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5장
=====5:1
저자는 본절에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 직무의 세 가지 특징을 언급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서 선택된 자여야 한다. 그래야만 백성들의 입장과 처지를 잘 이해하고 그들을 대표
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Bruce, Morris).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 대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중재하는 중보자(中保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Hewitt, Lane).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 대제사장은 중보자적 역할을 이루기 위하
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는 대속죄일과 연
관된 것으로서, 대제사장은 1년에 한차례씩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 자신을 포함한
온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다(레16장). 본절의 '예물'(* , 도라)은 대
속죄일에 드렸던 '소제물'을 뜻하는 말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충성을 나타내는 밀가루,
감람유, 유향, 무교병(無교餠)등을 가리킨다(레2:1-16). 또한 '속죄하는 제사'는 번
제물을 가리킨다. 번제에 드리는 제물은 흠 없는 수소, 수염소, 수양, 비둘기 등으로
서(레1:3-17) 화제를 통하여 이런 번제물을 드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대속받
으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다짐하였다(레1:3-17).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
니라 - 본절은 대제사장에 대한 설명이다. 대제사장은 타인의 무지와 미혹을 용납할
수 있는 자이다. '무식하고'의 헬라어 '아그노우신'(* )은 '알지 못하다'
혹은 '모르고 죄를 짓다'라는 의미이며 '미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노메노이스'
(* )는 '잘못 인도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10:26의 '짐짓'(*
, 헤쿠시오스) 즉 의도적으로 범죄하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로 모르고 짓는 우
발적인 죄를 시사한다(Robertson). 한편 '용납 할 수 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
리오파데인'(* )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특성인 '체휼하지 아니하시
는'의 헬라어 '메 뒤나메논 쉼파데사이'(* )와는 다르다
(4:15). '메트리오파데인'은 철학적인 용어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거나 자제하여 다
른 사람을 친절하고 사려깊게 대하는 것을 뜻한다(Yarnold, Lane). 대제사장은 이러
한 성품으로 무지나 실수로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동정을 베풀어 용납하였으나(9:7;레
4:2,13,22,27;5:2-4), 의도적으로 범죄한 자는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제외시켰다(민
15:30,31). 대제사장이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동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서 범죄할 수 있는 '연약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5: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
땅하니라 -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으며, 또한 일반 제사장들
보다 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으나(출28: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죄지
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은 대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 대비하여 속죄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해 놓았다(레4:3-12;9:7).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일반
회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직계 권속을 위하여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행하는 제사 중에 드리는 기도는 세가지이다(Lane). (1)자신과 자기 가족의 죄를 위
하여(m.Yoma 3:8). (2)아론계통의 제사장들의 죄를 위하여(m.Yoma 4:2). (3)이스라
엘 백성의 죄를 위하여(m.Yoma 6:2). 구약시대 대제사장에 대하여는 4:15에서 예수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죄는 없으시니라'(* , 코리스 하마르티아스)고
주장할 수 없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과 그리스도의 차이는 바로 '죄 있음'과 '죄 없
음'에 있었다(Stewart).
=====5: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 대제사장의 직분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은 하
나님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직분이 세습되었다(출28:1;민3:10;18:1).
아론 집안 외의 사람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될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직접 부르셨
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직분을 업적이나 성품 혹은 물질에 의해서 획득할 수 없는,
타인과 동등한 연약한 존재이며(Lane, Vanhoye)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임명
(任命)된 존재이다.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
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 저자
는 앞에서 모세와 예수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모세와 예수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서
유사성이 있었으나(3:1-2), 우월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음을 논증하였다(3:3-6). 같
은 방법으로 본절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아론과 그리스도가 비교되고 있다. 양자는
스스로 대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점에
서 유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우월하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거하기 위해 시2:7
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하늘의 특권을 지닌 자이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
당하신 존재임을 제시한다. 한편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라는 이름 대신에 '그리스
도'(* , 호 크리스토스) 즉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
님으로부터 부름받은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Morris, Lane).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라 하셨으니 - 저자는 앞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기 위해 시110:4을 인용하고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
를 좇는'의 헬라어 '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 )은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시라는 의미이
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Morris, Moffatt,
Hewitt).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은 다음과 같은 유사성을 지닌다.
+---------------------------------------+--------------------------------------+
| 그 리 스 도 | 멜 기 세 덱 |
+---------------------------------------+--------------------------------------+
|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음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
| (요8:58;계1:4) |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음(7:3) |
+---------------------------------------+--------------------------------------+
| 대제사장이시며 만왕의 왕이심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면서 |
| (계19:16) | 살렘 왕임(7:1;창14:18) |
+---------------------------------------+--------------------------------------+
| 생명의 떡과 포도주로 예표되는 자신의 | 아브라함에서 떡과 포도주를 줌 |
| 몸과 피를 인류의 대속물로 주심 | (창14:18) |
| (마26:26-29) | |
+---------------------------------------+--------------------------------------+
|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레위 지파를 좇는 | 레위 지파 이전의 인물로 지극히 높으신|
| 제사장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 하나님의 제사장이 됨(7:1) |
| 제사장이 되심(5절) | |
+---------------------------------------+--------------------------------------+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제
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존재임을 논증하고 있다. 아론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
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제사장
이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로서 훨씬 더 우월하시다(Bruce).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 본절은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음을 시사한다(2:14-18).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코스'(*
)는 '살'을 뜻하는 말로서 '영'과 반대되는 물질적인 육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셨으며 인간이 느끼고 당하는 감정이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시는 대제사장이심을 시사한다(4:15, Bruce).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본 구절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 중 겟세마네에서 드린 고뇌에 찬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나(눅22:39-46, Bruce, Robertson, Hewitt) 예수
의 지상 사역 중 어느 특정한 순간에 적용시키기 보다는 그의 대제사장적인 사역 전체
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Lane, Maurer, Morris). 한편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에서 '올렸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세넹카스'(* )는 희생 제물을
'바치다'라는 의미의 제의적(祭儀的) 용어이다(Maurer). 이것은 1절에서 언급된 대제
사장의 제사와 평행을 이룬다. 대제사장이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물'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올린 '간구와 소원'을 의미한다(Rasco).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 '경외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라베이아스'(*
)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1)혹자는 '두려움'으로 해석하여 그리스
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Morris). 예수는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느끼셨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
나님의 계획에 순복하셨다. (2)혹자는 '율라베이아스'가 '잘'에 해당하는 접두사
'유'(* )와 '붙들다'는 뜻의 헬라어 '람바노'(* )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낸다고 한다(Robertson).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본문은 시22:24의 '부르짖을 때 들으셨도다'와 상응된다.
이것의 일례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을 들 때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막14:36)라는 예수의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고난의 잔을 옮기는 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으
므로(막14:32-36)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수의 기도를 받아들
이셨다(Boman, Rissi, Maurer). 이 사실을 저자가 본절에서 밝히는 이유는 아론 계통
의 대제사장의 제사가 항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닌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받아들여졌음
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Lane). 한편 본문은 앞에서 언급된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
실'과 연결된다. '죽음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다나투'(* )는
예수께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예수를 지배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활을 통해 죽음의 영역을 극복하셨음을 시사한다(Vos, Fri-
edrich).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이시므로 고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시다(Morri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마덴 아
프 혼 에파덴'(* )은 헬라문학에서 오랫동안 쓰어진 관용구로서
'배우다'의 헬라어 동사어근 '마드'(* )와 '고난받다'의 동사어근 '파드'(* )
는 음성학적으로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수사학적인 효과를 위해 자주 함께 사용되었
다(Lane). 수사학적 관용구가 적용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는 표현은 예수
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
종하였으며 순종의 과정 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Bruce, Morris).
본절에서 사용된 '고난받다'의 헬라어 '에파덴'(* )은 '파스코'(* )의 부
정 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본서에서 오직 '예수의 수난'에만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
의 죽음을 암시한다.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 본절은 고난받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본질이 불완전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온전케 되셨음을 뜻한다(Lane, Hewitt, Meeter, Morris). 예수께서는 고난을 통해 구
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그의 백성의 대제사장으로 완전하다는 인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Klappert, Hewitt).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그리스도께서는 온전
케 되신 결과로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본절의 '순
종'은 앞절에 언급된 예수 자신이 행하신 '순종' 즉 죽음의 고난을 받기까지 행한 철
저한 복종을 의미한다(Lane).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한 것
과 같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그러한 순종을 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의 헬라어 '아
이오니우'(* )는 '끝없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
에게 주시는 구원은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참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참하늘에 속한 것임을 암시한다(Morris, Williamson).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온전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
는 대제사장'이라는 칭하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
장'이라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6절) 그리스
도께서 율법하에 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다른 약속의 은혜에 의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시사한다(Hewitt).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 '멜기세덱에 관하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페리 후'(* )로서 헬라어 '멜기세덱'이라는 명칭이 직접 거명되지
않고 관계대명사 '후'(* )로 나타난다. '후'의 성(性)에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
능하다. (1)'후'는 남성으로 10절의 멜기세덱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Robertson,
Bruce, Morris). (2)'후'는 중성으로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대제사장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Lane, Hewitt). 전자의 경우는 멜기세덱에 관하여 일반적인 유대 개념과
는 다른 관점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저자가 7:1-28에서 그것을 논하기에 앞서 본절을
통해 수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Robertson). 후자의 경우는 저자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납득할 만한 이해력이 수신자들에게 결핍
되어 있음을 수신자들에게 주지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Hewitt). 한편 '할 말이 많으
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뤼스 호 로고스'(* )는 헬라 문학의 관용구
로서, 다루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사용되었다(Lane).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 '둔하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드로이'(* )는 부정어 '네'(* )와 '멀다'라는 뜻의 '호데오'(* )의
합성어로서 '듣는 것에 무관심한' 혹은 '이해력이 부족한'을 뜻한다. 혹자는 본절을
앞 문단의 결말로 보아 '듣는 것이 둔하다'는 말은 9절에서 언급된 '자기를 순종하는'
즉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는 저자의 말을 수신자들이 충분히 깨닫지
못함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Lane, Morris).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 '때가 오래므로'는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되었음을 의미한다(Morris). 본절은 수신자들의 신앙이 성숙
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만큼(롬2:2;벧전3:15) 신앙의 연조(年條)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한다.
말씀의 초보 - 이 말의 헬라어 '테스 아르케스 톤 로기온'(* )
에서 '로기온'은 '로고스'(* , '말씀')의 지소어(指小語)로 단순히 말씀 자체
를 의미한다(Hewitt).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기초적인 진리를 시사하는 것
으로, 본절은 수신자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지식도 결핍되어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함을 나타낸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 '젖'(* , 갈라크토
스)과 '단단한 식물'(* , 스테레아스 트로페스)은 헬라 윤리학(倫理
學)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비유로서(Bruce, Lane), 헬라 윤리학에서는 아직 기초
단계에 있는 자들을 '우유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에 비유하며 성숙한 단계에 이른
자들을 '단단한 음식을 즐기는 어른'에 비유한다(고전3:1-3, Williamson). 저자는 본
비유를 통해서 수신자들이 오랜 신앙의 연륜에 걸맞는 성장을 이루지 못한 사실을 안
타까이 여겨 그들을 책망하며 권면하고 있다.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경험하지 못한 자요 - 저자는 본절에서 '젖을 먹는 자'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한다.
어린아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피오스'(* )는 '유아'를 의미하는 것
으로 올바른 언어를 구사하거나 정상적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결핍된 상태나
(Riggenbach, Schrenk) 옳은 것을 분별하는 도덕적인 기준이나 '의'에 관향 원리에 대
해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Robinson, Spicq, Owen).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 '의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는 신자들의 올바른 삶으로서의 '의'를 의미하며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신
자들의 '의'가 된다는 측면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의미한다(Hughes). 젖을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
로서 영위해야 하는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
=====5:14
단단한 식물은...분변하는 자들이니라 - '단단한 식물'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대제
사장직에 대한 말씀으로(7:1-10:18) 초신자들과 같이 어린아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
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진리를 가리킨다(Lane).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자에 대해 저
자는 본절에서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장성한 자 -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어린아이'에 비해(고전3:1;13:11) 상대적으
로 온전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를
시사한다.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 '지각'에 해
당하는 헬라어 '아이스데테리아'(* )는 스토아 학파(Stoics)에서 '감각 기
관'을 가리키던 말로(Robertson) 본절에서는 도덕적인 분별력을 넘어 영적인 분별 기
능을 뜻한다(Michel, Morris). 한편 '연단을 받아'의 헬라어 '게귐나스메나'(*
)는 '귐나조'(* , '훈련하다')의 완료 수동 분사로 끊임없이 훈
련을 받는 상태를 나타낸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훈련과 진리를 통해 성숙한 영
적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며 그 분별력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여 범죄치 않으며 하나
님이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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