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회 – 5

작성자釋대원성|작성시간24.06.13|조회수80 목록 댓글 17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회 탄허스님의 기본사상 – 5

 

 

 
  중국은요? 중국의 유학사상 가운데 陽明學(양명학)의 사문난적(斯文亂賊)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陽明學이 조선 조에서는 이단이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벌어졌느냐? 잘 한번 보십시오.

남송시대의 주자가 성리학이라고 하는 주자학을 만들어 냈고,

그것이 발전돼서 오다가 원나라 몽고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원나라가 등장했을 때, 선비들은 열 단계 가운데 아홉 단계에

해당하는 그런 계급적 차별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원나라 때 많은 선비들이 드라마 작가가 됩니다.

그것이 元曲(원곡)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에 나가서 지성인으로 살 수가 없으니까,

바깥에 나가서 드라마 작가를 합니다.

그래서 연극을 만들어서 저자거리에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元曲입니다. 그것이 발전해서 명나라ㆍ청나라로 내려오면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명ㆍ청 소설이 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중국의 유명한 병검이라든지,

패왕별희라든지, 이런 식의 많은 유명한 드라마들이ㆍ잡극들이 형성이

되면서 지성인들이 나레이션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詩와 文을 중심으로 하던 서사가 점점 소설과 희곡 쪽으로 넘어

가게 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지성인이 할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 원나라 이후에 다시 명나라가, 중국 한족이 중원을 딱 차지하게

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유학이 陽明學이었습니다.

이 양명은 왕양명이라고 하는 분이 나타나서 다시 유교 텍스트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자학이나 양명학이나 중국인의 입장에서 봤을 땐,

한족의 학문입니다. 그리고 공자의 학문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분명한 유교의 학문이었습니다.

 

그 유학이라고 하는 것을 주자가 본 방식과, 양명이 본 방식을 둘 다

존경하는 형태로 지속이 됐었지요.

그러면서 명나라 말기 정도에 오면, 중국의 많은 선비들과 스님들이

교류를 하면서 유교와 불교가 본격적으로 회통이 되면서 사상적으로

결합이 되는 순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조선 같은 경우엔 어떻게 되냐 하면,

고려라고 하는 불교문화에서 조선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해서 건국을

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불교를 타파하고 생겨난 왕조이기 때문에,

불교를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숭유억불이라고 하는 그런 형태로 나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선은 禪에 굉장히 가까운, 선과 아주 가까운 陽明學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놓고 얘기하기가 힘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獨尊儒術(독존유술)이라고 하는 성리학ㆍ주자학 중심의 유교

만을 내세우는 학문을 유교의 조선시대의 근간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

지요.

 

그러기 때문에 陽明이라든지, 불교와 회통하는 형태의 유교의 저술들ㆍ

저작들ㆍ주석들을 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탄허스님은 이런 것을 다 보고 계셨다는 겁니다.

20대 초반에 출가하신 분이 이런 것을 다 보시고,

이미 “中과 和가 불교와 유교의 핵심이다.”

 

유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중용인데요.

중용을 보기 위해서는, 소자유의 주석을 통해서

“노자 신해를 불교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씀을 해서 제가 깜짝 놀랐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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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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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惺牛大華 이삼연 | 작성시간 24.06.14 文光스님 – 呑虛思想 - 韓國學을 말하다. 2廻-5.
  • 작성자묘심행 | 작성시간 24.06.16 고맙습니다
    _()()()_
  • 작성자청산(靑山) | 작성시간 24.06.16 _()()()_
  • 작성자妙法樹 | 작성시간 24.06.27 _()()()_
  • 작성자묘덕 | 작성시간 24.10.18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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