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설교와 칼럼

오늘도 우리에게 임하소서(성령강림주일)(갈3:1-5)

작성자Horace|작성시간04.05.30|조회수189 목록 댓글 3

양무리교회주일설교(성령강림주일)                                  30/05/2004

 

                오늘도 우리에게 임하소서!(갈3:1-5, 찬송175,178장)

 

  칼럼을 통해서 ‘천년왕국’이 오순절날의 ‘성령강림’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바로 지금 이 시대에도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강림과 성령의 임재는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그 통치 아래에 들어가며 그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오늘 설교에서 저의 회심의 과정 중에서 있었던 성경적인 검토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나눌까 합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 혹은 영생이 있다, 죽어서 천국간다는 것을 과연 확신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봅시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건방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죽어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로마천주교회의 입장입니다. 평생토록 이런 확신을 가질 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한1서5장13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언제 알게 된다고 합니까? 죽어서입니까? 참으로 “건방지게도” 살아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의 생전에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영생이 있는 것을 안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물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천국”, “하나님나라”, “천년왕국”에 “앞으로” 들어가는 것만 아니고, “바로 지금”에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천년왕국의 통치 하”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과 연결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사도 요한에 의하면, 요한일서가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의 논지와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윗구절을 보십시오(11,12절). 그것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또 증거가 이것이니” 무엇이 그 증거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11절)라면서 12절에서 그것을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고 합니다. 아들 곧 예수님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 영생, 곧 하나님의 나라, 천년왕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분에게 “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도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있고, 천년왕국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흐음….아멘이라고 하긴 하는데, 지금 저의 분위기를 보고 아멘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멘이라고 하고 있군요. 혹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심정적으로는 “그래도 안믿어지는데….내 안에 있다는 그 영생이, 그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체험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믿으란 얘기지?” 이렇게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런 질문이야말로 정상적입니다. 그렇게 질문을 해야 합니다.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따라 오셔야 합니다. 거짓말 하는 지 아닌 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미혹의 영을 따라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이런 얘기를 하면서 실제로 미혹의 영을 따라서 할 때가 있다는 것조차도 알아야 합니다.

 

  하여튼, “예수가 있다”는 말의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믿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겠습니까?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예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믿는 주관적인 믿음과 사실 내 안에 예수가 계시다는 진짜 믿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게 되면, 나의 심리적인 확신에 의한 예수의 내주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생각과 관념으로 모든 고통의 문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불교와는 기독교복음이 차이가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답해 주는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로마서8장9절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나의 심리적인 확신에 의해서 예수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가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령의 오심과 내주하심”은  예수의 내주하심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성령님께서 오셨다는 것, 그리고 내주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렇게 내주한다는 성령이 진짜 성령이 아니고 가짜 성령, 혹은 악령이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지요? 그렇게 스스로를 속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직면하게 될 때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 바로 바울의 다른 서신, 곧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3장2절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나 듣고 믿음으로냐” 곧 어떻게 성령을 받은 것이 진짜 성령이냐는 것입니까? 율법의 어떤 행위, 어떤 의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바로 “믿음”에 의해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많은 구절들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줍니다.

 

 잠깐만요! 목사님! 앞에서, 그 “믿음”이란 것이 진짜인 지 아닌 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했쟎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을 저 자신이 이 문제를 두고 씨름하게 될 때 던졌더랬습니다. 문제는 “어떤”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의 개념이 도대체 어떤 개념이냐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요? 갈라디아서를 모두 읽어보면서 일일이 그 개념들을 살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구절이 바로 2장20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를 단순히 믿는다는 믿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믿음입니다. 그럴 때에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바로 이 믿음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믿음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이런 믿음,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5장2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곧 그리스도와 함께 그 모든 것들을 못박았다는 것입니다. 못박아도 아직 그 십자가상에서 나의 정과 욕심이 꿈틀거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못박는 결정적인 그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참된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아 그런 순간이 옵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지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으로만 가능하지요.

 

   바로 이런 못박음이 있었습니까? 구체적인 과정들은 저의 회심이야기나 청교도들의 회심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나의 못박음과 더불어서, “성령님이 나 개인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성령님의 오심과 함께입니다. 우리의 일생에 한 번 있게 되는 이 성령님의 오심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말합니다. 이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예수님의 현존이 체험되어지고, 그로 인하여 통치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여집니다. 천년왕국이 우리 가운데서 임하여서 그 통치를 시작하는 것입니다(이런 과정을 또한 “언약을 맺는다”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령의 오심을 경험한 사람은, 계속적으로 그 오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표현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가운데서 불일 듯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활용되어집니다. 병고침의 역사도, 방언의 터져나옴도 있곤 합니다. 혹은 봉사의 영역이 확대됩니다.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사회와 민족을 위한 봉사와 활동에 대한 소명을 받기도 합니다. 물질로부터 자유해 집니다. 자신의 소유욕에 집착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어놓고 그 나라와 그 뜻을 먼저 구하게 됩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물이 터져나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역사와 더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귀자녀 되었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없으면, 그 어떤 은사도 무의미합니다. 이 사건에 기초해서, 어떤 봉사라도 가능해지고 또한 의미가 있어집니다. 비록 우리 가운에서 여전히 우리의 죄성이 꿈틀거리는 일이 있고, 사단이 지금 “만국을 미혹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를 미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여전히 미혹의 때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사단이 “잠시” 놓임을 받아서 “만국”까지 다시 미혹할 때, 곧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단숭배와 이교숭배를 공공연히 자행할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때를 바라보면서, 성령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지금을 살아야 할 지, 그것이 바로 이렇게 성령강림주일을 맞으면서 되돌아보는 이유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이것을 추구하고 체험하고 증거하는 “새생명공동체”- 우리 양무리교회의 표어이고 목표입니다. 이것만이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런 소망이 우리 가운데에 더욱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한우리 | 작성시간 04.05.30 무천년설을 통천년설로 보는게 더 타당한 표현이라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하나만 목사님의 도움을 받고 싶은게 있어서 여쭙니다. 계20:1-3절부분의 천년동안 결박된 마귀가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한다는 이 부분의 주석을 부탁합니다. 저도 소위 무천년주의자이지만 시원하게 이 부분을 설명해놓은 분들이 없어서..
  • 작성자한우리 | 작성시간 04.05.30 포이스레스같은 분은 계시록자체를 나선형구조로 보아서 순서가 썩여 있다고 하지만 문맥적으로 볼 때 19장20장21장22장은 왔다 갔다 하는 구조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직선상의 구조임에 분명해보입니다. 무천년설은 이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보여지는데 제가 총신신대원다닐때 서철원교수에게 질문해도 여기에
  • 작성자한우리 | 작성시간 04.05.30 대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전천년주의자였다가 웨스트민스트에서 공부한 후 무천년주의자가 된 총신의 권성수교수 같은 분도 포이스레스의 책만 추천했을 뿐 이부분에서 명쾌한 설명이 안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목사님에게 시원한 해답을 얻는 기쁨을 기대하면서....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