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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치료

<OSHO> 옴사운드와 신체간의 관계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07.12|조회수162 목록 댓글 0

<질문 : 어제 당신은 일곱 번째 신체와 관련하여 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작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a와 u, m은 어떤 차크라에 영향을 줍니까? 그리고 이것이 구도자에게 어떤 도움을 줍니까?>

 

 

 

 

어제 나는 '옴'에 대해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몇 가지 더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로, 옴은 일곱 번째 신체의 상징이다. 옴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일곱 번째 차원을 암시한다.

 

일곱 번째 차원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단어도 사용될 수 없다.

 

그래서 무의미한 단어,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내가 어제 말한 내용이다. 이 단어에 대한 조사는 네 번째 신체의 경험을 통해 행해졌다.

 

이것은 일상적인 탐구가 아니었다.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을 때, 언어의 아우성은커녕 사념의 잔물결 하나 일지 않을 때, 이 때는 공의 소리만 남는다.

 

공에는 고유의 소리가 들어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외딴 곳에 가서 있어 보라.

 

공에 고유의 음악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외딴 곳에는 고유의 소리가 있다.

 

이 침묵 속에서 'a-u-m'이라는 기본적인 음만 남는다.

 

우리의 모든 멜로디와 선율은 이 기본적인 음을 적당히 배치하고 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단어와 소리가 사라졌을 때 이 기본적인 음만 남는다.

 

 

옴은 일곱 번째 차원, 일곱 번째 신체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소리는 네 번째 차원에서 포착되었다.

 

멘탈체의 공안에서 옴의 울림이 포착된다. 구도자가 이 옴을 사용하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전에도 말했듯이, 모든 차원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옴의 반복은 잠의 상태, 잠과 같은 트랜스(trance) 상태를 초래한다. 이런 상태는 어떤 단어로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면 졸음이 오듯이 특정한 단어의 반복되는 읊조림은 마음속에 똑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옴의 반복에 의해 이런 상태가 오면 그대는 꿈과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 꿈과 상상이 네 번째 신체의 자연적인 잠재성이다.

 

그대는 최면 같은 잠에 빠질 것이고 그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볼 수 있다.

 

천국이나 지옥으로 여행할 수도 있고 신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가 꿈속의 일이다.

 

그대는 지복과 평화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꿈속에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실제가 아니다.

 

옴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옴 소리를 크게 내면서 그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주 쉽다. 이것은 행복한 꿈을 꾸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다.

 

 

멘탈 차원의 자연적인 특성은 상상과 꿈이다. 마음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꿈꿀 수 있다.

 

네 번째 차원에서 이런 즐거움이 가능하다. 이 네 번째 차원의 다른 가능성은 의지력과 신에 대한 비전(vison)이다.

 

옴이 마음의 반복으로만 사용되면 그 효과는 최면 적인 잠을 불러온다.

 

옴의 반복에 의해 '요가 탄드라(yoga tandra)'로 불리는 상태가 창조된다.

 

그러나 내면의 주시자가 살아 있는 가운데 옴을 읊조리면, 그 소리에 빠져들거나 휘말리지 않고 철저하게 깨어서

 

그 소리를 듣는다면, 소리가 하나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그대는 청취자, 관찰자, 주시 자로서 다른 차원에 서 있다면,

 

이 소리에 대해 철저하게 자각하고있다면, 이때 비로소 네 번째 차원의 두 번째 다른 가능성이 시작된다.

 

 

이때 그대는 '요가 탄드라'가 아니라 '요가 자그리티(yoga jagriti)',각성의 상태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그대가 만트라의 사용에 빠져들지 않도록 시종일관 노력하고 있다.

 

나는 항상 어떠한 만트라도 사용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만트라를 사용하면 십중팔구는 상상적인 트랜스 상태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네 번째 신체는 잠에 약하다. 이 신체는 잠밖에 모른다. 꿈의 길이 이미 잘 닦여 있다. 이 신체는 밤마다 꿈꾼다.

 

이것은 방안데 물을 뿌려 놓는 것과 같다. 잠시 후 물이 마른 다음에도 흔적은 남을 것이다.

 

이때 다시 물을 뿌리면 이 물은 전에 있던 흔적을 따라 흐를 것이다.

 

 

찬팅(chanting)과 만트라를 사용하면 마음이 즉시 잠으로 향하게 될 가능성이 더 많다.

 

만트라를 반복하는 기계적인 과정이 그대를 꿈의 세계에 빠뜨릴 것이다.

 

그러나 내면이 철저하게 깨어있는 상태로 이 '옴'소리를 주시한다면, 그 소리에 휘말려들지 않고 관찰한다면,

 

이 때 이 만트라는 내가 권장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졸린 듯한 상태로 반복될 뿐 거기에 주시가 없으면 '옴' 만트라의 반복과 같은

 

오류가 일어날 수 있다. 그대는 꿈속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옴의 반복에 비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옴에는 아무 질문도 제기되지 않는다. 옴은 부드러운 다독거림과 같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에는 질문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다독거림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 뒤에는 의문 부호가 그대를 깨어 있는 상태로 유지시킬 것이다.

 

마음속에 의문이 있으면 잠들기가 어렵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낮 동안에 마음속에서 어려운 문제가 소용돌이치고 있으면 이 문제는 밤이 되어서도 그대의 잠을 방해한다.

 

마음속의 의문은 그대가 잠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의문 부호가 불면을 가져온다.

 

마음속에 의문이나 근심, 호기심이 있으면 잠들기가 어렵다. 나는 옴 대신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권장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의문이다. 그리고 의문은 대답을 추구한다. 대답을 얻기 위해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옴에는 의문이 없다. 옴에는 날카로운 모서리가 없기 때문에 그대를 자극하지 못한다. 옴은 완전히 둥글둥글하다.

 

거기엔 의문이 없다. 규칙적이고 부드러운 다독거림이 그대를 상상적인 트랜스 상태로 인도한다.

 

그러나 옴은 여성처럼 매끄럽다. 옴의 부드러운 다독거림이 그대를 빨리 잠들게 한다.

 

말에도 형태가 있으며 그대에게 미치는 효과가 다르다. 말에서 울려 퍼지는 공명이 각각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안에는 선율이 없다. 이 질문을 갖고 잠들기는 어렵다.

 

잠자는 사람 옆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하고 반복하면 그가 깨어날 것이다.

 

그러나 '옴, 옴....'하고 반복하면 그는 더 깊이 잠들 것이다. 말이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

 

이것은 옴이 아무 효과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대가 옴을 반복하면서 그 배후에서 관찰자, 주시자로 남아 있다면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나는 명상을 위해 옴을 사용하는 것은 권장하지 않는다. 여기엔 많은 이유가 있다.

 

 

옴을 위해 명상을 사용하면 이 옴은 필연적으로 네 번째 신체와 연결된다.

 

옴은 일곱 번째 차원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울림은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된다.

 

옴을 갖고 명상을 시작하면 이 옴과 네 번째 차원의 필연적인 관계가 더 이상의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이것이 옴을 사용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옴은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되지만 일곱 번째 차원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우리에게는 일곱 번째 차원을 상징하는 다른 말이 없다. 말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네 번째 차원 후에 끝난다.

 

우리는 일곱 번째 차원을 지칭하는 상징으로서 네 번째 차원의 마지막 말을 사용한다. 다른 대책이 없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 차원은 완전히 말이 끊긴 상태고, 일곱 번째 차원은 궁극적인 공이다.

 

네 번째 차원의 경계선에서 우리는 모든 말을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리는 말이 '옴'이다.

 

그러므로 '옴'은 언어의 영역에서 마지막 말인 동시에, 비 언어의 영역에서 최초의 말이다.

 

'옴'은 언어와 비 언어 사이의 경계선 상에 놓여 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네 번째 차원에 속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일곱 번째 차원에 가까운 말은 없다. 다른 말 모두가 일곱 번째 차원과 한참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일곱 번째 차원을 상징하기 위해 '옴'이 사용된다.

 

이 혼을 네 번째 신체와 연결시키지 말라. 옴은 분명히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옴은 일곱 번째 차원의 상징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명상을 위해 옴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명상을 위해서는 네 번째 차원과 멀리 떨러져 있는 방편을 사용해야 한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그렇다. 그대는 이 질문을 네 번째 차원에서 사용할 수도 있고 또한 버릴 수도 있다.

 

옴의 의미는 상징적으로 남아야 한다. 옴을 방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궁극적인 단계를 가리키는 상징이 방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최후의 목적으로 남아야 한다.

 

절대적 차원을 가리키는 상징은 오직 깨달음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한다. 옴은 우리가 최후에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옴을 명상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과거에 이 옴이 방편으로 사용되었지만 해로운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옴' 소리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흔히 네 번째 차원을 일곱 번째 차원으로 착각한다.

 

일곱 번째 차원의 상징이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네 번째 차원에서 경험되었을 때 구도자는 '나는 일곱 번째 차원에 도달했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것을 여행의 끝으로 착각한다. 이 사이의 차원에서 큰 해악이 발생한다. 이 때 구도자는 여기에 머물고 만다.

 

네 번째 차원에서 보이는 비전(vision)이나 색채, 내면의 소리를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구도자들이 많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궁극적 차원의 상징이 이 네 번째 차원의 경계선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때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옴'소리를 수행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이 방편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신체에 아무 효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효과는 오직 네 번째 신체에서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신체에 필수적인 충격을 주기 위해 다른 단어가 사용되는 이유다.

 

 

'a-u-m'이라는 기본적인 음에 대해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창조의 행위를 수행하지 않았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신이 '말'을 했다.

 

성경은 또한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며, 다른 모든 것은 그 뒤에 따라 나왔다.

 

인도에서 우리는 '말씀이 브라흐만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낳았다.

 

많은 사람들이 브라흐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말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오직 무언의 상태에서만 얻어진다. 

 

 '말씀이 브라흐만이다.'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소리 중에 '옴'이 가장 미묘한 소리라는 뜻이다.

 

우주의 근원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면, 세상이 비롯된 공의 차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옴의 울림소리를 들을 것이다.

 

네 번째 차원으로 들어감에 의해 공에 더 가까워졌을 때 옴의 소리가 들린다. 이 곳에서 우리는 태초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네 번째 신체에서 영체로 들어가고, 영체에서 코스믹체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반체로 들어간다.

 

마지막 두 신체 사이에 있는 공명도 또한 옴의 울림이다.

 

 

한 쪽에는 우리가 물질계(corporeal)로 부르는 네 가지 신체의 개체성이 있으며,

 

다른 한 쪽에는 브라흐만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비개체성이 있다. 이 둘의 경계선에서 울리는 공명이 '옴'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브라흐만으로부터 물질계가 형성될 때 옴의 공명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해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을 통해 모든 것이 탄생했다는 믿음이 있다.

 

이 '말씀'을 기본적인 요소로 쪼개면 우리는 'a-u-m'이라는 세 가지 음을 발견한다. 이 세 가지의 음의 조합이 '옴'이다.

 

이런 까닭에 '태초에 옴이 있었으며, 종말에도 옴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종말은 출발점으로 환원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원이 완결된다.

 

 

나는 이 '옴'이 상징으로 사용되어야지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들은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옴'같은 순수한 소리가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옴의 순수함을 오염시키는 행위다.

 

많은 사람들이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내게 와서 '옴의 영창을 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

 

아마 그들은 나를 옴의 적으로 생각하는가 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옴의 적이다.

 

그렇게 순수한 소리가 영적 성장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우리는 혀는 이 소리를 발음할 자격조차 없다. 옴은 육체에 의해 발음되기는 너무나 순수한 소리다.

 

이 '옴'은 혀가 무의미해지고 육체가 쓸모 없어지는 차원에 위치한다.

 

그런 곳에 옴의 울림이 있으며, 이 울림은 제 스스로 진동한다. 옴을 경험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옴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옴은 발음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위험이 있다. 옴을 방편으로 사용하면 그대는 이 단어의 기본적인 소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존재계로부터 저절로 그 소리가 솟아 나올 때 그대는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소리가 그 존재계의 소리를 눌러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는 이 기본적인 소리의 순수한 현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옴의 소리를 방편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결코 실제의 옴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은 실제로 옴의 울림이 왔을 때 그 위에 자신의 뉘앙스(nuance)를 덮어씌울 것이다.

 

이 때 그들은 옴의 순수한 울림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공의 직접적인 울림소리를 듣는 데 실패한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만들어 낸 소리가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와 이미 친숙한 소리가 우리 안으로 파고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옴과 친숙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옴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어느 날엔가 이 옴은 네 번째 차원에서 저절로 나타날 것이며, 그 때 이 옴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네 번째 신체 안에서 옴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대가 네 번째 신체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대는 프쉬케의 차원, 언언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있다. 마지막 말이 찾아왔다.

 

이제 그대는 말이 시작되었던 지점에 서있다. 그대는 창조의 시발점에 서 있다. 그 다음에 옴 고유의 멜로디가 시작된다.

 

그 아름다움은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것을 묘사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만든 최고의 음악도 이 멜로디의 가장 작은 메아리에 미치지 못한다.

 

외부의 귀로 이 침묵의 음악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소리에 대해 아무 선입견도 갖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이 소리에 어떤 형상이나 색채도 부여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낸 관념에 사로잡힐 것이고, 이것이 장애물이 될 것이다.

 

 

 

-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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