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이전에 백인천이 있었다 [3]
![]() 1979년 36살의 나이로 백인천은 그해 타율 3할4푼, 18홈런, 71타점을 기록하며 올스타에 뽑혔다. |
백인천 혹은 하쿠진덴(백인천의 일본어 표기). 1982년 이후의 백인천을 모르는 야구팬은 없다. 그러나 이승엽 이전에 배트 하나로 일본열도를 뒤흔들었던 하쿠진덴에 대해 아는 이는 드물다. <스포츠 춘추>에서는 한국야구출신 선수 가운데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화려한 성적을 거뒀으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1982년 이전의 백인천을 그의 육성을 담아 소개하고자 한다.
젊은 날의 꿈과 야망 그리고 장훈과 다이헤이요 라이온즈 4번 타자 시절, 퍼시픽리그 타율 1위 등극과 2천 안타의 좌절. 여기다 중앙정보부 비밀요원이 되야했던 백인천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야구를 떠나 인생의 소중한 교훈담이 될 것이다.
올해로 실질적인 야구 데뷔 50주년을 맞는 백인천의 1982년 이전 현역시절의 이야기는 총 3회로 진행될 예정이다.
(2편에 이어)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래 장이형(장훈)까지 했구먼. 프로야구는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한국도 예외 없이 대도시 연고지 팀이 팬들의 사랑을 받게 마련이네. 도에이의 연고지가 도쿄였다고. 생각해보게. 얼마나 인기가 좋았겠어. 그때나 지금이나 퍼시픽리그는 요미우리가 있는 센트럴리그에 비해 인기가 떨어지지만 우리는 조금 달랐어.
홈구장? 당연히 도쿄에 있는 진구구장과 고라쿠엔구장을 썼지. 맞네. 고라쿠엔구장은 요미우리와 함께 사용했어. 그 덕분에 팬이 많았는지도 모르겠구먼(웃음). 2004년인가 도에이 후신 니혼햄 파이터스가 연고지를 삿뽀로로 이전하면서 도쿄 시대는 막을 내렸지. 그래도 내 기억의 연고지는 도쿄야.
글쎄. 도에이가 당시 영화사라 야구단에 전폭적인 투자를 할 만한 회사는 아니었네. 요미우리처럼 흥행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것도 많지 않았어. 물론 영화사란 장점을 살려 유명 배우들을 구장 안으로 데려는 왔지. 그 배우들이 요미우리를 더 좋아해서 문제였지만(웃음).
데뷔 10년만의 첫 3할
도에이에서 1962년부터 1974년까지 뛰었네. 그때 도에이 투수진이 괜찮았어. 1964년에는 20승 투수가 3명이나 배출됐거든. 그렇지. 자네 말마따나 타선도 나, 장이형, 오쓰기 가쓰야, 부쓰지마 쇼이치 등 좋은 타자들이 많았어. 그런데 왜 성적이 좋지 않았느냐? 간단한 예를 들겠네.
도에이의 긴데쓰 버펄로, 한큐 브레이브스(이하 오릭스 버펄로스 전신)전 승률이 달라도 한참 달랐어. 한큐와는 어쨌거나 5할 승률인데 긴데쓰와 싸우면 어땠는지 아나? 우리가 8승 22패로 완전 열세야. 그런데 난카이는 긴데쓰에 16승14패로 앞섰단 말이지.
이유가 뭐냔 말이야. 숙소에서 긴데쓰 홈구장까지 가려면 2시간 30분이 걸려. 당시 버스에 에어컨이 어디 있어. 창문 열고 몇 시간이고 땀 뻘뻘 흘리면서 가는 거지. 경기 끝나고 숙소에 오면 밤 12시가 다 된다고. 하지만 난카이는 숙소가 항상 긴데쓰 홈구장 근처였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우리가 1964년에 20승 투수를 3명 배출하고 상대 성적에서 다른 팀을 앞서고도 난카이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내준 건 바로 숙소 문제 때문이었네.(주:1964년 도에이는 78승4무68패로 3위에 그침)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와 MBC 청룡, LG, 삼성, 롯데 감독을 맡으면서 다른 건 몰라도 숙소는 항상 구장 주변에 얻으려고 했던 것도 그때 경험이 생각나서였네. 야구는 컨디션 싸움이야. 그날 컨디션이 좋은 팀이 이기게 돼 있어. 이건 지금 감독들도 새겨들었으면 하네. 숙소에서 차로 구장까지 1시간 이상이 걸리면 선수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경기에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는 걸 말일세.
처음 타율 3할을 친 게 언제더라. (1972년이라고 하자)맞아. 그해 3할1푼5리로 퍼시픽리그 타율 3위를 차지했다고. 이전까지는 타율 2할7, 8푼 정도를 쳤어. 홈런도 그해가 가장 많았을 거야. 19개 맞지? 사실 내가 홈런 타자는 아니지만 강타자라고 했다고. 2루타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거든.(주:이해 2루타 33개는 퍼시픽리그 1위) 거기다 도루도 꽤 했어. 아마 20개 정도 했을 거야.
데뷔 10년 만에 타율 3할을 기록한 이유가 있었냐고? 암 있고말고. 타격에 관련해서 이전까지 누가 나서서 날 가르쳐주는 일이 없었어. 1972년 스프링캠프에서 스기하라 가쓰무 타격코치가 날 유심히 지켜보더라고. 그때 캠프에서 타율 2할8푼 정도를 치고 있었는데 이건 안타 4개면 3할인 거라. 스기하라 코치가 그래. "네가 3할을 못 치는게 이해가 안간다." 그리곤 3일간 찾아와서 계속 말을 걸어. 그런데 난 그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어. 어떻게 쳐도 2할8푼은 치는데 여기서 굳이 변화를 줬다가 실패하면 뭐가 되냔 말이지. 불안하거든.
허허, 스기하라 코치 이 양반 물러나질 않더라고. 계속 "나와 함께 한번 해보자"라고 설득하는데 못이겠대. 나중엔 내가 지치니까 "좋습니다. 코치님 뜻대로 해보지요"라는 말이 나오더라고. 그때부터 죽어라 스윙을 연습했어. 숙소가 다다미방이었는데 바닥에 구멍이 나도록 스윙연습을 했다는 거 아니야. 스기하라 코치가 타격폼을 수정했느냐고? 그렇지. 발을 들고 치라고 했지. 그런데 이거 큰일 난 거라. 자체 홍백전에서 헛스윙 연발하고 배팅도 제대로 안 맞는 거야. 2군으로 내려갔지.
그때 정말 후회 많이 했네. 코치 원망도 당연히 했지. 그런데 말이야. 젊은 사람 앞에서 자꾸 이런 이야기 그렇지만 사람일이란 게 언제 변할지 몰라. 인생에선 자기가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때가 있어. 특히나 야구는 그런 게 많다고. 잘 기억은 않나네만 2군 휴식일이었어. 훈련장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간만에 쉬는 날이라 아이들 데리고 놀러나 갈까 싶더라고. 그런데 그럴 경황이 없는 거라.
배트 하나 들고 2군 훈련장을 찾아갔어. 마침 스기하라 코치가 있더라고. 대뜸 "요즘 어떠냐"고 묻는 거야. 어떠긴 뭐가 어때 "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하고 대답했지.
그런데 2군 매니저가 다가와서는 "하쿠(백)상 컨디션 아주 좋습니다. 1군으로 승격해 내일 당장 뛰어도 손색이 없습니다."이러는 거라. 내가 속으로 ‘이 녀석 무슨 말을 하는 거야’했지. 그때 2군 매니저도 프로야구 선수출신이었거든. 야구 보는 눈이 있지.
스기하라 코치가 반신반의하는 눈치를 보이니까 이 친구가 "하쿠상, 코치님한테 당신의 배팅을 보여주세요"하네. 얼떨결에 추리닝 차림으로 타석에 섰지. 잘 맞았냐고?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잘 맞은 정도가 아니라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탁탁" 맞았어(웃음). 커브를 쳐도 정타로 맞고 직구를 던져도 이건 거의 홈런성이라.
잘 맞으니까 좋긴 한데 나도 모르게 이거 왜 이러나싶을 정도로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드는 거야. 데뷔전을 다시 하는 기분이랄까. 이게 ‘꿈이야 생시야’하는 기분이 느껴지는 거라. 스기하라 코치가 그 자리에서 감독한테 전화를 걸었어. "인천이 지금 굉장히 좋다"고 말이야. 감독이 그 말 듣고 "그래? 그럼 당장 (1군으로)올려"했지. 그런데 이게 배팅연습이랑 실전은 다르거든. 시범경기 야쿠르트 스왈로즈전이 시험무대였네. 설발 중견수로 경기에 나갔지.
첫 타석이었는데 상대 투수가 슬라이더로 유명했어. 아니나 달라. 초구로 슬라이더를 던지더라고. "탁"쳤지. 이거 바로 홈런이야. 다음 타석 때는 몸쪽으로 공이 들어오는데 또 "딱"치니까 이번엔 3점 홈런인 거라. 또 다음 타석에선 3루타를 쳤어. 그날 혼자 7타점을 기록했다니까. 이 여세를 몰아 개막전 첫 타석 때 홈런 치고 결국 그해 타율 3할1푼6리로 데뷔 10년 만에 3할 타자가 됐네.
야구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걸세. 해마다 그리고 매일 똑같은 훈련을 반복하고 훈련내용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때론 힘들고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말이야. 야구에서는 오늘 연습한 게 내일 나오는 게 아니라고. 다음해 아니 10년 뒤에 나올 수도 있으니까 언제나 그날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해. 난 이 나이 먹도록 지금도 그런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네.
다시 말해주게. 뭐? 그해 '20-20'(도루20, 홈런20)달성을 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지 않았느냐고? 홈런 1개가 모자랐지. 그런데 당시만 해도 ‘20-20’ 클럽 이런 개념이 없었다고. 그냥 홈런 잘 치고 도루 잘 한다는 것 정도로 그쳤단 말이야. 1990년 이후로 ‘30-30’클럽이니 하는 것도 유행을 했잖아. 선수를 판단하는 시각이 그 만큼 넓어졌다고 볼 수 있지. 지금 뛰었다면 ‘30-30’은 하지 않았을까?(웃음)
![]() 1978년 롯데 오리온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시범경기에서 만난 백인천(왼쪽)과 장훈. |
다음해인 1973년은 나도 참 아쉽네. 전해 타율 3할1푼5리를 치다가 2할4푼7리로 급격하게 내려갔잖아. 홈런도 6개로 떨어지고. 1972년은 악으로 버텼다지만 확실히 군복무 영향이 나타나더라니까. 1971년 시즌 끝나고 겨울에 귀국을 했어. 병역을 마쳐야 하니까 별 수 있나. 16주 군사훈련 받고 다음해 5월께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방망이가 어디 잘 돌아가나. 좀 쉬었다 하지 그랬냐고? 팀 성적이 너무 나빠 그럴 수가 없었어. 그때 타율 1위한 건 정말 행운이야.
군대 이야기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1962년 일본으로 갈 때 2년 있다 귀국해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고. 그런데 왜 9년이 지난 1971년에야 군대를 갔느냐. 당시는 군 문제에 대해 크게 말들이 없었어. 나처럼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았거든. 일본에서 국위선양한다고 정부에서 어느 정도 눈을 감아줬던 게야. 그런데 197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부에서 외국에 나가 있는 장·차관이나 고위직 자제들을 다 국내로 들어오게 했어. 이유야 뻔하지. 군대 문제는 서민에겐 민감한 문제 아닌가. 특혜시비가 나올까봐 선수를 친 게지.
그래서 나도 그때 귀국을 했다네. 모 사단에서 6주 기본훈련을 받고 당시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에서 6주 특수훈련을 받았네. 그리고나서 모 통신학교에서 다시 6주 교육을 받아 총 18주 교육을 받았어. 난 다른 이들보다 훈련을 더 많이 받았어(웃음). 그걸 다 끝내니까 4월 말이더라고. 5월 2일인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3일이 지난 5월 5일 경기에 나갔어.
제대는 아니었어. 일본에서 나머지 군복무 기간을 모두 채웠네. 무슨 소리냐고? 주일 대사관 소속으로 군 복무를 수행했다는 뜻이야. 언뜻 이해가 안가지? 밖에서는 야구선수로 지내면서 주일 대사관 소속이었다니까.
그때 일본에서 말이 많았다고. 이건 여담이지만 당시 일본거주 한국 연예인들 가운데 중앙정보부 정보원들이 많았어. 일본 국회에서 무슨 영문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나를 가리켜 "백인천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말이야. 아주 지목을 해서 나를 괴롭혔다고. 국회가 그런데 일본 언론이 가만있나. 기자들이 쫓아다니면서 얼마나 캐고 다니는지 내가 정말 학을 뗐다고. 뭐? 중앙정보부 정보원이 맞았냐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지금이야 이야기해도 괜찮겠지. 사실이었네. 주일 대사관에 근무하는 중앙정보부 특수요원이 내 보직이었어.
귀화? 군대 때문에 귀화를 하면 쓰나. 내 꿈이 뭐였는가 말했잖아. 단 한 경기만 뛰어도 여한이 없다고. 거기다 날 좋아하는 팬들에 대한 약속도 아니지. 지금도 그 결정 후회하지 않네.
![]() 1975년 다이헤이요 시절의 백인천. 일본프로야구 사상 이적 첫해 타율 1위에 오른 타자는 이해 백인천을 비롯해 단 3명 뿐이다.. |
삼진이 적었던 타자라, 일본 야구팬들이 그렇게 기억하고 있단 말이지? 그랬던 것 같으이. 이유가 있었네. 보통 2군에 있다가 1군으로 가면 감독이 3번 찬스를 준다고. 특히나 코칭스태프가 주문하는 게 멍하고 있다 삼진당하지 말라는 거야. 한 번도 스윙하지 않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면 크게 혼이 난다고. 일본만 그런 줄 알았더니 미국도 그렇더군. 몇 해 전 미국 마이너리그에 갔는데 타자들이 원바운드 공에도 스윙을 하는 거야. 이거 왜 그러나 싶었지.
그런데 말을 들어보니까 "볼넷으로 출루하면 안 된다는 거야." 스카우트들이 그런다잖아. "우선 배팅을 해야 결과가 나오지 않느냐. 우리가 널 평가하려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어야 하는데 볼넷은 내 타격을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표본이 아니지 않느냐." 맞는 말이지. 나도 그래서 2군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타격을 했다고. 그래서인가 내가 삼진이 적은 타자지만 볼넷도 많지 않았어. 거의 같은 비율이었다고 보면 되네.
나만의 타격 노하우? (고개를 갸웃하며)특별한 건 없었네. 야구를 알면 알수록 내 약점이 무엇인가 연구를 할 수 밖에 없네. 야구는 사실 먹이사슬이야. 투수는 타자의 약한 부분을 노리고 거기다 공을 찔러놓고 타자는 그걸 눈치 채 투수의 공을 노린단 말이지.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경험이겠지. ‘저 투수는 초구로 뭘 던지고 결정구는 무엇이다’는 건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면 깨우치게 힘들다고. 그렇지. 자네 잘 아는구먼. 경험을 감으로 오인들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 경험과 연구가 조화를 이뤄야 해.
난 현역시절 더그아웃에 앉아 있으면 상대 투수들의 성향을 죄다 체크했어. 나만 그런 건 아니고 대개 타자들이 노트에다 투수들의 특징이나 구질, 볼카운트 공략 등을 적었어.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런 거 많이 하잖아. 경기 중에 노트에다 뭐 적는 거 말이지. 꽤 좋은 방법이야. 경기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느낀 건 쉽게 잊지 않는 법일세. 우리나라 선수들도 더그아웃에 멍하니 있지 말고 이런 노력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그게 1975년이었나? 그렇군. 니혼햄 파이터스(도에이 후신)에서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세이부 전신)로 트레이드된 게 그해였었군. 아쉬웠지. 왜 아쉽지 않았겠나. 당시 니혼햄 외야진이 괜찮았어. 장이형, 오시다 쓰요시, 센도우 미마오 그리고 내가 있었는데 요시다는 발은 빠른데 몸쪽 공을 못 쳤어. 센도우는 다 좋은데 왼손투수한테 너무 약했다고. (손을 흔들며)아니지. 그게 내가 다이헤이요로 이적한 동기는 아니었어. 다른 이유가 있었네. 그 이야기 전에 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지.
1971년 도에이 오카와 히로시 구단주가 간경변으로 세상을 떠난다고. 그게 계기가 돼 다음해 도에이가 닛타쿠(부동산 회사)로 넘어간단 말이야. 닛타쿠가 아주 재미난 팀이었어. 전반기에는 도에이 유니폼에 닛타쿠 마크만 붙였지. 그런데 후반기 들어 닛타쿠 구단주가 7색의 유니폼을 제작하게 한 거야. 매일 다른 색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하라는 거였지. 이거 아주 획기적인 시도 아니야? 물론 퍼시픽리그의 인기를 살린다는 게 명분이었지만 당시 도바시 마사유키 감독이 그랬다고. "아니 그럼 더블헤더 1차전에서 이기면 2차전엔 뭘 입고 나가란 소리야"(웃음).
하지만 닛타쿠는 1년만 운영하고 니혼햄으로 팀을 넘겨버렸네. 명칭도 니혼햄 파이터스로 바뀌었지.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구단 사장으로 미하라 오사무, 감독으로 나가니시 후도시가 임명됐다는 걸세. 내가 도에이에 처음 입단했을 감독이 미즈하라 시게루라고 했잖나. 미하라와는 일생의 라이벌이었네. 동향(同鄕)인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라이벌로 살았어. 사실 나와 장이형, 그리고 팀의 주력 선수 대부분이 ‘미즈하라의 아이들’이었거든. 1969년 미즈하라 감독이 주니치 드래건스로 떠났어도 후임 감독들이 미즈하라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이라 편했다고.
그런데 미하라 사장이 부임하니까 전세가 역전되더군. 미하라가 딱 한마디 했어. "너희들은 내 새끼들이 아니다." 어쩌겠나. 그게 사자 새끼의 운명인 걸. 1974년 시즌이 끝나고 미하라가 대대적인 트레이드를 시행했네. 한꺼번에 7명을 트레이드 했어. 그것도 오시다(주:1974년 타율 2할4푼7리, 5홈런, 34도루), 오쓰기 가쓰야(타율 2할3푼4리, 22홈런, 90타점), 나(타율 2할6푼1리, 15홈런, 42타점, 24도루)같은 주력 선수들을 말이지. 장이형도 트레이드 시킬려고 했는데 다른 팀들에서 "하리모토는 반골기질이 강해 받기 어렵다"고 해서 무산됐지.
생각해보면 당시 트레이드가 잘된 일일지도 모르네. 세 선수 모두 이적한 팀에서 잘 했고 야구를 더 오래할 수 있었거든. 다음해 오시다는 도루 44개로 퍼시픽리그 도루왕에 올랐고 오쓰기는 그 이후 타율 3할, 30홈런, 100타점 이상을 꾸준히 치는 강타자가 됐으니까 말이야. 난 자네도 알다시피 퍼시픽리그 타율 1위에 오르지 않았나. 오죽했으면 니혼햄 구단주가 신문기자들에게 돈은 얼마든지 줘도 좋으니까 세 선수 다시 데려올 수 있겠느냐고 하소연을 했겠어.
한국야구 출신 첫 타이틀 획득, 타율 1위
![]() 4월 13일 SBS스포츠 해설을 맡고 있는 백인천이 제자 이승엽의 2군 강등 뉴스를 보고 있다. |
도이가 4번을 치고 내가 5번을 쳤는데 전기리그 우리가 놀랍게도 2위를 기록했어. 3위권 즉 A클래스만 들어도 성공이라고 했거든. 다들 깜짝 놀랐지. 나도 페이스가 아주 좋았어. 시즌 내내 니혼햄의 오다 요시토와 타율 1위 경쟁을 벌였어. 공교롭게도 내가 니혼햄에서 다이헤이요로 올때 오다가 오쓰기와 2대 1트레이드 상대로 야쿠르트에서 니혼햄 유니폼을 입게 됐네.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오다와 함께 니혼햄에 온 또 다른 선수가 바로 지난해까지 요미우리에서 (이)승엽이의 스승이었던 우치다 준조 히로시마 타격코치야. 인연이란 게 참 묘하지.
어쨌든 오다와 재밌게 타율 경쟁을 하는데 내가 시즌 말미에 몸에 맞는 공으로 부상을 당했다고. 그래서 남은 20경기를 모두 결장하게 됐어. 그때 타율이 정확히 3할1푼9리3모였네. 오다는 나보다 20경기가 많은 122경기를 뛰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3할1푼8리7모를 기록했다고. 단 6모 차이로 내가 타율 1위에 오른 거야. 기쁜 일이지. 장이형이야 일본에서 태어나 줄곧 거기서 야구한 분이지만 난 한국야구 출신 아닌가. 더 기뻤지. 이해 베스트나인에도 뽑혔네. 하지만 내 부상의 여파로 팀이 후반기 4위로 내려앉은 건 큰 아쉬움이었네.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마우이. 사실 당시 퍼시픽리그 투수가 무척 좋았다고. 각 팀마다 20승대 투수가 있었어. 게다가 왼손 3할 타자는 흔해도 오른손 타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거든. 나름 선전했다고 생각하네.
1979년의 일도 기억하나? 허허, 준비를 많이 했네 그려. 그해가 롯데 오리온스에서 뛸 때라고. 아마 타율이 3할4푼이었지. 홈런도 18개를 쳤고. 36살에 이 정도 타율을 기록한 건 이전에도 잘 없는 기록이라고 하더군. 이때 2번째 타율 1위를 할 수도 있었다고.
시즌 종반까지 한큐의 가토 히데지와 타율경쟁을 벌였네. 역시 시즌 말미일거야. 한큐와 우리가 싸우는데 내가 3할4푼8리, 가토가 3할5푼3리였다고. 그런데 내가 그날 3점 홈런을 포함해 3타수3안타를 치며 10-0으로 앞서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어. 가토는 2타수무안타로 3할5푼1리로 타율이 내려갔지. 나랑 불과 1리 차이밖에 나지 않았어.
6회인가 1아웃 주자 3루를 두고 가토가 등장했네. 그때 우리팀에 외국인선수로 레온 리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투수한테 "10점 차이니까 백인천을 위해 가토를 볼넷으로 거르자"고 했다고. 그런데 우리팀 투수가 약간 돌아이 기질이 있었어. 아무 생각 없이 가운데로 공을 던진 거야. 배팅볼 온 줄 알고 가토가 멋지게 휘둘렀지.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당연히 홈런이지(웃음). 리가 마운드로 가서 불같이 화를 내더라고. "널 위해 3점 홈런도 치고 백인천이 별짓을 다했는데 이럴 수 있느냐"고 말이지.
투수가 와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당시나 지금이나 그 투수 원망은 하지 않아. 하지만 그때는 맥이 쭉 빠지더라고. 그래 아예 타율 1위는 포기를 했네. 자네도 레온 리 아나? (고개를 끄덕이자)그 친구 아들도 누군지 알겠구먼. 그래 데릭 리(시카고 컵스). 그때 서너 살 정도 됐을 거야. 아주 점잖고 착한 아이였어. 아버지 닮아서 성장해서는 야구도 참 잘하더구먼.
돌이켜보면 19년 통산 3할을 친 해가 3시즌이라고. 일단 3할을 치면 다음해 기록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게 사실이야. ‘왜 그럴까’ 고민을 했지. 이유는 뻔해. 야구선수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올시즌 3할을 쳤으니 다음해도 이렇게 하면 되겠지’하는 자만이야. 게다가 언론에 시달리지 각종 시상식에 참가해야지 일단 바빠진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훈련양이 부족해지게 마련이야. 훈련이 자신감인데 자꾸 훈련을 빼먹으면 자신감이 줄어들지 안 줄어들겠어.
사진(사진명- 백인천 3-4)- 4월 13일 SBS스포츠 일본프로야구 해설을 맡고 있는 백인천이 제자 이승엽의 2군 강등 뉴스를 보고 있다.
내 경우는 오히려 기복이 좀 있었던 게 오래 야구하는데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 '쉬었다 잘했다'를 반복하다보니까 전해 쉬어도 다음해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어. 일종의 잡초기질이라고 보면 좋을 듯 허이. 밟으면 반드시 그걸 딛고 일어나는 뭐 그런 기질 말일세.
2천 경기, 2천 안타의 꿈은 사라지고
(지인들이 선물로 준 기념패를 보며) 보자. 일본프로야구에서 19년 활동하는 동안 타율 1회, 베스트나인 1회, 올스타출전 4회를 했구먼. 허허, 이 정도면 괜찮은 성적 아니야?(웃음). 당시 한국이 떠들썩했느냐고? 그렇지 않았어. 잘 몰랐지. 홈런이나 하나치면 한 이틀 지나서 백인천 홈런 쳤다 기사 한줄 나올 정도였지. 지금 승엽이처럼 큰 관심을 끌지 못했네. 타율 1위 올랐다고 한국에서 기자들이 온 적도 없었고. 일단 당시 한국에 프로야구가 있길 해 뭐가 있어. 프로에 대한 개념도 희박할 때였지. 같은 야구인들이나 "백인천 대단하네"했지.
가끔 한국에서 편지가 오곤 했어. 한국에 오면 환영하는 이들도 많았고. 만약 지금 타율 1위에 올랐으면, 뭐 장이형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대단했을 거야. 서운? 아니 전혀 그런 감정 느낀 적 없네. 난 누가 알아달라고 일본프로야구로 간 게 아니거든. 내 어렸을 적 꿈이 프로야구가 있는 나라에서 뛰는 것이었고 결국 꿈을 이뤘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보네.
물론 미국도 프로야구가 있긴 했지. 자네 모르나본데 1966년 포수에서 외야수로 전환할 때 피터 리저말고 말이야. 도에이 외국인코치가 나보고 "미국 가서 나랑 1년만 연습하면 메이저리그 입성이 가능하니까 같이 미국에 가자"고 설득했었다고. 일본에서 가까스로 적응한 터라 쉽게 발걸음이 안 떨어져서 그렇지 그때 갔으면 사람 일이란 게 또 모르는 거 아니야?(웃음)
이제 슬슬 이야기를 정리해야 할 것 같네. 1981년 롯데에서 긴데쓰로 이적을 하게 됐어. 1979년 이후로 성적이 하향세였지만 이전처럼 잘 극복하리란 믿음이 있었지. 게다가 1969경기, 1831안타를 기록하고 있어 2천 경기, 2천 안타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거든. 앞으로 1, 2년만 하면 달성할 듯싶었네. 그때 한국에서도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들었지. 갈등이 왜 없었겠나. 말리는 이들이 많았지. 성공여부가 불확실한데 뭐 하러 한국에 가느냐는 목소리가 꽤 있었어.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프로야구에 대해 아는 이가 누구 있었냐고. 없었잖아. 아무도 없었다고.
난 언제나 한국프로야구가 생기길 바랐고 그게 이뤄지면 뭐든 앞장서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사람이네. 더 뭐가 필요하겠나. 2천 경기, 2천 안타에 신경 쓰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야. 초창기 참 어렵고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귀국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해.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뭐 워낙 초창기였으니까 이해를 하지만 구단 사장이나 윗사람들이 너무 프로야구를 몰랐다는 거야. 프로야구부로 알지 프로야구팀으로 생각들을 안했다는 거지.
일례로 1982년 MBC 청룡 감독을 맡았지 않나. 그때 위에서 그러는 거야. "아니 백감독. 야구배트 부러지면 못 박아서 쓰면 되지 않아." 그건 양호해. 훈련 가면 공을 한 300타 준비해서 간다고. 그걸 갖고 말이야. "백감독이 공 장사 한다"고 말이지. 지금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내가 일본에서 못된 것만 배워와 장사한다는 소문이 들었을 때는 속상하더군.
1981년 이야기까지만 하기로 했으니 이즈음에서 정리를 하세. 늙은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우이. 내 나이에 더 바랄 게 뭐 있겠나. 한국프로야구가 계속 발전하길 비는 마음뿐이 더 있겠나. 나머지 이야기는 차후에 또 함세. (끝)
![]() 올해로 야구인생 50주년을 맞는 백인천은 공과가 명확한 야구인이다. 그러나 그가 이승엽 이전에 일본프로야구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한국프로야구 출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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