안에 뇌 속에 들어온 것이지만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뇌 안에 인체라는 큰 시스템의 소화계에 비견되는 정신적인 소화계가 있어서 영약을 소화해야 실제로 내공이나 무공 실력이 증진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소화계의 성능은 당연히 개인차가 있다.


의사를 예로 들었지만 세상 어느 직종의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말이다. 

주입식 교육과 자격증 시험은 영약이나 보약을 섭취한 상태라 볼 수 있고 현실 업무에서 소화능력의 차이에 따라 실력은 달라진다. 


성장기에는 주로 저 영약을 섭취하는 일 자체에 매달리다 보니 현실과 괴리도 있고 성체라면 저지르지 않을 뜻밖의 실수나 큰 사고를 저지르는 때도 있다. 그걸 감지하고 막아내는 게 성체의 몫이다. 문제는 성체 역시 소화능력이 약해서 성장기 사람들의 문제를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마저 그 안에서 허덕이는 일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성체들이 자신들에게 그런 경험이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정도는 약할 지 모르나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못하는데/않는데 있다. 성체들이 성장기 아이들보다 지금 세상의 문물에 대해 훨씬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어쩌면 그것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체화한 지식과 음가로만 남은 지식은 현실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의사들 역시 음가로만 남은 지식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의료계 내에서도 타 분야에 대해서는 사실상 어린아이인 것이다. 당연히 마취과 전문의가 따로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숙련된 간호사/전문간호사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을 때 대개 문제가 생긴다.


공자의 말 학이시습지에서 음가 지식은 학이고 습은 체화한 지식에 이르는 과정이다.

학을 경험하며 느끼는 행복감과 시습지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다르다. 학은 단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쾌감이자 속발성, 단발성, 급성 쾌감이지만 시습지는 지속적이고 은은한 행복감이다.


대개는 어릴수록(나이도 큰 변수이지만 절대적 변수는 아니다) 학이 주는 쾌감에 이끌리고 나이 들수록 시습지가 주는 쾌감에 이끌린다. 여성들은 지식 면에서(정확히는 현실을 이루는 문물에 대한 사회적 경험) 남성보다 부족한 편이다. (여성차별주의자라 해도 상관 없다. 저 여성들이라는 표현은 물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이다. 총합을 개체수로 나눈 평균값은 당연히 아니다. 소득 통계를 논할 때 흔히 쓰는 종 모양의 그래프를 생각해 보면 되겠다. 다수에서 크게 벗어난 높은 점수/낮은 점수 획득자를 배제한 상태의 모집단이니 normalization을 거친 후의 통계값 정도)


형태(구조)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 이 말 역시 의학계에서 외따로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건축학계 그리고 그 이전에도 오랜 연원이 있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데는 이유가 있다. 나이들수록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알게 된다. 이전에도 그러한 말들이, 사람들이 있었고 자신이 그 영향을 받아 자랐다는 걸. 혼자 힘으로 자신의 모든 걸 일군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순수라는 말이 상황에 따라 어리석지만 가능성이 있으나 유예하자는 말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순수한 모든 것은 항상 폭발력이 강하다. 순수한 것은 살면서 어느 순간 느끼는 찰나의 영역이라야지 항상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면 병이다. 달리 말하면 순수하다는 것은 결코 변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기독교풍 신의 개념 전지전능과 유사한가?


우유주사를 둘러싼 가담항설을 보며 느끼는 것은 모든 것(특히나 지식)에는 쓸모가 있지만 쓸모가 있는 시공간에서만 쓸모가 있는 것이지 어느 경우에나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시공간을 벗어나서까지 쓸모를 인정받으려 드는 게 인간의 hubris, 아니면 신에 이르려는/신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아닌가 싶다.


조사한 경찰들이 우유주사를 남성 성기와 정액을 뜻하는 것으로 전했다는 말, 기자가(조선일보 갔더니 이제 프로포폴에 대해 다른 정보가 올라와 있고 내가 왜 프로포폴이라고 생각했는지 과정이 나와 있다)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기사화한 일 모두 정보 비대칭에서 나온 서투름이다. 사회가 건강하다면 잘 알고 있는 누군가 의료계 종사자 혹은 아니래도 그쪽 지식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자가 그건 그런 뜻이 아닐 거라고 의견을 전하면 경찰이나 기자들이 계면쩍다는 듯이 슬쩍 머리를 긁으며 "그렇군요" 하는 해프닝에서 마무리된다. 그리고 사실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거론하는 우리들 역시 많은 경우에 경찰과 기자의 수준을 넘지 않는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거 그다지 흉볼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경로이다. 대중이라는 익명 속에 들어가 두려움이나 무지를 해소해 나가는 과정.


하지만 경쟁이 상승욕구만을 낳는 사회에서는 저런 것도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 경찰들과 기자들을 도매금으로 처분해서 무식하다고 뭣도 모르면서 탱자탱자 한다고 마구 밟아댄다면 그건 수준이 낮을 뿐더러 서로에게 위험한 사회이다. 공식적인 복지 제도라는 안전망 외에 이런 비공식적이며 정신적인 문화에서 나오는 사회적 안전망이 우리의 평온에 실제로 큰 역할을 한다. 이걸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공공재로 볼 수 있으며 이 공공재가 많아야 우수한 국가인 것이다. 그런 공공재를 낳는데는 물질적 요건 역시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논외로 하자.


경찰들과 기자의 저 모습은 우리가 커가면서 무척 자주 접하는 모습이고 우리들 역시 그 주인공이었던, 앞으로도 주인공일 상황이 많은 모습이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고 항상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있다. 통과의례를 거칠 때 유체들이 가능하면 공포와 불쾌감을 갖지 않도록 해주는 게 성체들 몫인데 문제는 정작 그 성체들 역시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받은 상처를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데 있다. 그건 유체들에게도 전달이 된다. 토지에서 서희의 고통에 아이들이 공기로 그 고통을 느끼듯이.



전문가들 역시 시달린다. 어느 분야 전문가로 대접을 받으면 유체들/성체된 유체들이 받들어 모시며 전지전능한 존재 대우를 하다가도 실은 유체들보다도 모르는 게 무척 많다는 걸 들킬 때/알려질 때 그 유체된 자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두려워서, 또래들에게서 밀려나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때 대중으로서의 유체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맹목적인지 아니까. 그 유체들은 전문가라는 존재를 달게 씹다가 단물 빠지면 버리는 행태를 보이게 마련이다. 아니 일상에서도 부모를 자식이 그렇게 대하는 일도 많다. 부모는 누구나 어느 순간 자식들이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리고 아프다. 아픔을 견디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진다.


문제는 대개 성체들에게 있다. 

나이가, 직책이 벼슬인 줄 아는.


자신에게 엄격한만큼만 남들에게 엄격하자.

자신에게 관대한만큼이라도 남들에게 관대하자.

비슷한 시공간에서 비슷한 물질적/정신적 조건에서 자신이 못해낼 일을 남들이 비슷한 조건에서 못해낸다고 비웃지는 말자. 그거 실은 자기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정작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거 아닌가?



인간은 분명히 '동물'이다. 

사회적이라는 속성을 지닌.

'동물'(생명체)이라는 근간이 흔들리면 '사회적'이라는 말 속에 내포된 선한 방향의 인간성은 대개 상실된다. 간혹 그렇지 않은 인간들을 보면 그들을 귀히 여길 일이지 인간성이 상실된 동물들을 타박하지는 마시라.


추가.


나는 평범한 인간(ordinary man)을 의학서적에서 자주 나오는 인체 황금비율을 묘사한,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남성의 그림에 가까운 개념으로 본다. 그림 속 남자 역시 본문에 나오는 평준화한 개념이다. 그런 인체 비례를 지닌 인간은 없다. 왜 그런 인간이 되질 못하느냐고 타박하는 순간 그 인간은 원래 의미에서 벗어나 얼토당토 않은 폭력과 맹목적 몰입의 토대가 된다. 정상성의 개념은 항상 인간을 짓누른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나 육체적인 면에서나 그런 인간은 없다.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시간 여행자가 있어 인간 개체 각각의 발달사를 주욱 그래프로 표현해 낸다면 일정한 곡선 표면에 모두 근접할 것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공간보다는 시간에 구애를 받는다.


같은 인간들에게서 생명의 위험을 받지 않고 평온하게 웃으며 때로는 땀을 흘려가며 자기 일을 하고 어쩔 땐 조금 넘치고 어쩔 땐 조금 부족한, 그리 지나치지 보수를 받고서 저녁참이 되면 밥 짓는 연기 오르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즐기다가 잠에 빠져드는 인간. 그 평범한 인간은 굳이 범인이 쳐다보지도 못할 높은 직위에 있지도 그렇다고 천대받는 위치에 있지도 않다.


인간 세상에서 화해란 용서란 자타불이란, 인간에 대한 예의란 그런 것이다. 저 평범한 일상을 흔드는 상황에 처해 힘들어 하는 시지프스(역경을 헤치는 영웅일 수도, 그저 비참한 상황에 빠진 이일 수도)에게 스을쩍 힘을 보태 자신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 물론 힘들더라도 그의 힘으로 걸어 되돌아가야 한다. 건네는 그 손길은 단지 넘어진 이를 일으켜세워주는 것일 뿐 시혜는 결코 아니다. 시혜는 고유함을 훼손하는 행동.


나는 그런 쪽으로는 바보가 아니라서 누구나 실은 이런 생각을 품고 있지만 뛰어들지 못하고 망설이고 엉거주춤한 모습을 보이다 뒤늦게 한탄하며 생을 보낸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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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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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깜노 | 작성시간 12.08.10 영국 대학교수가 쓴 문화비평문 번역하다 머리가 깨지고 욕나와서, 행여하고 바닷가님 시원한 바닷바람 불려나 하고 들여다 봤더니 눈까지 아프고 어지러움...한국말 잘하는 영국넘에게 이글 한영 번역시키고 싶네...칭찬임^^
  • 답댓글 작성자바닷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8.10 끄끄. 알면서도 원래 두서없이 글을 별 다른 퇴고 없이 쓰윽 써내려가는 걸 즐깁니다.
    누군가 '앞에 두고서' 넋두리를 펼친다는 기분으로.
    (나같은 놈이 보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을 제대로 쓰는 분'들'이 여기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줄어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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