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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은 어디에 있었나?

작성자천상희|작성시간13.11.28|조회수674 목록 댓글 3

 

<전에 쓴 글 입니다만, 약간의 생각한 바를 더하여 쓴 글 입니다.>

 

일동기유(日東記游)란 문헌이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아주 생소할 문헌일런지 모릅니다.

일동기유(日東記游)란 문헌을 "네이버 백과"를 통해서 보면,



1876년(고종 13)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金綺秀:1832∼?)의 견문기록으로 수필로 된 원본 4권으로 되어있으며,규장각 도서이며,

끝에 후서(後敍)가 붙어있는데,후서에 의하면 김기수가 일본에 갔다온 다음해인 1877년에 황해도 곡산군수로 있을때 정리한 것이라 합니다.

제1권에는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수록했고,2,3권에서는 일본의 여러 인물들과의 교유하고 문물을 견문한 내용,4권은 귀국하여

별단을 올리기 까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동기유에 대한 책 소개 외에 이 책의 저자인 김기수에 대해 "네이버 백과"를 통해서 보면,



본관 연안,자 계지(季芝),호 창산(蒼山),서울 출생. 1875년(고종 12) 현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응교(應敎)로 뽑혔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근대의 한일교섭의 시초이다. 견문을 기술한 일동기유,수신사일기 등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폐쇄되었던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신사유람단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



"일동기유(日東記游) 제 3권 정법(政法) 22칙"의 소개된 내용을 보면 김기수가 일본에 수신사로

가서 일본의 정치상황이 막부체재에서 천황 친정체재로 변한 상황,즉 메이지유신 이후의 정치상황에 대해 기록한 글입니다.

일본의 정치상황 소개에 앞서 일본의 근원에 대한 글이 있는데 이를 보면,



"일본이 건국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는데, 그 황실(皇室)의 계통과 관백(關白)이 섭정할 때의 정령(政令)과 제도는, 전인의 기술(記述)이 있으므로 지금 번거롭게 기술할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가 사행(使行)으로 가서 머무는 동안에 보고 기억한 것만 기록하여, 훗날의 고열(考閱)에 제공하는 바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본은 주(周) 나라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의 후손[後裔]이다.”
하였다. 《사기(史記)》에, ‘태백과 중옹이 천하를 계력(季歷)에게 양보하고 채약(採藥)한다고 핑계하고는 형만(荊蠻)으로 도망해 가서, 단발 문신(斷髮文身)을 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하니,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구오(句吳)는 그 후손인 것이다. 일본 땅은 중국의 강절(江浙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과 한 홍수(泓水)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강절은 오(吳)ㆍ월(越)의 유지(遺地)인 것이다. 그 자손(子孫 태백과 중옹의 자손)이 저쪽에 있는 것은 오 나라가 되고, 이쪽에 있는 것은 일본이 되었던 것이다. 이마에 물색(物色)을 새기는 것이 즉 문신(文身)이요, 단발(斷髮)하는 것은 서양인과 교통한 후의 일인데, 사람마다 그것이 건국 당시의 예전 제도라고 변명하고 있으니, 단발과 문신은 태백ㆍ중옹 그 당시에 처음으로 변한 형상인 것이다. 태백ㆍ중옹의 그 당시 일을 공자(孔子)는 지덕(至德)이라고 칭도(稱道)하였으니, 그 마음(태백의 마음)을 살펴본다면,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세상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이역(異域)을 낙지(樂地)처럼 여기고 형체를 훼상(毁傷)하는 것도 진실로 달게 여겼으나, 그 자손된 마음으로서 소급해 생각한다면, 또한 한 가지 인륜(人倫)의 크나큰 사변(事變)인 것이다. 친척과 헤어지고 향리(鄕里)를 버리며, 관면(冠冕)을 버리고 의상(衣裳)을 저버리면서까지, 당당한 중국 성인의 후손으로서 오랑캐 지역과 오랑캐 종족이 되었으니, 슬픈 원한이 뼈에 사무침을 다시 어떻다고 표현하겠는가? 그러므로 그 조상이 처음 변했던 형상을 다시 바꾸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지극한 원통을 표시한 것이라면, 이것은 일본인이 단발 문신을 옛날 제도라고 스스로 일컫는 것 또한 의심할 만한 한 가지 일인데, 옛말에도 화인(和人 일본인)을 태백ㆍ중옹의 후손이라 한 것이 있다."



여기서 저자는 어느 혹자의 말을 빌어서 “일본은 주(周) 나라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의 후손[後裔]이다.” 또한 글의 말미에 있는 글처럼 "옛말에도 화인(和人 일본인)을 태백ㆍ중옹의 후손이라 한 것이 있다."

라는 글의 논거로서 문헌적으로 사기(史記)의 기록을 말했으며 ,강절지방은 오나라,월나라의 옛땅이고 그리고 일본땅은 대륙의 강절지방(강소성,절강성)과 홍수(泓水) 사이에 있으므로 일본인은 태백과 중옹의 자손이 맞다는 기록입니다.

저자가 만약 지금의 일본 열도에 갔다면 이런 글을 남길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역대의 어느 문헌을 보아도 막연하게 일본은 어느 나라 남쪽,동쪽에 있다.라는 기록만이 존재하였지, 이처럼 구체적으로 일본이 어디에 있었다고,

지명을 언급한 문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일제시대에 교열을 통한 조작으로 인한 결과로 보입니다. 상대적으로 옛날 학자들의 문집은 비교적 교열의 손길이 덜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륙에 일본이 있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헌은 "일동기유"가 최초 일겁니다. 일동기유의 저자 또한 그 당대의 유명한 학자였습니다. 사실에 대한 무지에 의한 결과로 쓰여진게 아니라 그 당대의 상황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기술했던 겁니다. 제가 일전에 글을 올렸던 "동남아와 조선사"에 쓴 글 중에서 현재의 대륙의 지도가 서구의 서세동점기에 서구의 침략사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서쪽에 있던 원래의 지명들이 동진되어 있고,

그 동진에 밀린 지명들이 다시 남쪽으로 동쪽으로 밀려난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지도가 대륙의 지도라고 쓴바 있습니다. 만약 "일동기유"의 저자인 김기수의 시대에 이러한 지도상의 내용이 반영된 상황이라면 그 당대의 대학자가

일본이 대륙에 있었다는 어이없는 황당한 기록을 남기겠습니까? 제가 일전에 쓴 글처럼 서구의 침략사관이 개입되어 고착화된 대륙의 지도상에선 일본이 대륙에 발 붙일 여력의 공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일동기유"에서는 일본이 대륙에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알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서구의 서세동점기적인 침략사관에 의한 대륙의 지도,현황이 "일동기유"의 저자인 김기수의 시대까지만 해도,정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 당시 서구의 침략사관에 의한 대륙지도는 진행형 이었습니다. 서구의 침략사관에 의한 대륙지도는 그 당대에 고착화 된게 아닌 진행중이었다는 증거가 김기수가 남진 "일동기유"인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연구과제가 주어졌는데,일본이 대륙에 있었다는 "일동기유"의 근거자료를 통해서 대륙의 상황을 보면(물론 더 많은 근거 자료를 찾아야겠지만)동남아의 화교집단의 거의다가 대륙 일본,왜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봅니다. (이하의 글은 본인이 추론하는 가설입니다.)또한 손문은 화교집단이 많은 광동성 출신인데 이 손문에 의한 "신해혁명"의 주체는 신문물을 일찌기 접한 대륙 일본의 세력으로 생각됩니다.이들이 내세운 "멸청흥한"의 본질은 다분히 주도권 싸움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대륙의 상황을 넓게 보면 대륙은 조선입니다. 이를 세분화하면 중조는 조선이고 조선을 보좌하는 힘있는 제후국은 일본과 청나라였다고 봅니다. 청나라가 중조인 대륙조선의 권신(權臣)으로서 역할을 하였을때,이에 대한 반발 세력이 대륙 일본이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손문의 "신해혁명"의 슬로건은 당연히 "멸청흥한"이었을 겁니다. 이 신해혁명 세력과 대만의 국민당 세력과 대륙의 공산당 주도 세력은 다 같은 대륙 일본,왜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신해혁명 세력인 국민당과 대륙의 공산당을 리더하는 세력은 "객가인"이라 생각됩니다. 객가인의 정체성은 대륙 일본의 막부세력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일어나 막부체재를 몰아낸 신(新)일본이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신(新)일본 세력에게 패한 일본 막부체제의 잔존세력으로 이 막부체재를 근간으로 하여 다시 일으킨 집단이 국민당,공산당이라 생각합니다. 객가인이 통상 상업,무역 분야에 아주 소질이 탁월하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상업,무역분야의 소양 또한 과거에 "청장관전서"에 기록된 것처럼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지 않는 나라가 없고 이러한 여러 나라와 무역하여 일본이 강성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당시만 해도,일본의 무역은

막부가 주도했습니다.이러한 막부체재에서 무역을 주도한 세력은 막부세력 중에 있었던 객가인 이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객가인은 대륙일본의 정통세력으로 봅니다. 현재의 동북아시아 현황을 보면,

대륙의 중공의 주도 세력은 대륙일본 막부체재의 사람들이고,일본은 신(新)일본으로 메이지 세력들 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서구가 만들어준 서세동점기의 서구의 침략사관이 반영된 대륙의 지도에 불만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대륙의 일본,왜의 세력이 주도세력이 되게 만들어준 서구가 고마울뿐이지,현재의 영토만 이라도 온전히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기에 혈안이 된 시점에 서구에 불만이 있을수 없을 겁니다.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객가인(客家人)의 대표적인 건축 유산이 토루(土樓=土壘) 입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선조 32년 기해(1599,만력 27)  12월25일 (경자)

 

전 별제(別提) 노인(魯認)이 서계(書啓)로 10조를 바치기를,
“1. 왜적이 말하기를, ‘토루(土壘)는 전쟁의 진지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만고에 훌륭한 방법인데, 일본이 그 묘체를 능히 터득하여 7년을 횡행하면서 한 번도 실패한 일이 없다. 그런데 저 명 나라나 조선은 행군하며 야영을 할 때에 다만 소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성을 만들고 병사들을 둘러세워 막(幕)을 삼으므로, 우리 병사가 새벽을 틈타서 공격하면 저들은 비록 만 명의 군대가 있더라도 모두 겁을 먹고 도망친다. 조선에서 가장 소루하게 여기며 그 묘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진법(陣法)이다.’라고 하니, 이적의 말이 헛소리만은 아닌 듯합니다.”
................................

1. 명나라의 민(閩) 지방과 절강(浙江) 사이의 왜군을 방비하는 일은 오로지 수전을 힘써서 봄철에는 각 진영의 군대가 3월부터 모두 해상(海上)으로 내려가 배를 탄 상태에서 변란을 대기하였다가 5월에 철수해 돌아오고, 가을철에는 7월에 해상으로 나갔다가 10월에 비로소 철수하여 돌아오는데, 혹시라도 적이 와서 육지에 오르게 되면 포구를 지키던 장졸들을 모두 참수하여 용서하지 않습니다.

 

 

○前別提魯認書啓, 獻十條。” 一曰, 倭賊曰: ‘土壘, 萬古戰陣之良法, 而日本能得其妙, 故橫行七載, 一不見敗。 彼大明與朝鮮, 行師野營, 只以松枝爲城, 以卒爲幕, 我兵乘曉突擊, 則彼雖萬兵, 皆㤼而去。 朝鮮之最踈, 而未知其妙者, 陣法也。’ 此賊之言, 似不虛矣。

...............................

一曰, 大明間防事, 專以水戰爲務, 而春汛, 則各營之軍, 自三月皆下海上, 乘船待變, 五月撤還, 秋汛, 則自七月下海, 而十日始還, 而幸賊來而登岸, 則當浦將卒, 皆斬不貸矣。

 

 

위의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왜적 일본이 토루(土壘)의 묘체를 터득하여 임진왜란 7년간의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 일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명조(明朝)는 소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성을 만들어 야영하지만 왜적은 흙으로 진지를 만들어 전투를 하는 그 묘체를

터득한 군대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은 이러한 토루(土壘)라는 진법의 묘체를 이해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과연 어디에서 일본 특유의 토루(土壘)라는 진법을 구사 했을까요?

위의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명조(明朝)가  민(閩) 지방과 절강(浙江) 사이의 왜군을 방비하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어디에서 일어난 전쟁 이기에 임진왜란 그 당대에 민절(閩浙) 즉 강절(江浙) 지역에서 왜군을 방비하는 일을 할까요?

위의 일동기유에서 일본은 대륙의 강절지방(강소성,절강성)과 홍수(泓水) 사이에 있으므로 일본인은 태백과 중옹의 자손이 맞다고 했습니다. 이 일동기유와 선조실록에서 말하는 일본의 강역은 같은 장소를 말하는 것 입니다.

일본은 강절지방(강소성,절강성)과 하남성의 홍수(泓水) 사이에 있었습니다. 즉 일본의 강역은 지역적으로 오월(吳越) 남만(南蠻) 지역이 그 중심 강역이라 판단 됩니다.

아시아=조선 사관으로 보면 현재의 대륙 상황이 아주 왜곡된 상태이지만 문헌상에 전하는 명칭대로 하면 일본의 강역은 광동성과 그 주변 일대가 일본의 중심지라 판단 됩니다.

그리고 현재 대륙에 객가인의 유적이라 불리는 토루(土樓=土壘)는 중원 대륙 그 어디에도 없었던 건축 입니다. 또한 이 토루(土樓=土壘)라는 건축물은 생활과 주거 더불어 전쟁을 수행하는 목적으로 지어 졌다고 합니다.

토루(土樓=土壘)는 중원 대륙 그 어디에도 없었던 건축물 인데 기록에서는 왜적 일본이 토루(土壘)의 묘체를 터득하여 임진왜란 7년간의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 일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에서 토루(土樓=土壘)는 일본 특유의 진법 체계로 기록하고 있고, 현재 대륙에서는 토루(土壘)는 객가인 특유의 건축물이라는 상관 관계를 생각해 보면 객가인의 그 실체는 대륙왜(大陸倭),대륙일본(大陸日本)이라 생각됩니다.

기록에서 일본은 지역적으로 강절지방(강소성,절강성)과 하남성의 홍수(泓水) 사이에 있었으므로 광동성과 그 주변 일대가 일본의 중심지라 볼때 객가인의 그 중심지도 일본의 판도 아래 있었으므로

객가인의 그 실체는 대륙왜(大陸倭),대륙일본(大陸日本)이라 생각됩니다. 객가인은 전통적으로 전족(纏足)을 하지 않으며 대표적인 장례법은 화장(火葬)이라 합니다.

일본 역시  전족(纏足)을 하지 않으며 대표적인 장례법은 화장(火葬) 입니다. 위에서 말한 중원 대륙 그 어디에도 없었던 건축물인 토루(土壘),왜적 일본이 토루(土壘)의 묘체를 터득하여 임진왜란 7년간의 전투

광동성 일대를 중심으로 한 객가인의 거주지역,광동성 일대를 포함한 일본의 강역을 생각해 보면, 이 토루(土壘)라는 건축물은 일본 무사세력의 생활과 전쟁을 위한 주 거주지 로서의 그 잔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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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천상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1.28 본인의 가정입니다만,본인은 현재 중공의 세력은 남방의 대륙 일본계가 주도권을 쥔 상황이라 생각 됩니다. 이 대륙 일본계가 메이지에 의해 퇴출된 막부 세력이라 생각되며 이들의 실제적인 그 후예가 객가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청장관전서에서 수 많은 일본의 교역 활동을 볼때 이들의 교역활동은 지독히 상업을 중시하는 일본 막부에 의해 주도 되었으며 이들이 흩어진 그 잔재가 화교이며 이들을 리드하는 세력이 객가인이며 이 객가인이 막부의 후예라 생각 됩니다.
  • 작성자천상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1.29 선조 31년 무술(1598,만력 26) 5월2일 (병술) 경리 접대 도감 낭청(經理接待都監郞廳)이 우의정의 뜻으로 아뢰기를,
    “어제 저녁에 황응양(黃應陽)이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오늘 아침에 만나보았는데, 그의 말에, ‘행장(行長)이 보낸 왜노 7명은 임실(任實)에 구류(拘留)시켜 두고 주원례(朱元禮) 혼자 올라오고 있는데, 벌써 천안(天安)에 도착하였으니 내일이면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황응양이 또, ‘노야가 주원례를 처치하고자 하였으나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 이익이 없다. 또 절강성(浙江省)·복건성(福建省) 근처의 사람이 사로잡혀 왜영(倭營)에 억류되어 있는 자가 매우 많은데,
  • 작성자천상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1.29 이런 말을 듣는다면 틀림없이 나오려던 그들의 마음을 막아버리게 될 것이다. 노야는 성품이 조급한데다 사려가 깊지 않으니 사체가 이렇게 되지 않을까 나는 무척 고심(苦心)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도대체 임진왜란이 어디에서 일어난 전쟁 이기에 임진왜란 그 당대에 절강성(浙江省)·복건성(福建省) 근처의 사람이 사로잡혀 왜영(倭營)에 억류되어 있는 자가 매우 많다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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