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불상현不尙賢
就此一章, 分爲三別. 第一, 汎擧三不以戒行人. 第二, 獨顯聖人虛懷利物. 第三, 重勅學人令忘知會道.
이 장은 세 문단으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3가지에 대해 설명한다. 두 번째 문단, (마음에) 품은 (일삼고자 하는) 바를 텅 비움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하는 성인에 대해 설명한다. 세 번째 문단, (도道를) 배우는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은 앎知을 잊어버림으로써 도道와 조화되어야 함會을 설명한다.
第一, 汎擧三不以戒行人.
첫 번째 문단,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3가지에 대해 설명한다.
不尙賢, 使民不爭.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남보다) 잘하는 바를 귀하게 여기거나 대하지 말아야 하는데, (세간의) 사람들이 다투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尙, 貴也. 賢, 能也. 非謂君王不尙賢人, 直是行人撝謙先物後己, 不自貴尙而賤人也. 而言不爭者, 若人人自貴而賤物, 則浮競互彰, 各各退己而先人, 則爭忿自息. 故云不爭也.
“상尙”은 귀하게 여기고 대한다는 뜻이다. “현賢”은 (남보다) 잘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불상현不尙賢”은) ‘임금은 (남보다) 잘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거나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은 겸손을 귀하게 여기고 대함撝으로써 천하物를 앞이 되게 하고 자신을 뒤가 되게 해야 하며, 스스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대함으로써 타인을 천하게 여기거나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부쟁不爭”을 일컬은 까닭은 예를 들어 사람들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대함으로써 천하物를 천하게 여기거나 대하게 되면, 서로의 귀함과 천함彰에 대한 다툼이 일어나게 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뒤로 물리고 타인을 앞에 세우게 되면, (뒤가 됨과 앞이 됨에 대한) 다툼과 성냄이 저절로 사그라들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컬었다. “다투지 않게 된다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盜.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거나 대하지 말아야 하는데, (세간의) 사람들이 훔치거나 빼앗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難得之貨, 謂陏珠, 荊璧, 垂棘, 照車也. 若使普天貴寶, 則盜賊斯生, 率土賤珍, 則濫竊不起. 故言不盜.
“난득지화難得之貨”는 (예를 들어) 주周나라 제후국의 하나인 수隋나라 제후가 가지고 있던 보석인 타주陏珠, 초楚나라 문文임금 때 화和씨가 가지고 있던 보석인 형벽荊璧, 춘추시대 진晉나라에서 나왔던 보석인 수극垂棘, 전국시대 위魏나라 혜惠임금이 가지고 있던 보석인 조거照車를 일컫는다. (“불도不盜”라고 일컬은 까닭은) 예를 들어 천하普天가 보배를 귀하게 여기고 대하게 하면, 훔침과 빼앗음이 생겨나게 되지만, 천하率土가 보배를 천하게 여기고 대하게 하면, 훔침과 빼앗음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일컬었다. “훔치고 빼앗지 않게 된다.”
不見可欲, 使心不亂.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고자 할 만한 바를 보이지 말아야 하는데, (세간의 사람들)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可欲者, 卽是世間一切, 前境色聲等法, 可貪求染愛之物也. 言不見者, 非杜耳目以避之也. 妙體, 塵境虛幻. 竟無可欲之法. 推窮根塵不合故也. 旣無可欲之境. 故恣耳目之見聞, 而心恒虛寂. 故言不亂也. 故西昇經云, 譬如鏡中影, 可見不可取. 又云, 欲視, 亦無所見. 欲聽, 亦無所聞. 前不盜不爭是別, 今不見可欲是總, 違三業乃一切法也.
“일부러 일삼고자 할 만한 바可欲”는 앞서 말한 바境인 (일부러 일삼은) 색깔이나 소리 등의 것들法로서, (세간의 사람들 모두가 일부러 일삼아) 탐내고 구하며 물들고 기쁘게 여기며 친하게 대할愛 만한 것들物이다. “보이지 마라不見”는 말은 귀를 막고 눈을 가림으로써 그것들을 멀리하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어렴풋한 본체(體; 도道)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티끌됨境이 텅 비고 잠잠한幻 바法이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할 만한 바가 없음에 다다르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보이지 마라不見”라는 말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어렴풋한) 본체根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티끌됨이 (서로) 조화되지 못함을 미루어 살피게 하고, (서로) 근거가 되지 못함의 끝점에 다다르게 하라는 뜻이다. (요컨대,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고자 할 만한 바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세간의 사람들 모두가) 일부러 일삼고자 할 만한 바가 없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귀가 듣는 대로 듣게 되고, 눈이 보는 대로 보게 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 그들의) 마음이 언제 어디서나 텅 비게 되고 잠잠하게 된다. 따라서 일컬었다. “(그들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 따라서 『서승경西昇經』은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비고 잠잠한 마음은)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과 같다. 볼 수는 있지만, (또렷하게) 볼 수가 없다.” 또한, 일컬었다. “보고자 하지만, (또렷하게) 보이는 바가 없다. 듣고자 하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바가 없다.” 앞의 “~ 다투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와 “~ 훔치거나 빼앗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는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바를 2가지로) 세분하는 문장이며, 지금의 “일부러 일삼고자 할 만한 바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 ~”는 (세분한 앞의 2가지를) 총괄하는 문장인데, 몸(행위)과 입(언어)과 뜻(의지)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비롯한 일부러 일삼는 모든 것들法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第二, 獨顯聖人, 虛懷利物
두 번째 문단, (마음에) 품은 (일삼고자 하는) 바를 텅 비움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하는 성인에 대해 설명한다.
聖人治, 虛其心
성인의 다스림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천하의 마음을 텅 비운다.
聖人治, 同前釋. 旣外無可欲之境, 內無能欲之心. 心境兩忘. 故卽心無心也. 前旣境幻, 後又心虛也.
“성인의 다스림聖人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성인의 다스림”은) 밖으로 일부러 일삼을 만한 바가 없게 하는 모습境을 띠며, 안으로 일부러 일삼거나能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없게 하는 모습을 띤다. (따라서 천하는 안팎으로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삼는 바) 모두가 잊힌 마음의 모습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천하는) 마음을 쓰지만, (일부러 일삼아) 쓰는 마음이 없게 된다. 앞에서 말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잠잠한幻’ 모습이란 여기서 말하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이 “텅 빈” 모습이다.
實其腹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천하의 배를 채운다.
雖復卽心無心, 而實有靈照. 乃言妙體虛寂, 而赴感無差, 德充於內. 故言實其腹也.
마음을 쓰지만, (일부러 일삼아) 쓰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데, 따라서 (마음에) 신령스러운 바(靈; 도道)가 “채워지게 되고”, (마음이 신령스럽게 살피고) 비추게 된다. 왜냐하면, 어렴풋한 본체(體; 도道)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빈 채 잠잠한데, 따라서 (손은 모으고 앉아 있을 때나 팔을 걷어 올리고 일삼을 때나 마음의) 모습感이 차이가 없게 되고, (마음의 모습이) 차이가 없음에 다다르게 되며, (따라서 도道의 작용인) 덕스러움德이 (마음) 안에 채워지게 된다. 따라서 일컬었다. “천하의 배를 채운다.”
弱其志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천하의 뜻을 연하게 한다.
旣內懷實智, 而外弘接物. 處俗, 同塵. 柔弱, 退己也.
안으로 (어렴풋한 본체인 도道에 대한) 앎智을 품고 “채우게 함”으로써, 밖으로 천하物와 두루 조화되게 한다接. (다시 말해) 천하俗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티끌이 되게 한다. (말하자면, 일부러 일삼아 앞에 서고자 하는 “뜻”을) 부드럽고 “연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뒤로 물리게 한다.
强其骨
천하의 뼈를 강하게 한다.
骨, 譬內也. 言聖人, 雖復外示和光, 而內恒寂泊. 欲明動, 不傷寂. 應, 不離眞. 故言强其骨也.
“뼈骨”는 비유컨대 ‘속모습’이다. 성인은 (일부러 일삼아) 빛나게 하고 조화되게 하는 ‘겉모습’을 띠지만, ‘속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잠잠하고 담담하다. (따라서 성인은) 일부러 일삼아 (천하를 빛나게) 밝히고 움직이고자 하지만, (천하는 자신의 담담함과) 잠잠함을 망가뜨리지 않게 된다. (성인은 일부러 일삼아 천하를 두루) 조화시키고자 하지만應, (천하는 자신의) 참된 바(眞; 도道)에서 멀어지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일컬었다. “천하의 뼈를 강하게 한다.”
第三, 重勅學人, 令忘知會道.
세 번째 문단, (도道를) 배우는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은 앎知을 잊어버림으로써 도道와 조화되어야 함會을 설명한다.
常使民無知無欲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없게 하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게 한다.
知者, 分別之名. 欲者, 貪求之目. 言聖人常以空慧, 利益蒼生. 令倒置之徒, 息分別之心, 捨貪求之欲也.
“지知”는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른다는 뜻이다. “욕欲”은 (일부러 일삼아) 탐하고 구한다는 뜻이다. 성인은 언제 어디서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빈 앎慧로써 천하蒼生를 이롭게 한다. (다시 말해, 성인은) 일부러 일삼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마음을 비우게 하며息, (일부러 일삼아) 탐하고 구하고자 하는 바를 버리게 한다捨.
使知者不敢不爲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사람들이 감히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을 도道로써) 일삼지 못하게 한다.
前旣捨有欲, 得無欲. 復恐無欲之人, 滯於空見, 以無欲爲道. 而言不敢不爲者. 卽遣無欲也. 恐執此, 不爲故繼以不敢也.
앞에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을 버리고捨,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을 취하라得”고 했다. 여기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없게 한 사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텅 빔’이라는 이름見에 집착滯한 채,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빈)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을 도道로써 일삼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따라서 일컬었다. “감히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을 도道로써) 일삼지 못하게 한다.”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을 버리게 한다遣. (요컨대, 여기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 그것에 집착執할 것을 걱정했는데, 따라서 “불위不爲” 앞에 “감히不敢”라고 일컬었다.
則無不治
따라서 바로잡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
治, 正也. 行人, 但能先遣有欲, 後遣無欲者. 此, 則雙遣二邊, 妙體一道, 物我齊觀, 境智兩忘. 以斯爲治, 理無不正也.
“치治”는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이란 먼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을 버리고遣, 그 다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을 버리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의) 모습이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의) 2가지 끝점邊이 모두 버려진 모습이자, 어렴풋한 본체體인 도道와 하나가 된 모습이며, 천하物와 자기 자신이 나란하게齊 보여지는 모습이자, (2가지 끝점이) 모두 잊혀진 앎智의 모습境이다. (따라서) 그러한 모습으로써 다스리게 되면, 다스림理에 있어서 바로 잡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