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大邱地下鐵火災慘事)는
2003년 2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방화로 일어난 화재이다.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로 인해 2개 편성 12량(6량×2편성)의 전동차가 모두 불탔으며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당해서,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고 뒤 열차는 불에 타 뼈대만 남았고, 중앙로역도 불에 타서 2003년 12월 30일까지 복구를 위해 영업을 중단했다.

◆김대한(경북 예천) 대구지하철 방화범

싸그리 다 타버린 지하철 내부
사고 개요

이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범인인 김대한(당시 56세)은 경상북도 예천이 고향으로 2001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상·하반신의 장애가 오게 되어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김대한의 방화 사유는 심한 우울증 후, 정신 질환이 심해진데 따른 판단력 상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한의 아들은 대구 중부경찰서에 출두하여 "아버지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남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등 정신적으로 심한 문제가 있었다." 고 밝혔다.
하지만, 지병(뇌질환)으로 인한 울분을 방화로 토한 사건이라는 분석도 있어 방화 사유에 대한 의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용의자 김대한은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12초경, 대곡역에서 안심역 방향으로 운행하던 제1079열차의 1호차에서 경로석에 앉아 있다가 중앙로역에 열차가 진입하고 있을 때 라이터와 페트병 2개에 나눠 담은 휘발유 2리터로 불을 질렀다.
당시 주위 승객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몸싸움까지 벌이면서 그를 제지하였으나 그는 불이 붙은 페트병을 그대로 내던져 차 안에 불이 붙었다.
당시 1079열차는 중구 남일동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구내에 정차 중이었으며, 불은 순식간에 퍼졌으나 대부분의 승객들은 열려 있던 출입문을 통해 대피하였고 당시 1079열차의 기관사인 최정환(당시 31세)도 화재를 감지하고 대피하였다.
그러나 최정환은 지하철 사령에 화재 사실을 즉각 보고하지 않았고, 아무런 보고도 받지 않은 사령에서는 화재 경보가 울리고 있는데도 오작동으로 치부, 무시해 버려 운행 중지 조치 등을 취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정상 운행 중이던 대곡행 제1080열차가 중앙로역에 도착, 정차하였고, 1079열차의 불은 정차한 1080열차에도 옮겨 붙었다.
피해를 더욱 부채질하게 된 것은 뒤늦게 화재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운행을 멈춘 사령의 조치로, 사령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1080열차에 떠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에는 이미 화재로 역내 전기가 끊겨 전동차가 떠날 수도 없었고 역 안 전등도 모두 꺼진 뒤였다.
사령에서는 다시 급전을 시도하였으나 급전되지 않았고, 화재는 그 사이에 1080열차에 맹렬히 번져 사령에서는 1080열차 기관사 최상열(당시 37세)에게 출입문 개방과 승객에 대한 대피 유도를 지시했으나 최상열은 공황 상태에 빠져 승객의 안전을 확보·확인하지 않은 채 마스터 키를 빼들고 탈출해 버렸고, 출입문이 닫히면서 열차 안에는 142명의 승객이 갇히게 되었다.
차량에는 출입문의 비상 개방 장치가 갖춰져 있었으나 위급한 상황 속에서 사용할 줄 아는 승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차내에는 그 사용법이 명확히 적혀 있지도 않아 차내에 있던 많은 승객들이 유독가스에 질식하거나 불에 타 사망하였다.
그나마도 마침 1080열차에 타고 있던 코레일 직원이 비상 개방 장치를 취급하여 문을 열고 주위 승객들을 대피시켜 피해를 다소나마 줄일 수 있었다. 실제로 불이 난 1079열차의 편성보다, 불이 옮겨 붙은 1080열차의 편성에서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와, 1080열차에 대한 운행 중지 조치만 빨리 이루어졌어도 사고의 규모는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화재로 인하여 차량이 타 들어가고 있는데도 사령의 지시만을 기다리면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1080열차의 기관사 최상열도 ‘복지부동’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2년 후 2005년에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경대병원역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라이터로 방화를 일으키려고 한 사건이 있었으나, 시민들이 덮쳐서 붙잡았으며 시트에 설치된 난연재 덕분에 불이 붙지 않았다.
그 이외에도 2005년 1월 3일 오전에는 서울 지하철 7호선 철산역 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 1명이 경상을 입고 객차 3량이 소실되는 피해를 야기하였다.
관련자 처벌
방화 용의자는 사고 발생 2시간 뒤 대구 북구 노원동3가 조광병원에서 치료 중 경찰에 붙잡혔다.
4월 23일에는 대검 특별 수사 본부를 해체하고, 방화범 김대한을 현존 전차 방화 치사·상죄로, 기관사, 관제사, 역무원, 시설 책임자 등 지하철 직원 8명을 업무상 중과실 치사상·죄로 각각 구속 기소하고, 2명을 업무상 과실죄로 불구속 기소했다.
같은 해 8월 6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방화범 김씨에 대해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김씨은 심신 장애는 없었으나 범행 당시의 정신 상태 등을 감안하면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일으킨 범행이라 보기 어려운 점과, 직접 방화한 1079호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그다지 없었던 점(1080열차의 진입으로 사고가 크게 확산) 등이 감안되어 2004년 1월 7일에 대구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김대한은 2004년 3월 8일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가, 같은 해 8월 31일에 지병 악화로 사망했다.
또, 1080열차의 기관사 최상열은 열차의 출입문을 닫아 버려 승객들의 탈출을 막아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한 점에서 금고 5년이, 1079열차 기관사 최정환과 가장 먼저 화재 사실을 연락받은 관제사 방정민(당시 44세)에 대해서는 초동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각 금고 4년, 홍순대(당시 44세) 등 나머지 관제사들에 대해서는 각각 금고 3년에서 1년 6월이 선고되었으며, 그 밖의 역무원이나 시설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직접 책임이 없다고 하여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유족 및 피해자 후유증
희생자들과 그에 관계된 유족들은 지금도 이 사고를 잊지 못하고 있으며, 생존자들은 대부분 사고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충격으로 자살하거나 정신 이상을 일으킨 사람, 울화병으로 사망에 이른 사람 등도 적지 않았다.

대구 지하철 참사 후 슬픈 뒷 이야기 하나...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지 벌써 9년이 지났다.
어떤 여학생이 자기 엄마에게 전화로 갑자기 "엄마 나 없이도 살수있어?" 라고 묻더래요. 그런데, 엄마는 장난으로
"난 우리 딸 없어도 잘 살수 있는데^^" 이렇게 말을 해주었데요. 장난으로 넘겼던거죠. 그런데, 그 소녀의 마지막 말이 "엄마 난 엄마없이 못살아, 그런데 먼저갈께 사랑해." 라고 말하더래요,. 이상하다고 느낀 엄마는, 갑자기 눈물이 나더래요. 전화 안에서. "여기 불이 났는데, 문이 안열려. 그래서 난 같혀있는데, 엄마밖에 생각이 안나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라..ㅇ..ㅎ....ㅐ....."
마지막까지 사랑하단말을 남기고, 전화기를 떨어 뜨렸데요. 그리고 나서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이 일어나신걸 안 엄마는, 하늘을 쳐다보고, 말하더래요. "엄마도 우리딸 없이는 못사는데 어떻게하지? 사랑한다, 우리딸."


오늘은 한달 중 제일 기다려지는 용돈 받는 날. 그러나 오늘이 더욱더 기다려진 까닭은 수학여행 준비로 용돈을 좀더 넉넉히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 손에 쥐어진 돈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3만원. 참고서 사랴, 학용품 사랴. 정말 3만원 가지고 무얼 하라는 건지. 그리고 또 모레가 수학여행인데. 나는 용돈을 적게 주는 엄마에게 화풀이를 하고 집을 나섰다. 수학여행인데... 평소에 쓰던 가방 가져가기도 민망하고... 신발도 새로 사고 싶었는데...



내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교실에 도착했다. 내 속을 긁기라도 하듯 내 짝꿍이 용돈 넉넉히 받았다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있었다. "나 오늘 수학여행때 가져갈거 사러 가는데 같이안갈래?" 한창 신나게 아이쇼핑을 즐기고 있을 때
마침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괜히 화가 나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30분 후 다시 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버리고 밧데리까지 빼버렸다. 그리고 신나게 돌아다녔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괜히 화를 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신발도 그렇게 낡은 것은 아니었고 가방은 옆집 언니에게서 빌릴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지…’
집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아참! 엄마가 오늘 일나가는 날이었지.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습관대로 텔레비전을 켰다. 드라마가 나와야 할 시간에 뉴스가 나왔다. 뉴스 속보였다. 이게 웬일인가. 내가 자주 타는 대구 지하철에 불이 난 것이다. 어떤 남자가 지하철에 불을 냈다. 순식간에 불이 붙어 많은 사람들이 불타 죽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엄마는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고 텔레비전에서는 지하철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 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만 이어지고 있었다. 몇 번을 다시 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내리고, 꺼버렸던 핸드폰을 다시 켰다.
문자 다섯 통이 와있었다. 엄마가 보낸 문자도 두통이나 있었다. 엄마가 보낸 첫 번째 문자를 열었다. “용돈 넉넉히 못 줘서 미안해. 쇼핑센터 들렀다가 집으로 가는 중이야. 신발하고 가방 샀어.”
나는 첫 번째 문자를 들여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두 번째 문자를 열었다. "미안하다. 가방이랑 신발 못 전하겠어.
돈까스도 해주려고 했는데... 미안... 내 딸아... 사랑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 후 슬픈 뒷 이야기 둘...

당시 대구 지하철 화재 당시 객차안에서 생존자가 찍은 유일한 현장 사진
객차로 연기가 스며들고 있지만 사진속의 승객들은 그다지 당화한 기색이 없습니다.
이순간,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던 것 일까요?
사진 속 승객들은 매캐한 연기가 스며 들자 손으로 입을 막은체 묵묵히 앉아 있습니다.
당시 생존자
"심하지는 않은 걸로 제가 기억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가만히 있었고"
"저도 그때는 충분히 그러고 있었으니깐 일어서려다가 다시 앉았어요"
객차안에 흘러나온 방송
"열차 곧 출발하오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당시생존자
"기관사가 이제 방송으로 곧 출발할 테니까"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뭐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열차는 전력이 중단돼 출발하지 못하고
10분동안 꼼짝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당시 종합사령팀 교신 내용
"아,빨리 이제 차 그렇게 놓고 차 판 내려놓고 다른데로 도망가 올라가라고"
그 사이 종합사령팀의 지시를 받은 기관사는 불이 난 열차를 버리고 혼자서 탈출을 하게 됩니다.
당시 생존자
"열차에서 기다린 시간이 최소한 10분은 기다린 것 같고"
"사람들은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가만히 있었고"
결국 열차 안에 있던 승객들은 결정적인 탈출 타이밍 10분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객차안은 이상한 침묵에 휩싸인채 그렇게 죽음으로 가는 10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이후로..........
잘 잤어요. 여긴 날씨 맑음. 오늘 하루 보고 싶어도 쬐금만 참아요.」 (사고 발생 7분전, 예비 신부 송혜정씨가 예비신랑 이호용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좀 있으면 중앙로역을 지난다. 곧 갈께. 조금만 기다려.” (AM 09:50 분, 서동민씨가 선배 송두수씨에게 한 통화기록중) “지금 지하철인데 거의 사무실에 도착했어. 저녁 밥 맛있게 준비해 놓을테니깐 오늘 빨리 퇴근해요!” (사고 발생 4분전 김인옥씨가 남편 이홍원씨에게 한 통화기록중)
“여보, 여보! 불이 났는데 문이 안 열려요. 숨을 못 쉬겠어요. 살려줘요... 여보 사랑해요, 애들 보고 싶어!” (사고 발생 8분후 통화기록중) “지현아 나 죽어가고 있어. 나를 위해 기도해줘” (기독교 모임 강사 허헌씨가 강사 강지현씨에게) “엄마가 여기 와도 못 들어와!” (AM 09:54 분, 대학생 딸이 어머니 김귀순씨에게 한 통화기록중) “아.. 안돼... 안돼!” (AM 09:58분, 이현진양이 어머니에게, 이현진양은 이 해에 서울대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불효 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한 승객이 어머니에게) “불이 났어. 나 먼저 하늘나라 간다” (김창제씨가 부인에게) “숨이 막혀 더이상 통화못하겠어. 엄마 사랑해...” (대학생 이선영양이 어머니에게) 「오빠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민심은씨가 남편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아빠 뜨거워 죽겠어요” (한 여고생이 아버지에게)
2003년 2월 18일 9시 53분경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 중앙로역
구내에서 50대 남자가 플라스틱 통의 휘발유에 불을 붙히고 지하철 객차안에 뿌렸다.
12량의 지하철은 뼈대만 남은 채 모두 타버렸고,
출근 후 시내로 나가는 시민들의 인명사상이무차별 적으로 일어났다.
192명이 사망, 148명이 부상
대구 지하철 참사의 범인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사람으로 사회에 불만을 품고 지하철에 기름을 붓고 방화를 하였고, 범인은 최근 몇년 전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너무나 가슴아픈 기억으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한 장애인의 만행이라고 하기엔,
우리나라의 당시 안전을 고려하지 않았던 지하철의 설계과 무사안일주의에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지하철 문을 잠그고 나가버렸던 그 지하철의 기관사에 대한,
사고시에 기본적인 사고대책과 훈련도 되지않은 지하철 관계자들에 대한 분노가 다시금 일어난다.
예산만 중시하고, 안전에 무지했던 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희생자 들이 당신의 형재가 될 수 도있고 부모, 그리고 자녀가 될 수도 있었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무엇을 하던간에 내 가족이 이용하고 사용한다는 맘으로 해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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