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道, 可道, 非常道. 名, 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道는 말해질 수 있지만, (말해진 도道는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이 텅 비어서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는) 늘 그러한 도道가 아니다. (비유하면, 일삼고자 함이 있고 모양이 있는) 만물名은 이름 붙여질 수 있지만, (이름이 붙여진 만물은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어서 텅 빈) 늘 그러한 도道가 아니다.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이 텅 빔, 따라서 모양 없음, 따라서)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일삼고자 함이 있음, 모양 있음)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늘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이 텅 빔, 따라서 모양 없음, 따라서 이름) ‘없음’, (그것에서) 그 (도道의) 오묘함(본질)을 알아차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늘 (일삼고자 함이 있음, 모양 있음, 이름) ‘있음’, (그것에서) 그 (도道의) 미묘함(작용)을 알아차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없음’과 ‘있음’) 이 두 가지는 나온 곳이 같지만, 같은 곳에서 나와서 이름이 다른데, (나온 곳이) 같은 데 그것을 일컬어 어둑함이라 한다. 어둑하고 또 어둑함,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
此章總言道之體用, 及入道工夫也. 老氏之學, 盡在於此. 其五千餘言, 所敷演者, 唯演此一章而已.
이 장章은 (『노자』가 말하는) 도道의 본질體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用, 어떻게 도道를 알아차리고入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자』가 알리고자 하는 바는 이 장에 (모두) 들어있고 이 장에서 (모두) 드러난다. 그 오천 여 마디는 (이 장이) 늘여지고 펼쳐진 바로서, 오직 이 장을 (늘여서) 펼친 것일 따름이다.
所言道, 乃眞常之道. 可道之道, 猶言也. 意謂眞常之道, 本無相無名, 不可言說. 凡可言者, 則非眞常之道矣, 故非常道. 且道本無名, 今旣强名曰道, 是則凡可名者, 皆假名耳, 故非常名. 此二句, 言道之體也.
(“道可道 非常道”에서 『노자』가 말하는 도道는 첫 번째 나오는) “도道”인데, 바로 (실상에 벗어나는 바나 실정에 어긋나는 바가 전혀 없는, 따라서) 참되고眞 늘 그러한常 도道이다. (두 번째 나오는) ‘도道’라고 불린 도道는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言에 비유된다. 참되고 늘 그러한 도道는 본래 (잘 살펴볼 수 있는) 모양相이 없고 (따라서 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名이 없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말言로 설명되어질 수 없다. 무릇, 말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은 참되고 늘 그러한 도道가 아닌데, 때문에 (『노자』는 그것을) “非常道”(라 일컬은 것)이다. 그런데 도道는 본래 이름이 없음에도, (『노자』가) 지금 일부러 일삼아强 ‘도道’라고 이름 지어 부른 것은 (그것이) 부득이하기 때문인데, 따라서 무릇 지어 불린 모든 이름은 (일부러 일삼아) 꾸며진 이름일 따름이며, 때문에 (『노자』는 그것을) “非常名”(이라 일컬은 것)이다. 이 두 문장은 도道의 본질體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然無相無名之道, 其體至虛, 天地皆從此中變化而出, 故謂天地之始. 斯則無相無名之道體, 全成有相有名之天地, 而萬物盡從天地陰陽造化而生成. 此所謂: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故爲萬物之母. 此二句, 言道之用也.
도道가 모양이 없고 이름이 없다는 말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전혀 없이) 지극하게 텅 비어 있다虛는 뜻이며, (따라서) “천지”가 모두 그것을 말미암아從 움직이고變 일삼으며化 생겨난다出는 뜻인데, 따라서 (『노자』는 “無名”을) 일컬어謂 “天地之始”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道가 모양 없음과 이름 없음을 본질體로 삼음으로써, “천지”는 (그) 모양 있음과 이름 있음을 이루고 온전하게 유지되며, “만물”은 (그) “천지”음양陰陽의 조화를 말미암고從 따름으로써盡 생겨나고 살아가게 된다成. 이것이 이른 바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으며, 셋이 만물을 낳는다(42장)”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有名”을) 일컬어爲 “萬物之母”라 한 것이다. 이 두 문장은 도道의 작용(用; 본질이 실현되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此下二句, 乃入道之工夫. 常, 猶尋常也. 欲, 猶要也. 老子謂: “我尋常日用安心於無, 要以觀其道之妙處. 我尋常日用安心於有, 要以觀其道之徼處.” 徼, 猶邊際也.
그 아래 두 문장은 어떻게 도道를 알아차리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常”은 언제나 어디서나尋 그러하다常는 뜻이다. “欲”은 바란다(要; 애쓴다)는 뜻이다. (따라서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에서 『노자』가 뜻하고자 하는 바는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매일 같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없는 텅 빔虛, 모양相 없음無, 이름名) ‘없음無’에서 마음이 (번뇌 없이) 편안하기를 일삼는데用, 그 도道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본질(妙處; 體·근원)을 알아차리기觀 위해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멈추어 살피기 위해) 애쓴다要(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매일 같이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 모양 있음, 이름) ‘있음有’에서 마음이 (번뇌 없이) 편안하기를 일부러 일삼는데用, 그 도道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작용(徼處; 用·현상)을 알아차리기 위해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멈추어 살피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다).” “徼”는 가장자리(邊; 움직이는 모습)와 끄트머리(際; 일삼는 모습)를 뜻한다.
意謂全虛無之道體, 旣全成了有名之萬物. 是則物物皆道之全體所在, 正言: “一物一太極.” 是則只在日用目前, 事事物物上, 就要見道之實際, 所遇無往而非道之所在. 故莊子曰: “道在稊稗, 道在屎尿.” 如此深觀, 才見道之妙處. 此二觀字最要緊.
이른 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텅 빔과 (모양 없음과 이름) 없음이 도道의 온전한 본질體이며, (그것이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고) 이름이 있는 만물萬物에게도 이미 온전하게 구비되어 있다成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物物; things·event) 모두 도道의 본질體을 온전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뜻으로서, “하나의 사물物物에 하나의 태극太極이 들어 있다(物物有一太極: 『주자어류朱子語類』)”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어디서나) 매일 같이 눈 앞에 있는 만물事事物物에게서 구하면用, 어디서나 함께 하고, 언제나 함께 있는 도道의 본질實과 작용際에 대한 알아차림見과 (번뇌 없이 편안한 마음에 대한) 바램要을 이루는就 것이다. 때문에, 『장자』는 일컬었다. “도道는 논피나 밭피에도 있고, 도道는 똥이나 오줌에도 있다(在在稊稗, 在屎溺: 「지북유知北遊」)” 이 두 사실을 깊이있게 살펴야觀 비로소 도道의 본질妙處을 알아차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도道의 본질을 알아차리는 데 있어서) 이 두 사실에 대해서 (깊이있게) “살피는 일觀”이 가장 중요하다.
‘此兩者同’ 已下, 乃釋疑顯妙. 老子因上說觀無觀有, 恐學人把有無二字看做兩邊, 故釋之曰: “此兩者同.”
“此兩者同” 이하는 “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의문을 밝히고 (그 의미를) 드러낸 문장이다. 『노자』는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이 텅 빔과 모양 없음과 이름) ‘없음(無; 만물이 말미암는 바로서의 도道)’을 살피고, (일삼고자 함이 있음과 모양 있음과 이름) ‘있음(有; 만물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바로서의 도道)’을 살피라”는 앞선 말로 인하여, (후세의) 배우는 사람들이 ‘있음(有; 만물, 음양,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爲·작용用·현상·형이하形而下)’과 ‘없음(無; 천지, 태극,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본질體·인·형이상形而上)’ 두 글자에 집착한把 채, (상반관계에 놓여 있는) 두 상(邊; 相·극단)을 (일부러 일삼아) 찾아나서거나看 만들어내게做 될 것을 걱정했는데, 따라서 (『노자』는 둘의 상관관계) 그것에 대해서 밝혀서 “此兩者同”이라 일컬은 것이다.
意謂我觀無, 不是單單觀無, 以觀虛無體中, 而含有造化生物之妙, 我觀有, 不是單單觀有, 以觀萬物象上, 而全是虛無妙道之理. 是則有無並觀, 同是一體, 故曰: “此兩者同.”
다시 말하면, 『노자』의 “없음無을 살피라”는 말은 단순히 (‘있음有’과 상반관계에 놓여 있는 바로서의) ‘없음無’을 살피라는 뜻이 아니라,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이) 텅 비고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는’ 본질體의 실현(中; 自然)으로서, 만물物을 이루어지게 하고造 살아가게 하며化 생겨나게 하는生 (도道의) ‘오묘한妙’ 작용(含有; 自然)을 (온전하게) 알아차려야한다는 뜻이며, 『노자』의 “있음有을 살피라”는 말은 단순히 (‘없음無’과 상반관계에 놓여 있는 바로서의) ‘있음有’을 살피라는 뜻이 아니라, (일삼고자 함도 있고 모양도 있으며 이름도 ‘있는’) 만물萬物이 이루어지거나 살아가거나 생겨나는 형상象을 살핌으로써,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이) 텅 빈 채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이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오묘한(妙)’ 도道의 본질(理; 自然)을 온전하게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있음有’과 ‘없음無’은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 둘은 한 몸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자』는 둘의 상관관계, 그것에 대해서 밝혀서) “此兩者同”이라 일컬은 것이다.
恐人又疑兩者旣同, 如何又立有無之名, 故釋之曰; “出而異名.” 意謂虛無道體, 旣生出有形天地萬物. 而有不能生有, 必因無以生有. 無不自無, 因有以顯無. 此乃有無相生, 故二名不一, 故曰, 出而異名.
(『노자』는 후세의 배우는) 사람들이 다시 ‘그 둘이 본래旣 (한 몸으로 서로) 다르지 않은데, 그렇다면 또한 어찌 “있음有”과 “없음無”으로 서로 달리 이름 부르는 것인가?’ 의문을 품을까 걱정했는데, 따라서 그것을 밝혀서 “出而異名”이라 일컬은 것이다. 이른 바,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이) 텅 비고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던 도道의 본질體이 이내旣 ‘있음有’(의 시작)인 “천지”(음양)을 낳았으며, (“천지”음양의 조화를 말미암고 따름으로써) “만물”이 (그) 형상形을 드러내게出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있음有’은 (스스로 그) ‘있음有’을 낳을 수 없고, 반드시 ‘없음無’을 말미암因으로써 (그) ‘있음有’을 낳을 수 있다. ‘없음無’은 스스로 (그) ‘없음無’을 드러낼 수 없고, (반드시) ‘있음有’을 말미암음으로써 (그) ‘없음無’을 드러낼 수 있다. 이 말은 바로 “있음有과 없음無이 서로 낳는다(드러낸다: 2장)”는 뜻인데, 따라서 (그) 이름이 하나일 수 없고, 따라서 (『노자』는) “出而異名”이라 일컬은 것이다.
至此恐人又疑旣是有無對待, 則不成一體, 如何謂之妙道, 故釋之曰: “同謂之玄.” 斯則天地同根, 萬物一體. 深觀至此, 豈不妙哉.
나아가, 『노자』는 (후세의 배우는) 사람들이 다시 ‘있음有과 없음無은 상반되는對待 관계에 놓여 있어서, 한 몸體을 이룰 수 없는데, 그렇다면 어찌 도道 그것이 ‘오묘하다’는 것인가?’ 의문을 품을까 걱정했는데, 따라서 그것을 밝혀서 “同謂之玄”이라 일컬은 것이다. 이 말은 (‘있음有’의 시작인) “천지”가 한 뿌리(根; ‘없음無’)에서 생겨났는데, 따라서 (“천지”를 말미암고 따름으로써 형상이 드러나게 된) “만물(萬物; ‘있음有’)”은 (‘없음無’과) 한 몸體을 이룬다는 뜻이다. 깊이 있게 살펴서 이것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어찌 (도道 그것이) ‘오묘하다’ 일컫지 않을 수 있겠는가?
老子又恐學人工夫到此, 不能滌除玄覽, 故又遣之曰: “玄之又玄.” 意謂雖是有無同觀, 若不忘心忘跡, 雖妙不妙. 殊不知大道體中, 不但絶有無之名, 抑且離玄妙之跡, 故曰: “玄之又玄.” 工夫到此, 忘懷泯物, 無往而不妙, 故曰: “衆妙之門.” 斯乃造道之極也. 似此一段工夫, 豈可以區區文字者也之乎而盡之哉. 此愚所謂須是靜工純熟, 方見此中之妙耳.
『노자』는 또한 (후세의) 배우는 사람들이 도道를 알아차리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는) “마음을 씻고 닦아서 티 없게 하지(10장)” 못할까 걱정했는데, 따라서 다시 (“玄”자字를) 더해서 “玄之又玄”이라 일컬은 것이다. 이른 바, 비록 ‘있음有’과 ‘없음無’이 같은 뿌리에서 생겨난 것임을 알아차리더라도觀, 만약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 마음心을 멈추거나(忘; 止)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행위跡를 멈추지 못한다면, 비록 (겉으로) 오묘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온전하게) 오묘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道를 알아차리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살피고 멈춤으로써殊, (오히려 만물과 서로 어울리고 아우르는) 큰 도道의 본질體과 작용中을 알지 못하고(不知; 玄), 무릇 ‘있음有’과 ‘없음無’을 분별하지 않으며(不絶; 玄), (겉으로 보기에) “玄妙”한 행위를 물리치고抑 멀리해야 하는데離, 따라서 “玄之又玄”이라 일컬은 것이다. (따라서) 도道를 알아차리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아) 마음에 품은 바懷를 내버리고忘, (크게 트여서) 만물物과 서로 어울리고 아우름으로써泯, 만물의 실상에 벗어나지 않고無往, 만물의 실정에 어긋나지 않는데不妙, 따라서 “衆妙之門”이라 일컬은 것이다. 따라서, 도道의 극점極과 조화되게 된다. 이 같은 일련의 도道에 대한 알아차림과 실천을 어찌 구구하게 말과 글로써 알게 하겠으며, 행하게 하겠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바로서 말하자면 모름지기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 바야흐로 (도道의) 오묘한妙 작용(中; 自然) 그것을 살펴서 알아차려야할見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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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바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10.23 초벌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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