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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의 도덕지귀 : 도덕지귀서道德指歸序

작성자바랑|작성시간24.08.05|조회수3 목록 댓글 1

도덕지귀서道德指歸序

 

 

君子之心, 廣大公平. 雖於害己之小人, 未嘗以不情之說加之. 豈以其學之不同, 而加之以不情之說哉!

(옛날의 중국 유학儒學의) 군자君子가 쓴 마음은 크게 고른 모습이었다. (따라서 그 배운 바가 달라) 자기를 비판하는 소인小人에 대해 그러하지 못한 마음을 쓰거나 말을 하는 바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는) 그 배운 바가 (자기와) 같지 않다고 하여, (그 가르친 사람에 대해) 그러하지 못한 마음을 쓰고 말을 하는가!

 

 

老子之學, 切近儒學. 其說造化, 說事情. 雖儒學不能易也. 但以道德仁義分而爲二, 自仁義以下, 不使與於道. 此其所以與儒學異也.

노자가 가르친 바는 “(당시의) 유학儒學이 (더불어) 가까이 하던 바(近; 有爲)를 끊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자는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바無爲와 더불어) 어우러지고,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와 더불어) 아우러지라”고 일컬었으며,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바無爲로써 일을) 일삼고,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로써) 마음을 쓰라”고 일컬었다. 따라서 (노자가 가르친 바는 당시의) 유학儒學이 쉽게 (더불어 가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노자는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이면서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바無爲인 자신의) 도道나 덕스러움德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바有爲인 당시의 유학儒學의) 인仁이나 의義와 (더불어 두 가지로) 나뉘게 함으로써, (그) 두 가지가 (더불어 멀리하는 바가) 되게 했고, (당시의 유학儒學의) 인仁이나 의義가 (자신의 덕스러움德이나 도道의) 아래에 자리하게 했으며, (당시의 유학儒學의 인仁이나 의義가 자신의 덕스러움德이나) 도道와 더불어 (쉽게 가까이) 할 수 있는 바가 되지 못하게 했다. 이로써, 노자의 가르침은 (당시의) 유학儒學(의 가르침)과 더불어 다른 류(類; 所)가 되었다.

 

 

儒學以是絀老子, 夫誰曰: 不可. 今乃不然. 而執末流之弊, 以爲其師之罪. 且曰: 吾先師孔孟, 亦嘗斥之也. 以余之不爲老子者, 亦未見其然. 况爲老子者乎!

(이후의) 유학儒學을 배우는 중국의 누구나는 따라서 노자를 물리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후의 유학儒學을 배우는 중국의) 누구나는 일컫게 되었다. “(노자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는 것이 옳다.” 지금, 따라서 (유학儒學을 배우는 조선의 누구나는) 일컫는다. “(노자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아름답지 못한 나무람을 거침없이 내뱉던 조선의) 말세적 폐단을 (그대로) 붙잡은 것이자, 그러한 스승의 과오를 (그대로) 일삼은 것이다. (유학儒學을 배우는 지금의 조선의 누구나는) 또한 일컫는다. “나는 일찍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스승으로 삼았다. 따라서 (나는) 일찍이 노자를 물리쳤다.” (그러나) 따라서 (유학儒學을 배우는 지금의 조선의) 누구나는 (옛날의 중국 유학儒學의 군자와 같이 크게 고른 마음의 모습으로써) 노자(가 가르친 바)를 일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따라서 (노자가 가르친) 그 저절로 그러한 바(然; 自然·無爲·道·德·性·命)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옛날의 중국 유학儒學의 군자와 같이 크게 고른 마음의 모습으로써) 노자(가 가르친 바)를 일삼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야!

 

 

太史公, 稱學老子者, 絀儒, 學儒學, 亦絀老子. 言其學之者, 相訾嗸也. 世或因此, 謂孔孟亦絀老子. 今考孔子之書, 無一言及於老子. 自易詩書春秋, 以至論語禮記, 皆然. 且如孟子, 以拒跛息邪爲己任. 其言, 丁寧反復闢之, 不遺餘力. 然雖尋常言語, 一未聞譏誚老子. 似若不見其書者, 今以孔孟之言, 而爲斥老子之證夫, 豈其情乎!

(전한前漢시대 초기) 사마천(司馬遷, BC.145~86)은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서) “(세상에서) 노자(가 가르친 바)를 배우는 사람은 유학儒學을 물리치고, 유학儒學을 배우는 사람은 또한 노자(가 가르친 바)를 물리친다”라고 일컬었다. 그 배우는 바와 (배우는) 사람이 (당시에) 더불어 나무라고 싸웠다는 것이다. (유학儒學을 배우는 지금의 조선의) 세상은 따라서 이것을 말미암아 일컫는다. “(춘추春秋시대) 공자와 (전국戰國시대) 맹자가 또한 (당시에) 노자를 물리쳤다.” (그러나) 지금 (내가) 공자의 책을 살피건대, (공자가) 노자에 대해 일컬은 것은 한 문장도 없다. 『역경易經』·『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에서부터 『논어論語』·『예기禮記』에 이르기까지, 모두에서 그러하다. 또한, 비유컨대 맹자는 (유학儒學이 자신의 본질인 인仁·의義를 벗어난 채,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가 되는 것을 막고, (복福을 비는) 무당이 되는 것을 막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따라서) 맹자의 일컬음은 정말로 (유학儒學이 본질인 인仁·의義) 그것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그것을) 되돌이키게 하며, (그것을) 열어젖히게 하는 데, (그) 힘을 남겨두거나 떠나보내지 않았다. 이른바, (맹자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그러하게 (유학儒學의 본질인 인仁·의義에 대해) 일컬었는데, 따라서 (나는 맹자가) 노자를 꾸짖거나 나무라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따라서 공자와 맹자의 책을 살피지 않은 사람이 지금 공자나 맹자를 일컬음으로써, (자신이) 노자를 배척하는 근거로 일삼는다면, 어찌 그것이 실상에 맞는 일이겠는가!

 

 

學之有弊. 非其學之罪也, 學之者, 失其傳也. 莊生之荒唐, 申韓之慘刻, 東晉之淸虛. 皆自托老子, 以售其道. 而氣象規摹, 初不髣髴於老子. 漢初張子房, 受黃石之訣, 善學老子流風, 傳襲終漢之世. 孝文帝曹參賈誼汲黯, 皆以淸修玄黙爲榦於政事法度, 遂使劉向稱其君人南面之術, 司馬談贊其事少功多之利. 今以末流之弊, 而爲斥老子之案, 則又豈情乎!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는 일컫는다) “노자의 가르침은 폐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노자의 가르침이 (본래부터 그러한) 과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노자 이후) 노자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들이 노자가 전한 바를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국戰國시대) 장자(莊子, BC.369~286)는 (기氣로써 노자가 전한 도道를) 덮어 감추었고, (같은 시대) 신불해(申不害, BC.385~337)와 한비자(韓非子, BC.280~233)는 (형刑·명名과 법法·술術·세勢로써 노자가 전한 도道를) 쪼아 새겼으며, (위진魏晉시대) 동진東晉(의 왕필王弼, 226~249)은 청淸·허虛로써 (노자가 전한 도道를) 일삼았다. 이른바, 모두 노자(가 전한 바)를 기대었지만, (비유컨대 노자가 전한 본래의 도道가 아니라, 일부러 일삼은) 자신의 도道를 (세상에) 내다팔았던 것이다. 이른바, (그 배운 바의) 모습이 아예 노자(가 가르친 바)와 비슷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전한前漢漢시대 초기 장량(張良, ?~BC.189)은 (황석공黃石公에게) 『황석지결黃石之訣』을 건네받아, (비유컨대) 노자가 흘려보낸 바람(風; 道)을 배우기를 잘함으로써, 후한後漢시대 말기까지 (그것이) 건네지고 이어지게 되었다. 효문제孝文帝·조참曹參·가의賈誼·급암汲黯은 모두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아주) 어렴풋한 바(玄; 性·陰陽·自然·道)와 어슴푸레한 바(黙; 命·五行·無爲·德)를 (스스로) 맑게 닦는 일로써 다스림의 대들보를 삼았는데, (따라서) 유향(劉向, BC.77~6)에 이르자, “그러한 임금과 신하는 (모두 두 손을 모은 채 남쪽을 보는) 남면(南面; 無爲·自然)의 통치술을 펼쳤다”라고 일컫게 했으며, 사마담(司馬談, ?~BC.110)에 이르러, “그러한 (임금과 신하의) 일삼음은 (들이는) 공능功能을 줄어들게 하면서 (거두는) 이익을 늘어나게 하는 일삼음이다”라고 기리게 했다. (따라서 조선의 군자는) 지금 (또한) 이른바 (아름답지 못한 나무람을 거침없이 내뱉는) 말세적 폐단을 가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노자의 가르침(案; 學)에 대해 (그러한) 물리침을 일삼게 되었는데, 따라서 또한 어찌 (그것이) 실상에 맞는 것이겠는가!

 

 

大抵當程朱之時, 老佛之學, 日新月盛. 天下之學, 不入於佛, 必入於老. 其爲儒道之障礙極矣. 故不得不辭而闢之. 使向於彼者輕, 則向於此者重. 此聖賢救時矯弊之意也. 然其美者, 未嘗不美之. 蔡季通謂老子大段鼓動人, 而朱子是之, 又稱其工夫極難. 顧其心, 不亦廣大公平也乎!

이른바, 정자(程頤, 1033~1107)와 주자(朱熹, 1130~1200)가 살았던 시대, (노자를 높이던) 도교道敎와 (석가모니를 받들던) 불교佛敎(의 위세)가 날마다 새로워지고 달마다 두터워졌다. (따라서) 세상이 불교에게 찾아들지 않으면, 반드시 도교에게 찾아들었다. (따라서) 그 유학儒學의 도(道; 仁·義)를 일삼음이 가로막히거나 잘려 끊어지는 바가 아주 심했다. 따라서 (정자와 주자는) 도교와 불교를 멀리하거나 물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자와 주자는 세상 사람들이) 도교와 불교가 (인仁·의義를) 가볍게 여기는 것에 대해 살피게 했는데,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유학儒學이 (인仁·의義에 대해) 무겁게 여기는 것을 살피게 되었다. (이른바, 당시에 유행하던 도교와 불교가 인仁·의義에 대해 가볍게 여겼던 것) 이것이 정자와 주자가 (자신들의) 시대를 구제하고, (세상의) 폐단을 교정했던 이유였다. 따라서 (정자와 주자는 비유컨대) 도교와 불교의 아름다운 바(美; 自然·無爲, 緣起·無心), 그것을 아름답지 않게 여기는 바가 일찍이 없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제자) 채원정蔡元定이 “도교는 세상 사람들을 크게 일깨우고 북돋우며 일삼는 가르침이다”라고 일컫자, 주자는 “그렇다”라고 일컫고, 또한 “그러한 가르침이 아주 드물다”라고 일컬었다. 주자의 마음을 살피건대, 또한 (옛날의 군자와 같은) 크게 고른 마음이 아니겠는가!

 

 

乃後之儒者, 徒襲傳聞. 以絀老爲家計. 必肆其醜詆. 加之以不情之說. 吾恐見絀者之未能服其平也. 非惟見絀者之未能服其平, 在我誠有不平者存也. 然其不平者, 由不得老子之情也. 不得老子之情者, 由不得老子之言也. 余故於老子之道德五千言, 章解句釋, 明其指歸. 盖非爲老子也. 爲吾儒之功老子者, 平其情也.

(옛날의 중국 유학儒學의 군자가 노자에 대해 썼던 크게 고른 마음의 모습은 이러했다) 그런데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는 (그러한 마음의 모습이 아니라, 스승이) 이어주는 바대로 나아가고, 들려주는 바대로 전해 받는다. (비유컨대, 스승이) 노자를 물리치는 바로써 (자신이) 집안(家; 心)을 꾀하는 바로 삼는다. (따라서) 반드시 그 아름답지 못한 나무람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른바,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는 옛날의 중국 유학儒學의 군자와 달리 노자에 대해 크게) 고르지 못한 마음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아름답지 못한 나무람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노자를) 물리치는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가 가진 (비유컨대) 그 고른 마음의 옷을 걸치지 못한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그 아름답지 못한 나무람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노자를) 물리치는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가 가진 (비유컨대) 그 고른 마음의 옷을 걸치지 못한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보았는데, (따라서) 나에게 자리하게 된 바는 ‘(노자에 대해 본래부터) 고르지 못한 마음을 가진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는 진실로 자리하지 않는다. 이른바, (노자에 대해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가 가진 마음이) 고르지 못한 것은 노자가 가르친 실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가) 노자가 가르친 실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노자가 일컬은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서) 노자의 도道와 덕스러움德에 관한 오천 자字의 장章·구句를 풀이하고, 그 (실상이) 가리키는 바와 (말이) 돌려주는 바에 대해 밝힌다. 이른바, (이 책은) 노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노자에 대해 크게 고른 마음을 썼던 옛날의 중국 유학儒學의 군자와 달리 그 아름답지 못한 나무람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노자를 물리치는 지금의 조선 유학儒學의 군자를 위한 것으로서, (노자에 대한) 그 마음을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己丑, 淸明日, 達城徐命膺書.

1769년, 음력 3월 초, 달성 서씨 명응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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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바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05 우리나라 조선시대 서명응(1716~1787)이 도덕경에 주석한 도덕지귀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오늘 서문을 번역했다. 올 연말에 마무리해 볼 생각이다. 이 시점에서는 늘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한다. 잘 할 수 있을지, 어떤 내용이 있을지... 우리나라 주석본을 당분간 연속 번역할 생각이다. 그리고 다시 중국 주석본을 번역해 볼 생각이다. 중국 송대~청대의 주석본에 집중해 보고 싶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또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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