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우리 문화에 깊이 들어와 있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자동차에 비유하여 어떤 상태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펑크가 났다."라고 하는 표현을 우리는 자주 쓰는데, 이 표현은 어떤 예정된 상황이 예기치 않게 장애가 생기거나 잘못되었을 경우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은유는 기계적이고 않고 유기적이었습니다. 농사, 포도 재배, 양치기, 고기잡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자연의 움직임은 대체로 서서히 이루어지고 느린 편이며 굴곡이 자주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또한 이런 자연의 움직임은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기계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자연의 현상을 보면 늘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늘 흐리고 비만 내리거나 푹풍우가 내리치는 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자연인데도 우리는 이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잘 되어 가기만을 바라기에 어떤 일이 어긋나거나 잘못되었을 때 크게 실망하거나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보복 운전"이나 "묻지마 폭행 혹은 살인" 등이 이런 문화 현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이 편리하고 간편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은근과 끈기를 발휘할 의지마저 잃은 것이겠지요....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을 기계로 여기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그 차에 연민을 느끼지 않습니다. 불만을 품고 수리소에 가져갈 뿐입니다. 만일 사람을 기계로만 본다면, 마음이나 몸이 지쳐 무너진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고장 난 자동차를 대하는 태도와 같아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던" 그들에 대해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가엾게 여기셨다"라고만 번역하지 않고 "마음 깊이 가엾게 여기셨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마태오가 사용한 그리스어 σπλαγχνίζομαι(splagchnizomai-스플락크니조마이)는 특별히 깊은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문자 그대로 "내장(심장, 간, 폐)"을 가리키며, 기계에 대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깊은 연민을 뜻합니다.
우리말에도 "몹시 슬프서 애(창자, 또는 마음속 깊은 곳)가 끊어지는 듯하다"라는 표현이 있지요. 이것이 바로 마태오가 사용한 그리스어 "스플락크니조마이"에 해당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보시고, '나인'이라는 마을의 과부를 보시고, 그들을 향해 깊은 연민의 정으로 움직이셨습니다. 바로 그 동정심과 연민, 자비가 열두 제자를 파견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다스리고 복종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께서 보여주신 그 자비와 연민과 동정심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사실 발음하기도 어려운 그 단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성품 전체를 드러냅니다. 말하자면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마음 깊이 가엾게 여기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그분의 "애가 끊어지는 듯한 사랑과 연민"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연민과 사랑과 자비를 주변에 보여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주님께서는 여전히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셨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파견해 주시며 같은 정과 권한을 부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의 이런 "애가 끊어지는 듯한 우리에 대한 사랑과 정"을 깊이 의식하고 인식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급선무요 가장 중차대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적어도 1분(3분에서 5분이면 더 좋고요...) 이상 잠시 멈추고는 우리의 세상적인 관심사를 제쳐 두고 주님의 이런 애틋한 연민의 정과 사랑을 의식하기 위해 고요한 시간을 갖고자 하는 연습(수양)을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그리도 중요한 것입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마리향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4
마태오가 사용한 그리스어
σπλαγχνίζομαι(splagchnizomai-스플락크니조마이)는
특별히 깊은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문자 그대로 "
내장(심장, 간, 폐)"을 가리키며, 기계에 대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깊은 연민을 뜻합니다.
우리말에도 "몹시 슬프서 애가 끊어지는 듯하다"라는 표현이 있지요.
이것이 바로 마태오가 사용한 그리스어
"스플락크니조마이"에 해당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보시고, '나인'이라는
마을의 과부를 보시고, 그들을 향해
깊은 연민의 정으로 움직이셨습니다.
바로 그 동정심과 연민, 자비가
열두 제자를 파견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다스리고 복종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께서 보여주신 그 자비와 연민과 동정심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
작성자마리향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4
만일 우리가 지금의 고비를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곧 개인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바깥과 주위로 흘러가는
전혀 새로운 사고의 길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우주적 비전(cosmovision)"과
의식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생애 안에서조차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가르침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은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분에 대한 신뢰를 더욱 굳건히 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또한 그분이 씨앗을 뿌리신 그리스도교를
살아 있고, 현대적이며, 시대에 맞는 종교로
바라보게 하며, 이 아름다운 흐름의 비전
곧 나눔과 일치의 비전—을
새로운 우주적 관점(cosmovision) 속으로
전해 나갈 수 있는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제 공은 우리 공동체의 손에 놓 있습니다.
우리 이 비전과 함께 달려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