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물 - 김달진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地球의 섬 위에 앉았다.
♧ 물이야 - 안영희
믹서 뚜껑을 열어놓고
냉장고에서 꺼낸
파프리카 양배추 바나나 토마토들의 몸에서
질질 물이 흐른다
여름은 저리 가혹하게 속성으로
본질을 확증시킨다
섭씨 35도는
이 팔, 다리, 젖가슴, 두 눈과 코와 입술이
다 물인 거라구!
일갈한다 씻고 닦고 나울대는 푸성귀밭
일상 한가운데를 질러
꽂힌다 새파란 날
♧ 행어 - 김인구
퇴행성관절염으로 나의 발은 뒤틀렸다
야윈 두 다리에 힘겨운 상체는 오늘 하루도
위태로움이다
안간힘으로 버티는 어깨 위로 일상이 던져진다
말없는 나는 점점 더 말을 잃는다
어쩌다 한 번씩 가슴팍 안으로
새로운 희망이 들어서기도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절망에 이르는 길
숨을 곳 없는
나의 하루는 오늘도 기울어져 간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나는 가라앉는다
♧ 저무는 한 해 - 송문헌
깊은 밤 귀가길
인적 없는 골목, 가만가만
쌓이는 눈송이들이 길을 냅니다
하얗게 난 그
길을 따라 가다 서다
고양이 한 마리 힘없이 웁니다
꾀죄죄 깡마른
육신 위로 쌓이는 눈발
다가서는 인기척도 모른 채
♧ 당신을 - 최상호
누구에겐가 자꾸
당신을 보내주고 싶습니다.
미치고 폴짝 뛸 세상
참말 기막힌 세월과 마주친 사람에게
덮어도 덮어도 아픈
시뻘건 화상을 가진 그 사람에게
당신을 넘겨주고 싶습니다.
솜털같이 따뜻한,
산수유처럼 빨간 피를 가진 당신을
넘겨주고 돌아서다가
또 다시
불빛 없는
마을 앞 흐린 냇가에 앉아 쓸쓸하게
풀잎이나 뜯는 그런 사람의
텅 빈 주머니 속에
달빛보다 은은한 당신을
나눠주고 싶습니다.
♧ 책이 책을 안으면 - 서금복
간신히 차지한 자리 뺏길까 봐
꼿꼿하게 서 있는 책 사이로
새 책 한 권 들어가려 용을 쓴다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밀고 당기는 힘에서 가장 멀고
틈에서 가장 가까워 밀려난 책
할 수 없이 새 책을 포개 안는다
아까보다 잘 들어간다
1+1은 2가 아니라 11인가
껴안은 책 두 권이 밀고 들어간다
♧ 금식 - 최한나
그 옛날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먹고
컴컴한 백일을 견디기로 했다고 한다
견딘 곰은 사람이 되었고
견디지 못한 호랑이는 그냥
호랑이가 되었다
검진을 앞두고 금식을 했다
자정을 넘기려면 자정을 먹지 말라고 한다
텅 빈 위장 속으로
마늘과 쑥을 삼키듯 공복을 넘긴다
생채기 난 붉은 위장 속
먹이사슬에서 밀려날수록
굴욕은 더 선홍색이다
당분간 음식을 가리라는 말
차라리 마늘 먹고 인간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얀 밥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허기 진 입맛에는 그 어떤 음식도 맛있다
오래 전 먹은 마늘의 양념이
빈 속 어느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득 호랑이가 그립다
수천 년 인박힌 마늘냄새 다 토해내고
호랑이와 다정히 산 속을 거닐고 싶다
내가 사람이 아니었을 때 그렸던 인간은
콩나물시루에 박힌
출근길 몸뚱이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직서를 또 찢는다
고개가 땅에 붙을 때마다 뒤틀리던 배알이
위벽을 쥐어뜯는다
인내란 이런 때 필요한 것이라며
돌아갈 수 없는 곰이 속삭인다
꿇린 무릎에서 하얗게 날이 샌다
이글거리는 호랑이 눈이
동쪽하늘에 떠오른다.
♧ 어느 날ㆍ9 - 남대희
-미호천에서
하늘이 산머리를 쓱 베어 먹고
구름으로 몰래 덮어 놓았다
뛰놀던 다람쥐랑
꾀꼬리는 어찌 하라고
그 앞으로
기러기 떼 줄 서서 들여다보고 있는데
미호천 갈대밭은
쏴아 쏴아
연신 몸 씻는 소리만 낸다
* '우리詩' 2016년 12월호(통권 342호)에서
사진은 12월의 억새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