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44코스, 세 친구의 팔도 유람기
이원근
◉ 2026.6.21.
◉ 임진성 – 상가 소류지-천황산임도-정자-노루목고개-장항해변-45코스 시작-예계마을
오늘은 임진왜란 당시 지역을 지키기 위해 민관이 힘을 모아 축성한 임진성에서 길을 시작했다. 코리아둘레길 5,350km를 함께 유람하는 팔순의 친구 셋은 성곽에 잠시 머물며 옛사람들의 흔적을 되새겼다. 외성은 토성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었고, 내성은 석성으로 복원되어 있어 오랜 세월을 건너온 역사의 숨결이 느껴졌다.
계절은 이미 한여름으로 성큼 들어서 있었다. 햇살은 뜨겁고 습도는 높아 숨이 턱턱 막혔다.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섰지만, 옷은 금세 땀으로 젖었다. 그래도 세 친구는 서로의 걸음을 맞추며 느릿느릿 길을 이어갔다. 젊은 시절 같으면 더위를 탓했겠지만, 이제는 이런 날씨마저도 여행의 한 장면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천황산 숲길 대신, 고실치 방향으로 우회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지도와 고도표를 펼쳐 놓고 여러 차례 도상 탐방까지 마쳤지만 실제 지형은 늘 예상과 달랐다. 거리는 2km 정도 단축될 수 있었지만, 차도에다가 오르막도 만만치 않았다. 해발 고도 차이도 크지 않았다. 결국 원래 계획대로 천황산 임도를 걷기로 했는데, 지나고 보니 참 잘한 선택이었다.
남구마을을 지나 상가소류지에서 천황산 임도에 들어섰다. 한참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는데 산악자전거 동호회원 열댓 명이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파이팅!"을 외치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길 가장자리로 비켜선 세 친구도 박수를 보내며 응원했다. 그 짧은 순간, 서로의 땀과 노력이 통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걷는 동안 새삼 깨닫는다. 아무리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고 지도를 들여다보아도 길은 직접 걸어봐야 비로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만약 천황산 임도를 우회했다면 이날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 뻔했다.
임도 중간쯤,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는 작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 친구는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 갔다. 점심이라야 볶은 멸치가 전부였지만, 오래 걸은 뒤 먹는 소박한 음식은 어느 진수성찬에도 뒤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주변을 바라보니 그제야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든 것은 발 아래 펼쳐진 거대한 돌너덜이었다. 산 정상에서 무너져 내린 회색 바위들이 수백 미터 비탈을 따라 흘러내려 숲 한가운데 거대한 돌의 강을 이루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바위들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그 틈새마다 어린 풀과 잡목이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세월은 모든 것을 깎아내리지만, 또 다른 생명을 키워낸다는 사실을 말없이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자, 풍경은 갑자기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열렸다.
짙은 녹음으로 뒤덮인 산 사면 아래에는 잘 정돈된 남해의 골프장이 펼쳐져 있었다. 연둣빛과 진녹색이 교차하는 페어웨이는 마치 누군가 붓으로 산기슭에 초록 물결을 그려 넣은 듯했다.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잔디밭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간임에도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있었다.
그 너머로는 여수만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바다는 눈부신 청록색에서 깊은 남색으로 서서히 색을 바꾸며 수평선까지 이어졌다. 정박한 대형 화물선들은 마치 바다 위에 세워진 작은 도시처럼 보였다. 그 뒤로는 수십 겹의 산 능선이 푸른 안개 속에서 겹겹이 이어졌다. 가까운 산은 짙은 녹색으로 선명했고, 먼 산은 푸른빛으로 물들었으며, 가장 먼 산은 하늘과 경계를 잃어버린 채 아련한 회청색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정자에 서 있으면 산과 숲, 들판과 마을, 바다와 섬, 그리고 먼 수평선까지 모두 품에 안은 듯한 기분이 든다. 발 아래에는 태고의 시간을 품은 돌너덜이 놓여 있고, 눈앞에는 사람이 가꾼 초록의 풍경이 펼쳐지며, 그 너머에는 여수만의 푸른 바다가 깊고 느린 숨을 쉬고 있다. 숲을 스쳐 올라온 바람이 땀을 식혀 주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다의 적막이 겹칠 때면 그곳은 단순한 전망대가 아니라 산과 바다가 서로를 마주 보는 거대한 관람석처럼 느껴졌다.
원래는 시설이 잘 갖춰진 남해스포츠파크에서 일정을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서둘러 나와 네 시간이나 차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10km도 채 못 걸었다면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다. 세 친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조금만 더 가세." 그렇게 다시 배낭을 메고 길에 섰다.
비지땀이 흐르고 다리는 무거웠지만 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결국 2km 정도를 더 걸어 예계마을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팔순의 나이에도 세 친구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이제는 어디에 얼마나 빠르게 도착하느냐보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바다 건너 겹치는 산그림자, 정자에 앉아 나누는 짧은 이야기 한마디가 더 소중하다. 코리아둘레길 5,350km는 단순한 도보 여행이 아니라 살아온 세월을 함께 돌아보고 남은 시간을 더욱 깊고 넉넉하게 누리는 여정이다. 그날 천황산 임도에서 바라본 남해의 풍경처럼, 우리 세 친구의 노년 또한 푸르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청황산 너덜지대(암괴류)
천황산 중턱 산길 여러 곳에서 너덜지대(암괴류)를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암석이 풍화되어 깨지고, 깨진 돌들이 경사면을 따라 아래로 이동하면서 생긴 독특한 지형이다. 수천 년 또는 수만 년에 걸쳐 암석이 조금씩 무너져 내려 형성되었다고 한다.
▲아난티 골프장과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