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도가도道可道
道可道章, 卽是第一大段, 標道宗致. 就此章中, 又開四別. 第一, 略標理敎. 第二, 汎明本迹. 第三, 顯二觀不同. 第四, 會重玄之致.
도가도道可道 장은 (상권을 크게 나눈 세 단락 중) 첫 번째 큰 단락으로 도道에 대해 개요하고 있다. 이 장은 다시 네 개의 문단으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은 (자연 곧 도道 곧 본성으로서의) 리理와 교敎에 대해 설명한다. 두 번째 문단은 (도道의 자연한) 본체本와 작용迹에 대해 설명한다. 세 번째 문단은 (자연 곧 도道 곧 본성 곧 리理 곧 교敎를 실현하는) 2가지 방법의 차이를 설명한다. 네 번째 문단은 다시 한번 거듭 어렴풋할 것을 강조한다.
第一, 略標理敎.
첫 번째 문단, (자연 곧 도道 곧 본성으로서의) 리理와 교敎에 대해 설명한다.
道可道, 非常道.
도道를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도道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저절로 그러한 바로서의 도道가 아니다.
道以虛通爲義. 常以湛寂得名. 所謂無極大道, 是衆生之正性也. 而言可道者, 卽是名言. 謂可稱之法也. 雖復稱可道, 宜隨機愜當, 而有聲有說, 非眞常凝寂之道也. 常道者, 不可以名言辯, 不可以心廬知. 妙絶希夷, 理窮恍惚. 故知言象之表, 方契凝常眞寂之道. 可道可說者, 非常道也.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텅 비운 채, (만물과) 소통하는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뜻한다. “상常”은 (만물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없앤 채) 맑고 잠잠한 (자연의) 모습을 뜻한다. 이른바, (만물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끝점에 다다르며, (저절로 그러한 바가) 큰 (자연의) “도道”, 이것이 만물의 참된 본성이다. 그런데 “가도可道”는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은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이름 부른 것이다. (따라서) 비록 (일부러 일삼아) 이름 불러 “가도可道”한 것이 경우에 비추어 합당하더라도 (일부러 일삼아) 소리를 더하고 (일부러 일삼아) 의미를 담아낸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맑고 잠잠한 “도道”는 아니다. “상도常道”는 (일부러 일삼아 지은) 이름으로 말하거나 따질 수 없으며, (일부러 일삼아 부린) 마음으로 헤아리거나 알아차릴 수 없다. (“상도常道”는) 어렴풋한 바(妙; 저절로 그러한 바)가 끝점에 다다른 것으로서 들어보아도 또렷하게 들을 수 없고, (만물의 본성인) 리(理; 저절로 그러한 바)가 끝점에 다다른 것으로서 살펴보아도 뚜렷하게 살필 수 없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이) 말과 글에 따른 허상임을 알아차리고,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맑고 잠잠한 (실상인) “도道”를 헤아려야 한다. (요컨대) “가도可道”, (곧 일부러 일삼아 말을 더하고) 의미를 담아낸 것은 “상도常道가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
명名을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명名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저절로 그러한 바로서의 명名이 아니다.
名者, 敎也. 前言可道, 盛明於理. 今言可名, 次顯於敎. 眞理旣絶於言象, 至敎亦超於聲說. 理旣常道不可道, 敎亦可名非常名. 欲明理敎敎理, 不一而不異也. 然至道深玄. 不可涯量, 非無非有, 不斷不常. 而義有抑揚, 敎存頓漸. 所以立常以破可. 至論造極處, 無可無不可, 亦非常非不常. 故玉京經云, 無可無不可, 思與希微通.
“명名”은 (자연 곧 도道 곧 리理 곧 본성으로서의) 교敎를 뜻한다. 앞에서는 “가도可道”를 들어 (자연 곧 상도常道 곧 본성으로서의) 리理를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가명可名”을 들어 (자연 곧 리理 곧 상명常名으로서의) 교敎를 설명한다. (“상도常道”인) 참다운 리理가 본래 (일부러 일삼은) 말과 글을 벗어나 있듯이, (“상명常名”인) 지극한 교敎 역시 (일부러 일삼은) 소리와 의미를 넘어서 있다. (참다운) 리理는 본래 “상도常道”로서 “가도可道가 아니듯이”, (일부러 일삼은) 교敎 역시 “가명可名”으로서 “상명常名이 아니다.” (요컨대) 리理와 교敎, 교敎와 리理를 구별하면, 하나로 같지도 않고, 둘로 다르지도 않다. 덧붙여, (자연의) 지극한 도道는 본래 어렴풋하다. (일정한 부피나 질량이 있어서) 재어볼 수도 없고 달아볼 수도 없으며, (일정한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일정한 길이나 넓이가 있어서) 잘라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어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깨우치는 일에는 깊고 얕음이 있게 되고, 일깨우는 일에는 넓고 좁음이 있게 된다. 따라서 (“상도常道”와 “상명常名”의) “상(常; 저절로 그러한 바)”을 근거로 (“가도可道”와 “가명可名”의) “가(可; 일부러 일삼는 바)”를 경계했다. 깨우치는 일과 일깨우는 일이 끝점에 다다르면,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게 되고 (의지가)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일삼게 되는데, 이른바 (마음이) 저절로 그러하게 되고 (의지가) 일부러 일삼지 않게 된다. 따라서 『옥경경玉京經』은 일컬었다.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일삼게 되면, 의지가 본래 어렴풋한 바(微; 자연 곧 도道 곧 본성 곧 리理 곧 교敎)와 소통되게 된다.”
第二, 汎明本迹
두 번째 문단, (도道의 자연한) 본체(本; 體)와 작용(迹; 用)에 대해 설명한다.
無名, 天地始.
“무명無名”은 (저절로 그러한 도道의 본체로서) 천지의 시작이다.
始, 本也. 虛無至道, 淘萬物. 二儀三景, 何莫由斯? 故指此無名, 爲物之本. 道本無名. 是知不可言說明矣.
“시始”는 (천지의 시작으로서 도道의 저절로 그러한) 본체(本; 體)를 뜻한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의) 텅 빔과 (일부러 일삼는 바의) 없음이 끝점에 다다른 도道는 (저절로 그러하게) 만물을 빚는다.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무엇이 이것에서 말미암지 않았겠는가?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바”, 이것을 가리켜 만물의 (저절로 그러한) 본체本라 한다. (요컨대, 저절로 그러한) 도道는 (만물의) 본체本로서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다.” 이것은 말이나 의미로 설명될 수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有名, 萬物母.
“유명有名”은 (저절로 그러한 도道의 작용으로서) 만물의 어미이다.
有名, 迹也. 重玄之道, 本自無名. 從本降迹, 稱謂斯起. 所以聖人因無名立有名, 寄有名詮無名者. 方欲子育衆生, 令其歸本. 慈悲鞠養, 有同母儀.
“유명有名”은 (저절로 그러한 도道의) 작용(迹; 用)을 뜻한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거듭 어렴풋한 도道는 본래 저절로 그러해서,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붙일) “이름이 없다.” (저절로 그러한 도道의) 본체를 말미암아 (“무명無名” 곧 도道의) 작용迹이 일어나고, (비유컨대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바로서) 말과 글, 소리와 의미, (곧 “유명有明”) 이것이 생겨난다. 따라서 성인은 “무명無名”을 말미암아 “유명有名”을 시행하고, “유명有名”을 말미암아 “무명無名”을 실현한다. 이른바, (마치) 자식처럼 만물을 길러서, 그들이 본체本로 돌아가게 한다. 자비롭게 (만물을) 기르는 모습이 마치 (자식을 기르는) “어미”의 모습과 같다.
第三, 顯二觀不同.
(자연 곧 도道 곧 본성 곧 리理 곧 교敎를 실현하는) 2가지 방법의 차이를 설명한다.
常無欲, 觀其妙.
언제 어디서나 (마음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게 하라, (이른바, 만물의) 그 어렴풋한 바를 비추고 살펴라.
妙, 精微也. 觀, 照察己身也. 言人常能無欲無爲, 至虛至靜者, 卽能近鑒己身之妙道, 遠鑒至理之精微也.
“묘妙”는 (만물의) 본래 어렴풋한 바(微; 리理)를 뜻한다. “관觀”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비추고 몸을 살핀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마음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없게 해서, (몸에 일부러) 일삼는 바를 없게 하면, 이른바 (마음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빔에 다다르게 해서, (몸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잠잠함에 다다르게 하는 사람은 이내 가깝게는 마음과 몸의 어렴풋한 바인 도(道; 본성)를 비추고 살피게 되고, 멀게는 (만물의 본성이 끝점에) 다다른 리理인 본래 어렴풋한 바(微; 도道)를 비추고 살피게 된다.
常有欲, 觀其徼.
언제 어디서나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고자 하는 바를 있게 하라, (이른바, 만물의) 그 되돌아가는 바를 비추고 살펴라.
徼, 歸也. 欲, 情染也, 所境也. 言人不能無爲恬澹, 觀妙守眞. 而妄起貪求肆情染滯者, 適見世境之有, 未體卽有之空. 所以不察妙理之精微, 唯覩死生之歸趣也. 前明無名有名之優劣, 此顯無欲有欲之勝負也.
“요徼”는 (만물이) 되돌아가는 바(歸; 도道)를 뜻이다. “욕欲”은 (만물에) 본래 물들여진 바이자, (그러한) 바로서의 모습(境; 작용)을 뜻한다. (따라서) 사람이 (몸에 일부러) 일삼는 바를 없게 하지 못하고, (마음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텅 비게 하지 못하거나 잠잠하게 하지 못하면, (만물의 본래) 어렴풋한 바(妙; 도道)를 비추고 살펴야 하고, (만물이 되돌아가는) 참다운 바(眞; 리理)를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저절로 그러한 바로서의 모습을 일부러 일삼아) 치장하고 조작하며, 욕심내고 갈구하며, (만물의) 본래 물들여진 바를 경시하고 집착하게 되면, (그러한) 만물의 모습(境; 작용) 곧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 치우친 채, (그러하지 않은 만물의) 모습(體; 본체) 곧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텅 빔(空; 없음, 만물의 본래 물들여진 바이자 저절로 그러한 바)을 비추고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물의) 어렴풋한 리理 곧 본래 어렴풋한 바(微; 도道)를 비추고 살피지 못한 채, (일부러 일삼아) 삶을 죽임 곧 (일부러 일삼아 삶을 죽음으로) 되돌아가게 함과 다다르게 함을 비추고 살피게 된다. (덧붙여) 앞에서는 (자연 곧 도道의 본체와 작용으로서)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의 차이를 설명하고, 여기서는 (자연 곧 도道 곧 리理 곧 본성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무욕無欲”과 “유욕有欲”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第四, 會重玄之致
다시 한번, 거듭 어렴풋할 것을 강조한다.
此兩者同出而異名.
이 2가지는 나온 곳이 같지만, 이름이 다르다.
兩, 謂無欲有欲, 二觀也. 同出, 謂同出, 一道也. 異名者, 徼妙, 別也. 原夫所觀之境, 唯一. 能觀之智有殊. 二觀, 旣其不同, 徼妙. 所以異名.
“양兩”은 “무욕無欲”과 “유욕有欲”으로서 2가지 방법을 뜻한다. “동출同出”은 (2가지 방법이) 나온 데가 하나의 도道로서 (서로) 같다는 뜻이다. “이명異名”은 (2가지 방법은) “그 돌아가는 바를 비추고 살핌徼”과 “그 본래 어렴풋한 바를 비추고 살핌妙”으로서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그런데) 2가지 방법은 만물 속의 리理인 도道와 자기 몸 안의 본성인 도道를 저절로 그러한 바(자연)로 보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저절로 그러한 바(자연)를 따름에 있어서, 마음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게 함”으로써,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아야 한다는 것과 마음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게 함”으로써,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아야 한다는 것에는 실천적 과정 상 인식과 행위의 양식에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2가지 방법은 (“일삼고자 하는 바欲”에 대한 실천적 과정 상 인식과 행위의 양식) 그것이 (‘그 돌아가는 바를 비추고 살핌徼’과 ‘그 본래 어렴풋한 바를 비추고 살핌妙’으로 서로) 같지 않다. 따라서 (서로) “다르게 이름 지어 불렀다.”
同謂之玄.
같이 나온 곳을 일컬어 어렴풋하다고 한다.
玄者, 深遠之義, 亦是不滯之名. 有無二心, 徼妙兩觀, 原乎一道. 同出異名. 異名一道. 謂之深遠. 深遠之玄, 理歸無滯, 旣不滯有, 亦不滯無. 二俱不滯, 故謂之玄.
“현玄”은 (마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대해) 잠잠하다는 뜻이자, (행위가 그것을)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 “그 돌아가는 바”를 비추고 살피는 방법과 “그 본래 어렴풋한 바”를 비추고 살피는 방법은 하나의 도道를 말미암는다. (이른바) “나온 곳이 같지만, 이름이 다르다.” (“같이 나온 곳”과) “다른 이름”은 하나의 “도道”를 말미암는다. 그것을 일컬어 잠잠한 바라 한다. (도道 곧) 잠잠한 바 곧 “어렴풋한 바”는 (만물 속의 자연 곧 도道인) 리理로 돌아가 (일부러 일삼는 바를) 집착하지 않는다. 요컨대, (마음心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거나 행위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거나 행위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2가지 모두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 그것을 일컬어 “어렴풋한 바”라 한다.
玄之又玄.
어렴풋하고 또한 어렴풋하라.
有欲之人, 唯滯於有, 無欲之士, 又滯於無. 故說一玄, 以遺雙執. 又恐行者滯於此玄, 今說又玄. 更祛後病. 旣而非但不滯於滯, 亦乃不滯於不滯. 此卽遺之又遺. 故曰玄之又玄.
(마음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 사람도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있는 바에 대해 (행위로) 집착하고, (마음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사람도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바에 대해 (행위로) 집착한다. 따라서 한 번 “어렴풋하라”고 일컬음으로써, (일삼고자 하는 바와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는 바에 대한 마음의) 2가지 집착을 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어렴풋한 바를) 실현하는 사람이 어렴풋한 바를 (행위로) 집착할 것을 걱정해, 곧바로 “또한 어렴풋하라”고 일컬었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붙인 이름으로서의 어렴풋한 바를 행위의 대상으로 삼는) 병病을 버리게 하였다. 요컨대, 먼저 (마음으로) 집착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한 다음, (행위로)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하였다. 이것이 곧 버리고 또 버림이다. 따라서 “어렴풋하고 또한 어렴풋하라”고 일컬었다.
衆妙之門.
만물이 어렴풋한 바를 실현하는 방법이다.
妙, 要妙也. 門, 法門也. 前以一中之玄, 遺二偏之執. 二偏之病旣除, 一中之藥還遺. 唯藥輿病, 一時俱消, 此乃妙極, 精微, 窮理, 盡性. 豈獨群聖之戶牖? 抑亦衆妙之法門.
“묘妙”는 (자연 곧 도道 곧 리理 곧 본성인) 어렴풋한 바를 실현한다는 뜻이다. “문門”은 어렴풋한 바를 실현하는 방법을 뜻한다. 먼저, 한 번 잠잠하게 함 곧 어렴풋하게 함으로써, (일삼고자 하는 바와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부를 이름이 있는 바에 대한 마음과 행위의) 2가지 치우침 곧 집착을 버려진다. (마음의) 2가지 치우침 곧 병病이 이미 버려짐은 한 번의 잠잠하게 됨 곧 (어렴풋하게 됨 곧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부를 이름이 있는 바와 없는 바에 대한 행위의 2가지 치우침이 다시 버려짐 곧 집착이 다시 버려짐 곧) 약藥이 다시 버려짐이다. 오직, 약藥과 병病이 한 번에 함께 버려진 때, 이것이 이내 어렴풋한 바가 끝점에 다다른 때, 본래 어렴풋한 바의 때, (자연 곧 도道인) 리理를 끝점에 다다르게 한 때, (자연 곧 도道인) 본성을 끝점에 다다르게 한 때이다. (이것이) 어떻게 성인들만의 어렴풋한 바를 실현하는 방법이겠는가? 아마도 만물이 어렴풋한 바를 실현하는 방법일 것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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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바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1.26 서로의 공부를 나누고자 합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
작성자바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1.26 성현영은 당나라 태종(626~649) 때 사람으로 도교의 도사이자 대표적 이론가였다. 시호는 서화법사이다. 그러나 성현영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신당서" 예문지에 따르면, 성현영이 "노자도덕경주" 2권, "개제서결의소" 7권, "장자주" 30권, "장자소" 12권을 남겼다고 한다. 이 기록 뒤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붙어 있다. "현영의 자는 자실이고 섬주 사람이다. 동해에 은거하다가 정관 5년에 경사로 초빙되었다. 영휘 연간에 욱주로 유배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도교가 불교의 이론을 받아들여 보다 정교해지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으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