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성품에 대한 일화
원광대학교 박윤철 교수
1916년 4월 소태산 박중빈 선생의 깨달음을 계기로, 1924년 6월에 전북 익산에서 창립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는 원불교의 옛 이름이다. 불법연구회는 당초 소태산을 중심으로 풀뿌리 민중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였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을 비롯한 물적 토대들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불법연구회 회원들은 초창기부터 금주단연, 공동노동, 허례폐지 등을 실천하며 저축조합 운동을 벌이고,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일구며, 낮으로는 일하고 밤으로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실천하면서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한편, 일제의 식민지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정신개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불법연구회의 운동은 결코 순탄하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1932년 봄, 그러니까 불법연구회가 창립된 지 8년 째 되던 해에 연구회는 중대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중대한 난관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 숨 막히던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본년(1932) 정기총회를 대신한 제 8회 평의원회 석상에서 모모 간부의 생활보장 여부의 건을 토의할 새, 사정은 대단히 난처하였다. 생활을 보장하여 주자면 회(會)의 예산이 부족하고, 생활을 보장치 아니하여 주자면, 그들 사가(私家) 생활이 막연하여 그들을 회중에서 내놓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으며, 그들을 내어 놓는다면 회중 사업은 운전할 수 없는 난경에 빠지게 될 가위 진퇴유곡의 경계이었다. 그리하여 평의원 이하 일반은 용이한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장내는 침묵한 그대로 일분 이분을 경과할 그 찰나, 덕의심(德義心)이 무비한 예의 이공주(李共珠) 선생은 정중하고 쾌활하고 또 선명하게도 그 생활을 자기의 절약 절검으로써 독단 보장할 것을 선언하였다. 때에 장내는 마치 깊은 함정에서 살아 올라온 것 같은 환희와 안심의 빛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 돌고, 이어서 감사를 표시하는 박수소리가 요란하였다.
이 때에 회장(會場) 서쪽 편에 좌정하였던 종사주(宗師主; 소태산 박중빈 선생에 대한 당시의 호칭)께서는 존안에 처연한 빛을 띄우시고 감개 깊으신 어조로,「내가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1924년)에 동지 몇 사람인 그들과 영광(靈光)에서 부안(扶安), 부안으로부터 익산(益山)에 나올 때는 우리의 정신과 몸까지 희생하여서라도 일체 인류에게 이익됨을 끼쳐 주자고 굳게 맹세하였더니, 아 세상일이라는 것은 과연 뜻과 같이 되지 못하는 것이로구나. 남에게 이익됨을 끼쳐 준 것은 아직 없고, 도리어 각 방면으로 소소(小小)한 생활까지 남의 의뢰를 받게 되니 이 어찌 우리의 본뜻이랴」하시고 성안에는 눈물의 흔적이 나타나시었다.” (불법연구회 기관지,『월말통신』35호, 1932년 4월호)
위의 내용에는 불법연구회라는 공동체가 해체될 지도 모르는 절박한 순간에도 “일체 인류에게 이익을 끼쳐주는 길”을 고민하고 있는 소태산 대종사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이른바 공익으로의 길이 좌절될까 안타까워 눈물 흘리는 한 종교지도자의 고뇌가 절실하게 전달되어 온다. 소태산은 평생토록 아끼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공도(公道)의 주인, 즉 공익을 실현하는 주인공이 될 것을 강조하였고, 스스로 그 모범을 보였다.
“자신의 정신과 몸까지 희생해서라도” 일체 인류에게 이익됨을 끼쳐주는 일은 보통 사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개인주의로 가득 찬 오늘날, 타인의 이로움을 자신의 이로움으로 삼으며,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소태산은 개인의 이익이나 불법연구회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 일체 인류의 이익을 우선시하였다. 이러한 소태산의 삶과 실천에 대해 9인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던 김광선(金光旋)은 선생님께 늘 배우고자 하나 능히 다 배우지 못하는 것이 바로 ‘순일무사한 공심(公心)’이라 했다.
근대 시민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공공(公共)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면서 공(公)과 사(私)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새로운 차원에서 공공(公共)철학이 확립되는 시대라는 점이다. 소태산 선생과 같은 멸사봉공(滅私奉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의 시대, 바로 그런 시대가 성숙한 시민사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모 자치단체장 부인의 부적절한 처신은 아직도 공공의 철학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낸 부끄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신문 2006년 4월 15일(토요일)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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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원무 작성시간 11.01.05 아침에 이 글을 읽으면서 대종사님의 당시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지장님 감사합니다. 제가 이공주 종사님을 모시고 8년 경을 살았는데
종사님도 대종사님 말씀을 하실때는 종종 눈가에 이슬이 맺히시곤 하셨습니다. 합장공경!!! -
작성자정성권 작성시간 11.01.05 예전에 이 예화를 보았을 때 대종사님께선 새시대 새부처님이심을 거듭 느꼈었습니다.
오늘 다시 보아도 그 감동은 여전합니다.^^
그 분의 제자가 된 것만큼 큰 축복은 없습니다.
꼴마니에 넣고 다니시겠다는 정산종사님만큼은 되지 못하더라도
대종사님 꼴마니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말아야지 하는 뜻을 다시 세웁니다. -
작성자지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1.06 '타인의 이로움을 자신의 이로움으로 삼으며,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소태산은 개인의 이익이나 불법연구회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 일체 인류의 이익을 우선시하였다.'
'...부안으로부터 익산(益山)에 나올 때는 우리의 정신과 몸까지 희생하여서라도 일체 인류에게 이익됨을 끼쳐 주자고 굳게 맹세하였더니, 아 세상일이라는 것은 과연 뜻과 같이 되지 못하는 것이로구나. 남에게 이익됨을 끼쳐 준 것은 아직 없고, 도리어 각 방면으로 소소(小小)한 생활까지 남의 의뢰를 받게 되니 이 어찌 우리의 본뜻이랴" 하시고 성안에는 눈물의 흔적이 나타나시었다.' -
작성자지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1.06 '이공주 종사님도 대종사님 말씀을 하실때는 종종 눈가에 이슬이 맺히시곤 하셨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대종사님의 당시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가슴이 살아 있는 분들이십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