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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1의 태초와 요1:1의 태초는 같은가 다른가?

작성자배수진|작성시간08.05.31|조회수699 목록 댓글 14

창1:1의 “태초”와 요1:1의 “태초”는 같은가 다른가?

일반적으로 요1:1의 초두에 기록된 “태초”는 본 절의 “태초”와 동일하지 않다고 설명된다. 그 이유는 대체로 요1:1의 ‘태초’는 ‘말씀’, 즉 제2위 되신 성자 예수와 관계된 시점이고, 후자는 물질과 관계된 시점이므로 양자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태초는 ‘영원 전의 태초’이며, 창세기의 태초는 ‘물질계의 태초’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요1:1의 내용과 전혀 조화롭지 못하다.

 

의미상의 모순성

만일 태초가 시간과 물질의 창조와 관련된 것이라면 태초 이전의 또 하나의 태초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시간이 시작되는 첫 시점 이전에 또 다른 시간적인 시점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두 개의 시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의미상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모순을 일으킨다. 창조 이전의 시간적인 태초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시간은 피조된 세계의 존재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자적 일치성

요한복음에서 태초 (엔 아르케)는 구약의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 경의 (레쉬트)와 동치어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관사 없이 사용되는 것은 70인 경이 관사 없이 쓰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그 서두의 ‘태초’와 창세기에서의 ‘태초’가 동일한 것임을 밝히려는 의도임에 분명하다.

 

의미의 연결성

만일 요1:1의 태초를 ‘이전 태초’로 이해한다면, 1절은 ‘태초 이전, 즉 영원 전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해석해야 한다. 물로 이와 같은 해석이 하나님의 제2위에 관하여 잘못된 것을 말해 주지는 않으나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 1절의 의미를 보다 확실히 알기 위해 먼저 “계시니라”를 살펴보자. 여기서 헬라어 (엔)은 be동사 (에이미)의 미완료 과거(과거 진행형)로서 직역하면 ‘계시고 있었다’가 된다. 그러므로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있었다’라고 해석되며, ‘말씀’은 제2위이신 성자께서 (언제부터 계셨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적어도 천지가 창조되던 때, 즉 태초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물질에 대한 말씀의 선재성을 의미한다.

그럼 그는 천지가 창조되던 태초에 무엇을 하셨나? 3절은 그 대답으로 그가 천지 창조에 참여하셨음을 계시한다. 이것이 요한 사도가 1절에서부터 3절까지 말하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 사도가 창1:1의 창조의 시점인 태초를 요한복음 서두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는 것은 성자께서는 창조 때에 이미 계셔서 만물 창조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것을 보다 분명히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요한 사도는 1절의 첫 문장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예수님이 물질보다 선재하심을 말하면서 물질과 말씀 둘 중 말씀이 먼저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다음 문장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에서는 성자 되신 예수님을 물질 아닌 존재이신 하나님과 비교하여 시간적으로 같은 지위에 놓았다. 마지막 문장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으로서 ‘그러므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체’라는 단계적 논법을 펴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초반부에 태초를 영원 전의 한 시점으로 미루어 놓는다면 저자가 창조의 시점으로 인용하는 태초는 사실상 의미 없는 단어가 된다. 이와 같이 이 단어가 과거 진행적 동작을 말해 주는 한 말씀이 태초에 ‘계시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고’ 있었음이 분명할 뿐 아니라 이것으로 말씀의 기존성이 입증되므로 태초를 창조 이전으로 끌어 올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유재원,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의 미학, pp.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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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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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바로미 | 작성시간 08.05.31 <위의 해석도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라는 위의 저의 글을 전제로 저의 글을 읽어주심... 아마 위의 유재원님도 그리 크게 문제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의 구절들에 대한 태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분류 아닙니까? 같은 의미다. 아니다. .. 이렇게...
  • 답댓글 작성자배수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5.31 네, 그렇군요. 위의 해석도 그리 큰 문제가 없다고 바로미님이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는데도 제가 유의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 작성자기독네티즌 | 작성시간 08.05.31 태초에 함께 하셨던 엘로힘의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한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원어성경에 무엇이라 말했는지 궁금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배수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5.31 맛소라 사본: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베에트 하아레츠(창1:1) 참고로, 유재원 님은 엘로힘은 '장엄복수'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malkut | 작성시간 09.07.24 엘로힘은 장엄 복수로 여겨지거나(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대해 이렇게 쓰인 일이 없다), ---- 생명과 능력의 충만함을 시사하는 집중 복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복수는 하나님을 생명과 권능이 충만한 존재로 지칭한다. 개혁주의 신론 헤르만 바빙크 저 이승구 역 P14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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