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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칼럼

파트리크 쥐스킨드의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작성자수국|작성시간04.05.03|조회수401 목록 댓글 6
파트리크 쥐스킨드는 '향수'와 '좀 머 씨 이야기'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그의 글을 보면 좀 어두운 분위기도 느껴 지지만 삶에서 잃어버린 중요한
그 무엇을 찾아보도록 합니다.

'깊이에의 강요'는 그의 단편집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보다는
자기자신의 존재성을 찾는데 비중을 둡니다.
아마 에릭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와 함께 궁합이 맞는 소설이라 생각됩니다.

작가는 자기자신의 존재성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소유욕을 충족시키고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비즈니스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겪어야 할 필연적인 결과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그곳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용기가 없고, 대안이 없어 망설이는
인간들의 모습을 아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글
'깊이에의 강요'는 한 젊은 여류화가가 그린 그림에 대해 어느 평론가가
내린 평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평론가는'재능은 있지만 깊이가 없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평론가의 평가에 화가는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마침내 모든 작품 활동을 중지하고 결국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해 버립니다.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평론가는 그 이후에 정반대의 논리를 펴면서
'그녀의 작품에는 강요된 깊이에의 집착이 엿보인다'는
어처구니 없는 평가를 다시 내리게 됩니다.

작가는 이 짧은 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요?
소설가로서 평론가들의 무책임한 말장난에 일침을 놓고자 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평론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화가의 연약함과 존재성 혹은
주체성 상실을 지적하고자 함일까요? 물론 그렇게 볼 수 도 있습니다만
단지 그런 이유만이라면 가벼운 소설일 것입니다.
작가의 의도는 보다 근본적인데 있습니다.
과연 깊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깊이가 있다 없다 할 때의 깊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깊이를 논합니까?
동일한 그림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깊이를 느끼고, 어떤 사람은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작품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그 작품을 보는 사람의 문제일까요!
과연 깊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을까요?

평론가의 평가 한마디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화가의 모습이 평가받고 평가하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깊이를 가지고 싶어하고 깊이가 있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평가하는 사람의 권위는 막강합니다.
또 반드시 평가하는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평가하는 사람 역시
그 평가가 정당한지 평가 받아야 합니다.
세상 살이는 평가로 시작해서 평가로 끝난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깊이를 강요받고 살아갑니다.
평가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게 세상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이런 세상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는 의도에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또 평가라는 것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를 묻고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단편 '승부'로 이어집니다 .
체스의 고수인 쟝 이라는 사람은 체스(서양장기)의 세계에 있어서 만큼은
대단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 공인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도전하는 한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단편 '승부'는 젊은이의 무모한 도전을 그리고 있습니다.

체스꾼인 쟝 에게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동네 사람들은 새로 나타난 젊은이가
비상한 수를 써서 게임에서 이겨주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이 기대할 만큼 젊은이가 잘합니다.
고수 쟝을 꺽을것 처럼 게임은 전개됩니다.
구경꾼들은 새로운 고수의 등장을 기대하며 숨을 죽입니다.
그러나 젊은 친구는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고 막판에 무참히 깨지고 맙니다.
그 젊은이는 체스에 깊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수에게 도전하고, 무참히 지고 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기 갈길을 갑니다.
그는 왜 그렇게 무모한 도전을 했던 것일까요!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유대 땅에 탄생하셔서 활동하신 예수를 생각하게 됩니다.
당대의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최 고단수들인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 앞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율법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군중들을 몰고 다녔습니다. 그는 군중들에게 메시야로 착각하게
한 죄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달고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의 지배국인 로마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독립하여 다윗 왕국을 재건해줄 것이라 기대를 모았는데
결국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이슬처럼 사라져간 예수로 말하자면 쟝 에게 도전하여
무참히 깨진 그 젊은이에게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작가는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풀어갑니다. 작가는 왜 깊이 있는
체스 고수의 입을 빌어 실제로는 그 고수가 게임에서 진 것이라는 선언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도 그 유대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했다고
쉽게 받아들이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가장 비참한 실패자로 사형당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쥐스킨트가 바라보는 '깊이'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깊이와
그 의미를 달리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쥐스킨트가 바라보기에는 그 고수보다, 체스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던 그 젊은이가 더 깊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바라보는 깊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좀더 구체적인 내용이,
이어지는 단편 '장인 뮈사르의 유언'을 통해 드러납니다.

구두장이 아버지 밑에서 자라, 궁중 보석 세공사로 성공한 장 자크 뮈사르는
어느날 우리 의 세상이 '무자비하게 닫히는 조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원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그는 모든 땅이 조개화 되고 있다는 사실 앞에
놀랍니다. 생명을 자라게 하는 흙이 점점 얇아지고
조개 층이 점점 두꺼워져 이 세상을 점령해 간다는 이야깁니다.

흙과 조개의 승부는 과연 어떻게 귀결될까요!
모든 구경꾼들은 이미 자기들은 조개화 되어 있지만 흙이
조개를 물리치고 그 싸움에서 승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기대에 싸늘한 냉소를 보냅니다.
그것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흙의 깊이가 조개의 깊이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그 젊은이도 체스의 고수를
이겼을 것이며, 그 젊은 화가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는 이야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릇을 비유로 들겠습니다. 그릇의 용도는 비어있는 것입니다.
그릇에 무엇이 담겨져 있으면 이미 그릇이 아닙니다.
그릇에 밥이 가득 담겨 있다면 그릇으로서의 의미는 없어지고 밥으로서 의미만
가집니다. 밥의 깊이가 깊으면 배고픈 사람에게는 좋지만
그릇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무용지물 입니다.

사람을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 라는 존재의 가치가 어디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속에 가득찬 것이 나입니까? 아니면 비워냈을 때 상태가 나입니까?
불교에서는 텅빈충만을 말합니다. 언제나 비워진 상태로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릇보다 내용물에 집착을 합니다.
내용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을 평가합니다. 빈부귀천이 구분되어 버립니다.
누구나 텅빈상태로 왔지만 하나씩 채우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빈자리가 없도록 가득 채우는 순간을 조개화 되었다고 합니다
빈 그릇을 차곡 차곡 채워 가면서 토토리 키재기 하다가
더 이상 빈곳이 없어지면 죽습니다.

과연 무엇이 나입니까! 누구누구의 아들이나 딸 이라는 것.
누구의 남편이나 아내라는 것, 아니면 서울대 학생이라는 것,
유명한 회사의 사장이라는 것, 누구의 아버지라는 것.
또 인정받는 화가나 작가나 시인이라는 것, 이런 것들이 나일 수 있습니까?
이런 것들은 그릇 에 담기는 밥이나 국이나 물 따위에 불과합니다.
밥은 그릇은 아니고, 물도 그릇도 아닙니다.
그릇은 거기 담겨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을 때 비로소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조개화 되어 가고 있다는 쥐스킨트의 지적은 우리 인간들이
나를 잃어버리고, 내 속에 담기는 어떤 것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빈공간이 없어지고 그것들이 가득 차는 날, 나는 조개화 되고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또 지구 역시 인간이 내용물을 가득 채웠을 때,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달과 같은 화석으로 변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승부'에서 젊은이는 아직 조개화가 시작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시작되었더라도 아직 흙의 깊이가 깊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아직 빈 부분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체스의 고수처럼 치밀하게 살지 못합니다.
때로는 무모한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체계적인 사람이 볼때 방황하는 사람이며 책임감도 없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중요한 책임을을 내팽개치기도 합니다. 가정을 버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경합니다.
자신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지만 그렇게 살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부에서 구경꾼들 처럼 무모한 젊은이가 고수를 이겨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정말 절망적이란 말입니까?
인간의 조개화, 지구의 화석화는 필연이란 말입니까?
작가는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로 대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고찰(문학의 건망증)'을 통해 작가는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을 듣고 사람들이 회개할 것인가를 자문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산 누군가가 삶에 대한 깨달음을 적어 놓은
어떤 글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감동 받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글들이 종국에 가서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읽을 때 잠깐 감동은 받을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작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비록 다 잃어버리고 모두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그 내용들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집니다.
마치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져 나와도 콩나물이 자라 나듯이 말입니다.

장인 뮈사르가 유언하는 것도 세상의 조개화를 막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합니다.
그러면서 또 덧붙이기를,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궁지에 몰려
만들어 낸 나태하고 무가치한 위안이라고 해버립니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습니다.
누구의 글이나 누구의 이야기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을 변화 시켜야 한다는것 만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 시켜보려고
힘쓰면서 그래도 전하면 들을 것이라고 하지만사실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만
남아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세상도 조개화 되고 화석화 되고 말 것입니다.

짧은 소설입니다 한번씩 읽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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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olyjoy | 작성시간 04.02.26 이 글은 수국님의 허락을 받은 뒤에 "...칼럼"란으로 옮기려고 남겨둡니다.
  • 작성자수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2.26 카페 주인장님 뜻대로 하십시요.
  • 작성자holyjoy | 작성시간 04.02.26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복된 하루 되시길...
  • 작성자에노스 정 | 작성시간 04.02.27 수국님!~~~ 감사합니다 지당하신 말씀이라 생각이 드는군요 나 자신도 마찬가지며 가족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공감이 생기는 이야기 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에 아집만 들어 낼뿐 이지 다른이들의 이야기는 듣기 싫어항다는 사실을~~~
  • 작성자에노스 정 | 작성시간 04.02.27 그 뿐만 아니라 나에 신앙 생활에도 동일 하지 않을까 싶군요!~~ 까맣눈과 가득찬 궛밥 때문에!~~~~~~~~내 생각에는 하는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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