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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삼위일체의 본체와 위격의 개념

작성자하나로|작성시간07.03.03|조회수1,099 목록 댓글 14

아래의 글은 이종성 저, 삼위일체론의 <본체와 위격의 개념>에 대한 부분을 발췌 인용하였습니다.

이 색깔의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김종흡 역 에서 발췌인용한 글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글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김종흡 역에서 발췌인용한 글입니다.


이 색깔의 부분은 저의 생각이나 기타 자료를 인용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본체와 위격의 개념


1) 우시아

‘우시아’는 성서적 개념이 아니라 희랍철학에서 근원적 존재를 의미하는 말로로 사용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실재,참존재,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인간이 눈으로 볼수 있는 유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유형적인 것을 있게 하는 근원적인 존재, 또는 힘을 말한다.


플라톤은 그러한 근원적인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다. 그는 실지로 존재하는 것을 ...이는 현상계라는 뜻이다. 그는 ‘우시아‘와 이데아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실지로 존재하는 것은 현상계가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우시아의 세계)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를 플라톤과 다르게 이해했다. ...그의 범주론에서 모든 실재에는 실체와 속성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속성에 속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을 제1우시아(동방교회의 휘포스타시스)...구체적인 것에 공통된 실체를 제2우시아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두 우시아는 플라톤처럼 본성적인 것(형이상학적인 것)과 현상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두 우시아가 다 같이 실체적 존재(초 물질계)를 의미한다.


동방교회가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프로소폰’을 기피하고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우시아에 해당하는 휘포스타시스를 ‘위격’으로 사용한 것을 볼 때에 <위>에 대한 부분을 한글로 번역할 때에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본성과 하나님의 존재와의 관계를 말할 때, 처음에는 ‘우시아’를 플라톤적인 뜻으로 사용했으나, 4세기 중반부터는(362년,알렉산드리아 대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뜻으로 사용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291p)


성 어거스틴 : 354년에 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출생하여 430년 히포의 감독 (현재 알제리 숙크아라스)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교부중의 한사람입니다.


제5권8항

하나님에 대해서 실제에 관한 말은 각 위격에 대해서 따로따로 하는 말이며,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함께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는 한 본질과, 헬라어로 세 휘포스타시스(hypostaseis), 라틴어로 세 위격(personae)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본질(essences)을 말하지 않는것과 같이, 세 위대성을 말하지 않는다. 내가 본질 즉 에센티아(essentia)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우시아(ousia)라고 하며, 라틴어로 보통 숩스탄티아(substantia)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휘포스타시스라는 말도 쓰는데, ousia와 hypostansis의 뜻이 어떻게 다르다고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헬리어로 이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mia(한) ousia, treis(세) hypostaseis라는 말을 쓰지만, 이것은 라틴어로 한essentia와 세substantiae라고 한다.

제5권9항

세 위격(personae)이라는 명칭은, 인간적인 뜻으로 해석하면 적당치 않다.

주께서는 사벨리우스파와 달라서 이 때에 주어를 단수로 쓰시지 않고 복수로 쓰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셋이냐?고 묻는다면, 사람의 언어는 심히 빈곤을 느낀다. 그러나 “세 위격”(세 “분”)이라고 대답한다. 이 용어가 뜻을 충분히 표현한 것이 아니라, 전혀 아무말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질과 위격의 차이를 철두철미하게 이해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의 차이를 몰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헬라어 지식이 깊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그 대신에 삼위일체에 대한 그 자신의 지식이 깊었음을 알수 있다. (성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178~180p)


위의 김종흡님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번역하면서 “세위격”을 “세 분”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대부분이 그렇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방교회나 서방교회가 이 용어의 형식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내적 노력이 있었듯이 한글의 번역에서도 한글 단어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며, 설사 적당한 단어가 없어 사용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생길수 있는 문제점을 함께 파악하여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2) 휘포스타시스

이 말은 역시 철학적인 용어로서 ‘우시아’보다는 드물게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밑에 서 있는 것’ , ‘어떤 행동을 결과로 남아 있는 것’, ‘침전물’을 의하는 말로 사용했다.(중략)

소크라테스의 시대에는 ‘우시아’보다 ‘휘포스타시스’를 더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부터는 ‘우시아’를 더 즐겨 사용했다.


이 말이 로마에서는 무형적인 것을 강조하는 ‘우시아’보다 유형적인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 ‘휘포스타시스’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밑에 서있는 것’,또는 ‘보이는 것 뒤에 있으면서 보이는 것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로마에서는 ‘휘포스타시스’의 직역어인 ‘숩스탄티아’를 ‘우시아’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휘포스타시스’가 ’우시아‘와 분리되어 삼위일체론에 사용된 것은 362년에 아타나시우스가 주관했던 알렉산드리아 대회였다. 그들은 니케아 신조의 기본신앙에 따르면서 세 우시아가 아니라 세 휘포스타시스라고 표현하도록 결정했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다수의 교부들은 ‘우시아’가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의 본체, 또는 실체 자체를 의미하는데 대하여, ‘휘포스타시스’는 하나님의 존재의 특별한 양태 또는 각 ‘페르소나’의 존재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 후 캅파도키아의 세 신학자들이 등장하면서 두 낱말의 구분이 더 분명해졌으며 얼마 안가서 ‘휘포스타시스’는 세 위격을 설명하는 낱말로 정착되었다.



3) 숩스탄티아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와는 다른 두 낱말을 사용한다. 그 말이 곧 ‘숩스탄티아’와 ‘페르소나’라는 말이다. ...숩스탄티아(substantia)는 ‘숩스토’(substo)라는 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로서 ‘어떤 것의 밑에 있는 것’,‘어떤것을 존재케하는 그것’,‘본성 또는 어떤 실체가 그것으로 존재케 하는 밑에 깔려 있는 원칙’등을 의미한다. ‘숩스토’는 밑을 의미하는 접두사 ‘숩(sub)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말은 어떤 환상적 대상이나 가공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존재,근원적 존재를 의미한다.


희랍세계에서는 실재 또는 근원적 존재에 대한 논리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작업이 성행했으나, 로마를 중심한 서방세계에서는 그렇치 못했다.

이 현상은 교회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헬라어로 쓰여진 이레니우스의 글을 라틴어로 번역했을때,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를 일률적으로 ‘숩스탄티아’로 번역했다. 로마인들의 눈에는 근원적 존재를 두 낱말로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터툴리아누스도 그 구별을 짓지 않았다.

... 이렇게 하여 동방교회에서는 세 위격을 의미하는 말인 ‘휘포스타시스’가 서방교회에서는 일체를 의미하는 ‘숩스탄티아’로 이해되었다. ..이에 따라 동서교회간에 긴장도 생겼다.... 서방교회는 삼신론을 가르친다고 오해를 하게 되었다.  ... 이러한 오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어느정도 완화되었으나 현재까지도 두 교회는 자신들의 표현형식을 고집하고 있다.


4)페르소나

‘우시아’가 로마인들에게는 생소한 낱말인 것과 같이 ‘페르소나’는 희랍인들에게 익숙치 않은 낱말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조건,신분,기능을 의미했다. 특히 시민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신분이나 기능을 가지는 것이 중요시 되었다. 로마법에 의하면 노예는 ‘페르소나’를 가지지 못했으며, 동시에 로마의 시민이 될 수 없었다. 시민으로서의 신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프로소포이(무인격자) 또는 ’페르소나 카렌테스(국외인물)라고 불렀다. 성서적 개념은 이 두 번째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어에는 그것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낱말이 없다.(23)

(23) 한국어로 persona를 인격(人格)으로 번역하면 그 말의 뜻에서 너무나도 크게 벗어난 듯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위(位) 또는 위격(位格)으로 번역하기도 하나, 그 말들도 정확한 뜻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언제든지 어려움을 당하는 말이 바로 ‘페르소나’라는 말이다.


이종성님은 <위격>조차도 ‘페르소나‘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것이 정확하지 않다고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습니다. 후학들의 연구과제인지 아니면, 제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인지...


성서(신약)에서는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프로소폰’이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중요한 낱말로 부각된 것은 터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하고부터였다. 그 본래의 뜻은 위에서 설명한 두 번째 뜻이었다. 단지 어떤 존재를 대역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존재를 실체를 가진 존재로 이해했다. 즉 독자적 실체를 가진 존재로 이해했다. 한 개인의 구체적 현현을 의미했다. 자아의식을 가진 주체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실한 신분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신학에서 ‘페르소나’의 개념에 대한 고전적 무게를 가진 정의는 보에시우스가 내려주었다.

그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페르소나는 이성적 본성이 개체적 실체다. 이 정의가 말하는 것 같이 ‘페르소나는 단지 아버지의 기능을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실체적으로,지적으로 그리고 다른 것에 이양되지 않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단지 아버지의 다른 형태의 존재 양태가 아니라 그의 고유한 존재 실체다. 서방교회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 낱말을 택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에 적용함과 동시에 그 낱말을 군주신론이나 종속주의를 막는데 적극 활용한 것은 서방교회 신학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군주신론이나 종속주의를 막는데는 공헌을 했다고 하지만, 본래 ‘휘포스타시스’가 가지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우시아라고 정의하는 “속성에 속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의 의미들이 단어 자체(페르소나)에서 미흡하게 되었을 때의 문제점도 동시에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우시아’의 의미를 보면, 성리학의 “기(氣)”와 유사함이 발견되고, 제2우시아는 “리(理)”와 유사함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페르소나’가 “기(氣)”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기” 는 실체이면서 “리”가 따라오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정조가 정약용에게 하문한 것에 대한 문답을 발췌해보면,


정조의 물음

율곡이 인심(人心 )과 도심(道心)을 구분한 것은 이렇다. 理와 氣기 구조적으로 떨어질수 없는 한 몸이다. 발하는 주체는 氣이고 발하는 근거(所以) 理이니, (오직 氣發理乘의 한 길 밖에 없다)  어찌 理發 氣發의 다름이 있으리. (인심과 도심의 구분은) 다만, 氣를 떠나지 않되 그 발현이 道義를 위한 것인 까닭에 性命에다 배속한 것이 도심이고, 理에 바탕하고 있으면서도 그 발현이 口體를 위한 것인 까닭에 形氣에 배속한 것이 인심이다.


(여기서), <발하게 하는 근거>니 <발하게 하는 주체>니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즉 리 氣가 있기에 발하고(*지침이 있어야 나갈 것 아닌가), 이 氣가 없으면 발하지 않으므로(*재료가 있어야 만들게 아닌가), 理와 氣가 구조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이로써 (논의를) 가히 판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일설은 어째서 四端을 理發에, 七情을 氣發에 배속시키고있는가(이것은 퇴계의 설을 가리키고 있다:원주)


정약용의 대답

臣은 四 端을 理發에, 七情을 氣發에 배속시킨 설에 대해 오랫동안 의문을 품어 왔습니다. 만약 분분한 설에 빠져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편견없이 바라보면 변파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대개 氣는 독립적인 물건이고 理는 의존적인 물건입니다. 의존적인 것은 독립적인 것에 기대고 있으므로 <氣가 발할 때 이 理가 있게 됩니다>.

런즉 氣發而理乘之는 가능하나 理發而氣墮之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理는 독립적 실재가 아니므로 먼저 나설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발하기 이전에 (가능성으로서의 잠재적)理가 먼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발할 참에는 氣가 반드시 먼저 앞설 것입니다.

이이가 말한 <발하는 것은 氣, 발하는 근거는 理>라는 설이 어김없이 참되고 분명하니 누가 뒤집을수 있겠습니까?

(중략)

결국 나중에 이벽은 율곡의 <포괄적> 논의에 기우는 정약용을 불러 세움으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로 생각)

본체와 위격, 위격과 위격간의 관계들에 대해서 깊이 상고하고자 할 때에,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리학의 구체적인 접근방법론을 활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어 올립니다. 삼위의 '위'의 개념을 사단(인의예지) <단,실마리>으로 비유하고 사덕의 덕을 본체에 비유하여 이해를 해보는 것입니다. 

(이부분은 너무 길어지게 되어 나중에 별도로 분리해서 정리가 한번 필요할 것 같습니다)


5) 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희랍어가 바로 이 ‘프로소폰’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신약성서에서 사용할 때, 그 뜻은 ‘얼굴’ 또는 ‘현존’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말을 세가지 뜻으로 쓰고 있다. 얼굴과 마음(살전2:7), 마음과 외모(고후5;12) 등으로 비교하여 외부적인 것을 의미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했다(고후2:10 ; 4:6, 그리스도의 얼굴). 셋째로, 고린도후서 1장11절에서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라는 말이있으나, 이중 ‘사람’으로 번역된 원어는 ‘프로소폰’이다 터툴리아누스가 사용한 뜻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동방신학자들은 서방세계에서 ‘페르소나’를 그렇게 이해하는데 경계를 갖는 동시에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프로소폰이 같은 오해와 오용의 기회가 될것을 경계하여 ‘프로소폰’이란 낱말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동방교회가 구태여 ‘프로소폰’을 기피하고 ‘휘포스타시스’를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결론


동방교회가 ‘미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의 형식을 결정하기 까지에는 몇가지 내적 노력이 필요했다. 서방교회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시아’를 일체를 의미하는 뜻으로 채택한 동시에 본래는 ‘우시아’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던 ‘휘포스타시스’를 적용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제1우시아에 해당된다. 그러고는 ‘페르소나‘에 해당되는 ’프로소폰‘을 의식적으로 기피했다.


다른 한편 서방교회는 처음부터 ‘우시아’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이 없었다. 또한, 휘포스타시스‘와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시아‘보다 ’휘포스타시스‘가 언어 구조상 더 쉽게 이해가 되었음으로 하나님의 본질 가운데서 보편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휘포스타시스‘의 직역인 ’숩스탄티아‘를 택했다.

그 다음에 ’휘포스타시스‘의 자리에 동방교회가 모르는 ’페르소나‘라는 말을 도입했다. 이 말을 도입한 것은 법률가였던 터툴리아누스의 개인적 탁견(뛰어난 의견)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서방교회는 ‘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스 페르소나에“로 결정되었다. 그대로 직역한다면 ’하나의 본체와 세가지의 위격‘이라는 뜻이다. 두 형식을 비교한다면 다음과 같다.


동방교회의 ‘미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가 서방교회에서는 ‘우시아’가 제거되고 그 자리에 ‘숩스탄티아’가 도입되는 동시에, ‘휘포스타시스’의 자리에 세속적인 낱말인 ‘페르소나’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이스 페르소나에이다. 그러나 그 뜻은 두 형식이 동일하다.(28)

(28) 한국교회와 일본교회는 Trinity-Trinitat를 삼위일체로 부른다. 그렇게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수 없으나 매우 모호하고 부적당한 번역이다. 왜냐하면 위(位)의 개념이나 체(體)의 개념이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학적 연구가 요청된다.


삼위일체를 추구하면서, 용어나 개념정립을 위해서 정리해두고자 합니다.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기탄없이 지적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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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하나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3.04 현재로서는 "분"외에 다른 더 좋은 단어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헌데, "분"으로 한다해도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 가 봅니다. 제가 아직 좀더 공부를 해야 할것 같습니다.
  • 작성자한우리 | 작성시간 07.03.04 그러나 그 위험성 때문에 하나님을 더 잘알고 싶은 열망을 멈출수도 없고.....참 어렵습니다만 인간의 제한성을 뛰어넘는 부분은 거룩한 미스테리로 남겨두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요? 위트니스-리나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도 너무 나가다가 변형된 양태론쪽으로 굳어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단순하게 본질이 하나인 세분 하나님! 정도로 이해하면 안될까요? 본질이 다르면 삼신론이 되고 본질이 같아도 세분이 안되면 양태론이 되니깐요....이와 관련해 차영배교수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한! 세분
  • 답댓글 작성자하나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3.04 소개해주신 <차영배,삼위일체론>을 구입해서 읽어보고 있습니다. 이종성님보다는 얇아서 보기는 좀더 낫네요..^.^ 헌데, 제가 좀더 깊이 들어가고 하는 열망은 과연 지방교회의 신론이 양태론인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호랑이를 잡을 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심정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 껍질이 워낙 두꺼워서 왠만해서는 쉽지 않을것 같아서요. 막연한 비판보다는 서로에게 납득이 되는 수준의 비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 답댓글 작성자하나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3.04 저는 일단 모든 결론을 유보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공부를 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다보니, 전통적인 것도 해야하고, 위트니스 리도 알아야 하고 할것이 넘 많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내 안에서 움직이는 대로 계속 가볼 생각입니다. 그래도, 바로미님이 도와주셔서 대강 입구는 찾은 듯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삼일하나님으로 지칭하면서 삼위일체를 고백합니다. 다만, <그영>에 대한 차이와 상호내재에 대한 부분이 다른것 같습니다. 물질적,공간적 측면의 편재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지 않나 싶구요.좀더 정리가 되는 대로 검토를 받아 보겠습니다. 많은 가르침과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 작성자한우리 | 작성시간 07.03.05 제가 볼 때 지방교회는 분명히 양태론이 맞는데 그것도 그냥 양태론이 아니라 변형된 양태론 같습니다. 하나님로님의 연구가 이 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공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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