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 속에는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천재적 기질을 발휘했던
인물이나 영웅적 삶을 살다간 인물들이 많다.
그들이 남겨둔 그런 삶의 자취들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들은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면에서는 너무나 위대하고 훌륭 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의 뒤안길을 살펴보면 일반 사람들보다 더 엄청난 영적 문제나 정신적인 고통 속에 살아간
이들도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그런 고난이 더욱 아름다운 작품을, 혹은 영웅적인 삶을 살게 했다고 변호
하지만 복음의 눈으로 볼 때 하느님 없이 성공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저주요 재앙임을 쉽게
진단해 볼 수 있다.
특히 음악의 천재들 중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과 고난 속에 살았던 이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천재 음악가들의 말년과 죽음의 시간들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너무나 위대한 인물들이었기에 그들의 불행했던 부분들을 짚어 본다는 자체에 송구한
마음도 들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삶을 살펴보면서 음악의 천재인 사단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를 살펴 오늘을 사는 음악인들과 성도들에게 좋은 지표로 삼고자 한다.
많은 천재 음악가들은 일반 사람들의 수명에 절반도 못되는 일생을 산 이들이 의외로 많다.
또 환상이나 환청에 시달리거나 정신적 질환으로 고통하다가 죽은 이들도 허다하다.
뿐만아니라 그것이 집안의 내력이 되어 가문 속에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저주로 고통
당한 자들도 여럿 있었다.
많은 기독인들은 천재 음악인들이 거의 대부분 찬양곡 들을 많이 썼기에 그들도 하느님을
믿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의뢰받아 썼으며, 곧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썼을 뿐이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기독교와는 무관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몇몇 천재 음악가들 중에 실로 대단한 신앙심으로 살다간 이들도 더러 있다.
하이든이나, 바하, 헨델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 모두가 음악가들 중에 가장 건강하게 장수 했다는 사실이다.
음악의 신동이며 천재라고 일컫는 모차르트는 35세에 죽었고, 악성이라 불리는 슈베르트는
단지 31살 밖에 살지 못했다.
페르골레지는 26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헨리 퍼셀은 36세, 벨리니는 34세, 베버는 40세,
멘델스죤은 38세, 쇼팽은 39세에 죽었다.
반대로 바하는 65세까지, 헨델은 74세, 하이든은 77세 까지 살았다.
세 악성은 모두 환갑을 넘긴 수(壽)를 누렸고 베르디는 거의 90세 까지 사는 복을 누렸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배웠으나 스승보다 더 일찍 죽었고 모차르트는 베토벤보다 14년
연상이지만 베토벤이 21세 때 죽었으며 베토벤은 그후 36년을 더 살았다.
바그너가 출생했을 때 슈베르트는 불과 16세 였지만 바그너가 15살 때 죽었다.
이처럼 음악가들의 출생과 죽음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한 면들이 많아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모차르트(1756-1791, 35세)
프리메이슨 단원, 신경쇠약, 가난, 환상, 환청 속에서 생을 마감.
아버지가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7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두 명만 살아남았다.
그중에 하나가 모차르트다.
아버지는 궁정 음악가였기에 모차르트는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한번 들은 곡은
그대로 연주할 만큼의 암기력과 모방의 천재적 기질을 타고났다.
1782년에 콘스탄체와 결혼을 했으나 그녀는 변덕스러운 성격인 데에다 자신만 아는 악처로 시아버지와의 관계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또 아내의 규모 없는 살림살이로 모차르트는 평생 빚쟁이에 몰리면서 살았으나 그녀는
별장이나 온천장에서 요양이나 하는 호화로운 생활로 지냈다.
궁색해진 모차르트는 메이슨 단체에 손을 벌려 여러 번 재정적 후원을 받았으나 그것으로
가난의 굴레를 벗을 수는 없었다.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류마티즘 열로 심장이 좋지 않았다.
이것이 가난과 겹치고 아내와의 불화로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의 후기 작품이면서도 가장 유명한 오페라인 ‘마술피리’는 프리메이슨적 신앙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초기 인생은 천재라는 별명으로 모든 사람의 관심과 주의를 모았으나 정작 작품의
완숙도를 더한 후반기에는 주위의 관심이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 그의 성격상 귀족들과 잘 어울리거나 또 그들에게 예속되는 일을 싫어했기에 결국
그들로부터 냉대와 소외를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그가 경제적 어려움과 더 깊은
파멸의 길로 빠지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당시는 터키와의 전쟁 중이라 귀족들조차 살기 힘들어 이런 천재적 음악가를
감싸주고 보듬어 줄 환경이 되지 못했다.
이런 현실이 모차르트로 하여금 저급한 삶을 살게 만들었으니 곧 여성 편력증이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모차르트의 여자는 한 군단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 불안감과 공포, 악령에 시달리는 고통을 이기기 온갖 타락의 길을 헤매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깊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는 그로 하여금 극도의 불면증과 환상, 환청에
시달리게 했다.
마지막 죽음의 병명은 심장충격 과다출혈로 알려지고 있다.
슈만(1810-1856, 46세)
환상 환청의 증세로 정신 병원에 입원 중 죽음.
슈만을 가리켜 흔히 낭만파 음악의 대가라고 평가한다.
아버지는 서점을 운영하는 출판업자로 슈만의 어릴 때 정신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간곡한 소원을 따라 법률을 전공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음악을 하게 된다.
교양있고 유복한 집에서 자란 슈만은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아이로 자랐으나 15세 때
부친과 누이를 사별하고 이어서 형과 형수가 죽음으로 점차 과묵하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형수의 죽음은 그로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했고 자살까지 감행할 정도의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이르게 했다.
특히 피아노 선생의 9살 된 딸 클라라를 좋아하면서부터 이성에 눈을 뜨게 되고 이것이
그의 일생을 크게 흔들어 놓은 중요한 사건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손가락을 다쳐 피아니스트가 되는 꿈은 접고 작곡자가 되기를 결심한다.
클라라가 16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그녀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장인 될 분의 심한
반대 때문에 크게 절망하면서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술과 여자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알콜 중독 단계까지 가버렸다.
그가 18세가 되는 해부터 환상과 환청이 그를 사로잡기 시작하였고 1830년 대에 벌써
자살을 세 번 이상 시도하였다.
그의 일기에도 ' 나는 이제 완전히 정신을 잃은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 고 고백하고 있고
1837년에의 일기에는 '암흑의 악마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고 썼다.
클라라와는 1840년에 결국 결혼은 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인생이었다.
청신경이 나빠 작곡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성격이 너무나 괴팍하여 사람들과의 마찰이
심했다.
그래서 음악 활동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급기야는 환상, 환청증세와 불면증, 극심한
우울증 등으로 시달렸다.
결국 1854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를 자청하였고 다음날 물에 뛰어들어 자살까지 시도
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1854년-1856년까지 정신병원에 있었는데 증세가 워낙 심각하여 면회까지 금지 시켰다고
한다.
결국 1856년 7월 29일 정신 병동에서 그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7자녀를 두었는데 아들 세명 중 한명은 폐결핵으로 24살에, 또 하나는 몰핀
중독자로 42세에 죽었고, 다른 하나는 정신 분열증으로 25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51세에 죽었다
딸들 4명중 하나는 폐결핵으로 32살에 죽고 다른 두 딸들은 독신으로 살았다.
슈베르트(1797-1828, 31세)
극한 가난, 매독으로 죽음
농부인 아버지와 직공인 어머니에게서 탄생한 그는 평생토록 가난과 질병에 매인 생을
살다가 간 불행한 음악인이다.
키가 작아 군에도 면제된 그는 25살 때 친구들 사이에서 난봉꾼이며 엽색 행각으로 이름난
친구 쇼바를 알게 되면서 일생을 망치는 불행의 수렁으로 깊이 빠지게 되었다.
곧 그와 어울려 쾌락과 방탕을 일삼다가 젊은 나이에 매독이라는 저주스런 질병에 걸린
것이다.
이것이 천재 음악가로 하여금 요절하게 만든 단초가 된 것이다.
평생 질병과 가난과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남들도 다하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된다.
병원에 입원하면 그 때마다 친구들에게 처량할 만큼의 자신을 한탄하는 글을 써 보내기도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불운하고 가여운 사람이라" 사실 그는 음악적으로 대가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명성은 전혀 얻지를 못했다.
그의 노래들은 문자 그대로 주옥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거의
무명의 존재로 묻혀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더더욱 가난한 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땐 한끼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식당 주인에게 노래 한곡을 즉석에서 작곡해 주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생전에는 그의 작품들이 출판되거나 공연되지도 못했고 사후에야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인정받지 못했기에 직장도 얻지를 못했고 그래서 1828년 자신의 작품으로 유일하게
연주회를 가졌고 그 때 비로소 자신 소유의 피아노를 사게 되었다.
바로 그가 죽은 해이다.
그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성격으로 과묵한 생을 살다가, 결국 1828년 10월에 매독과
장티프스로 인한 질병으로 31세의 생을 마감했다
쇼팽(1810-1849, 39세)
종합 병원이란 별명, 궁핍한 생활
쇼팽은 낭만주의 시대 인물로 멘델스죤(1809년), 슈만(1810년), 리스트(1811년),
바그너(1813년), 베르디(1813년)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이들보다 조금 앞선 인물로는 슈베르트(1797년) 베를리오즈(1803년) 벨리니(1801년)등이
있다.
낭만시대의 사상이 그렇듯 여러 천재 음악가들이나 영웅들이 죽으면 죽음 자체를 굉장히
미화하는 관습이 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 실상을 알기가 무척이나 힘이 든다.
다행히도 사실을 기록한 사본들이 발견되어 진위가 밝혀지기는 하나 그것은 아주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전기를 대할 때는 어느 만큼은 왜곡된 사실을 감안하고 읽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쇼팽의 죽음은 더더욱 그런 기사들이 많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의 말년과 죽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인으로 폴란드로 일자리를 찾기 위해 갔다가 여의치
못해 어떤 귀족 집안의 프랑스어 개인교사로 들어간다.
거기서 가정부로 일하는 니콜라스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 둘째 아이가 바로
쇼팽이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음악의 천재성이 나타나 네 살 때에 피아노, 여섯 살 때부터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제2의 모차르트라는 칭찬을 들었으며 특히 귀족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대단했다.
중학생 때쯤은 더 이상 지도할 사람이 없을 만큼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순전히 작곡에
몰두하게 된다.
나이 19세쯤 그는 음악의 도시인 빈으로 향하게 되는데 거기서도 굉장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곧 다가온 전쟁으로 인해(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와의 관계) 정신적으로는
우울한 나날을, 경제적으로는 궁핍한 생활을, 육신적으로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삶이 시작되었다.
특히 1836년 폐결핵으로 시달리던 그는 리스트의 소개로 상드라는 여성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미 자식을 둘씩이나 가진 이혼녀이었다.
그녀의 적극적이고도 모성애가 넘치는 보살핌으로 생애 최고의 걸작들을 쓸 수가 있었는데
9년 동안 지속되던 관계가 결국 깨어지고 말았다.
바로 두 아이의 양육문제 때문이었다.
그 이후 음악 활동을 완전 접어야 할 만큼 정신적, 육체적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의지는 산만해지고 질병으로 허약한 심신은 모든 음악의 의욕마저 상실케 했다.
상드와 헤어진 2년 후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실 그는 인생 절반쯤(20세 전후)부터 여러 가지 질병들로 시달려 왔다.
25명의 의사들로부터 진찰을 받아야만 했고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여러 질병을
항상 짊어지고 살았었다.
폐결핵, 만성후두염, 희귀성빈혈, 근육박약, 황달, 장허약, 신경쇠약...
그로인해 말년에는 병고와 궁핍, 고독 등으로 최악의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마치 유령 같은 모습으로 생계를 위해 연주여행을 다녔고 쓰러질 때 까지 피아노
앞에 앉았어야 했다.
그러나 사후 동전 한 닢 남기지 못하고 죽을 만큼 가난한 생을 살았다.
베토벤(1770-1827년, 57세)
귓병, 눈병, 간병, 알콜중독,
그의 할아버지는 궁정 악단의 테너 가수였으며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은 죽고 막내
요한만이 살아남았다.
그가 바로 베토벤의 아버지이다.
어릴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궁정에서 심부름꾼으로 지낸 그는 1767년에 결혼하여 4명의
자식을 낳았다.
베토벤의 형은 어릴적에 죽었고 바로 아래 동생 요한도 26세에 죽었다.
베토벤의 아버지도 궁정 악단의 테너가수로 일했는데 술주정뱅이에다가 인격까지 파산한
생을 살았다.
베토벤은 4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이자 아버지는 과도한 연습을 시키기 시작하는데
어떤 때는 밤중에 술이 만취해 들어와 잠자던 그를 깨워 밤새껏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나이 17세 되던 때 본을 떠나 빈으로 갔다.
거기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별로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모차르트에게 사사 받기를 원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해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갈등과 방황의 삶을 살았다.
다행한 일은 하이든(당시60세 가량)에게 사사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베토벤에겐 여러명의 귀족들이 후원자로 나서 인생 중기의 삶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그것은 또 그로 하여금 결혼을 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그가 교제했던
여인들은 귀족들이라 신분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도 있었으나 자신의 괴팍스럽고 변덕스런
성격때문에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 같다.
그에게 치명적인 질병은 나이 26-27세 쯤 찾아온 귓병이다.
이 질병으로 사람들과의 교제에도, 생활하는데도, 창작생활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자살까지 생각을 했다고 한다.
1820년-21년 사이에는 황달증세가 나타났고 이것은 간 질환의 불길한 징조였다.
이 증세는 결국 간경화증으로 발전했고, 과음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갔다
(알콜 중독까지 감).
또 눈병에 장염과 건망증까지 그를 괴롭혔다.
여러 가지 심각한 질병으로 중요한 수술을 4차례나 받았다.
또 동생과 제수씨와의 갈등도 심각하여 가족간의 불화가 그의 명예와 건강을 더 크게
손상시켰다.
넉달간이나 병상의 고통 속에서 생을 마쳤다.
베버(1786-1826 40세)
출생 때부터 병약함, 중반에 독극물 마심, 말년에는 결핵, 객사
베버의 가문은 할아버지 때부터 음악과 연극에 깊이 종사하는 귀족집안 이었다.
재미난 사실은 베버의 큰 아버지가 저음 가수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에게 네 명의 딸도 모두
성악가 였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만하임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그의 둘째 딸 알로이지아
(Aloysia)에게 끌려 구혼을 했으나 실패하고 셋째 딸인 콘스탄체와 결혼하였으니 베버와
모차르트 사이도 결국 친척간이 되는 셈이다.
베버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에 재능을 보이자 모차르트 같은 신동으로 키울 꿈을 가졌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체질적으로 병약한 아이였던 베버는 좌골을 앓아 네 살 까지는
걷지도 못했고 이로 인해 평생 다리를 절뚝거려야만 했다.
또 말도 어눌하며 성격마저도 폐쇄적이며 과묵한 편이인데다 아버지가 유랑극단을 이끌고
이곳저곳 다녀야만 했기에 공부에도 매우 부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열정적인 뒷받침과 훌륭한 음악선생 밑에서 수학한 결과 일찍부터 오페라
작곡에 진보를 보였다.
1804년 그의 나이 18세 때는 벌써 오페라 극장의 감독이 되었으나 운영 미숙에다 폐쇄적
성격과 아버지의 과도한 야망 때문에 감독직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인쇄 동판에 사용할 질산을 포도주로 알고 마심으로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잃게
되었다.
말하는 것조차 불편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음악에 회의를 느낀 그는 잠시 어떤 귀족의 개인 비서로 일하게 되는데 거기서도 공금
횡령이라는 혐의를 받아 한동안 감금생활도 했으며 여러 가지 불운을 겪게 된다.
결국 자신의 생활을 깊이 반성하고 음악창작에 복귀하게 되는데 1813년(27세)에는 프라하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임명을 받아 비로소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가 싶었는데 연애 스캔들로
3년 만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다섯 아이의 어머니인 텔레제 브르네티라는 여배우의 유혹에 빠진 사건이었다.
1817년(31세)에는 오페라 가수와 결혼을 하게 된다.
또 가극장의 지휘자로 자리를 얻어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는데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기간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얼마가지 못했다.
그의 작품 ‘마탄의 사수’라는 오페라가 대 성공을 거두면서 연주에 너무 과로한 나머지
가슴과 후두에 결핵이 찾아 온 것이다.
영국 런던의 유명한 가극장 세 곳에서 동시에 공연될 만큼 그의 오페라는 인기였고, 또
영국 제일의 가극장인 코벤트 가든에서도 베버에게 영국 가극의 작곡을 위촉할 정도였다.
의사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뺏기지 않으려고 무리하다가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타국에서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18년 후 그의 아들 막스와 바그너에 의해 영국 땅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차이코프스키(1840-1893년, 53세)
동성애자, 자살,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를 대표할만한 음악의 대가이다.
말년에 작곡한 '비창'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불후의 명작이라 할 수 있고,
또 발레음악의 진수로 여겨지는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같은 대작들을 많이 남겼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탄광도시인 보틴스크에서 광산 검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프랑스계 러시아 인으로 후처로 들어와 여섯 형제를 낳았다.
차이코프스키는 둘째 아들로 어릴적부터 좋지 않는 여러 경험들 때문에 평생을 그 속에
묶인 인생을 살았다.
곧 어린 나이에 기숙사 생활을 위해 어머니와 강제로 이별하는데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그런 어머니가 콜레라로 일찍 죽은 사건이었다.(그의 나이 14세 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그로 결혼생활의 파탄과 동성애와 자살로 생을 마치게 하는 비극적
요소로 작용했다고 추론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요인으로 일세기 가까이 전해오고 있다.
곧 당시에 창궐하였던 콜레라에 의한 것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비창에 대해
관중들의 반응이 냉담한데 대한 좌절감으로 자살했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1978년 그의 전기 작가인 데이빗 브라운에 의해 새로운 기록이 공개됨으로 그의
죽음은 '강요된 자살'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곧 차이코프스키가 어떤 귀족과의 동성애에 빠짐으로 이 불명예스런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그의 학교 친구들이 귀족의 압력을 받고 그에게 자살을 강요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대체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의 나이 37세에 20세 된(혹은 28세) 아내와 한 결혼은 3개월도 가지 못하고 끝났다.
그러나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날까봐 정식으로 이혼도 못 한채 별거하되 아내의 평생
생활비를 대는 조건으로 합의가 되었다.
(그의 아내는 연애행각으로 전전하다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또 그의 생애에 빼 놓을 수 없는 9살이나 연상이었던 한 부인과의 사랑이다.
그녀는 남편의 엄청난 유산을 상속 받은 자로 그를 경제적으로 돕게 된 것이다.
14년 동안 무려 천백통 이상의 편지를 교환 하면서도 따로 만나거나 함께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거기에 온통 기대고 그나마 안정적인 음악 활동을 해 왔던 그는 또 한번의 큰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런 사건들로 정신병이 악화되고 도저히 한 곳에 안착할 수 없는 불안증세 때문에
계속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행 중 그의 가장 사랑했던 누이가 죽음으로 향수병에다 우울증세까지 겹쳐
50이 된 그는 완전 늙은 노인의 행색으로 바뀌었다.
이 때 발악이라도 하듯 몸을 추슬러 마지막 작품을 썼는데 바로 비창이다.
그런데 그의 기대와는 달리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자살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자살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시기에 동성애 때문에 평소 괴로워했고 그 악습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투쟁을 했지만 실패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동성애가 나의 행복에 가장 큰 장애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내 본성과 싸워야만 한다.
결혼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걸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테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나의 오래된 악습을 정복하고야 말겠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악습을 이기지 못했다.
친구들의 모의 법정이 모인 후 엿새 만에 그는 죽었다.
말러(1860-1911년 51세)
조울증, 환상(정신병), 심장병,
구스타프 말러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위대한 지휘자요, 작곡가이다.
특히 그는 남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비범한 곡들을 많이 썼다.
특히 고전파와 낭만파를 잇는 전환점에서 과거와는 과감한 이별을 고하고 새 시대를 여는 작업을 했으며 또 천명을 위한 합창곡을 위시하여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장대한
스케일의 곡들을 많이 썼다.
사실 그는 자신이 쓴 곡들을 통해 이미 그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나 가장 완성도 높은 곡으로 평가되는 교향곡 6번, 영웅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바로 그것들이다.
수년 후 그가 유별나게 사랑했던 큰 딸 마리아의 갑작스런 죽음(그는 1902년 42세 때
23살의 알마 쉰들러와 결혼, 두 딸을 낳음, 맏딸이 불과 세살 때 성홍열과 디프테리아로
무서운 고통 속에 죽음)과 그에게 닥친 치명적인 심장병은 결국 한 영웅을 죽게 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불같은 성격, 거의 광적인 독재성은 가는 곳마다 지휘자로서의 자리를 위태롭게 했고 단원들이나 음악인들로 완전 등지게 하는 데까지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말하자면 적을 만드는 데는 천재성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생애를 잘 알고 있는 브르노 발터는 '지휘할 때면 소리를 질러대고 때론 발을
굴렀으며 단원들을 마치도 야수처럼 다루었다'고 회고했다.
연주가 서툰 자들에게는 즉석에서 심한 모욕을 주고 때론 가차 없이 해고하는 무자비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곁에는 항상 반대파들의 음모가 들끓었고 전대 미문의 중상모략과 간계와
광분으로 넘쳤다.
그런 열정과 전제성 때문에 어떤 경우는 음악적 황금기를 맞기도 했다.
여관집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다.
어릴적부터 소수민족의 소외됨과 가족간에 일어난 저주들로 그의 성격은 특이하게 성장해 갔다.
아버지는 독학으로 공부했고 어머니는 교양 있는 집안 출신으로 아내의 사회적 우위에 대해 아버지는 늘 폭력으로 아내를 학대했다.
말러의 형제는 모두 14명이나 된다.
그중 8명이 죽고 6명만이 살아남았다.
가장 음악적으로 재능이 뛰어났던 막내는 자살하고 말았다.
말러는 형제로서는 둘째였으나 형의 죽음으로 맏이의 역할도 해야만 했다.
이런 복잡하고도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그의 천재성은 특유의 극단적 기질로 표출되었는데 악마적이고 신경증적이며 이기적인데다 고압적, 독재성에다 냉소적이었다.
또 평생 정서적으로 불안정함과 조울증은 그의 삶을 늘 어둡고 무겁게만 했다.
이런 사실을 안 그는 거기에 묶이지 않으려 몸부림 쳤으며 일부러 라도 바쁘게 움직여
휴식 없는 삶으로 일관하여 등산과 수영 또는 작곡하는 일로 더욱 무자비하게 자신에게
대항해 나갔다.
특히 제 10 교향곡은 순서상으로는 제 9교향곡인데 베토벤이나 부루크너가 9교향곡만
완성하고 죽은 것을 보고 자신은 제 9번을 피하고 바로 10번으로 제목을 잡았다.
이는 일종의 액 막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극도의 미신적 믿음도 작용했다.
그러면서 '나의 위기는 사라졌어' 라고 장담했으나, 결국 제 10번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제 10교향곡을 작곡하는 동안 얼마나 고통이 컸던지 그의 자필 악보에는
'자비를, 신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등의 절규들이 적혀 있었다.
또 자신의 아내인 알마가 바람을 핀다는 말에 불안을 느끼고 당시 정신 분석 학자인
프로이트를 찾아가 상담까지 했다. (결국 아내는 말러의 사후 바람피던 건축가와 재혼)
그 무렵 그는 이상한 환상도 체험한다.
그의 결정적 사인이 된 심장병은 어머니의 병이 유전된 것으로 파악이 되었다.
거기에다 폐렴증세와 편도선염의 증세가 더해져서 극도의 쇠약함 속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
드뷔시(1862-1918, 56세)
장질환, 고질적인 치육염(齒肉炎), 직장암
가장 프랑스적인 작곡가이면서도 20세기를 이끌어갈 독창적인 음악정신과 방향(인상파
음악)을 제시한 음악가이다.
도자기를 제조 판매하는 아버지에게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민중 봉기에 가담하는 일로 자주 감옥에 갔고 이로 인해 그의 어린 시절은
친척들에게 맡겨져 많은 보살핌을 받았다.
특이한 점은 젊은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아르바이트로 음악 활동을 하는 중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로 알려진 메크 부인을 알게 되어 그의 피아노 반주자로 활동을
했다.
그녀의 덕에 유럽지역으로 여행도 많이 하여 자연스레 차이코프스키 음악과도 접할 수
있었다.
드뷔시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여성 편력증이다.
그의 많은 정부 가운데 가브리엘 뒤퐁과는 6년간이나 동거를 했으면서도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다.
바로 그녀의 친구인 재단사 겸 패션모델인 로잘리 텍시에와 1899년(37세)에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5년 뒤 결혼한 경험이 있는 아마추어 성악가와 함께 살기 위해 아내를 잔인하게
버렸다.
그러나 복잡한 이혼 소송에 휘말려 몇 년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정식 부부가 되었다.
또 버림 받은 아내가 정신적 타격으로 자살까지 시도함으로 많은 가십과 스캔들로 곤욕을
치루어야 했는데 그래서 오래 동안 영국으로 도피했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옛 친구들과도 모두 관계가 끊어졌다.
나중 결혼한 바르닥 부인과의 사이에 엠마라는 딸을 얻었으며(1905년) 음악에 비상한
재주를 보여 기대가 컸으나 아버지 보다 몇 달 더 살고 14세에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바르닥 부인과 결혼한 이후부터는 집안에 질병들과 이로 인한 병원비며 또 씀씀이가 헤픈
자신 때문에 굉장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된다.
이미 1907년에 찾아온 장질환 때문에 모르핀과 코카인 등의 흥분제를 맞아야 했고
1913년엔 고질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치육염과 직장암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직장암을 일종의 수치로 여기고 병을 애써 감추려함으로 결과적으로는 병을 키워준 꼴이 된 것이다.
그래서 1915년 부터는 완전 환자로, 또 일차 대전의 막바지에서 불안과 고통과 초조 속에
지낼 수밖에 없었다.
병상에서 마지막 쓴 편지를 보면 '음악은 내게서 완전히 떠나버렸소. 음악이 나와
함께하기가 싫다면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어...'
음악이 자신을 버렸다는 마지막 절규인 셈이다.
음악가가 음악에게서 배신을 당했다면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그는 친구들에게서 버림 받고 결국은 가족과 음악에게서도 내침을 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