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진아에 대한 나의 생각 1
서로 나의 견해가 옳다고 했을 때는 답이 없다. 모두가 자기주장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에 대해 서로 자기견해를 주장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럴 때는 상대의 견해가 나와 다르더라도 그냥 상대의 견해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객관적 진실은 오직 지혜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는 결코 무엇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견해의 차이가 생겼을 때 전혀 해결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붓다께서 설법하신 진리를 말할 때 경장, 율장, 논장에 근거해서 여기에 속하는 견해일 때는 바른 법이다. 그렇지 않고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견해일 때는 바르지 않은 법이다.
붓다께서는 정법과 정법이 아닌 것을 구별하기 위해 삼장을 설하셨다. 또 이런 가르침을 계승하기 위해 제자들이 결집을 해서 가르침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함에 있어 붓다의 가르침으로 이미 분명한 기준은 설정한 것이다. 단 붓다의 가르침을 말할 때의 경우에만 이런 기준을 삼아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삼장에 근거해서 왈가왈부 할 필요는 없다.
붓다의 가르침을 말할 때 대승불교에서는 ‘보고 있는 이놈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든다. 이때 보고 있는 이놈이 바로 진아(眞我)라고 한다. 보고 있는 이놈이 무아라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무아를 아는 것이 바로 진아라고 한다. 아울러 이런 진아를 주장을 하면서 진아와 반대가 되는 무아를 부정하지 않고 긍정한다. 이러한 무아를 아는 것이 진아고 또는 참나라고 한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무아와 진아를 동일시한다. 하지만 붓다께서는 오직 무아를 말씀하셨지 진아를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진아가 출현한 것은 인도에서 대승불교라는 부파가 생기면서 힌두교의 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긴 견해다. 이런 배경에는 당시 힌두교도들에게 전법을 펴려고 하는데 누구도 내가 없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무아를 말하고 다음에 무아를 아는 이것이 바로 진아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서로 대칭이 되는 견해를 하나로 묶어낸 절묘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불가피하게도 약간의 억지가 생긴 것이다. 특히 이런 조합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생길 때 참나를 믿는 힌두교도들을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무아와 힌두교의 진아가 서로 상반된 견해이지만 어정쩡하게 동거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단지 이런 상황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얻는 수행을 할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다른 결과가 생긴 것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다른 길로 가면 연기와 사성제를 완성할 수 없어 계속 괴로움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승경전에서도 무아와 진아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진아라는 주인공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사실 무아와 진아가 하나라고 말해도 나의 인식은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개아에 대한 인식을 지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힌두교의 법신이 불교의 진아가 되었다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근거로 붓다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힌두교의 진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분명하다. 힌두교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붓다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진아를 방편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점에서 이 조합이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다.
불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포교를 할 필요는 있지만 오직 바른 가르침을 펴는 것이 우선이지 불교가 포교를 위해서 생긴 종교는 아니다. 불교는 오직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여 윤회가 끝나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불교의 가르침에 사실 교세의 확장을 위한 가르침이나 방편은 없다. 물론 승가의 번영을 무시할 수 없지만 승가의 번영이 당초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차선책에 불가한 일이다. 그래서 혹시 이런 이유로 불교가 인도에서 힌두교로 흡수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장 상징적인 붓다의 가르침이 사라져 버려서 인도에서 불교가 존재해야할 필요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추측해 본다. 힌두교와 불교의 교리가 똑같다면 굳이 실천하기 힘든 불교를 믿어야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불교보다 더 고행을 하는 자이나교는 아직도 인도에서 번성하고 있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도에서 불교의 포교를 위해서 편 방편이 오히려 불교가 힌두교로 흡수되는 결과를 맞이하고 끝난 셈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에 힌두교에서는 붓다를 비슈누라는 보호 신으로 흡수해버린다.
어떤 구도자께서 말하기를 ‘무아의 문으로 들어가서 진아에 이른다고 하셨다.’ 처음에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는 이놈을 누구인가?’라고 했을 때 보는 이놈이 무아인 것은 교리 상으로 분명한데 힌두교 때문에 진아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어서 생긴 말이라고 이해하였다. 이처럼 무아인 것은 분명한데 무아를 아는 것이 진아라는 인위적인 조합 때문에 이런 말이 생긴 것이 이해가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상반된 두 가지 견해를 하나로 엮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의 조합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가령 무아와 진아가 같은 말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욱이 두 가지 단어가 전혀 다른 뜻임에도 개념적으로 같다고 말했을 때 과연 깨달음을 얻는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님을 알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제다. 두 가지가 서로 같다고 하는 사람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상당히 추론적인 것이라서 그대로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부분이 억지로 느껴질 때 다소는 어색할 뿐만 아니라 도저히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가 성숙될 수 없다. 그래서 무아의 문으로 들어가서 진아에 이른다는 표현보다 진아의 문으로 들어가서 마지막에는 무아의 문에 다다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평소에는 내가 있더라도 깨달음을 얻을 때는 반드시 무아여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아와 진아가 같은 것이라고 말했을 때 과연 진아를 무아라고 여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아닌 것은 시간이 지나도 결국 아닌 것이다. 깨달음을 닦는 과정에서는 절대 의문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수행자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수행을 하면서 의문에 사로잡힐 때는 한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사실 이런 면에서 붓다의 분명한 가르침이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짜 맞추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수행이 아닌 교학의 차원에서라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해탈의 자유를 얻는 문제에 걸림이 되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그리 간단하게 보아 넘길 사안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불교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열반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붓다께서 설하신 삼장에 있는 내용이 아니면 가르침을 왜곡할 소지가 있어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붓다의 가르침이 왜곡될 가능성이 삼장으로는 부족할 수 있어 계속해서 스승들의 주석서가 나오고 다시 끊임없이 복주가 나온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가섭존자께서 경전결집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계속된 결집으로 가르침이 변질되는 것을 보호했다. 누구나 붓다의 가르침을 자신의 견해로 색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다른 견해가 생기는 일은 붓다가 계실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면 무상, 고, 무아의 통찰지혜에서 벗어나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이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나 깨달음을 얻어 괴로움을 해결하는 일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후대에 문화적 현상으로 생긴 다른 견해가 있을 때는 나름대로 존중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붓다고사의 청정도론이 그렇고 나가세나 존자의 밀린다 왕문경이 그렇다. 하지만 어느 때를 막론하고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는 오차가 생기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해탈의 자유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나 자이나교나 다른 종교에도 해탈은 있다. 그러나 붓다께서 말씀하신 무아의 해탈과는 전혀 다르다. 관념으로본 해탈과 실재하는 것으로 본 해탈은 내용의 차이가 크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깨달음이 아닌 것이 많다. 정신세계라는 것이 겉으로 드러내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서 말하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사실 무아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설하지 않고 오직 붓다께서 설하신 가장 위대한 진리이다. 무아가 아니고서는 자아가 있기 마련이라 결코 집착을 끊을 수 없다.
자아가 있어서 집착을 끊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끝낼 수 없다. 하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대상을 대할 때 먼저 자아를 가지고 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고 있는 이놈이 있다’는 전제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자아를 가지고 살아서 이런 견해가 불가피하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보고 있는 이놈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알아차림을 하면 덫에 걸려 절대 실체가 없는 무아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출발부터가 바른 방법으로 시작해야 한다. 출발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결코 원하는 목표에 이를 수 없어 계속 방황해야 한다.
설령 무아와 진아가 같은 뜻이라고 십분 이해한다고 하자. 다음에 12연기에서 이와 유사한 재생과 환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만약 진아이기 때문에 재생이 환생이 되었다면 이는 작은 오류가 아니고 매우 큰 오류인 것이다. 연기는 사성제를 완성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제시하는데 재생일 때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환생일 때는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난관에 봉착한다.
이처럼 상반된 위험이 생길 수 있다면 아예 이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이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려면 보고 있는 이놈을 빼고 그냥 이것이 무엇인가 알아차리는 것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이는 이놈이 있다는 전제를 하지 않고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나 그냥 단순하게 볼 일을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다가 오히려 얻지 못하는 결과가 생긴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보다 더 수승한 방법은 그냥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위빠사나 수행이고 무아를 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바로 이러한 방법이 붓다에 의해 밝혀진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다. 이런 단순하고 명쾌한 방법이 있음에도 애써 ‘보고 있는 이놈을’ 전제할 필요는 없다. 보고 있는 이놈이 있다는 전제가 선행되면 보고 있는 이놈을 찾다가 날이 샌다. 찾을 수 없는 놈을 찾으려고 십년 백년의 세월을 보내도 찾을 수 없는 것은 결국 찾지 못한다.
이처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붓다께서 6년 동안 고행을 한 끝에 밝혀진 진실이다. 보살께서 6년 동안 노력하고 이것의 무의미함을 알아 포기하신 것이다. 포기를 하고나니 비로소 무아의 진실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붓다께서는 남이 말한다고 믿지 말라고 하셨으며 역사라고 해도 믿지 말라고 하셨다. 오직 나의 경험으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다.
이처럼 깨달음을 얻는 통찰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가장 정확하고 가장 확실한 바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결코 진아가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무아와 진아라는 두 가지 같다고 애써 주장할 필요가 없다. 사실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관념으로 보면 같을 수 있지만 실재를 보면 결코 같을 수 없다.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아차려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현상을 아는 지혜의 단계에서부터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성숙되지 않으면 절대 16단계의 지혜가 성숙될 수 없어 도과를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아닐 때 무아와 진아가 같다는 견해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는 진아가 결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무아를 아는 것이 진아라는 말로 인해 수행자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면 이런 말도 삼가는 것이 수행자를 위한 일이다.
잘못된 말은 그만큼 악업의 과보가 따른다는 것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견해는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괴로움이 소멸한 깨달음의 길로 함께 가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무아만 진실이고 진아는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팔정도의 계정혜에서는 진아와 무아가 단계적 과정의 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로 서로의 견해를 달리할 일도 아니다. 진아는 세간의 법이라서 속제에 속하고 무아는 출세간의 법이라서 진제에 속한다. 어차피 이 세상은 속제와 진제의 두 가지 과정이 함께 있으므로 이런 첨예한 문제는 이 부분에서 답을 얻어야 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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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혜아니 작성시간 22.10.09 수행을 시작할 때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면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은 추론 등의 개념이 아닌 실제가 중요하지만 시작을 하는 입장에선 방향 키를 잡음에 있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행을 하며 생기는 많은 문제들은 올바른 스승님 하에서 만이 제대로 지도 되어, 바르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걸 인지하게 되고요.
그래서 불법승 3보에 귀의하게 된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본 불교는 타 종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기복신앙의 하나였습니다. 행복을 기원하는.... 기복 신앙에 있는 행복은 한 마디로 보면 부귀영화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최고의 행복은 열반'이라는 걸 상좌불교와 그 상좌불교에서 전승된 경전을 가르쳐 주시는 승가에서 배웠습니다.
그 열반은 부귀영화가 영원히 지속되는 세속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청정함이라는 것이지요.
그 청정함은 8정도에 의해 무상 고 무아의 지혜로 나아갈 때 찾아오는 진리라고 합니다. -
작성자혜아니 작성시간 22.10.09 이렇게, 분명하게 해석해주려 하지 않는, 아니 잘 해석을 할 수 없는 대부분의 불교 관계자들이 산재한 이 시공간에서,
'진아'와 '상락아정'을 가르침을 기준으로 분명하게 해석해 주심에 깊은 존경심을 갖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