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식민사관》
6장 식민사관 해체의 길
1. 식민사관은 구조의 문제다(2)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대할까 보냐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 김병기 박사는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1881~1965) 선생의 증손자다. 김승학 선생은 망국 후 만주로 망명해 봉천강무당奉天講武堂에서 전문 군사 교육을 받은 후 평생을 무장 항일 투쟁과 역사학을 연구한, '한 손에는 총, 한 손에는 붓'을 든 전형적인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참의부 참의장과 상하이의 「독립신문」사장, 지금의 교육부 장관 격인 임시정부 학무총장 대리를 역임했다. 김승학은 상하이 망명 시절에 박은식의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서술을 보조하면서 역사학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때 박은식 선생과 해방 후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고자 굳은 맹약"을 한 것이 역사학에 입문한 계기라는 것이다.
김승학은 해방 후에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려고 각종 독립운동 사료를 수집해 감추어두었다. 그는 1929년 지린성(길림성)에서 열린 삼부통합회의에 정의부 김동삼ㆍ이청천, 신민부 김좌진 등과 함께 참의부 대표로 참석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었는데, "왜경倭警에게 체포된 후 수각手脚이 절골折骨되는 수십 차례 악형惡刑이 주로 이 사료 수집 때문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것이바로 제대로 된 역사였다. 그리고 일제가 역사를 장악한 후과를 지금 대한민국이 톡톡히 치르고 있는 데서 일제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김승학은 취조받던 장면을 「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나를 꿇어앉힌 후에 직경 3촌寸쯤 되는 통나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양 끝에 두 놈이 올라서서 통나무를 드디면 형문다리가 부러질 듯 기절하게 되는데,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않고 당하였다. 그때의 상처가 지금은 백각白脚이 되고 만다. ...... 나는 절실하게 각오하기를 내가 죽지 않고 너희들 망하는 것을 목격하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는 이런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독립 운동 사료들을 감추어둔 곳이 만주 천금채라는 사실을 토로하지 않았다. 김승학은 5년 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해 일제가 "망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지만 정권을 잡은 것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친일파들이었다.
평북 의주 출신의 민족주의자인 그는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월남했다. 이후 집안 사람들이 김승학을 따라서 남하할 때 저녁 밥을 짓는 것처럼 아궁이에 불을 피워놓고 몰래 남하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반공反共이 친일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백범 김구를 비롯한 상당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반공이었다. 다만 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남북 협상에 나섰을 뿐이다.
서울은 물론 부산 피난 시절에도 김승학의 집 앞에는 경찰들이 상주했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아들 김영달과 손자 김계업이 부두에 가서 막노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찰들이 막노동도 못하게 막았다. 독립운동했던 집안 사람들은 굶어 죽으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굶어죽을 수는 없기에 집안 여성들이 호구지책으로 사과 광주리를 들고 나가야 했다. 이 무렵 생존 독립운동가들이 김승학 선생을 찾아와 큰절을 올리면 집안 여성들의 마음은 급해지기 시작한다. 국수라도 삶아 대접해야 하는데, 국수가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방문한 독립운동가라고 이 사실을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마음먹고 방문한 터에 오자마자 일어설 수는 없어서 옛 시절을 회고하느라 시간은 흘러간다. 그 사이 집안 여성들은 동네를 다니며 온갖 수단을 다해 국수 두 그릇을 삶아서 상에 올린다. 일생을 독립 운동에 바친 대가가 이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자 김승학은 폭숨 걸고 지켜낸 독립운동 사료와 생존 독립운동가들의 수기를 덧붙여 『한국독립사』(1964)를 펴냈다. 『한국독립사』「자서自序」에서 김승학은 한 나라를 창건하거나 중흥시키면 유공자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반역자를 치죄하는데 그 이유는 국가 주권을 길이 반석 위에 놓으려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반세기 동안 국파민천國破民賤의 뼈저린 수난 중 광복되어 건국 이래 이 국가 백년대계의 원칙을 소흘히 한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제의 주구走狗로 독립운동자를 박해하던 민족 반역자를 중용하는 우거愚擧를 범한 것은...... 전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시정施政 중 가장 큰 과오이니 후일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대할까 보냐."
친일파를 처벌하기는커녕 도리어 반역자를 중용하는 우거를 범한 이승만이 어찌 지하에 돌아가 선배와 동지들의 얼굴을 대할 수 있겠느냐는 절규였다. 김승학은 또 "이 중대한 실정으로 말미암아 이 박사는 집정執政 10년 동안 많은 항일투사의 울분과 애국지사의 비난의 적的이 되었었다."고 비판했다. 망국 직후 망명해 해방 때까지 싸우다 귀국한 김승학의 이 토로는 이승만 정권이 독립 운동 진영과 정확하게 반대편에 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현상은 비단 독립 운동계만의 현상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였고 학계라고 예외도 아니었다. 특히 역사학계는 이병도ㆍ신석호 같은 친일파가 학문권력을 완전히 장악해서 조선총독부 사관을 해방 후에도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었다. 다른 분야의 친일 색채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고 대한민국이 발전하면서 점차 희석되었지만 역사학계는 동북아역사재단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풍납토성 재발굴 사례에서 보듯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제 발전된 대한민국은 이런 가치전도적인 상황을 정상화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식민사관에 대한 각계의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이 이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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