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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6장 식민사관 해체의 길(1)

작성자팔도유람(신종근)|작성시간21.08.09|조회수65 목록 댓글 1

《우리 안의 식민사관》



6장 식민사관 해체의 길

1. 식민사관은 구조의 문제다(1)

너희 집안도 독립 운동했다는 말이냐?


식민사학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조선총독부 사관이 해방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역사학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점의 뿌리를 찾아보면 대부분 일제 식민 지배의 문제점에 가 닿는다. 그러나 다른 부분들은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제 잔재가 상당 부분 희석되었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역사학은 거꾸로 강화되어 왔다. 그 뿌리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청산하기는 커녕 이들을 중용한 데 있다. 면사무소 등지에서 일하던 말단 행정 관료야 그렇다쳐도 검찰, 경찰, 교육 기관 등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친일파 세상이 계속되었다. 한 예를 보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조부는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렸던 우당 이회영 선생은 1911년 국망 직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 운동에 매진하다가 1932년 다렌수상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사했다. 우당 이회영 6형제 일가가 모두 독립운동에 나서 다섯째 이시영만 살아 돌아오고 모두 순국했다. 망명 당시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호였지만 독립 운동에 전 재산을 쏟아붓고 해방 후 귀국했을 때는 거처할 집도 없었다. 이종찬 전 원장의 모친 조계진(趙季珍: 1897~1996) 여사는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이자 고종의 조카로 운현궁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황족이었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李圭鶴과 혼인 후 중국으로 망명해 평생을 독립 운동에 매진했다. 독립 운동이 가업인 집안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 입을 옷 한 벌이 없어서 귀국할 때 입고 왔던 중국옷 치파오(旗袍)만 입고 다녀 동네 사람들이 '중국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녀의 삼남이 이종찬 전 원장으로서 경기중ㆍ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대학 갈 돈이 없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육사를 선택했다. 1956년 육사 입시를 봤는데 경쟁률이 치열했다. 216명 선발하는데 무려 4,811명이 지원했으니 23대 1의 경쟁률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국에서 수재들이 몰린다는 경기중ㆍ고 출신이니 시험은 꽤 잘봤을 것이다. 그런데 면접 때의 일이었다. 당시 육사에 입학하려면 2명의 보증인이 필요했다. 그것도 장성이나 정부 중앙부처 국장급이어야 했다. 부친 이규학도 부친을 도와 아니키즘 운동을 하기도 하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충칭重慶 등지를 오가며 민족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던 독립 운동가였다.

이종찬 전 원장이 육사 입교 시험을 볼 무렵의 국군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대부분 쫓겨나고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일본 육사나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 남아 있던 몇몇 장성 가운데 독립 운동을 한 김관오(金冠五: 1901~1965) 장군과 민영구(閔泳玖: 1909~1976) 제독이 있었다. 해방 이후 일본 육사나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은 자신들만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것처럼 호도하면서 광복군이나 독립군 출신들을 폄하했지만 이 역시 알고 보면 대부분 자가발전한 과장에 불과하다.

김관오 장군은 중국의 유명한 운남(윈난雲南)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수료한 엘리트로, 중국 국민혁명군 제43군 및 중앙훈련단에서 복무했다. 한국독립당 충칭重慶지구당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광복군 창설에 관여했다. 이때 숙부 이시영을 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규학과 친해졌을 것이고, 그래서 추천서를 써주었을 것이다. 이런 인연이 없다고 해도 독립 운동에 잠시라도 몸담았던 사람이라면 우당 이회영 손자에게 추천서를 써준다는 사실이 오히려 자랑스럽지 않았겠는가?


민영구 제독은 3.1운동 후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는 부친 민제호(閔濟鎬: 1890~1932)를 따라 상하이로 망명했다. 민영구는 상하이의 인성仁成소학교를 졸업했는데, 인성소학교는 독립 운동가 자제들이 주로 다니던 학교였다. 그는 만국항해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다와 인연을 맺는데, 선장으로 근무하던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자원 참전해 한커우漢口와 난징南京 간의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그 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에 가담해 광복군 서안판서처西安辦事處를 설치하고 광복군 총사령부 상교참모上校參謀로 활약하는 등 광복군 임무에 깊숙이 관여했다. 광복 후에도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총무처장으로 활약하면서 교포들의 안전 귀국 문제를 책임지다가 1947년 6월에야 교포 1,000여 명과 함께 귀국했다. 그 후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본부 작전참모부장ㆍ해군사관학교장 등을 역임했다.

이종찬 전 원장의 육사 면접 때의 일이다. 면접관 중 하나가 일본 헌병 오장 출신인 이용李龍 준장이었는데, 육사 교장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창국(張昌國: 1924~1997)이었다. 장창국은 불과 만 32살의 나이로 육군 소장 겸 육사교장이 되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군부를 장악하는 과정을 보려면 주목해야 하는 곳이 1945년 12월 미군정이 서울 냉천동에 설치한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인데, 장창국도 여기를 나왔다. 정식 명칭은 군사용어학교지만 주로 영어만 가르쳤으므로 군사영어학교라고 불렀다. 초대 교장은 미군 소령 리스(Rease)였고, 부교장은 소령 원용덕(元容德: 1908~1968)이었다. 원용덕은 나중에 중장까지 승진하는데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야당 탄압에 앞장섰다가 4.19혁명 후 15년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원용덕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의사로 있다가 만주국으로 달려가 군의관이 된 특이한 인물이었다. 만주군 중좌로 있다가 일본 패전 후 낙담하고 귀국한 원용덕은 뜻밖에도 미국이 친일파들을 중용하면서 해방 이듬해 창설된 국방경비대에 소령으로 총사령관이 된 인물이다. 원용덕과 역시 일본 육사 출신의 이응준이 군사영어학교 입학생 선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군사영어학교는 장교나 사관 경력이 있는 자로 입학 자격을 제한했는데, 광복군 계열은 해방된 나라에서 광복군이 군의 법통法統을 이어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면서,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몸담았던 친일파들과 같이 복무할 수 없다며 입교를 거부했다. 그래서 입교자 대다수가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복무했던 친일파들로 채워졌다. 군사영어학교는 학생 개개인의 경력과 영어 수준에 따라 짧게는 며칠, 길어야 몇 주의 교육을 받고 임관했는데 이 학교는 사실상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학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5월 새로 개교한 경비대사관학교에 임무를 넘겨줄 때까지 겨우 5개월 정도 존속했는데 해방 후 한국 군사軍史에 남긴 영향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약 5개월 동안에 110명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68명이 장성으로 진급했고 대장이 8명, 중장이 20명이었으며, 참모총장이 13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의 친일파들이었다.

면접관이었던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의 이용 준장이 이종찬 수험생의 추천인을 보더니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김관오 장군과 민영구 제독을 어떻게 아나?"

일개 수험생이 면접관인 장군의 질문에 무슨 답변을 하겠는가? 그것도 어조가 벌써 심상치 않은데.

"...... 집안과 세교世交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럼 너도 독립운동한 집안이란 말이냐?"

이종찬 수험생은 "떨어졌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집에 돌아와 부친 이규학에게 면접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부친 이규학은 민영구 제독에게 항의했다.

"독립운동한 게 무슨 죕니까?"

사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때는 독립운동 경력이 죄였다. 이때 해사 교장으로 있던 민영구 제독은 수험생 이종찬과 동명이인인 이종찬(李鍾贊: 1916~1983) 육군대학 총장에게 항의했다. 이종찬 총장은 일본 육사 출신이지만 특이하게 친일 행위를 참회하는 뜻에서 해방 후 3년간 자숙하다가 1949년 6월 신성모申性模 국방부 장관의 권유로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이종찬은 한국 전쟁 때는 사단장을 역임했으며 육군 참모총장도 역임했다. 부산 피난 시절인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을 위한 발췌 개헌을 날치기로 처리하고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일어나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이종찬 장군은 군사 출동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어 육군대학 총장으로 좌천된 것이다. 민영구 제독의 전화를 받은 이종찬 장군이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라고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나서서 겨우 육사에 합격했던 것이다. 그나마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경우는 항의할 경로라도 있었던 특이한 경우였고, 대부분 '찍소리도 못하고' 당하기 마련이었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들은 항상 불이익을 당했다.

필자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한국 사회에서 꽤 높은 지위까지 오른 몇몇 사람들의 사례를 알고 있다. 그중 장관도 하고 광복회 회장도 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만나면서 놀란 것이 대부분 선조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이었다. 보통 사람들도 자기 선조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는 법인데 이들은 선조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경우도 심심찮게 보았다. 그래서 필자가 내린 결론은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립운동한 선조에 대해 아는 것 자체가 출세에 보탬이 되지 못했던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알지 않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일종의 자기보호 본능이었다.

필자가 만나본 사람 중에는 이종찬 전 원장만이 독립운동가 후손의 정체성을 갖고 힘닿는 한 식민사학을 해체시키려고 노력했고, 독립운동가 선양 사업을 하려고 노력한 분이었다. 그래서 집권당 원내총무 시절 국회에서 특위도 만들고 식민사학 문제를 가지고 공청회도 열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건물도 번듯하게 지어줬다. 이제 세월이 조금 좋아지니까 선조를 외면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뒤늦게 선조를 팔아 출세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한 명이라도 좋은 자리에 올라가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친일 청산에 별 관심이 없다. 식민사학 해체 문제를 이야기하면 남의 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제는 이런 일도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갖고 있다. 국민의 돈으로 지어진 백범기념관의 운영 실태를 보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라자 호텔 뷔페가 아니면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빔프로젝트 사용 비용까지 받는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백범의 일생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안의식민사관 #조선총독부사관 #친일파 #이회영 #김관오 #민영구 #군사영어학교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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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석재 | 작성시간 21.08.14 이덕일은 식민사관 해체 운운하면서 정공하지 못하고 왜 변죽만 올릴까?
    노론이니 이병도니 강단 주장만 줄창 나열하고 비난.비판?만하면 무엇하나?
    그들이 주장을 취소하고 사죄라도 할 것 같은가?

    서기전 108 년 설치된 낙랑군 위치 조차도 장성동단의 낙랑군 수성현이니 보정의 상곡군 수성현이니 하며 운만 떼고 얼버무리는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주변 이야기나 줄창 나열하면서 언제 무슨 수로 식민사관을 해체하겠다는 것인가? 그런 일은 김삼웅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서 식민사관 해체?
    식민사관.동북공정의 공통 핵심을 파악은 커녕 낌새도 채지 못하는 것 같은데 무슨 수로 식민사관을 해체하겠다고 하는가?
    또 동북공정은 어쩔건데?
    동북공정도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일본.중국 역사학계를 꼼짝 못하게 설복시킬 대안이라도 있기는 있는가?

    멍청하고 덜 떨어진 리지린이 윤내현.이덕일 등을 베려놨는지 리지린과 같이 윤내현.이덕일 등이 워낙 멍청한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참으로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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