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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찾기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을 찾아서

작성자송계|작성시간22.05.27|조회수675 목록 댓글 13

1.
한족(漢族) 역사의 역대 나라들에 의해 장안(長安)이라 불리며 여러 왕조의 중국(中國, 중앙 조정)으로 번영을 이룩했던 서안(西安).
섬서성(陝西省)의 성도(成都)로 한(漢), 위(魏), 서진(西晉), 수(水), 당(唐) 시기에 국도 장안성(長安城)으로 기능을 다했으며, 명대(明代)초에 비로소 서안(西安)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서안(西安) 교외에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앙소(仰韶)문화를 중심으로 대표적 유적(遺蹟)인 반파(半坡)유적이 발굴되어 있는데 이는 스웨덴의 지질학자(地質學者)인 안데르손(Johann Gunnar Andersson, 1874-1960)이 조사한 감숙(甘肅)의 것보다 오래된 것들로 밝혀졌다.
감숙(甘肅)의 유적은 방사성 탄소측정으로 4540(±100)이 나오는데 비해, 반파(半坡)유적은 6080년(±110)의 연대를 보여주어 반파(半坡)쪽이 감숙(甘肅)보다 1천년이상 앞선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반파(半坡)쪽의 앙소(仰韶)문화가 감숙(甘肅)의 앙소(仰韶)문화로 전파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를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의 시각에서 분석해 보면, 안데르손이 조사한 감숙(甘肅)의 앙소(仰韶)문화는 바로 한족(漢族)의 역사강역에서 조사된 것들이고, 1952년에 발견되어 1957년까지 발굴조사된 반파(半坡)유적은 현 서안(西安) 즉 조선(朝鮮)역사의 황해도(黃海道) 개성(開城)지역에서 발굴된 역사유적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 상고역사(上古歷史)인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환웅(桓雄)시기라 할 역사시점을 기준으로 현 서안(西安)지역에 우리 선조들은 이미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는 말이고, 이 터전에서 마한(馬韓)-백제(百濟)를 거쳐 삼국통일로 향해 갔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산동성(山東省) 역산현(歷山縣) 용산진(龍山鎭)에서 발굴되었다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늦은 시기의 유적인 용산(龍山)문화는 현 산동성이 아니라 바로 현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의 위쪽 기련산(祁連山)의 우측단 즉 역사상의 산동(山東)에서 발견된 유적임을 우리는 간파해 내야 겠다. 시기적으로 용산(龍山)문화는 하(夏)왕조(王朝)시대로 하(夏)나라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기련산(祁連山)의 동남쪽에 자리잡았던 역사(歷史)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은 용산진(龍山鎭)의 성자애(城子崖)유적에서 발견된 누벽(壘壁)에서 패기(貝器)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담수산(淡水山)의 조개껍질로, 이는 강(江)가의 민물조개를 말함에 따라 바로 거대한 황하(黃河)의 상류가 흘러가는 감숙성(甘肅省)의 난주(蘭州) 서북방-현 기련산 우측단-에 존재했던 역사상의 산동(山東)을 말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2.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위수(渭水)북안에 함양성(咸陽城)과는 별도로, 대규모의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해 수많은 건축을 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서안의 서북에 장안성(長安城)을 쌓아 B.C. 200년 낙양(洛陽)에서 천도했다고 하며 이후 위(魏), 진(晉)의 수도로서 서경(西京)이라 불리게 되었다.
북위(北魏)가 분열한 후 서위(西魏)가 수도를 두었고 이후 북주(北周)로 이어지고 수(隨)나라는 전국통일이 이루어진 문제(文帝)의 개황(開皇,581-600) 초년에 장안성(長安城) 동남방에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여 대흥성(大興城)이라 하고 당(唐)은 다시 이를 장안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唐)말기에 와서 도읍이 황폐(荒廢)되자 천우(天祐)원년(904)에 낙양(洛陽)천도를 꾀하여 장안(長安)의 주요건축을 모조리 해체, 재료를 수로(水路)로 낙양에 운반해서 장안성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고 전한다.
명대(明代) 초에 들어서 당대(唐代)의 궁성전역과 주위 지역을 성벽으로 둘러싸 현재의 서안성(西安城)이 되었다.
 
섬서성(陝西省)은 서주(西周) 시대에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섬현(陝縣)인 섬원(陝原)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섬서(陝西)'라고 이름하였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진(秦)나라의 영토였으며, 진나라가 한족(漢族)의 강역을 통일한 후에는 내사(内史)와 상군(上郡), 한중군(漢中郡)이었다. 漢나라 때는 사예(司隶)와 병주(并州), 익주(益州)에 속하였고, 송(宋)나라 초기에는 섬서로(陕西路)를 두었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섬서행성(陕西行省)이 설치되었다.
 
1900년에 의화단(義和團)이 발생하자 淸나라 수도는 북경(北京)에서 서안(西安)으로 쫓겨 들어갔고 국가(國家)의 위신은 더할나위 없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3.
 
한고조(漢高祖)유방(劉邦)은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정했는데,.이때 장량(張良)은 <낙양(洛陽)은 토지가 좁아 사방 수백리에 지나지 않으며, 토지도 황폐했던데 비해 장안(長安)은 기름진 평야가 천리(千里), ()으로는 풍요로운 파촉(邑蜀)지방이 있고, ()으로는 호족(胡族)과 대완(大宛)을 통한 통상(通商)이익이 있으며, 더구나 지형이 험난해 천연의 요새가 된다>는 이유를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장안(長安)도 내란(內亂)으로 황폐해지자 후한(後漢)은 낙양(洛陽)을 수도로 삼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남쪽으로 파촉(巴蜀)지방이 있다는 말이다.
필자의 고증에 따르면 파촉(巴蜀)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이 아니라 운남성(雲南省)과 이서(以西)지역 그리고 현 운남성의 북쪽으로 민산(岷山)에 이르는 4천미터 이상의 고원지대(高原地帶)를 말하고 있다.
역사의 사천성(四川省) 중경(重慶)은 명확히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판츠화특구(攀枝花特区)라는 사실이 일제강점(日帝强占)기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였던 정정화(1900-1991)여사의 <장강일기>라는 책의 증언에 의해 명명백백하게 검증되었다. 또한 1940년 당시 전투기(戰鬪機)의 항속거리를 고려할 때 현 대만(臺灣)에서 현 중경(重慶)까지의 거리를 폭격하고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함에 따라 현재의 강역과 지명이 1945년이후 새롭게 지명이동되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현 대만 – 중경 : 1,600km 왕복 3,200km,
해남도 –판츠화특구 : 1,150km 왕복 2,300km)
따라서 역사속 파촉(巴蜀)의 원래 위치가 확정되면 그 위쪽에 한당(漢唐)의 장안(長安)이라는 지명이 형성되어야 마땅한 일이 된다.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에서 서쪽으로 기련산(祁連山)이 뻗어있는 그 아래지역이 되겠다.
 
당(唐)말에 이르러 서안(西安)은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명대(明代)의 보수는 당말(唐末)의 규모를 따랐고 그것이 현재의 서안시(西安市)라고 역사통설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히 날조된 거짓의 기록이고, 정확히는 1945년 이후 거대했던 조선의 강역을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얻은 모택동의 계략에 의해 만들어진 지명(地名)과 강역(疆域) 그리고 그곳에서 숨쉬고 있는 역사(歷史)까지도 모조리 이전시켜 강제화시킨 가짜 역사일 뿐임을 이 시대 대한민국의 지성들은 알아 들어야 할 일이다.
현재의 종루(鐘樓)와 고루(鼓樓)도 명대(明代)초에 만들어졌고, 서안(西安)이라는 이름도 명대(明代)에 붙여졌다고 또한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도 모두 1949년 이후 모택동과 그 하수인들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일 뿐이다.
대안탑(大雁塔,64m), 소안탑(小雁塔), 천복사(薦福寺)탑, 화청궁(華淸宮) 등 모든 문화재(文化財)는 중국 공산당(共産黨)에 의해 새롭게 이전 설치된 것들이다.
위 글중 당말(唐末) 장안(長安)의 주요건축을 모조리 해체, 재료를 수로(水路)로 낙양에 운반해서 장안성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는 기록처럼 모택동의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은 감숙성(甘肅省) 기련산(祁連山) 남쪽에 있던 모든 문화재를 수로를 통해 조선이 빠져나간 대륙 한복판으로 옮기고 원래 한족의 역사터전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단지 하나 새롭게 볼 것은 바로 비림(碑林)이다. 비림(碑林)의 존재에 대해 서안(西安)부근에 산재된 엄청나게 많은 비석(碑石)들이 그대로 방치되면 닳아서 글자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어 각지의 비석(碑石)들을 모아 커다란 건물안에 들여 놓게 되었는데, 죽 늘어서 있는 크고 작은 비석들이 마치 숲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비림(碑林)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그 비석(碑石)의 수는 3,000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현 서안(西安)1926년 이전 조선(朝鮮)의 개성(開城)이었고, 고려(高麗)때는 개경(開京), 백제때는 한성(漢城)이자 마한(馬韓)의 수도였고, 또한 고구려(高句麗)의 남평양(南平壤)이었던 곳이다. 그래서 현 서안(西安)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많은 수의 피라미드가 현재도 감추어진 채 수천년의 역사속에 묵묵히 버티어 서 있는 것이고, 수많은 조선민족의 선조들에 의해 쓰여지고 만들어진 엄청난 수의 비석(碑石)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은 여기에 한족(漢族)의 역사를 덧씌워 버리고 비림(碑林)을 조성해 웅혼했던 조선민족의 역사를 속이고 있음을 우리는 정확히 간파해 낼 수 있다.
 
수천년동안 조선민족이 세운 나라의 국도(國都)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자리가 현 서안(西安)이다.
어찌 이 자리에 진시황(秦始皇)의 무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1974년 발견된 병마용갱(兵馬俑坑)이라 일컬어지는 고분(古墳)은 중공의 모택동(毛澤東) 사망 후 실권을 장악한 4인방 중 모택동의 처()였던 강청(江靑)에 의해 발굴 일주일만에 진시황릉(秦始皇陵)이라고 일방적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고분(古墳)이다. 어떤 연구과 정확한 고증도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명확히 그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조선사(朝鮮史) 오천년 역사의 어느 시기(필자의 생각에는 마한(馬韓)이나 백제(百濟)의 유적이 되어야 타당하다고 생각한다)에 조선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걸출한 인류의 문화유산(文化遺産)이 틀림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이 역사를 바로 잡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 확신한다.
 
4.
이제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의 역사는 새로운 이정표(里程標)를 찾아 길을 떠날 채비를 마무리했다.
이제 우리는 대륙의 거대했던 조선(朝鮮)이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으로 분리되었다는 이론이 잘못된 논리라는 점을 명확히 집어낼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하은주(夏殷周)로부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쳐 진(秦)한(漢)당(唐)송(宋)원(元)명(明)으로 이어진 이른바 한족(漢族)의 강역이 대륙의 서쪽인 현 사천성(川城)과 운남성(雲南省)지역과 난주(蘭州)를 지난 황하(黃河)의 상류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강역에서 그 역사를 이어왔음을 정확히 고증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단군(檀君)의 후예(後裔)들은 단군의 나라를 만들어 그 면면한 역사를 이어왔고, 조선민족과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의복이 다른 이른바 한족(漢族)들은 그들의 역사를 만들어 조선민족과 교류하면서 수천년의 역사를 같이해 온 것뿐이다.
시원(始原)이야 같을지 모르나, 수천년의 시간은 서로를 갈라 놓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이제 우리는 이를 근거로 조선민족(朝鮮民族)과 한족(漢族)을 정확히 구분지어 역사(歷史)를 재단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강점(日帝强占)기 위대한 조선(朝鮮)의 전사(戰士)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만들고 군대(軍隊)를 육성해 일제와 무력전쟁을 선포하였고, 피맺힌 투쟁속에 1940년 중경(重慶-현 운남성 판츠화시)으로 임시정부는 뼈아픈 이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 미국과 연합하여 현 한반도에 만들어진 일본령 속국 대한민국을 되찾기 위해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많은 요인들이 서안(西安)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때 이들은 현 운남성의 중경(重慶-판츠화시)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양자강을 따라가다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가릉강(嘉陵江)을 따라 형성된 도로와 열차를 타고 현 감숙성(甘肅省) 기련산(祁連山)의 남쪽에 위치한 서안(西安)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길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소설에 나오는 ()나라가 파촉(巴蜀)을 치기 위해 등애(鄧艾)장군으로 하여금 정벌군을 보내는데 이때 촉으로 갔던 길이 바로 4천미터의 고산준령(高山峻嶺)이 즐비했던 청장고원(青藏高原)의 우측이 되며 이 길은 위대한 조선인 장준하(張俊河, 1918-1975)선생과 김준엽(金俊燁,1920-2011)선생이 뜻을 같이 한 조선인들과 같이 걸어갔던 길이기도 하다. 바로 파촉령(巴蜀嶺)이다.
 
5.
이를 지도를 통해 고찰해 보면 아래와 같이 볼 수 있다.

2022.05.27. 松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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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나루터 | 작성시간 22.05.28 병마용갱에 등장하는 병사들의 머리가 전부 상투라 좀 의아하게 생갹했는데 결국은 우리 조상들의 유적이고 유물들이었군요.
  • 작성자흑괭이 | 작성시간 22.05.31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불량아재 | 작성시간 24.04.11 판즈화(攀枝花, Panzhihua)를 검색하니 압록강(Yalong Rivers)이 나오네요.
    약 1만년전 지우수드라(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 해발고도 2200미터에 접안했다고 전해집니다.
    대홍수 이전의 역사는 진흙과 지구의 토사물 속에 완전히 묻혀버렸습니다.
    두루두루 대홍수 관련 기록을 찾아보니 해발 고도 3400미터 이상으로 올라간 사람은 살아남았다고 전해집니다.
    확정적인 사실은 대홍수 이전 해발 고도 2200미터 이하에 거주하던 사람은 모두 사망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해수면 상승 시뮬레이터를 3400미터로 설정하면 청해성 티베트 고원의 북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해발 4078m의 할라호(Hala Lake, Hala Hu, Har Hu)가 나옵니다.
    염도가 약 1.8%(18psu)인 기수호입니다.
    호수 북쪽의 슐레 난산은 해발 5800m를 넘습니다.
    빙하의 영향으로 호수와 생태계의 수위는 녹은 물의 파동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단군과 관련된 지역은 탕굴라산(탱그리산)이 있습니다.
  • 작성자불량아재 | 작성시간 24.04.11 탕굴라산(唐古拉山鎮:탱그리산?)은 중국 칭하이성의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탕굴라 산맥의 중심지이다.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탕굴라 산맥의 중앙부에 있는 해발 4,535미터에 위치한 탕굴라 정착촌은
    마르쿠우(Marquwo), 투오투오허옌(Tuotuoheyan) 또는 토토쿠우(Togtogquwo)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마을의 면적은 해발 6,621미터의 젤라다인동 봉우리를 포함합니다.
    이 산은 양자강의 발원지 중 하나인 뚜오뚜오강의 발원지와 가깝기 때문에 유명합니다.
    남쪽에는 통톈허이안(통톈강변), 야산싱( y山城), 웬취안(文全), 탕굴라 빙잔(唐g羅 bing)이 있습니다.
  • 작성자불량아재 | 작성시간 24.04.11 소륵남산(疏勒南山) 수륵남산은 치롄산시 구간으로 수륵하 남쪽에 위치하며 간쑤, 칭하이 두 성에 걸쳐 있다.
    최고봉은 단결봉으로 해발 5808m다.수륵남산의 서쪽 부분은 간쑤성 경내에 위치하고
    야생마 남산이라고 하며 나머지는 칭하이성 경내에 위치한다.
    청해성(青海省) 해서주(海西蒙古族藏族自治州)더링하시(德令哈市) 백수산(柏树山,白頭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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