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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찾기

낙양(洛陽)을 찾아서

작성자송계|작성시간21.10.28|조회수2,057 목록 댓글 11

낙양(洛陽)을 찾아서

 

1.

송호열씨의 세계지명 유래사전(2006)에는 낙양(洛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낙양(洛陽)은 현 중국 하남성(河南省) 북부 황하(黃河) 유역에 있는 도시로 ()나라 때 낙양현(洛陽縣)이라 하였고 (()대에는 하남부(河南府)에 속했으며 1948년 시()가 되었다.

대륙의 역대 9개 왕조(王朝)의 수도였으며 현 중국의 7대 옛 도시의 하나로 역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강의 북쪽 연안'이라는 뜻으로, 지명은 '낙하(洛河)의 북쪽 연안에 있는 도시'라는 의미이다. 이 도시는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일시적으로 하남성(河南省)의 수도였고, 근래에는 정주(鄭州)와 함께 중점 도시로 지정되어 화북(華北) 지방의 대표적인 중공업 지대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 최대의 트랙터 공장이 있으며 이외에 자동차와 각종 기계 공업과 면방직 공업도 발달하였다. 면화와 밀을 재배하여 가공하고 있다. 많은 유적이 있는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백마사(白馬寺)와 함께 남쪽에 있는 용문(龍門) 석굴이 유명하다.”

 

1945년8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면서 미국에 의해 현 열도(列島)로 강제이주되고 대륙동남부와 현 대만(臺灣) 그리고 한반도(韓半島)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에 넘김으로써 일본은 현재와 같은 강역속에 눌러 앉게 되었다.

1948년 현 낙양(洛陽)이 시(市)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장개석(蔣介石,1887-1975)의 국민당(國民黨)이 1948년초부터 모택동의 공산당(共産黨)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장강(長江)이북지역을 잃게 되고, 모택동은 이미 대륙의 조선이 빠져나간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지역에 서서히 사천성(四川省) 이북쪽의 지명을 옮겨 현재와 같은 강역명을 확정하기 시작한 것이었음을 간파해 낼수 있다.

 

이전의 무한삼진(武漢三鎭)을 고증하는 글에서 사천성(四川省)의 한수(漢水)를 통해 촉(蜀)의 잔도(棧道)를 지나 장안(長安)으로 이어진 수로(水路)가 있었다는 일본인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1883-1984)의 저서 <조선-중국 음악조사기행>(2000)의 기록을 통해 역사상의 장안(長安) 즉 북경(北京)이 당시의 한구(漢口)였던 현 중경(重慶)에서 2,000km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또한 살펴보았다. 현 감숙성(甘肅省)의 주천(酒泉)지역을 기점으로 본다 하면 그 이북(以北)지역이 되어야 하며, 당 카페의 회원이신 모(某)선생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주천(酒泉)을 구한말의 북경(北京)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

모택동의 공산당 정권의 출범과 동시에 진행된 대륙에 존재했던 조선(朝鮮)역사지우기라는 일련의 간악한 정책속에서 사천성(四川省)과 현 동정호(洞庭湖) 주변에 거대하게 형성되어 있던 자연호수를 장강(長江)에 제방을 쌓아 호수의 흔적을 없애버렸다.

이러한 근거는 17세기 네덜란드 지리학자 블라우의 세계지도와 1684년 불란서인 듀발이 출간한 <亞細亞地圖>라는 책에 삽입된 지도에서 보여주는 사천성(四川省)지역의 거대한 호수와 호수속의 섬이 위치한 모습을 통해 그 이면의 역사를 살펴볼 수가 있다.

아무튼 북경(北京)으로 가는 여정은 한구(漢口)-현 중경-를 기점으로 했을 때 현 사천성(四川省)지역 중경(重慶) 서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한수(漢水)의 지류를 따라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를 거쳐 올라가는 길이 되며 구한말 이 길을 따라 경한철로 (京漢鐵路)-북경에서 漢口를 연결하는 철도-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현 중경(重慶)지역이 호북성(湖北省)에 속함에 따라 현 사천성(四川省)지역내 양자강이 큰 호수를 관통하는 모양이었음을 알수 있고, 감숙성(甘肅省)과 사천성(四川省)의 경계에 있는 대파산(大巴山)이 역사상의 대별산(大別山)임을 간파해 낼수 있게 된다. 즉 현 대파산(大巴山)-大別山-의 아래가 호북성(湖北省)이 되고, 대파산의 위쪽이 역사상의 하남성(河南省)이 되는 것이다.

하남(河南),하북(河北)의 기준점은 명확히 황하(黃河)를 이름하는 것이 명확한바, 현 난주(蘭州)를 관통해 가는 황하의 아래쪽이 하남성(河南省)이요, 그 북쪽이 하북성(河北省)임을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낙양(洛陽)이라는 지명은 구한말을 기준으로 볼 때, 현 대파산의 이북 난주(蘭州)를 가로지르는 황하의 아래쪽 낙하(洛河)라는 지류에 형성된 지명이었음을 유추할수 있게 되며 따라서 이 하남,하북을 중심으로 현 대륙의 장강이북 지명을 같은 방위로 펼치게 되면, 감숙성(甘肅省)에 밀집해 있던 이른바 한족(漢族)의 강역을 복원할수 있게 된다.

현 하서회랑(河西回廊)의 기련산(祁連山)지역이 산서(山西)가 되고, 그 좌측의 끝단정도가 섬서성(陝西省)이 됨을 알아낼 수 있게 된다.

주천(酒泉)지역으로 비정되는 북경(北京)이 기련산(祁連山) 좌측의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했던 것을, 현 의빈(宜賓)인 역사상의 남경(南京)지역에서 남북으로 연결된 경한(京漢)철도의 모습과 일치하게 만들기 위해, 모택동은 일본의 시모노세키가 있었던 지역에 남경(南京)을 지명이동하고 그곳에서 남북으로 연결되는 지역에 북경(北京)을 만듦과 동시에, 이는 반도에 강제이주한 조선사(朝鮮史) 연행(燕行)사신(使臣)의 거리도 염두에 둔 복합적 판단으로 현재의 위치에 역사상의 북경(北京)을 지명이동시켰음을 명확히 간파해 낼 수 있다.

 

3.

漢唐宋明淸으로 이어지는 漢族의 강역은 대륙의 중심에 남북으로 우뚝선 조선의 겨드랑이와 같은 위치에서 우리와 같이 숨가쁜 역사의 맥박(脈搏)을 이어왔던 것이고, 낙양(洛陽)이란 지명은 현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아래 황하가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의 아래쪽에 위치했던 것임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지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비정할수 있다.

2021.10.28. 松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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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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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흑염소 | 작성시간 21.11.08 가정집 제14권 / 고시(古詩)
    부여 회고(扶餘懷古)
    청구가 수기(秀氣) 배태해 황하에 응하면서 / 靑丘孕秀應黃河
    온왕이 동명의 가문에서 탄생하였나니 / 溫王生自東明家
    부소산 아래로 옮겨 와 나라를 세울 적에 / 扶蘇山下徙立國
    상서로운 기적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 奇祥異蹟何其多
    무비지조선도의 부소산의 위치도 황하 이남이었습니다.
    낙양의 옛 이름이 하남이었고 하남 위례성은 낙양 근처라야 숭산에 이르기까지 제방을 쌓을 수 있습니다.
    고문헌 속의 송도(개성)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洛水, 崇山, 北邙 등이 등장합니다. 즉 현재의 낙양이 온조가 처음 자리잡은 하남위례성, 개경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문헌속의 동서 양경은 장안, 낙양(한성, 개성)이었는데 진나라, 당나라, 수나라 등의 수도로 둔갑한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송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09 감사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대만에서 출간된 지리지에 보면, 현 낙양을 중심으로 그 이동은 모두 물바다입니다. 산동반도와의 목부근은 모두 바다였습니다.심지어 북경부근까지도 물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현재의 강역은 모택동의 간척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지형이 되어 버렸습니다. 낙양과 장안이 감숙성에 있어야 함은 바로 갑골의 발견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의 하남성 황하부근은 모두 진흙뻘로 덮혀있었던 곳입니다. 갑골이나 청동제가가 묻혔다면 모두 삭아 없어졌어야 하는 곳들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그러한 유물들이 멀쩡하게 남아있다는 것은 모두 사막지역에 묻혀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로 판단되고 있으며, 최근 발굴되는 것들은 모두 고려와 조선조에서 만든 청동제기들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낙양이라는 지명이 당송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족의 역사에 나오는 낙양과 장안은 분명 현 감숙성에 존재해야 서지의 기록과 부합되며 또한 강역의 역사에도 부합이 되고, 더군다나 구한말의 역사와도 맥락이 닿습니다. 자칫하면 대륙 전체가 조선이었는데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이 나뉘어졌다는 오류에 빠질수 있음을 경계해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송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09 하남이라는 지명도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기에 압록강쪽이나 청천강과 관련헤서도 하남이란 말들이 쓰이고 있습니다. 5천킬로에 이르는 황하와 관련해서 하남이란 지명은 적어도 서너군데 이상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명사를 고유명사로 분석하는 오류는 벗어나야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 당 카페의 강역에 대한 분석은 이미 기타 글들에서 밝힌바와 같이 대륙에서 이주해오셔서 직접 지도를 펴고 구한말의 역사를 후학에 알려주신의 분의 기록을 토대로 서지적으로 분석하고 비교하여 밝히게 된 사실임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민수 | 작성시간 22.02.15 송계 산동과 산서의 기준이 되는 "산"은 어딘가요?
    서로 다른 산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송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4.08 김민수 현재의 교열된 역사속에서는 태행산이 그 분리의 근거가 되나. 1945년이전의 역사에서는 현 기련산을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산동과 산서가 고유명사가 아닌이상 시대에 따라 변화와 변천이 있었음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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