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개업> 대표곡을 들으며 찾아가는 대음악가들의 발자취-<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을 들으면서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5.05.14조회수733 목록 댓글 2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 1악장>, 2악장과 3악장은 맨밑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애독자 여러분들께!
이제 다시 음악가들 얘기로 긴 여행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사실 이 시리즈(대음악가들의 발자취를 찾아서)는 제가 광주 근무시절에 연재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용두열 홈페이지가 적을 두고 있었던 프리첼이 폐쇄되면서 이 시리즈 대부분을 이곳 다음 카페에 미처 옮겨싣지 못해 사장되어 버렸습니다.
이후 다시 복원하려고 했으나 본인의 저장자료를 광주에서 올라올 때 챙기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올리는 글은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글도 더욱 보완하고, 사진과 음악도 한층 새롭게 단장하여 올릴 예정이니 기대에 부응하리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이미 이곳에 올라가 있는 포스터,차이코프스키,드보르작,그리그,나폴리 민요,아일랜드 민요(대니 보이)를 제외한 22편 정도를 올릴 예정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특히 한국일보 주불 특파원이었던 김성우 대기자님의 <세계의 음악기행>과 이동활 님의 <올댓 클래식>을 많이 참고했음을 밝혀둡니다.
[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 ]
'모든 음악은 바흐로부터 시작된다'라고 합니다. 현대 음악의 근원은 바흐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무인 우주선 보이저호가 외계인에 보내는 인류의 메시지를 싣고 간 것이 바흐의 음악이었습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일생을 그가 태어난 독일 땅에서 벗어난 일이 없고 잠시 여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튀링겐의 고향 부근에서 평생을 지냈습니다. 베를린에서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까지는 고속도로가 나 있습니다.
아이제나흐는 튀링겐 지방의 광산촌으로 광대한 튀링겐 숲의 북단 가까이에 있습니다. 인구 5만. 시내에 들어서니 빨간 지붕의 건물들 사이사이로 나무들이 무성한 푸른 도시입니다.
* 바흐의 생가(기념관)
바흐의 생가는 시가지 중심부 부근인 프라우엔플란 광장 가에 있습니다. 노란 벽의 2층짜리 건물 앞에는 관광객들이 쉴새없이 모여들어 줄을 섭니다. 생가 옆. 광장의 한쪽 끝에는 바흐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손에 깃털 펜을 든 입상(立像)은 1884년 바흐가 세례를 받은 성(聖) 게오르겐 교회 앞에 세워졌던 것인데 1938년에 생가 곁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동상을 세울 때는 리스트, 지휘자 뷜로,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 등이 모금 운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생가는 17세기 때 지어진 건물로 1907년부터 바흐 기념관이 되었습니다. 바흐의 손때 묻은 것은 물론 남은 것이 없으나 그 시대 중류 가정의 생활 조건에 맞는 살림 도구들을 모아 당시 분위기를 재현시키고 바흐의 일생과 작품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기념관 내부
아래층 입구의 하프시코드, 비올라, 다감비 등 당시의 악기들이 진열된 홀에서는 관광객들을 의자에 앉혀놓고 시대별로 바흐의 음악을 들려주며 안내인이 그의 일생을 설명합니다. 음악은 젊은 시절의 작품인 <토카타 d단조>에서 시작하여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 합창장으로 있을 후기의 작품인 <마태 수난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끝납니다.
전시실에는 바흐에 대한 여러 사람의 찬사들이 걸려있고 그 중에는 슈만의 것도 보입니다.
"우리가 대할 때마다 새롭게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다."
바흐의 음악은 들으면 들을수록 새 맛이 나고 안이 깊어 닿는 데가 없습니다. 그의 음악은 여러 가지 해석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있어서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고 몇 번을 들어도 지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300년이 넘은 음악이 지금도 젊습니다. 그 발원지가 이 단촐한 고옥이었습니다.
바흐가 태어나자 세레를 받은 성 게오르겐 교회는 지금도 그때의 세례반(洗禮盤)이 그대로인채 건재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커다란 바흐의 석상(石像)이 서서 방문객들을 맞습니다.
* 성 게오르겐 교회
바흐가 어릴 때 다니던 성 게오르겐 교회 부속의 라틴어 학교는 현재 김나지움이 되어있고 입구에 '바흐가 1692년부터 1695년까지 여기서 배웠다'라는 명판(名板)이 걸려 있습니다. 이 학교는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다닌 곳이기도 합니다. 아이제나흐는 루터가 청년 시대를 보낸 동네여서 그의 동상과 기념관이 따로 있습니다.
*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흐 동상
아이제나흐는 저만치 산마루에 우뚝한 고성(古城)이 유명합니다. 중세 때 연애 시인들이 노래 솜씨를 겨루었다는 바르트부르크 성(城)입니다. 바그너의 가극 <탄호이저>의 무대가 바로 여기입니다. 기사(騎士)이자 연애 시인이었던 탄호이저는 실재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성까지는 주차장에서 숲 사잇길을 10분 가량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성 안에는 노래 시합을 하던 방이 남아있고 벽에는 시합 장면을 그린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탄호이저>에서 엘리자베트가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 <노래의 전당>이 귀에 선해집니다.
* 바르트부르크 성
다른 한쪽에 있는 것이 루터의 방. 루터가 1521년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는 곳입니다. 돌바닥에 책상이 하나. 그 위에 커다란 성서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성의 탑에 오르면 아이제나흐 시가지가 한눈에 조망되고 반대편은 넓은 녹림의 수해(樹海)입니다.
바흐는 어려서 양친을 잃어 10세 때 형이 있던 오르드루프로 가면서 고향 아이제나흐를 영원히 떠납니다. 이 아이제나흐가 현대 서양 음악의 본관(本貫)이 될 줄이야. 이 때부터의 족적을 따라 바흐 순례를 해 보면 모두 200km 미만의 반경입니다.
바이마르에서 동북쪽으로 120km의 괴텐. 32세 때인 1717년부터 6년 동안 궁정 악장으로 일하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등 많은 작품을 쓴 곳인데 정확한 집 자리는 불분명한 채 바흐 광장에 그의 흉상이 서 있습니다.
38세가 되던 1723년 바흐는 괴텐을 떠나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 합창장으로 취임합니다. 이 때부터 65세로 죽을 때까지 27년 간을 이 교회에서 지내며 <마태 수난곡> 등 그의 불멸의 교회 음악 대부분을 낳게 됩니다.
* 성 토마스 교회
라이프치히는 오랜 전통의 상품 견본시(見本市)로 널리 알려진 상업 도시이자 독일 최고(最古)의 대학으로 괴테, 니체 등을 배출한 라이프치히 대학이 명물인 곳이지만, 음악적으로는 세계 최고(最古)의 민간 연주 단체인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이 유명하고 게다가 바그너가 태어난 곳이고 멘델스존이 죽은 곳이고 슈만이 결혼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흐의 영광이 있어 라이프치히입니다. 그래서 흔히 라이프치히를 '바흐 슈타트(바흐의 도시)'라고 부릅니다.
라이프치히는 독일 통일 전에는 동독 제2의 도시여서 거리에 인파가 흘러 넘치는 활력과 잡답(雜沓)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크게 파괴되어 구(舊) 시청 청사가 있는 마르크트 플라츠(시장 광장) 주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새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 라이프치히 시청
바흐가 후반생을 바쳐 위업을 이룩하게 되는 성 토마스 교회는 다행히 전화(戰禍)에서 살아 남았습니다. 이 서양 음악의 기념비적 건물을 전쟁이 마저 쓸어 갔으면 인류의 음악사(音樂史)는 허전할 뻔했습니다.
시장 광장에 등 쪽을 돌리고 그 한쪽 끝에 이 교회가 서 있습니다. 1946년에 세워져 한때 마르틴 루터가 연설을 한 적도 있는 키 큰 건물입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바흐의 대해(大海)같은 음악이 온 교회 안에 그득 차서 그 심해(深海) 바닥에 선 듯한 느낌이 듭니다.
바흐의 음악은 인간혼(人間魂)의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귀향(歸鄕) 같은 감회가 서립니다. 창조력의 절정기에 있던 바흐는 이 교회 부속학교의 합창장으로서 학교에서는 매주 일요일 새로운 칸타타를 내놓고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축제일을 위한 음악, 성(聖) 금요일을 위한 수난곡(受難曲), 결혼이나 장례를 위한 예식 음악, 시(市)의 행사를 위한 축전 음악 등을 거의 매일 일기(日記)처럼 써 냈습니다.
이 교회가 아니었으면 바흐의 음악은 달랐을 것이고, 그랬으면 오늘의 바흐가 있었을 것인가요. 이 교회는 가히 현대 음악의 신전(神殿)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제단을 면한 2층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그 주위에는 50~60명의 합창단과 30명 정도의 오케스트라가 들어설 계단식 공간이 있습니다. 바흐는 이 오르간이 마음에 들어 많은 작품을 쓰게 됐습니다.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대 작품은 265곡이나 됩니다.
제단 중앙의 바닥에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라고 새긴 동판이 깔려 있습니다. 그 아래가 바흐의 무덤입니다. 바흐는 죽은 후 성 요한 교회에 묻혔으나 2차 대전 때 이 교회가 파괴되자 1950년 성 토마스 교회로 이장했습니다. 죽은 지 200년 만에 옛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 바흐의 무덤
교회를 나서면 옆쪽 벽가에 커다란 바흐의 동상이 눈에 뜁니다. 1908년 카를 세프너라는 조각가가 만든 것입니다.
* 교회 앞의 바흐 동상
교회에서 길 건너 바로 옆이 보제 하우스라 하여 바흐가 살던 집입니다. 건물은 많이 달라지고 19세기 말에는 한때 음악사(音樂史) 박물관이 들어서기도 했는데, 1985년 바흐의 300주년 생일을 맞아 집을 바흐 시대때로 보수하여 새로 바흐 기념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딴 데 있던 바흐 기록 보관소도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교회 앞은 넓은 잔디밭이고 그 한쪽 가 나무 그늘을 유심히 살피면 또 다른 바흐 기념물이 서 있습니다. 멘델스존이 1843년에 세운 것으로 바흐에 대한 기념물로는 최초의 것입니다. 멘델스존은 바흐를 발굴, 재생시켜 오늘의 바흐로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초연 이후 100년만에 연주했던 현대화된 게반트 하우스
바흐는 생존 중 오르가니스트로서는 인정을 받았으나 작곡가로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아 그가 죽자 거의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1829년 약관 20세이던 멘델스존은 베를린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이 곡이 초연된 이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휘, 연주했고 이로써 바흐는 부활했습니다.
버려졌던 곡 하나가 건져짐으로써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작곡가 바그너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일컬어 음악사를 통 털어 가장 놀라운 기적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그가 남긴 업적과 후대에 미친 영향이 크기에 아무도 그와 견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것이 너무나 크고 높아 도저히 한 사람이 이루어낸 것이라고 믿기 힘들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 라이프치히의 바흐 기념관
당장 그가 남긴 작품의 수와 양만 놓고 보더라도 이 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로 ‘바흐(Bach)'는 ‘시냇물’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두고 베토벤은 “시냇물(Bach)이 아니라 바다(Meer)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흐협회가 그가 남긴 작품을 모아 60권으로 출판하기까지 46년이 걸렸고 그렇게 정리된 작품의 수만 헤아려도 천곡이 넘지만 버려지고 잊혀져서 찾을 수 없는 작품들이 얼마인지는 도저히 가늠할 수조차 없으니 실제로 그가 작곡한 작품의 수와 양을 추정한다면 실로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라이프치히가 보이는 독일 지도, 아이제나흐는 라이프치히에서 카셀 방향으로
가면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스승이었던 첼터는 친구이자 대문호인 궤테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창공처럼 항상 존재하나 붙잡을 수 없다네. 바흐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 해당하네. 그는 교회 봉사자로서 오직 교회를 위해 작곡했지만 사람들이 교회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곡하지 않았다네. ...바흐 음악의 근본 요소는 고독이라네. ...그렇게 그는 고독을 느끼고 마르지 않는 강이 무한한 대양으로 흘러들어 갈 때까지 서서히 파고 들어온다네....이 라이프치히 성가대의 지휘자 겸 오르간 연주자는 신의 출현이네. 분명히, 그럼에도 설명할 수 없는...”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이야기 ]
견실한 조형! 격조높은 표현! 바로크 시대의 원만한 온기가 느껴지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흔히 바흐의 탐구 정신이 이루어낸 바로크 시대 협주곡의 집대성으로 불리웁니다. 다양한 형식과 절묘한 감각, 신선미가 아주 옛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예술적인 미는 시대를 초월합니다. 우아함과 약동하는 밝음으로 다가오는 역작입니다.
바흐는 34세 때이던 1719년 쾨텐의 리오폴드 공의 궁전에서 악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레오폴드 공의 베를린 순방길에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브란덴부르크의 루드비히 공 앞에서 연주할 시간이 있었는데 루드비히 공에게 큰 찬사를 받았음은 물론 자신의 궁정 악단을 위한 작품 의뢰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바흐는 36세 때이던 1721년에 재차 독촉을 받을 때까지도 아무런 곡도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해 5월, 그동안 쾨텐 궁정 악단의 연주를 위해 쓰인 것 가운데 특별히 뛰어난 작품을 선별해 헌정문을 곁들여 한데 묶어 보내주는데, 그것이 오늘날 6곡으로 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입니다.
그런데 당시 브란덴부르크에는 소규모 악단만이 있을 뿐 이만한 편성의 곡을 연주할 악단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습니다. 루드비히 공이 죽은 뒤 그의 악단이 해산되었을 때, 바흐의 자필로 된 이 곡집도 자칫하면 없어질 뻔했습니다. 다행히도 바흐의 제자였던 키른베르거의 손에 들어가 훗날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 2,3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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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류영철 작성시간 15.05.15 전 시리즈가 참 재미 있고 유익했었는데, 어느새 마지막회였다니 참 아쉽습니다.
그리고 새 시리즈가 드디어 첫 발을 내 딛었으니, 자못 기대가 됩니다. 항상 좋은 음악과 흥미로운 일화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셔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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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블라디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5.15 류대감! 그동안 보내준 성원 감사합니다. 이제 또다시 보내줄 관심과
응원이 기대됩니다. 이래서 글 쓸 맛이 더욱 나는 것 아닌가 합니다. 그
동안 영화니 문학이니 해서 잠깐 외도를 했는데 역시 용음회는 음악얘기
가 제격이 아닌가 합니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요. Have a Good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