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誌 第1輯 |
慶州金氏의 正統系譜
- 硏究課題와 過誤에 對한 省察 -
慶州金氏大宗會聯合會
권 두 언
존경하고 사랑하는 전국의 종친 여러분 !
공사로 다망하실 제 종파 대종회장님 , 임원 여러분 !!
성하의 계절을 맞이하여, 농촌에서는 농번기로 한창 분주할 시기에 여러분들의 귀체금안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경주김씨대종회연합회는 지난 해 말 여러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창립총회를 가진 후, 더디나마 한발 한발 내딛어 왔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사무실을 마련하고 회장단 및 집행부를 구성하였으며, 우리 회 발기 취지인 정통계보연구의 기틀을 구축하여 왔습니다.
정통계보연구, 특히 시조 大輔公(諱 : 閼智)이래 신라천년사직의 38왕을 비롯하여 왕공귀족과 국가의 동량을 꾸준히 배출하여 온 우리 경주김씨 문중의 계보연구라면, 오직 正統史書와 權威있는 古譜를 위주로 한 각종 역사문헌을 철저히 검증하여 시대별로 엄정한 기록을 남겨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번에 출간하는 제1집 “慶州金氏의 正統系譜”는 우선 우리 경주김씨대종회연합회의 기본방향을 설정한 지침서가 될 것이며 계속하여 각종 자료와 기록을 검토하고 논증하여 보존, 전승하는 역할을 확실하게 담당하여 나갈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회의 硏究誌 제1집을 출간하면서 그간의 성원과 지도편달에 무한히 감사드리고 우리 경주김씨 모든 일가 여러분의 무궁한 번영과 건승을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慶州金氏大宗會聯合會 會 長 金 緊 洙
慶州金氏大宗會聯合會는 慶州金氏 諸宗派의 宗會 및 大宗會가 聯合하여 崇祖精神을 倍養하고 正統系譜의 硏究와 定立을 目標로 하여 2011년 12월 30일 創立總會를 갖고 출범한 단체입니다. 참여한 諸宗派는 다음과 같습니다. 江陵府使公派, 校吏公派, 杜溪公派, 文簡公派, 密直公派, 白村公派, 府使公派, 樹隱公派, 侍御使公派, 月城府院君派, 參贊公派, 版圖判書公派, 縣監公派, 戶曹參議公派.江陵府使公派, 校吏公派, 雞林君派, 連洞派, |
차 례
1. 서론
가. 종사연구의 자세 2
나. 어떻게 이런 일이? 족보편찬의 엽기적 사건 5
다. 선계대의 부정확한 기록을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 8
2. 족보 제대로 알자. 10
3. 경주김씨의 정통계보 13
4. 신라삼성연원보의 실체와 비판 15
가. 내력으로 본 신라삼성연원보 15
나. 신라삼성연원보의 개작과 흥행 18
다. 엉터리 신라삼성연원보를 보는 여러 시각 22
(1) 우리 겨레의 성씨 이야기(저자 김정현) 22
(2) 경주김씨 계림군파의 시각 25
(3) 경주김씨의 혼란을 보는 다른 시각 46
5. 결론 53
1. 序論
가. 宗史硏究의 자세
慶州金氏 후손으로서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족보를 검토하면서 옛 조상의 계보가 명료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는데, 과연 부끄러운 일일까? 17세기 이래로 족보를 편집하였던 선조들께서도 고심을 거듭하였던 계보에 대하여 당시에 수집 가능하였던 모든 자료를 검토하여 최선이라고 생각한 방식으로 정리해 놓았는데, 현존하고 있는 후손이 과연 선조들보다 더 많은 자료를 섭렵하여 수정할만한 근거를 찾은 것인가?
기껏 찾았다는 자료라고 제시한 “新羅三姓淵源譜”를 조선조 仁祖 시대의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선조들께서 誤譜라고 참조하지도 않았던 家譜를 내용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 중앙종친회의 종사연구위원이라는 자격으로 연구물을 발표하였으니, 과연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경주김씨중앙종친회 종사연구지 “계림” 제1집(1998년 4월 30일 간행) 107 쪽에 소개하고 있는 “新羅三姓淵源譜”의 참고자료라고 인용한 전라남도 장흥군 김영찬 가보의 내용은 태사공(諱 仁琯)을 영분공의 후손으로 계대하고 있는 내용은 왜 소개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위 김영찬 가보의 내용은 상촌공 6세손 응추(應秋)께서 서문을 쓴 것으로, 경주김씨대종친회 50년사(2000년 12월 20일 간행) 360쪽에 소개된 상촌공 6세손 창한공께서 서문을 쓴 계림김씨가보(1588년 선조 21년, 무자, 필사본 단권)와 다를 바 없이 오보라고 판단되어 선조들께서 활용하지 않았던 것이고, 신라삼성연원보라는 작품이 인조 때에 간행된 것이라면 숙종조 이후에 족보를 편집하였던 선조들이 능력이 부족하여 구해 보지 못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라삼성연원보”는 왜정 시대에 평안북도 벽지에 졸속으로 꾸민 보소에서 만들어낸 그야말로 ‘작품’일진대 명문거족의 후예가 이런 졸작을 인용하여 360년 전 작품으로 재창작하고, 경주김씨 중앙종친회 종사연구라는 과정을 훼손시킨 과오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탄생한 태사공파 대종회는 도를 넘어서는 작업을 벌였으니 소위 大安君 영단 조성인데, 영단비명을 새기면서 考證되지 않은 내용을 담아서, 여러 宗派에 분란의 씨를 뿌리고 있음은 최근 십여 년의 종란의 화근이라 할 것이다.
예컨대 후손으로서 선조의 유훈을 존중한다면 가르침을 존경하고 미흡한 계대를 밝히기 위해 신빙성 있는 자료를 학계의 권위자에게 확인받아서 활용하여야 마땅한데, 기껏 후손 몇 명이 모여서 박수치고 결정하는 잘못된 민주주의를 활용하였으니, 선조께 무례가 극심하지 않은가? 이런 잘못 진행된 태사공파의 전례를 따라서 마의태자를 파조로 하는 경주김씨를 탄생시켰으니, 경주김씨의 망신살이 끝없이 이어지게 생겼다.
이에 慶州金氏로서 족보를 만들고 있는 대종회들이 나서서 연합회를 결성하고 바로잡는 노력을 하려고 하는데 慶州를 본관으로 쓰고 있는 오래된 보첩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여, 잘못 인용된 자료를 삭제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여 바른 계보를 지켜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족보에 관한 연구 기록들을 보면, 조선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엄격했던 신분제도가 해이해져서 양반이라고 행세하는 가짜가 횡행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혈족인양 행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족보 편찬의 필요성이 커지게 되어 16세기 이후 각 씨족들이 다투어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왜정 시대에도 또 다른 필요성에 따라 지역별로 각종의 족보가 간행되었으니, 그 와중에 “봉이 김선달” 같은 사람이 족보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 장사해 먹었으니 개탄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주김씨는 각종파별로 족보를 만들었는데, 물론 혈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억울한 심사가 어찌 불편치 않을까 마는 ‘고추 가루 뿌리는’ 심정으로 만들어 내는 엉터리 족보 형태에 현혹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선조들께 죄송스런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경주김씨 제종파의 대종회들이 연합하여 올바른 계보를 정립하는데 힘을 모으기로 하였으니, 이후 족보를 편찬하고자 하는 문중에서는 더 이상 “봉이 김선달” 류의 족보에 현혹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대종회연합회의 자문을 받아 바른 계보를 담아 후손과 타성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족보를 만들어야 하겠다.
나. 어떻게 이런 일이? 족보 편찬의 엽기적 사건
2010년에는 경주김씨 족보 편찬 400년사에 유례없는 엽기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소위 태자파라는 족보가 등장하였는데, 언필칭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라면서 마의태자를 파조(派祖)로 도용한 사건이다. 이런 도둑질을 처벌할 수 없다는 법제도의 문제가 심각하다. 또한 경주김씨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한이 없다.
물론 비슷한 사례가 10년 전에도 있었다. 태사공파 대동보를 편찬하면서 태사공(휘 仁琯)의 상계대(上系代)를 심구하였다고 하여,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휘 은열)과 태사공 간의 소목을 정리한 것인데, 그래도 파조를 대안군으로 하지는 않았으니, 태자파 사건과는 유가 다르다 할 것이다. 태사공파의 상계대 심구는 후손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었지만, 신빙성이 결여된 자료를 맹신하여 벌어진 우매한 후손의 만용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태사공파는 대동보 편찬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잘못을 범하였다. 소위 대안군 영단(靈壇)을 조성하면서 대안군 후손의 다른 종파의 계대를 멋대로 비문에 담아 세운 일이었다. 이를 빌미로 하여 소위 태자파가 생겨날 여지가 있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종파별로 족보를 만들면서 대안군의 후손이라고 칭하던 태사공파, 판도판서공파 외에 순웅 장군을 원조로 하는 계림군파, 더 나아가서는 경순왕 후손으로서 다른 본관을 쓰는 성씨들의 족보를 뒤흔들 수 있는 사건이었다.
2010년의 엽기적인 족보의 유래를 정리해 보자.
(1) 출발 시에는 順雄 將軍을 派祖로 한다고 하여 장군공파라 하였다. 이를 추진한 사람들은 일부 계림군파 후손들이었다.
(2) 언제부터인가 順雄 將軍을 大將軍으로 품계를 올려 대장군공파라 하였다.
(3) 드디어 엽기적 사건의 핵심으로 順雄 將軍을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계대하면서 太子派라 칭하게 되었다.
위의 유래 단계별로 족보 편찬에 있어서는 안 될 해괴한 진행을 살펴보자.
첫째, 장군공파의 성립이 가능한가? 계림군파의 한 뿌리가 계림군(휘 균)의 정통 후손들이 전해오고 있는 족보를 버리고 순웅 장군을 파조로 할 수 있는가? 이는 계림군파 종회가 용납하지 않는 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계림군파 종회에서도 순웅 장군이 계림군의 먼 조상임을 인정하고 있고, 다만 300년 전의 선조들이 오랜 세월 연구하였지만 밝히지 못한 상계 소목으로 하여 순웅 장군을 원조(遠祖)라 칭하고 있는 것은 누차의 대동보가 지켜오고 있는 전승이다.
계림군파는 300년이 넘는 족보를 이어오고 있는 명문가로서, 창시보 이래 순웅 장군을 원조로 모시고 있다. 이런 순웅 장군을 파조로 한다면 당연히 장군공파의 주류는 계림군파가 되어야 하고, 계림군파 종회가 장군공파 종회로 외연 확대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계림군파 종회에서는 법정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장군공파 족보 편찬에 반대한 것을 보면, 장군공파의 성립은 계림군파 내의 쿠테타라고 할 것이다.
학교를 대표한다고 하면서 어느 한 무리가 그 학교를 하버드대학교의 분교라고 주장한다면 믿을 것인가? 대통령이 국가원수인데 국무위원이라고 하여 장관이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는가?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둘째, 순웅 장군의 품계를 대장군으로 승격시킨 사건이다. 고려 초기의 병제를 보면 상장군, 대장군, 장군의 품계가 역사 기록으로 나타난다.
훌륭한 조상을 미화하려면 이왕 승격시키려면 상장군으로 하지 않고 고작 대장군으로 한 품계만 올릴 것이 무엇인가? 우리보다 먼저 족보에 관심을 가졌고, 더욱이 명문가의 품위를 위해 선조들의 관직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담아내었던 조선 시대의 족보 편찬자였던 조상님들은 왜 순웅 장군을 대장군으로 품계를 올려 드리지 않았을까?
욕불과급(欲不過及)이라는 말이 있는데, 지나치면 오히려 못하다는 뜻으로, 조상이 하지도 않은 벼슬을 덕지덕지 붙여놓으면 오히려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며, 대외적으로도 오히려 망신스런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태자파가 있을 수 있는가? 다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면 개골산에 들어가 마의초식으로 생을 마친 분을 파조로 모신다면, 천년 후에 갑자기 나타난 후손들은 피골이 상접한 비썩 마른 사람들일 것이다. 이는 본관이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솔거를 파조로 모시는 화가 집안을 만들어 내는 족보 제조에 불과하다.
본관은 고려 시대에 비롯된 것으로 역사 기록에 누가 경주인이라 불렸는가를 근거로 하여 경주김씨 가문이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의태자를 경주인이라 지칭한 역사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경순왕조차도 경주김씨가 아니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따라서 이런 유래를 가지고 탄생한 태자파 족보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대외적으로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실로 엽기적인 족보가 아닌가?
다. 선계대의 부정확한 기록을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역사적 기록이 잦은 외침과 각종 병란으로 인하여 많이 훼손되고 멸실되어 어느 문중이나 조상의 계대를 명확하게 밝히기 어려운 점은 우리 선대의 훌륭하신 조상들께서 이미 고뇌하셨던 것이다. 계림군파의 임진대동보(창시보)의 서문에는 이런 고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김경대의 신라삼성연원보는 근거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는 경순왕의 석씨왕비와 여러 명의 왕자 후손들을 경주인으로 삼고 있다. 고려 시대로부터 시작된 본관(本貫)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후손 누가 경주인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 저작의 신빙성을 확보하는 것임을 모르겠는가?
정통계보는 선계대의 부정확한 기록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이 나라 역사의 실제 상황이다. 잦은 외침과 병란뿐만 아니라 참혹한 사화나, 무고한 참소로 인하여 멸문의 화를 입은 경우 가승을 이어적기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고려 시대의 명문가였던 김부식의 가문이 무신들의 득세로 몰락한 역사에서 보듯이 큰 나무는 거센 바람을 맞게 마련이었다. 우리 경주김씨 가문이 본관을 경주로 하여 1000년이 넘었는데, 한 뿌리나마 경순왕으로부터의 명료한 계대를 지켜낸 것은 매우 값지다 할 것이다. 바로 수은공의 업적(수은실기)에 힘입은 것이다.
경주김씨 영분공파 후손 이외에는 경순왕에서 중시조에 이르는 계대가 명료치 못함을 선조들이 기술한 각 문중의 족보들이 내려오고 있다. 역사적 기록들을 참조하여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선조들을 비교하여 경순왕까지의 계대를 추산할 수는 있으나 어찌 오차가 없을까?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동시대인들을 보면 비슷한 연배에도 5대 또는 6대까지 차이가 나는 경우를 자주 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믿을만한 보충 자료나 사적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남북통일이 되어 우리가 고려사 자료를 좀 더 충실히 검토할 수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기까지 동시대를 사셨던 태사공(仁琯) 후손 상촌공과 장군공(順雄) 후손 계림군의 친족 관계를 따질 수 없었던 선조들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후손들의 어리석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계림군파 대동보 서문에 기술된 방식을 지켜나가야 하겠다. 즉, 일설에 의하면 이러저러한 계대가 성립한다고 하고, 혹은 어떠어떠하다고 하나 확증의 사적이나 자료가 없으므로 기존의 방식대로 중시조를 1세로 하여 족보를 편찬한다고 하면 될 것이다. 명백한 고증을 거치지 않고 신뢰할 수 없는 소설가의 창작물을 참조하여 300년 전의 조상들께서 정립한 계대를 훼손함은 얼마나 불효막심한 일인가?
2. 族譜 제대로 알자.
가. 가첩(家牒) 또는 가보(家譜)
대체로 종손(宗孫) 집안에서 필사하여 전해오는 가족관계 기록이다. 그런데 종손이 부실하면 친족의 왕래가 소원해져서 그때그때 발생하는 가족관계의 변동(출생, 혼인, 공훈, 입양, 사망 등)을 정확하게 기재하지 못할 수 있다. 또한 친족 간에도 원한관계가 있어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부실해진 기록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늦은 가을에 모시는 시제 때이다. 그러나 요즘의 세태에는 그나마 많은 친족이 모이지 못하여 충실한 기록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어떤 계기가 있으면 친족들의 합의로 家乘譜를 만들어 나누어 가지는 경우도 있다.
나. 파보(派譜)
10대조 이상의 선조를 같이 하는 후손들이 각자의 가첩을 모아서 계보를 정리하여 편집한 것을 파보라 한다. 이렇게 파보를 편집하려면 먼저 종회를 구성하고, 종인들의 중의를 모아 보소를 개설하여 같은 뿌리의 종인들로부터 收單(출생, 혼인, 공훈, 입양 등의 기록)을 받아 편집하게 된다. 계통이 불분명한 사람들이 비록 수단을 제출하더라도 편찬위원회에서 검증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자기의 계통을 입증할 책임은 수단을 제출한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다. 대동보(大同譜)
20대 이상의 조상을 같은 뿌리로 하는 종인들이 논의하여 대종회를 구성하고 대동보를 편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 수만 명에 이르는 종인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방안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대종회 산하의 여러 종회 대표들이 그간의 파보를 기초로 하고 각 종회의 다양한 연락 방법을 동원하여 특정한 기한을 정하고 수단을 수집하게 된다. 수십만에 달하는 종인들 에게 빠짐없이 연락하기는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완벽한 대동보를 편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편찬된 대동보가 특정 조상을 모시는 종인들의 계통을 밝히고 누대의 기록들을 수록하여 가문의 역사를 간직하게 되므로 후세교육에 유익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우리 경주김씨의 경우 여러 대종회들이 있는데 20세기까지 두계공파, 수은공파, 판도판서공파, 계림군파, 태사공파 등이 대종회를 일컬어 왔다.
라. 계통보(系統譜)
대동보에는 누대 조상들의 내력과 역사적 기록, 그리고 현존하는 종인들의 내력을 상세하게 수록하다보니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어 보관에 문제가 되고, 활용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수십만에 달하는 종인들이 모두 대동보를 갖게 하려면 인쇄에 소요되는 비용이 막대하게 되어 종인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요즈음에는 전자 출판의 형태로 간결하게 할 수도 있으나 인쇄된 형태로서 각 종인들의 계통만을 요약하여 편집한 것이 계통보이다. 즉 누대 조상들의 상세한 내력을 생략하고 가계의 흐름을 정리한 것이다. 대종회가 편찬하는 대동보를 요약한 계통보의 경우에는 계통보만으로도 여러 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소문중의 대표들이 대동보를 갖고 다른 종인들은 계통보만을 가지고 하면 종인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으므로, 요즘에는 대동보를 편찬하는 경우에 계통보를 겸하여 편집하고 있다.
3. 慶州金氏의 正統系譜
족보를 가문의 역사라 한다면 ‘오래 된 것이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30년대 이후에 경향 각지에서 양산된 족보는 많은 오류가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먼저 족보 편찬의 動機가 다르다. 19세기 이전에는 족보에 오를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동등하게 수록되게 되었다. 나라를 잃고 성씨까지 왜식으로 바꾸어 살아야 하는 시대 상황에서 같은 조상의 뿌리를 유지하려고 만든 기록이므로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다. 또한 신분의 귀천이 없어졌으므로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면 당연히 한 계통의 기록에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혈통이 포함된 경우는 없을까?
집성촌에 모여 사는 후손들은 내력이 분명하였지만 멀리 나가 살던 사람들의 내력은 모호한 경우가 많아서 사후 입양의 형태로 계대를 이어 기록의 부실한 부분이 많아지게 되었다. 심지어는 혼인관계의 기록까지 조작하여 삽입한 경우도 있다.(즉, 혼인도 하지 못하고 단명한 사람에게 입양하기 위해 억지로 혼인 기록을 만들어 넣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분단 상태가 장기화되어 혈통의 정확한 파악은 불가능하다. 즉 20세기의 족보들에 포함되어 있는 계통도가 정확하다고는 결코 단정할 수 없다. 더욱이 19세기까지의 상황을 보면 남부지역에 살던 경주김씨 후손들과 북부 지역에 살고 있던 경주김씨 후손들의 교류 왕래가 충분치 못하였다. 북부지역에 살고 있던 경주김씨 대부분은 집안에서 버림받아 나가 살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후손이었기에 남부지역에 사는 집안사람들과의 왕래가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변하여 20세기에 편찬된 족보에는 같은 후손이라고 하여 계통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정확한 계통이 검증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족보에 올라 있느냐 아니냐가 경주김씨의 판정 기준인가?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해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18세기나 19세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 변화가 족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오늘날에는 출생신고 서류에 父系의 本貫을 기록하고 있다. 행정적으로 서류가 만들어진 이러한 기록이 무탈하게 유지되었다면 확실한 판정기준이다. 문제는 그 기록이 몇 대에 걸쳐 유지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즉, 행정적으로 유지되어온 기록과 과거의 족보의 계통을 접목하여 하자가 없다면 분명한 경주김씨 후손이겠지만, 족보의 계통에 있는 조상과 행정기록 상의 계통이 다를 경우에 의문이 제기되고 설왕설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한 시비꺼리인데, 정통계보를 연구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정통계보를 연구하면 이런 의문투성이를 양산하게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계보를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소설 같은 족보를 만들어 놓고 기고만장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족보가 값진 것이며 어떤 족보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건대 족보에는 19세기까지 평등권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기 조상의 내력을 19세기까지(최소한 1850년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정통계보에 편입하기 어렵다는 것이 대원칙이다. 또한 19세기 이전의 족보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바꾸려면 그 이전의 역사적 기록으로 검증하여야 할 것이며, 20세기의 소설을 근거로 19세기 이전 조상의 내력을 바꾸는 것은 조상 모독이며 후세의 지탄을 받을 명백한 역사 조작이라 할 것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비난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와 같이 조상들의 내력을 소설처럼 바꾸는 족보 조작을 묵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新羅三姓淵源譜의 實體와 批判
가. 내력으로 본 신라삼성연원보
경주김씨의 계보를 혼란에 빠트린 소위 신라삼성연원보는 1934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金景大라는 사람이 新羅朴昔金淵源譜宗約院이라는 譜所(소재지 평안북도 의주군 광성면 풍하동 447번지)를 만들어 본인 이름으로 著作, 發行하였다고 인쇄된 것이다. 이를 인용하는 사람이나 비판하는 사람들 모두가 간과한 것이 바로 김경대가 저작 겸 발행자라고 밝힌 점이다. 더욱이 자신의 住所(평안북도 의주군 고진면 유동 267번지)까지 명기한 小說 같은 淵源譜를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명문가 후예들이 한심할 따름이다.
김경대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 그가 만든 또 다른 족보(碧洞派譜, 1924년)에 등재된 본인에 관한 기록(보명 종거 鍾鐻)으로 보면, 그는 1880년 생으로 족보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전국의 계림군파, 태사공파, 영분공파 등 여러 문중을 찾아다녔으나 전라도 함평군에 살고 있는 종인에게서 그나마 긍정적인 답을 들었던 것 같다. 이를 근거로 자신을 수은공의 32세손으로 추정하고 직계조상을 소설로 만들어 꾸민 허무맹랑한 족보라 할 것이다. 그나마 양심적인 것은 후세 자손들에게 선대로부터 내려온 계보를 찾아달라는 양해를 구한 점이다.(後世子孫 先代來系 詳尋以 此諒解)
신라삼성연원보의 원작자 김경대의 고충을 소설처럼 엮어 보자.
1880년은 조선 고종 17년이고 54세였던 1934년에 소설을 탈고하였는데, 그전에 자기 집안 족보를 만든 1924년이면 44세에 불과하였다. 그 족보에 기재된 본인의 고백을 보면 7년 넘게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하니 35세 무렵(한일합방 후 기미독립만세 이전)부터였을까? 먼저 경주김씨의 훌륭한 문중을 찾아 평안도 일대를 다녀보니 태사공파 후손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김태훈 이던가? 그런데 그네들 족보에 있는 선대를 보니 경순왕으로부터의 계대가 억지춘향이라 믿을 만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려조 명신의 후예들의 문중을 찾아보자고 전국 유람에 나섰겠다. 일단 서울로 가보자 하여 계림군파 문중을 찾으니 오래된 대동보가 있기는 한데, 도저히 자기네 집안과 내력을 이어붙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또 태사공파의 큰 뿌리 상촌공파 후손들을 찾아보니 (아마 유제(有濟)공을 만났다면 이 때였을 것이다.) 젊은 사람이 뿌리를 찾으려고 애쓴다고 격려는 하지만 상촌 후손일 리가 없다고 박절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왕지사 나섰으니 고려말 충신 수은(樹隱)공 후손도 찾아보자 하여 전라도 일대를 뒤지고 다녔는데, 다행히 경순왕으로부터 수은공(충한 冲漢)까지의 일목요연한 계대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자기 집안을 수은공 후손이라 하자고 작심하고 남원 땅 문중 종장과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평안도 벽동에 어떤 후손이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거절당하였다. 이로 인해 의기소침하였지만 전라남도 함평 땅에서 드디어 고마운 분을 만났다. 그분께서는 평안도 땅에 사는 경주김씨들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고, 뿌리의 연원을 확연하게 밝힐 수 없다면 이러이러 하게 족보를 만들어 가까운 종인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가 또한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 비슷한 내력의 집안과 합하여 더 큰 족보를 만들고, 누대의 노력을 더하면 나중에는 수은공파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것 아니냐면서 수은공파의 항렬도를 알려 주었겠다.
그래 우리끼리 번드레한 족보를 만들자 결심하고 일단은 자기 이름부터 항열에 맞게 보명을 종거(鍾鐻)로 삼자 하면서 가까운 집안을 규합하여 족보를 만들었다. 이것이 소위 1924년에 평안북도 벽동군 일동 70번지의 김경대가 저작 발행한 경김족보의 내력이다. (이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소설처럼 정리한 것으로 결코 김경대의 족보 편찬 노력을 폄훼하려는 의도로 기술한 것이 아님)
그럼에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저작겸 발행 김경대’에 주목해야 하겠다. 평안북도 벽동군 일동 300번지에 소재한 경김보소를 발행소로 하면서 본인을 저작겸 발행이라 하였으니, 그는 이 족보도 소설처럼 만들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집안의 족보에 저작자가 있을 수 있는가?
신라삼성연원보를 왜 소설이라 하는가? 역사 소설이 범람하는 요즘 작가의 주제 설정에 맞추어 여러 등장인물들은 시대 상황에 맞는 다른 여러 사람들과의 흥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최근세사에 속하는 조선조 고종과 대원군 시대는 사료가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인물들 김홍집, 김옥균, 안동김문의 사람들, 여흥민씨 문중의 여러 사람들의 행적은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아기자기한 로맨스나 악랄한 가렴주구의 행태 등이 과장되거나 허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간혹 문중 사람들이 이러한 소설을 각색한 방송 드라마 제작에 항의하는 일도 빈번한 것이 혹은 문중 선조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인데, 이를 어찌 법적으로 단죄할 수 있는가? 소설가는 분명히 창작임을 밝히고 있는데, 역사적 인물의 실명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 시대를 같이 살아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 창작의 허무맹랑한 전개를 어찌 탓할 수 있는가? 여기서 한 번 더 김경대가 신라삼성연원보를 발행하면서 자신을 저작겸 발행자라고 밝힌 점을 상기해 본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남의 창작물을 인용하면서 자기가 한 것처럼 꾸밀 수 없다. 요즘에는 분명 저작권 침해이다. 그런데 이 저작물을 복사한 어떤 사람들이 일부 내용을 조작하고, 더욱이 김경대라는 저작자를 300년이나 일찍 태어나게 하여 선조 시대에 살게 하는 괴력을 발휘하는 비상한 창작을 하고 있으면서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왜 창작임을 밝히지 않는가? 혹시 김경대의 후손이 살아 있어 저작권을 주장할까 염려해서인가? 김경대를 300년 전에 태어난 것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태사공 후손 택준을 경순왕 44세손에서 24세손으로 20대를 앞당겼으니 과연 괴력을 지닌 창작자가 아닌가?
나. 신라삼성연원보의 개작과 흥행
소설도 잘만 쓰면 인기 작가가 되어 떼돈을 벌수 있는 세상이다. 2백만 경주김씨 후손들을 현혹하고 있는 이 소설을 현대에 맞게 각색하면 역시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원작자의 양해도 없이 개작하여 배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중일 터이다. 아니면 무식하여 용감한 것인가? 경주김씨 계통을 문란케 하는데서 나아가 다른 성씨들의 계보까지 넘보고 훼손하는 무례를 범하는 이런 사람들이 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니 한심한 민주주의 아닌가?
원작자의 고충을 이해한다면 개작을 할 때라도 근거를 밝히고 원작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분명이 족보에 관해서라면 평안북도는 오지였는데, 그곳에서 발행한 족보의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짜집기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정통 문중에서 인정받지 못하니까 그럴싸하게 조상들의 이름조차 날조하여 계대하고, 화려한 벼슬로 치장하고 각색하는 창작의 노력이 필요하였다. 이런 類의 족보는 잡문이라 할 것인데, 수학 공식에 대입하여 얻는 정답이라도 되는 양 자기 선조들이 밝혀준 계대의 모호함을 부정하고 있는 후손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이런 소설을 추종하여 소위 대종회를 만들고 총회를 열어 박수치고 결정하여 조상의 연원을 바꾼다고 하는 (태사공파, 장군공파) 대종회의 결의방식이 민주주의인가? 여기서 내린 결론이 이 나라 법에서 인정하는 종약인가? 자기네들만의 광대놀이라면 모르겠는데 다른 문중을 욕되게 하고 다른 문중의 조상을 훔쳐오는 결정을 종인들이 박수쳐서 결정할 수 있는가?
과거에 흥행에 성공하였던 영화의 복고판이 더러 제작되기도 한다. 그런데 1930년대의 족보를 되살려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일제시대의 암울한 시기에 뿌리 의식이나마 지켜보겠다는 소박한 충정을 가엾어 할 것인가? 더욱이 적통 문중에서 인정받지 못하여 인용조차 하지 않던 그런 잡문을 찾아내어 300년 전의 문헌이라고 흥분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은가?
그런 문헌이 있었다면 우리 선조들이 어렵게 족보를 만들면서 찾아내지 못하였을까? 그렇다면 그렇게 흥분하여 날뛰는 바로 그 후손이 자기 조상의 우매함을 비웃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자기 직계의 선조들께서 선계대가 애매하니 후손들이 깊이 살펴서 보완하라는 유지를 잘못 이해하여 집안 내력도 모르는 박수무당의 훈수에 따라 춤추는 꼴이 아닌가?
엉터리 신라삼성연원보를 또 다시 변조!
첨부 사진: 중요한 연대 등이 완전 조작된 내용 중 1부분
원본(좌측)에는 "경순왕의 44세손 택준"이었는데 왜곡시킨 부분(우측)에는 "경순왕의 24세손"
국립중앙도서관에는 2개의 삼성연원보가 있다.
위조 진본과 또 다른 변조본(경주김씨 일파에서 자신들의 씨족역사 왜곡을 위하여 수년간 기획 하여 많은 부분을 변조시켜 박물관등에 소장용으로 배포한 책자)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계보연구회에서는 원 신라삼성연원보라는 것도 조잡하기 그지없는 잡보지만 이것을 또다시 짜깁기 하여 다른 책자의 진본인양 탈바꿈시켜 국립 중앙도서관등에 기증하여 문외한들을 눈속임하고 있다.
만약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 사고가 생기면 또 다른 잡보가 완전 세탁되어 씨족 역사 왜곡은 성공할 수 있다는 계산이 아닐까? 이러하니 신라김씨들의 족보를 불신하는 이유가 아닌가?
사진 좌측: 1934년대 김경대가 만들어 배포한 날조 잡보(전국에서 단1권 발견)
우측: 1997년도 경주김씨 계보연구회에서 많은 부분을 의도적으로 변조시켜 새로
비치한 영인본(경주김씨 씨족 역사 왜곡을 위하여 배포한 책자인데 다른 씨족
역사 왜곡의 도구로 인용하고 있다.)
신형식교수(이화여대:신라역사연구소장)는 박성수 교수가 발표한 "마의태자는 두 사람 이었다." 등에 대하여 “얼간이 씨족학자. 족보학자들이 내용도 검토 않고 인용하는 오류역사 의 진범이다. 오류의 역사는 또 다른 오류변조의 역사만을 양산할 뿐”이라고 혹평한다.
이들은 왜 씨족 역사를 왜곡하는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의태자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합리화하기 위한 편법 주장이다.(연구인 김 강)
다. 엉터리 신라삼성연원보를 보는 여러 시각
신라삼성연원보에 대한 비판의 견해는 여러 시각에서 제기된바 있다.
(1) 우리 겨레 성씨 이야기(저자 김정현)
족보의 허구성에 대한 좋은 예로 <신라삼성연원보>를 들 수 있다. 신라계 김씨, 박씨, 석씨 왕과 그 후손들의 계보를 엮은 책이다. 그 내용은 실제 우리의 국사책이나 학자들의 문집 등에서 볼 수 없는 허무맹랑한 기록들이 무성하다. 어디서 찾아다 끼워 맞추었는지 마치 소설 같은 허구적인 기록이 많은 것이다.
엮은이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김경대(金景大)란 사람이다.
그의 찬술 1권을 보면 신라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큰 아들 김일(金鎰 마의태자)을 여섯 번째 아들로 기록해 놓았다. 또한 경순왕의 부인 박씨(죽방부인) 소생의 아들이 3명이 있고 앞서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소생의 아들이 5명이 있었다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경순왕 재위 때 오로지 박씨 성의 죽방부인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라삼성연원보>에 등장하는 송희부인은 가공의 인물이다. 또한 마의태자 위로 전.요,곤,영,분 5명의 형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그 자체가 분명한 허구라고 밝힌다.
어떤 학자는 <신라삼성연원보> 에서 보는 왕자들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왜 그 많은 형들을 제쳐두고 마의태자가 경순왕 앞에 나서서 ‘고려국에 나라를 그냥 내 주는 것은 불가(不可)하다.’는 간언을 했을까?” 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신라삼성연원보> 는 1934년에 출간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의 족보 발행을 허용했던 시기이다. 이 당시에는 가짜 족보 출판이 성행했다.
<金丁鉉 著> 우리겨레 姓氏 이야기(2009년 지식산업사 간)
(참고) 신라삼성연원보에서 제시한 계보도[붉은색이 엉터리]
시조(始祖) ------------- 2세------------3세-----------4세------------5세----------- 6세-----------7세------------8세------ 알지(閼智)------------세한(勢漢)-----아도(阿道)-----수류(首留)-----욱보(郁甫)-----구도(仇道)-----말구(末仇)-----내물왕(奈勿王) 대보공(大輔公) 추봉세조왕(追封世祖王) ---9세----------10세---------11세----------12세---------13세-----------14세---------15세--------16세--------17세----- 복호(卜好)----습보(習寶)---지증왕(智證王)----진종(眞宗)----흠운(欽運)-----마차(摩次)----법선(法宣)---의관(義寬)----위문(魏文)- -18세----------19세-------------20세---------21세-------------22세-------------23세---------24세--------25세------- 효양(孝讓)-----원성왕(元聖王)---예영(禮英)----균정(均貞)-------신무왕(神武王)----문성왕(文聖王)-----안(安)-----------민공(敏恭)---- --26세-----------27세----------28세--------------------- 실홍(實虹)-------억렴(億廉)----유렴(裕廉) --26세-----------27세----------28세--------------------- 인경(仁慶)-------효종(孝宗)----
경순왕(敬順王)----------- -29세
(경순대왕15왕자)--------30세
佺(전)
瑤(요)
琨(곤)
英(영)-----------------------淡(담)--------達城金氏(달성김씨)
------------------------淑(숙)--------大邱金氏(대구김씨)
奮(분)
鎰(일, 謙用(겸용)-------------善雄(선웅)----경주김씨
--------------------------順雄(순웅)----경주김씨太子(태자)
굉 (珍用:진용)----------------雲發(운발)----羅州金氏(나주김씨)
------------------------雨發(우발)----경주김씨
鍾(종, 鳴鍾)------------------豊雄(풍웅)----경주김씨
-----------------------奧(오)-------牛峰金氏(우봉김씨)
鑑(감,殷說)-------------------泰華(태화)----경주김씨
-----------------------------淑(숙)--------安東金氏(안동김씨)
-----------------------------濂(렴)--------水原金氏(수원김씨)
-----------------------------湯(탕)
錫(석, 重錫)-----義城金氏(의성김씨)
鍵(건)-----------江陵金氏(강릉김씨)
鐥(선)-----------彦陽金氏(언양김씨)
錘(추)-----------三陟金氏(삼척김씨)
德摯(덕지)-------蔚山金氏(울산김씨)
위 계보도는 태자파 등 일부만 인정하고 신라김씨 대종회. 경주김씨 중앙종친회등 수많은 종파 에서 전형적 가짜로 분류합니다.
(2) 경주김씨 계림군파의 시각
쿠테타 세력에 의한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계림군파에서는 수년 전부터 신라삼성연원보를 근거로 계대를 조작하고 있는 장군공파에 대하여 비판하여 왔고, 조작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자료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장군군파로 시작하여 대장군공파, 태자파로 승격시켜온 사람들의 주장과 행태에 대하여 계림군파는 차분하게 대응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계림군파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칭 경주김씨 대장군공파에서 2007년 정해(丁亥)에 발행하였다는 소위 대장군공파 요람이라는 것을 만들어 역사를 재창조하고 있다.
그 요람의 내용은 사실(事實)과 전혀 다르게 조작(操作)되어 있으며 그네들 입장을 보충하기 위해 왜곡(歪曲)하고 있다.
(가) 월성가승(月成家乘)과 월성세승(月成世乘) 및
계림군파 대동보에 대한 왜곡 또는 조작부분
1)) 월성가승은 경주김씨 계림군파 임진창시 대동보가 발행되기 전에 김세신(金世臣=1688-1736)공이 저술하였는데 경순왕 자 태자겸용(太子 兼用) 자 순웅(子 順雄) 자 인위(子 因渭) 로 계대되어 있다고 조작 하였다.
2) 월성세승은 김덕운(金德運=1687-1767)공이 저술하였는데 경순왕 자 은열(子 殷說) 자 계령(子 繼苓) 자 한공(子 漢公) 자 수서(子 壽西) 자 영고(子 永固)로 계대한 다음 안서(按書)에 평장사공 인위의 치사 연대를 감안하여 계산하면 순웅 장군공이 대안군보다 나이가 위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원조 순웅(遠祖順雄) 자 인위(子因渭)로 등재한 것은 순웅 장군공이 마의태자의 아들일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왜곡 하였다.
3) 임진 창시대동보에도 위와 같은 뜻을 담고 있고 경순왕 자 은열 자 태화 보결(보결) 계령 자 한공 자 수서 자 영고 원조 순웅 자 인위로 계대되었다고 왜곡하였다.
4) 1842년의 임인대동보부터 1991년의 신미대동보까지 5차례에 걸쳐서는 경순왕 자 은열 자 태화 보결(譜缺) 계령 자 한공 자 수서 자 영고 원조 순웅 자 인위로 계대 되었다고 왜곡하였다.
(나)순웅장군공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계대되어 있다는 근거로 제시한 족보들
1) 1934년 김경대(金景大)가 발행한 신라삼성연원보
2) 1934년에 김태훈(金泰勳)이 발행한 경주김씨 족보(갑술보)
3) 1999년 발행 경주김씨 태사공파 대동보
(태사공의 조상계보 검토내용에 순웅 장군공이 대안군 은열의 예하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4)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수성백파보(隋城伯派譜) 계림군후 백천공파보(鷄林君后 白川公派譜) 송강공파보(松岡公派譜) 예판공파보(禮判公派譜) 계림군파 가승보 계림군후 병조참판공 파보등 6개 족보
(다)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대종회의 구성
자칭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대종회가 순웅 장군공의 예하 7개파 대표가 참석하여 2000년 1월26일에 창립 되었으므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창립이후 계대 정립을 위한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1) 월성가승 (2) 월성세승 (3) 계림군파 임진창시대동보 (4) 대안군 은열공 묘지명 (5) 강릉김씨 사정공이원청동파보 (6) 경주김씨분파총목 (7) 경주김씨문헌록명현절목집성록 (8) 신라삼성연원보 (9) 경주김씨족보갑술보 (10) 고려사 (11) 태사공파족보 (12) 휘 순웅공이 대장군으로 기록된 문헌 (13) 경순왕 태자 휘 일 - 순웅공으로 계대된 족보 등을 검토하고. 장군공 김순웅을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계대 한다고 결론지은 다음 2000년 11월20일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의안대로 결의 하였다고 하였다.
(후손들이 모여서 박수로 결의하면 헌 고무신으로 엿 바꿔 먹듯이 조상도 바꿔 놓을 수 있다니 이런 민주적 절차는 다른 성씨들이 들으면 웃어버릴 모양새 아닌가?)
(라) 대장군공파에서 만든 요람
대장군공파에서 요람이라는 소설을 작성하여 역사를 날조,왜곡하고 있는데,
1) 월성가승(月城家乘)에 대한 왜곡
월성가승은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7세 직계 장손으로 호는 석릉(石菱)이며 1844년에 태어나 21세때 문과급제 하였고 벼슬은 공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하고 향년47세에 졸하신 金昌熙(김창희)씨가 저술한 8권의 가승인데 4권은 유실되고 1.2.4.8. 네 권만 남아 있었다. 이것을 김주신의 작은집 종제인 김세신(金世臣)의 9세손 야촌 김정무(野村 金正珷)가 1988년부터 1989년까지 필사하여 보관하고 있는 가승으로 내용은 현조(顯祖)의 행실. 유사. 시문. 비문, 제문. 등을 기록하고 있다.
조상 계보로는 경순왕부터 계림군까지 계대한 다음 계림군 예하로는 경은부원군의 직계조상에 대한 내용을 위주로 하면서 특히 인원왕후(仁元王后)를 탄생케 한 김주신이 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인 진사공 김필진(金必振) 내외분께서 경은부원군 김주신을 많이 보살펴 주셨기에 8권 후미에는 숙모이신 안동권씨 부인의 제문을 손수지은 내용을 끝으로 하였다.
주목할 만한 것으로 월성가승원대세계(月城家乘遠代世系)란에 敬順王 諱 簿 南諱 謙用 按東國史畧有太子謙用之語 順雄 敬順王之後 將軍 配 江陵金氏宣喚女 男諱 因渭 라고 기록한 다음 안서로 순웅부터 경순왕 사이에 보실세계(譜失世系)가 있고 경순왕이 고려 경종3년 흉하신 후43년에 순웅의 아들 인위가 현종 때 우복야 하니 이를 근거로 하면 연대가 지극히 가깝다고 하는 참봉공 김덕운의 안서를 인용하고는
또 경주 김상욱(金尙郁) 집에 보관중인 세보에는 경순왕 4자(四子) 은열 이후 4세대를 내려가 영고의 아들이 인위라고 하였으니 이는 경순왕 흉후 43년에 인위가 우복야를 하였는데 나이 70세에 치사를 하였는지 아닌지 명확치 않아서 그간의 대수가 그렇고 저렇고 하는 말이 많더라 하고는 인위 예하는 계림군까지 월성세승과 같은 내용을 담아 계대하였다.
그런데 월성가승 원대세계의 내용을 살펴보면
㉮ 경순왕의 휘자가 어떤 곳에는 부(溥)자 라고 하였지만 고려사의 기록에 부(傅)가 맞는다고 하였으므로 오기로 판명 되며
㉯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남휘겸용(南諱謙用)은 아버지인 경순왕보다 두 글자를 내려서 썼고 안서에 “동국사략에 태자겸용이라는 말이 있다”라고 한 것은 조선 태조때 문형 대제학 권근(文衡大提學 權近)등이 찬한 동국사략(東國史畧)을 확인 하지 않고 참봉공 김덕운이 쓴 월성세승(月城世乘)의 내용을 따라 태자겸용(太子謙用)으로 오기(誤記)한 것으로 간주되며
㉰ 순웅의 이름 앞에 남이라고 쓰지도 않고 남휘겸용 보다 두 글자를 올려서 경순왕의 첫 글자인 경자와 같은 위치에 순웅이라고 하고는 경순왕지후라고 하였으니 남휘겸용의 아들이 아니고 경순왕의 후이지만 계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며 관직은 장군 배위분은 강릉김씨 선환의 여식이고
㉱ 순웅의 아들은 남휘 인위라고 하면서 아버지인 순웅보다 두 글자 내려서 경순왕과 그 아들 남휘 겸용과 같이 글자의 높낮이 배열을 엄하게 해놓은 것은 순웅 장군공이 경순왕의 아들 남 겸용의 아들이 아니고 경순왕의 후예이지만 정확한 계보는 알 수가 없다는 뜻임에도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는 필사자(筆寫者) 야촌 김정무가 월성가승 8권 맨 후미에 “이책은 昌熙 호는 石菱 가 저술한 가승이라 후에 자손을 위하여 필사 하여둠” 이라고 써 놓은 것을 낙서로 지우고 창희의 176년전 7세 방조인 김세신이 임진창시대동보가 발행되기 전인 1600년대에 저술 하였으며 순웅 장군공이 마의태자 둘째 아들로 계대된 고증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삼척동자도 비웃을 일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필사본 원문 계림군 대종회에 확인 가능)
2) 월성세승에 대한 왜곡
월성세승은 송애 문정공 김경여 (松崖 文貞公 金慶餘)의 증손자인 참봉공 덕운(參奉公 德運=1687-1767)이 수기(手記)하여 만든 한권의 가승(家乘)인데 많은 사료들과 가승들을 검토하여 조상계보를 정립하고 인위평장사 아래로 12세 적장손 계림군까지의 계대를 사기(史記)에서 명확하게 밝힌 다음 평장사 위로 아버지인 순웅장군 위의 계대는 사료 상에서 밝힐 수가 없고, 경순왕의 위로는 이미 밝혀진 사첩(史牒)이 상합(相合)하지만 경순왕과 순웅장군공의 사이는 밝힐 수가 없으며 은열 이하의 계보는 가정전언(家庭傳言)에 따라 고록(故錄=잠깐 적어둔다는 뜻)으로 적는다고 하면서 은열 공부시랑(殷說 工部侍郞)자 계령 형부시랑(子 繼苓 刑部侍郞) 자 한공(子 漢公) 자 수서(子 壽西) 자 영고(子 永固)라 하고는 임진창시 대동보에 등재되어 있는 안서(按書)와 같이 순웅 장군공을 은열의 후예로 계대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하였고 또한 경순왕과 순웅 장군과의 관계도 사료에 밝혀진 바가 없었음으로 일세 휘:순웅(一世 諱:順雄)이라 하고는 이하로 명확한 계대를 설명하고 있는데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 에서는 이 같은 설명의 내용이 은연중에 순웅 장군공을 마의태자 둘째아들로 계대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참봉공 덕운이 월성세승을 편록 하면서 조선조 태조 때에 문형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권근(文衡 弘文館 藝文館 大提學 權近) 등이 저술한 동국사략(東國史略) 춘하추동 4권중의 하권에는 “왕견태수겸용 우고려 청상견려 왕왕회우국 도숙대이행 추호불범 도인상경 왈석견씨지 래야여 봉시호 금왕공지 래야여견부모”(王遣太守兼用 于高麗 請相見麗 王往會于國 都肅隊而行 秋毫不犯 都人相慶 曰昔甄氏之 來也如 逢豺虎 今王公之 來也如見父母)
“경순왕께서 태수 겸용을 고려에 보내어 서로 만나기를 청하니 고려왕이 서라벌에 와서 만났는데 고려왕을 호위한 도숙대의 행실이 서라벌 백성들을 털 끝 만큼도 범하지 않았기에 서로 경하하며 이르기를 옛날 견씨(후백제 견훤을 지칭)가 왔을 때는 승냥이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이번에 왕공(왕건 태조지칭)이 왔을 때는 부모를 본 것과 같더라.”라고 하였음에도 이를 명확하게 확인하지 않고.
태수 겸용(太守 兼用)을 태자겸용(太子 兼用)으로 글자 한자를 잘못 기록하므로 임진창시 대동보와 월성가승에도 그같이 믿고 기록케 하였으며 훗날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도 태자의 자(字)가 겸용이라고 조작(造作)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과 순웅 장군공의 배위는 강릉김씨로 대상 선환(大相 宣喚)의 3여이시고 대상 선환은 명주군왕 주원(溟洲郡王 周元)의 6세손이신데 월성세승 에서는 대상 선환이 명주군왕의 7대손이라 하였고 방계문중 소목의 일부 내용을 명확하게 확인도 하지 않고 서(庶)자를 붙여 놓음으로써 훗날 그 후손들의 위상에 큰 피해를 입혔던 오류 등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후손들은 족보나 가승을 편집 기록함에 있어서 조상계보에 대하여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검토하며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등재 하여야 조상님께 불효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고 명확하게 밝혀진 고증과 근거 있는 사료에 나와 있는 사실 대로만 수록 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안서로 후손들에게 계보 정립을 당부한 선조께서 후손 몇몇이 모여서 박수치고 “큰 집 할아버지를 훔쳐다가 저희들 할아버지로 모셨으니 선조께서도 그리 알고 기뻐하십시오.”라고 고유하면 그 선조께서 노발대발하지 않으실까?)
3) 계림군파 대동보들에 대한 왜곡
경주김씨 계림군파 임진창시대동보부터 신미대동보까지 6차에 걸친 대동보의 조상계보에 관한 왜곡(歪曲) 내용을 지적하자면 1772년의 임진창시대동보 발행 당시에는 대안군 은열의 묘지가 발견되기 12년전 이었다. 따라서 경순왕의 아들이 몇 명이고 태자의 이름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고, 신빙성이 없고 참고할 가치가 많지는 않지만 어느 일보(一譜)에 태자 궐명이자 역궐명 삼녀 은열(三女 殷說)이라는 내용도 있더라고 기록하였다.
그 다음 평장사 인위가 고려초 8대 임금 현종의 장인으로서 고려사 기록이 명확하고 아현 김감사 려(阿峴 金監司 礪) 소장 가승에 평장사공 인위의 아버지가 고려 초기 정4품 장군을 역임한 김순웅 이라는 사료들의 근거가 명확하므로 시조 대보공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는 국사(國史)로서 사료(史料)가 그런대로 밝혀져 있으므로 국사의 내용대로 기록하고 경순왕 이후부터 장군공 까지는 사실(史失)로 명확한 근거가 없어서 다 밝히지 못하고 장군공을 1세로 하여 원조순웅(遠祖順雄)으로 임진창시 대동보를 편찬하면서 연대가 맞지 않아서 장군공을 대안군의 예하로 계대 할 수 없다는 월성세승의 안서와 대안군부터 영고까지의 고록(姑錄=잠깐 적어둔다는 뜻)을 그대로 등재하여 발행 하였다.
1784년에 대안군의 묘지(墓誌)가 발견되어 경순왕의 아들이 다 밝혀지고, 넷째아들 대안군의 아들이 태화(泰華)임이 밝혀졌으나 태화의 아들은 기록이 없어서 계대가 명화하게 이어질 수는 없지만 대안군부터 영고까지의 고록에 묘지의 내용을 삽입하였다.
그 이후 2차인 임인대동보부터 6차인 신미 대동보 까지 경순왕의 아들은 대안군 묘지에 따라 기록 할 수 있었으나 장군공의 조상계보는 더 밝혀진 바가 없어서 원조 순웅(遠祖 順雄)으로 등재한 다음 장군공을 1세로 또는 계림군을 1세로 하여 일관되게 대동보를 편찬해 왔는데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는 우리 계림군파의 역대 대동보에 장군공을 대안군의 예하인 공부상서 영고 후예로 계대한 것처럼 왜곡하여 계림군파 대종회 종원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 대동보 참조)
(마) 근거 족보들의 허구성
순웅 장군을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계대한 족보라고 근거를 밝힌 족보들을 보면
1)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性淵源譜)
1880년생 김경대(金景大)가 평안북도 벽동(碧洞)에서 족보를 갖지 못하였다가 1924년에 경김족보갑자년(慶金族譜甲子年)이라는 허황(虛荒)된 족보를 처음 만들면서
“내가 을묘년 가을에 족보를 이루겠다는 뜻을 굳히고 이에 7.8.년에 걸쳐 각도를 유람하면서 고적 등본 김충한공 서문 오래된 묵보초본 및 6세조 대우공 집에 있는 문적을 살펴보고 의문 없이 떳떳하게 편집할 마음을 굳혔다.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나의 중조 적선공의 차증손 영진씨 후손은 전라 함평군에 살고 있으므로 다 기록 할 수는 없으니 후세 자손들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계보를 찾아주고 양해를 바란다.” (김경대가 본인 족보에 기재한 안서) 는 기록을 남겼다.
(惟我乙卯秋 成譜趣旨令至七八年 各道遊覽古蹟 腾本 金冲漢公 序文上古 墨譜草本及 六世祖大佑公家所 文蹟可考一遵編緝心常無 疑吾中祖積善公 次曾孫永珍氏后孫則 全羅咸平郡 仍居 故不可盡記 後世子孫先代來系 詳尋以 此諒解)
또한 자신을 김충한의 32세손으로 맞추기 위하여 직계조상을 작명 조작 계대하고 사실(史失)로 조상계보가 밝혀지지 않아서 보결(譜缺)로 비워둔 계림군파와 태사공파의 조상계보를 임의작명날조(任意作名捏造)하여 영분공파, 계림군파, 태사공파 합보를 2권으로 만들었는데(국립도서관 한58-가5-5-126) 국사인 시조 대보공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는 오자만 있을 뿐 큰 무리 없이 국사(國史)인 정보와 같았으나, 그 이후로 터무니없는 임의 조작과 날조를 하였다.
일언반구 설명이나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임의로 날조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전부다 열거 하지는 못 하겠지만 중요한 일부분만 지적하면 경순왕비 죽방부인 박씨소생이 정보에는 생 3남 1녀인데 여기에서는 생8남 1녀로 태자 전(佺). 요(瑤). 곤(琨). 영(英). 분(奮).등 5형제가 더 있다고 하였고 태사공 인관(太師公 仁琯)을 대안군 은열(大安君 殷說)의 12세 장손(長孫)으로 장군공 순웅(將軍公 順雄)을 대안군의 5세손 한공(漢公)의 동생 연공(沇公)의 손자로 하여 대안군의 7세손으로 둔갑시키고, 대안군의 5세손 품언(稟言)의 아들 4형제 금영. 한남, 용담, 김씨선대 순보(順輔) 순거(順擧) 순서(順瑞)순단(順端)을 한공의 아들로 뒤바꾸었다.
이렇게 자기 집안 족보를 만들면서 계림군파와 태사공파의 적장종통마저 뒤바꾸어 놓더니 10년 후인 1934년에는 의주(義州)로 옮겨와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性淵源譜)라고 하는 괴상한 족보1권을 발행 하였다.
여기서 박(朴) 석(昔) 양씨는 설명을 줄이고 김씨 시조이신 대보공(大輔公) 후예만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는데 국사(國史)에서 확인된 시조 대보공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의 계보 중 경순왕의 19세조부터 16세조까지 정보(正譜)상에 습보(習寶) 지증왕(智證王) 진종(眞宗) 흠운(欽運)을 사도(斯道) 구해(九解) 이천(伊天) 미휴(美休)로 뒤바꾸어 놓았다.
나아가 14세조이신 법선(法宣)의 아들이 경순왕의 13세조이신 의관(義寬) 한분이신데 진지왕(眞智王)의 후예인 연충(蓮忠) 충필(忠弼) 필긍(弼肯) 긍현(肯玄) 4대를 법선의 큰아들 계보로 조작 하였다.
또한 정보에는 경순왕의 6세조이신 문성왕(文聖王)의 큰아들이 안(安)이시고 민공(敏恭) 실홍(實虹) 이자효종(二子孝宗) 경순왕으로 이어졌으며 문성왕의 둘째아들 식(軾)이고 식의 아들이 인경(仁慶)이신데, 신라삼성연원보에는 인경을 한 대 내려서 민공(敏公)의 둘째아들로 하여 경순왕의 조부이신 실홍(實虹)대신 인경(仁慶)으로 뒤바꾸었다.
김경대(金景大)자신이 10년 전 처음 발행한 경김족보 갑자년에서는 국사의 정보와 같이 발행하였으면서 10년 후에 발행한 신라삼성연원보에서 국사를 뒤바꾸었으면 근거의 사료(史料)를 제시하고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임에도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계보만 바꾸어 놓았으니 어찌 신뢰할 수 있는 책자라고 할 것인가?
신라삼성연원보를 근거 없는 잡보(雜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정보에는 경순왕비 죽방부인 박씨가 생3남1녀하고 낙랑공주 왕씨가 생5남2녀 별빈안씨 생1남이신데, 김경대가 1924년에 처음 발행한 경김족보 갑자년에는 죽방부인 박씨 생8남1녀 낙랑공주 생5남2녀라 하고는 같은 사람인 김경대가 10년 후에는 신라삼성연원보에서 송희부인석씨(松希夫人昔氏)생5남 죽방부인박씨 생3남1녀 낙랑공주왕씨 생5남2녀라하여 경순왕비 한분을 더 만들고 있다.
똑똑한 후손 둔 덕에 경순왕께서는 마누라 하나 더 얻으셨으니 복도 많으신가?
계림군파의 원조 순웅장군공에 대해서는 1924년에 만든 경김족보 갑자년에는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 은열(殷說) 태화(泰華) 정구(正矩) 계령(繼苓) 연공(沇公) 수서(壽西) 순웅(順雄)으로 대안군 7세손이라 하더니,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마의태자의 둘째아들이라 하여 5세를 줄여 놓았다.
태사공파의 중조인 태사공 김인관(太師公 金仁琯)에 대해서는 1924년 경김족보 갑자년에서는 대안군 은열(殷說) 태화(太華) 정구(正矩) 계령(繼苓) 한공(漢公) 경보(景輔) 세린(世麟) 태서(台瑞) 약선(若先) 미(敉) 인관(仁琯)으로 대한군의 12세손이라 하더니,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대안군 은열을 감(鑑)이라하고 은열의 아들을 심(深)이라 한 다음 정구(正矩)계윤(繼尹) 양검(良儉) 인관(仁琯)이라 하여 태사공 김인관이 대안군 6세손으로 6세를 줄여 놓았다.
또한 판도판서공 김장유(版圖判書公 金將有)에 대해서는 1924년의 경김족보 갑자년에서는 소목의 기록이 없었는데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감(鑑) 심(深) 중구(重矩) 원개(元槪) 지공(之恭) 여생(麗生)필손(弼孫) 언보(彦輔) 익정(益精) 덕립(德立) 수(秀) 장유(將有)라 하여 중구부터 수까지 9대를 작명(作名) 삽입하였다.
이외에도 창작의 수준이라 할 수밖에 없는 조작 계대가 수도 없이 많으므로 신라삼성연원보는 털끝만큼도 참고 가치가 전무(全無)한 잡보(雜譜)인 것이다.
1880년생인 김경대는 족보도 갖지 못한 가계(家系)였으나 한일 합방 후 왜정에서 침탈의 목적으로 호적을 편재할 때 성(姓)과 본관(本貫)을 본인의 희망대로 부여 하니까, 경주김씨로 등재하는 1924년초 평안북도 군남 답동(郡南沓洞)에서 주인 없는 큰 무덤을 발견한 다음
그 무덤을 자신의 입벽중조(入壁中祖=처음벽동에 들어온 중조) 병판공 김보남(兵判公 金甫南)묘로 하여 족보를 처음 만들었음은 경김족보 갑자년의 서문과 병판공 묘지와 발행동기를 후기로 써놓은 내용으로 보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24년에 족보를 처음 만들면서 고려말기 예의판서 김충한(禮儀判書 金冲漢)공이 명나라 홍무28년(을해, 서기1935년)에 영분공(永芬公)부터 자신의 조부까지 벼슬한 직계조상들만의 관작을 적어놓은 근지(謹誌)를 입수하고, 1784년에 대안군묘지가 발견된 후 영분공이 경순왕의 셋째아들인 김명종(金鳴鐘) 이라고 판독된 것을 확인하고 김경대 본인의 가계를 예의판서 김충한의 후예로 계대하면서 예의판서공의 조상계보를 영분공파의 기존 족보와 비슷하게 수록하였다. 그러나 10년 후에 만든 신라삼성연원보 에서는 자신과 계대를 맞추기 위하여 예의판서공의 조상계보를 뒤바꿈으로서 영분공 기존 족보와도 판이(判異)하게 다르게 조작 날조하였으므로 신라삼성연원보를 경주김씨 영분공파 대종회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알고 나서 계보연구회에서는 신라삼성연원보를 국립도서관에서 복사한 다음 즉시 영분공 예하의 계보를 기존 족보와 같게 재조작하여 판매 하였으니 원작자 김경대의 양해도 받지 않고 초고속 정보화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을 석기 시대 유물이라 속이는 잡보를 어떻게 희귀본이라 할 것인가?
하기는 그런 사람들만 모여 박수치고 바꾸는 역사 놀이 한마당이 개그 소재가 되기는 하겠다. 왜정 시대 평안북도 구석에 보소를 만들고 편집한 신라삼성연원보를 300년 전에 있었던 책자의 영인본이라고 우기는 몰상식한 주장도 웃기는 얘기다.
참고사항 : 김충한공 서문 : 고려말 예의판서 김충한의 조상 계보지 홍무28년 을해=1395년.
2)경주김씨족보(갑술보)
경주김씨족보(갑술보)는 일정 소화 9년인 1934년에 1889년생 김태훈(金泰勳)이 평안북도 용천군 내중면 산동(平安北道 龍川郡 內中面 山洞)784번지 자택에서 철산(鐵山)곽산(郭山)용천(龍川)의주(義州)정주(定州)선천(宣川)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신의 집안(당시 생존자 집안 23가구(家口))를 모아 처음 만든 가승(家乘)이다.
이 김태훈은 1924년에 경김족보 갑자년과 1934년에 신라삼성연원보라는 잡보를 만든 김경대(金景大)와는 같은 도내에 살면서도 김경대가 1924년에 처음 만든 경김족보 갑자년에는 태사공 김인관을 대안군 김은열의 12세손으로 계대한 것이 연대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족보를 갖지 못하였음에도 입보(入譜)하지 않고 있다가 김경대가 1934년5월에 신라삼성연보를 만들면서는 태사공 김인관을 대안군6세손으로 계대하자 그 계보에 따라 가승을 만들면서 태사공파 기존 족보에는 태사공의 8세손 휘:오(諱:珸)의 큰아들이 자정(子汀)이고 둘째아들이 상촌공 자수(桑村公 自粹)인데 자정(子汀)의 8세장손 정남(正南)이 무후(无后)하였음을 알고 철산군 백양면 명암리 순대산(鐵山郡 栢梁面 鳴岩里 順岱山)에서 호(號)가 운암(雲岩)인 김옥남(金玉南)의 주인 없는 묵은 무덤을 발견하고는 정남을 옥남으로 바꾸어 자신의 가구를 옥남의 후예로 계대한 후,
일명 운암공파(雲岩公派)라 하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선생의 종손자 김유제(金有濟)씨가 갑인년인 1914년에 졸 하였는데 졸하기 직전에 서문을 쓴 것처럼 하고는 한일합방 전까지 조선조 직제에는 없었던 전홍문관장 원종유제서(前弘文館長 遠宗有濟序=홍문관 관직 영사(영의정이 겸임) 대제학, 제학, 부제학, 직제학, 응교, 부응교, 수찬 ,부수찬, 박사, 저작,정자,)라는 서문을 조작하여 공신력을 갖춘 것처럼 위장을 하고 20년 후에야 가승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국사인 시조 대보공 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의 계대 중 정보(正譜)에는 경순왕 20세조 복호(卜好) 아들이 습보(習寶)이시고, 지증왕(智證王) 삼자 진종(眞宗), 흠운(欽運), 마차(摩次)로 이어 지는데 김태훈의 가승에는 복호의 둘째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모르겠다는 뜻으로 00이라 표기하여 5대를 내려간 다음 경순왕의 14세조이신 법선(法宣)을 계대함으로써 경순왕의19세 직계선조이신 습보부터 15세조 마차까지 5대를 방조(傍祖)라 하였고 경순왕의 6세조이신 문성왕의 큰아들이 안(安)이시고 안의 큰아들이 민공(敏公) 둘째아들이 인경(仁慶)이며 민공의 아들이 실홍(實虹)으로 경순왕의 조부이신데 김태훈의 가승에는 문성왕의 둘째 아들로 00또 그 아들 00이라 한 다음, 그 아들을 인경(仁慶)이라 하여 인경을 경순왕의 조부라고 터무니없는 조작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순왕의 아들은 김경대가 만든 잡보와 다르게 전비박씨 생3남1녀 후비왕씨 생5남2녀라 하여 8공자라 하였고 순웅장군을 마의태자의 둘째아들로 태사공 김인관을 대안군의 6세손으로 판도판서공 김장유를 대안군의 12세손으로 신라삼성연원보와 똑같이 계대하는 등 사료(史料)의 근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국사를 날조하고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조상계보를 조작해 놓은 근거 없는 잡문(雜文)이라 할 것이다.
이런 쓰레기만도 못한 잡보를 순웅장군공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이라는 근거라고 한다면 말 못하는 짐승인 소도 웃을 것이다, (국사내용 후첨)
3) 최근의 족보들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 재판과정 에서나 요람을 통하여 이미 순웅장군공을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계대하여 발행된 족보들이 다수 있다고 하면서.
가) 1986년 발행 수성백파보 (隋城伯派譜)
나) 1997년발행 계림군후백천공파보(鷄林君後白川公派譜)
다) 1998년발행 송강공파보 (松岡公派譜)
라) 1999년발행 예판공파보 (禮判公派譜)
마) 2000년발행 게림군파가승보 (鷄林君派家乘譜)
바) 2000년발행 계림군후병조참판공파보 (鷄林君後兵曹參判公派譜)
등 6종을 들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순웅장군부터 13세손 계림군까지의 사이에서 분파된 지파 세 문중과 계림군 예하 소목으로 계대된 소문중 셋으로 구분 되는데 이들 모두가 1995년에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신라삼성연원보라는 허황된 잡보를 1632년에 발행된 희귀본이라 신봉하고 그 계보에 따라 족보를 처음 만들었거나 족보를 발행한 역사가 일천(日淺)한 문중들이다.
자손록(子孫錄) 100명 미만의 가승으로부터 2.3백명 문중들이고 약4.5백명으로 추정되는 문중은 예판공문중 뿐이며 계림군 예하의 세 문중은 계림군파 대동보에 입보(入譜)된 역사가 짧고 지역 한 고을에 기십 내지 백 여 호 되는 종원들이 일개 문중 이라 하여 만든 족보들로서 천년전 조상이신 순웅장군공의 조상계보에 관한 추호의 영향력도 끼칠 수 없는 족보들인 것이다.
4) 장군공파의 구성
순웅 장군공의 13세 적장손 계림군까지 적장종문인 계림군파를 비롯하여 6개 지파를 합하면 7개 파인데.
첫 번째 분파된 지파는 계림군 5세손 이신 휘:남미(南美)공의 아우 남기(南基)공을 중조로 하는 예판공파(禮判公派)이고
두 번째는 4세조이신 휘:수(粹)의 이제(二弟)정(精)을 중조로 하는 정숙공파(貞肅公派)이며
세 번째 역시 휘:수(粹) 삼제(三弟)방(昉)을 중조로하는 수성백파(隋城伯派)이고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 분파된 지파는 1제 능(倰)을 중조로 하는 현령공파(懸鈴公派), 2제 헌(櫶)을 중조로 하는 송강공파(松岡公派), 3제 온(穩)을 중조로 하는 충문공파(忠文公派)이나 충문공파는 북한에 거주하고 있어 남한에는 자손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 지파들의 최근 발행된 파보들을 기준하여 종원수를 살펴보면.
가) 현령공파=1993년발행 파보단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298면
나) 송강공파=1998년발행 파보단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250면
다) 정숙공파=2003년발행 파보단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200면
라) 수성백파=1996년발행 파보단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284면
마) 예판공파=1998년발행 파보 2권 서문및 참고자료포함 500여면으로
계림군파 신미대동보 평균 900면17권에 비교하여 100분지8에 불과한데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는 대동보를 편찬 한다고 하면서 이들5개 지파를 주축으로 하고 대종회장 가계(家系)의 종원들과 일부 극소수의 추종 종원들로 대동보 편찬을 추진하고는 절대 다수의 계림군파 대종회 종원들에게 수단 제출을 독려하고 있으나 이는 도덕적으로도 불합리하고 상식적으로도 어불성설 이라고 할 것이다.
이유는 2000년1월26일에 장군공대종회를 창립하면서 400여 년 동안 대종손과 종회가 합심하여 계림군의 사우(詞宇)와 묘소(墓所)를 수호하며 향화(香火)하다가 1956년10월1일(陰)에 종헌(宗憲)을 제정하고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회로 개명하여 건전하게 운영 되고 있는 계림군파 대종회에 공식적(公式的)인 통보나 협의도 없이 소수 종원 에게 개별 통지하여 대종회를 창립 하였고 또 2003년12월20일에 대동보 편찬공고를 하면서도 사전에 순웅장군공의 적장대종손이나 종가(宗家) 또는 계림군 대종회와 협의나 통보도 없이 사료(史料)의 근거도 없는 조상계보(祖上系譜)로 태자파 대동보를 편찬 하겠다고 공고한 후 계림군파 대종회는 상위 대종회인 대장군공파(태자파) 대종회의 운영 방식에 협조하라는 취지를 알리고 있는데, 곁방살이가 안방차지 하려는 격이고 적반하장이라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계림군의 13세 직계선조이신 순웅장군공파 대동보 편찬을 하기위한 바른 절차는 순웅장군공의 적장 종손이며 계림군의 대종손인 효수(孝洙)를 비롯한 대종가(大宗家)와 먼저 협의를 한후 합의가 이루어지면 계림군파 대종회와 공식적인 협의를 거친 다음 5개 지파들과 협의를 하여야 할 것인데 바른 절차를 무시한 채 근거 없는 조상계보를 조작하여 대동보를 편찬하려 하고 있으므로 장군공의 적장종문(嫡長宗門)인 계림군파 대종가와 대종회가 반대하여 수단을 제출하지 않을 시에는 대동보가 편집 될 수 없는 이유로,
시조로부터 조상님들의 소목이 등재되고 자손록(子孫錄)에서는 매권마다 맨 앞에 대종손 가계가 수록되고 다음 지차순(之次順)으로 족보가 공간이 없이 엮어지는데 계림군파 대종가와 대종회가 공식적으로 반대의사를 수차 통보 하였고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하였음에도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 대동보 편찬을 강행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순웅장군공 및 계림군 적장종통을 부정하고 사료(史料)의 내용과 다른 가계를 종통으로 하여 대동보를 편찬 하려는 의도가 역연(歷然)한 것이다.
그럼에도 계림군의 후예로서 대장군공파(태자파) 대동보 편찬에 동조하여 수단을 제출하고 입보(入譜)한다면 누구도 직계조상으로 증명할 수없는 마의태자를 조상으로 섬겨야하고 사료(史料)와 다른 가계를 적장정통가계로 섬기게 됨으로 훗날 천수(天壽)를 다하고 저승에 가서 조상님을 어찌 뵐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조상님들에게 ‘저희가 중론을 모아 민주적인 방식으로 마의태자를 조상으로 모셨으니 기뻐해 주십시오.’ 라고 말할 것인가?
(바) 경주김씨 계보연구회에 관하여
경주김씨 계보연구회는 계림군후 계파 소목으로 계대 된 김창묵씨가 회장 이고 김경창. 김윤기. 김용석 등을 참모진으로 하여 계보연구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시조 대보공 예하의 범 신라김씨들과 동원이관성씨(同源異貫姓氏)들의 조상계보를 임의 조작하고 뒤바꾸는 등 대혼란을 야기하여 많은 지탄을 받아왔다.
1995년경에 1880년생 김경대(金景大)가 1934년에 발행한 신라삼성연원보라는 해괴한 잡보와 1889년생 김태훈이 발행한 경주김씨 족보 갑술보라는 잡문 가승(雜文家乘)을 국립도서관에서 복사하여 "신라삼성연원보는 1632년에 발행된 경주김씨 족보 중에서는 맨 처음 발행된 희귀보첩이라 조작하였고, 경주김씨 갑술보는 1914년에 추사선생의 종손자인 김유제씨가 발행한 갑인보라고 왜곡하여 그 두 족보의 계보에 따라 사실(史失)로 조상계보를 보결(譜缺)이라 기록해 놓은 명문거족들의 소목을 임의 조작하여 마구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그들의 만행(蠻行)은 여기에 다 설명 할 수는 없지만 계림군파대종회와 관계되는 몇 가지만 간추려서 지적하면,
첫째로 신라삼성연원보를 1632년에 발행된 경주김씨 최초의 희귀 보첩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자신을 경순왕 44세손이라고 하는 김택준(金澤俊)이 신미맹추상한(辛未孟秋上澣=1931년 초가을 초순)에 신라 박.석.김.연원보연기(新羅 朴.昔.金.淵源譜緣起)를 써 넣었는데 경순왕44세손을 24세손이라 조작하고 김경대(金景大)가 1934년에 발행하였다는 기사(記事)는 일정 당시 조선총독부 도서관 검인연도에 불과한 영인본(影印本)이라고 조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삼성연원보라는 잡보의 발행자 김경대는 "김종거(金鐘鐻)초명:경대 개명:만정. 자:수옥. 호:제암. 관:선전.경진생(初名:景大 改名:萬鋌. 子:水玉. 號:濟菴. 官:宣傳.庚辰生)"이라고 본인이 1924년에 처음 만든 자기네 집안 경김족보 갑자년의 자신(自身)란에 기록해 놓은 대로 김경대가 김종거이고 1880년 경진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있음에도
2004년7월10일에 발행한 계림지(鷄林誌)의 명현록에 김종거를 명현으로 소개하면서, 1580년 선조13년에 태어났고 호가 제암이라고 한 다음(김종거의 생년을 300년 앞당김)"초휘는 김경대 개명:만정 자는 수옥. 호는 제암. 영분공 김명종의 후손 참의 김응창의 아들 벼슬은 음보로 선전을 지냈다고 조작한바 있다.
또한 ‘경주김씨의 시보라 할 수 있는 신라삼성연원보를 1632년(인조20년) 제암공의 나이 52세 때 시작하여 62세 때인 1642년에 완료 할 수 있었다."라고 소개하였다.
그런데 김경대가 만든 잡보에 있는 영분공 예하 계보가 기존의 영분공파 족보와 판이(判異)하게 14대가 다르므로 이를 영분공파 기존족보와 같게 재조작하여 문헌보급안내(文獻譜及案內)란에 광고하면서 "신라삼성연원보 인조10년(1632)판 중간단권(重刊單券)"이라고 하면서 50,000원에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위를 자행하였다.
둘째로 1934년에 김태훈(金泰勳)이 자기집안 23가구(생존자 가구수를 말함)를 모아 처음 만든 잡문가승(雜文家乘)을 1914년에 성균관장 김유제(成均館長 金有濟)가 서문을 쓰고 간행 했다고 하면서 복사하여 경주김씨족보 갑인보라 하여 30.000원씩 받고 팔았다.
셋째로 지금의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를 태동시키는데 방조하여 순웅장군공을 마의태자 둘째아들로 계대하고, 현재의 계림군 종통을 부정하는 대동보를 편찬하도록 부하뇌동하며, 시조 대보공 예하 김씨뿐만 아니라 동원이성(同源異姓)들까지의 조상계보를 뒤바꾸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3) 경주김씨의 혼란을 보는 다른 시각
가) 마의태자는 어느 집안 조상인가?
정창열 차장 (주간조선, 2010. 8. 2)
경주김씨 태자파, 마의태자 1세로 삼은 새 족보 제작 부안김씨·통천김씨 등“마의태자는 우리 조상” 반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912?~?). 망국의 한을 품고 삼베옷을 입은 채 산천을 떠돈 것으로 알려진 이 비운의 태자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문중이 각기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은 경주김씨 태자파(太子派) 대종회(회장 김주경)가 작년에 마의태자를 자신들의 1세로 삼은 대동보(大同譜·동성동본에 딸린 모든 파를 합쳐서 엮은 족보)를 만들어 문중에 배포하면서 증폭됐다.
경주김씨 태자파는 당초 경주김씨 대장군공파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 순웅(順雄·932~1015년) 대장군을 중시조로 삼고 있던 문중으로, 순웅 장군의 윗대를 마의태자의 배다른 동생인 은열공으로 계대(繼代·대를 이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열공의 나이가 순웅 장군보다 오히려 3~4살 어린 점 등을 이상하게 여겨 2000년부터 진짜 뿌리 찾기에 나선 결과 순웅 장군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대동보 제작에 나섰다.
2009년 9월에는 대종회 명칭도 대장군공파에서 태자파로 바꿨다. 정사(正史) 기록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어머니는 경순왕의 첫째부인 죽방부인 박씨이고, 은열공은 고려에 손국(遜國·나라를 넘김)을 결정한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다.
경주김씨 태자파가 마의태자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근거로 삼은 문건은 크게 두 가지. 조선시대인물인 경주김씨 세신공(1668~1736년)이 쓴 ‘월성가승원대세계(月城家乘遠代世系)’와 1934년 발행된‘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로, 월성가승원대세계에는 ‘순웅과 경순왕 사이에 세계(世系)의 기록을 잃었다.‘그러나 (순웅과 경순왕 사이의) 연대가 매우 가깝다’는 등의 문구가 나오며, 삼성연원보에는 김일(金鎰·마의태자의 이름)의 두 아들이 선웅(善雄)과 순웅으로 분명히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 족보에 근거한 경주김씨 태자파의 주장에 대해 여타 김씨 문중들은 반발하고 있다. 부안(부령)김씨 대종회(회장 김창원) 측은 “마의태자의 두 아들은 선웅, 순웅이 아닌 기로(箕輅)와 교(較)로, 두 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입산하여 설악산 근처에서 시녀의 손에 의해 양육되다 마의태자가 돌아가신 후 세상에 나왔다”며 “두 형제는 고려의 탄압을 피해 기로공은 부령현(현재의 전북 부안)에 정착해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고 교공도 강원도 통천에 자리 잡아 그 후손들이 본관을 통천으로 행관했다”고 주장했다. 마의태자가 경주김씨가 아니라 부안김씨, 통천김씨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신라 김알지(金閼智) 후손들의 연합체인 ‘신라김씨연합대종원’도 같은 주장이다. 현재 부안김씨와 통천김씨 측이 이러한 주장을 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주김씨 태자파가 마의태자를 1세로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인 신라삼성연원보가 엉터리 족보, 이른바 위보(僞譜), 잡보(雜譜)라는 것이다.
부안김씨와 통천김씨의 입장을 대변해온 ‘신라김씨연합대종원’ 김진광 부총재는 “1934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김경대라는 사람이 발행한 것으로 돼 있는 신라삼성연원보는 곳곳에 사실(史實)과 다른 기술이 많고 같은 책 안에서도 내용이 모순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족보”라고 주장했다.
김 부총재에 따르면 신라삼성연원보의 잘못된 기술은 경순왕의 부인과 태자 부분에서부터 나온다. 신라삼성연원보에는‘경순왕의 비는 송희부인 석(昔)씨로 5남을 두었는데 태자의 이름은 전(佺)’‘태자는 왕이 고려에 항복할 것을 청하자 극렬하게 간했지만 왕이 듣지 않자 통곡하며 자결했다’는 기술이 나오고 이어‘계비(繼妃) 죽방부인 박씨는 3남을 두었는데 김해군에 봉해진 장자 이름은 일(鎰)’이라는 기술 등이 이어진다.
이 김일(金鎰)이 왕이 고려에 항복할 것을 청하자 개골산에 들어가 마의(麻衣)와 초식(草食)으로 살며 생을 마쳤다고 돼 있다. 우리가 아는 마의태자의 행적이다.
이에 대해 김진광 부총재는 “경순왕 부인 중 죽방부인 박씨와 낙랑공주 외에 석씨가 있다는 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어디에도 없고 신라삼성연원보에만 기재돼 있다. 태자 이름이 전(佺)이며 자살했다는 기록도 여기에만 나온다.”며 “삼성연원보에 따르면 태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김일이 마의태자라는 다른 기록이 맞는 건지 아닌지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 버린다.”고 지적했다.
신라삼성연원보는 ‘경순왕 15공자(公子) 실기(實記)’라며 경순왕의 아들이 모두 15명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는 게 김진광 부총재의 주장이다.
“경순왕의 자손들에 대해 지금까지 가장 앞서 기록된 족보는 1624년 조선 중종 때 발간된 김해김씨(현 김녕김씨) 족보 입니다. 여기에는 죽방부인으로부터 얻은 경순왕의 세 아들 이름은 아예 없고 낙랑공주에게 낳은 은열공 이하 5명의 이름만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조선 정조 8년인 1784년 은열공의 묘지(墓誌)가 발견되면서 비로소 죽방부인에게 낳은 세 아들의 이름(鎰,굉,鳴鍾)이 밝혀진 것이고, 마의태자 이름이 일(鎰)이라는 것도 이때 처음 알려졌습니다.
모든 김씨 문중이 인정하는 은열공 묘지(墓誌)에 따르면 경순왕의 아들은 15명이 아닌 8명입니다. 또한 마의태자의 자가 겸용(謙用)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동국사략에 보면 겸용은 경순왕이 왕건에게 사신으로 보낸 태수의 이름입니다.”
부안김씨 등이 반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는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 가계와 관련된 기록들이다. 경주김씨 태자파가 새로 만든 대동보에 따르면 김부식은 마의태자의 두 아들 중 첫째인 선웅의 6세손이 된다.
순웅 대장군을 마의태자의 아들로 계대한 결과 순웅 장군과 형제인 선웅의 자손 김부식이 자동으로 마의태자의 7세손이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정사(正史)와는 다른 심각한 오류가 빚어진다는 것이 부안김씨 등의 반박이다.
김진광 부총재는“정사 기록을 보면 김부식은 분명히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돼 있는데 태종무열왕 후손들은 경주김씨가 아닌 강릉김씨로 행관을 하며 태종무열왕의 제사도 지낸다.”고 주장했다.
실제 조선 전기 서거정이 펴낸 문집‘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김부식의 손자 김군수(金君綏)의 시‘동도객관(東都客館)’에는‘무열왕의 후손 문열공의 집(武烈王孫 文烈家)’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문열공은 바로 김부식을 뜻한다. 김 부총재는 “고려사를 보면 태조 왕건이 936년 경주를 만들어 최초의 주장(州長)으로 위영(魏英)을 삼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위영은 김부식의 증조이며 선웅의 3세손”이라며 “경주김씨 태자파의 주장대로라면 위영은 경순왕의 5세손이 되는데 978년에 죽은 경순왕이 살아있을 때 경순왕의 5세손이 생존해 주장이 됐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고 주장했다.
그는 “마찬가지로 고려에 계속 반항했던 마의태자의 아들을 고려의 대장군으로 삼았다는 주장도 상식에 반한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반박에 대해 경주김씨 태자파 측은 “마의태자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은 이미 법원의 판단을 거친 사안으로 우리는 법원의 판단이 나온 후 새로운 대동보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의 법원이 씨족사회의 선계대를 결정하였으며, 마의태자의 자손록까지 만들어 주었다는 말인가?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회 등은 2005년 10월 마의태자를 1세로 삼은 새로운 대동보 편찬을 준비 중이던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대동보편찬위원회를 상대로 “신라계 김씨 일가의 족보에 대혼란을 야기하게 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경주김씨 계림군파에서 대동보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이 소송에는 부안김씨와 통천김씨 대종회도 보조 참가인으로 가담했다.
당시 소송에서 경주김씨 대장군공파는 자신들이 제출한 근거 자료인‘삼성연원보‘갑술보’등을 위보, 잡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 소송에 대해 “사건 신청에 대해서는 법률상 권리보호의 이익을 인정할 수 없다”(1심) “김순웅과 마의태자 김일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아니하였지만 김순웅이 김일의 둘째 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할 것”(항고심) 등의 이유로 사건 신청을 기각했고, 대법원도 2007년 8월 항고심의 결정을 확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신라김씨 연합대종원 김진광 부총재는“당시 법원이 역사적 진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셈인데, 그렇더라도 족보는 역사에 근거해 기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
마의태자가 누구의 조상이냐는 논란에 대하여 언론중재위원회에 주간조선을 제소한 부안김씨와 통천김씨의 제소에 대하여 2011년 2월 18일 양측이 조정에 합의한 내용이 있다. (주간조선 2144호, 2011년 2월 21일 게재)
그 내용을 보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 912?∼?). 망국의 한을 품고 삼베옷을 입은 채 산천을 떠돈 것으로 알려진 이 비운의 태자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문중들이 각기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은 경주김씨 태자파(太子派) 대종회(회장 김주경)가 작년(2010년)에 마의태자를 자신들의 1세로 삼은 대동보(大同譜. 동성동본에 딸린 모든 파를 합쳐서 엮은 족보)를 만들어 문중에 배포하면서 증폭됐다.
경주김씨 태자파는 당초 경주김씨 대장군공파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 순웅(順雄. 932∼1015) 대장군을 중시조로 삼고 있던 문중으로, 순웅 장군의 윗대를 마의태자의 배 다른 동생인 은열공으로 계대(系代. 대를 이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열군의 나이가 순웅 장군보다 오히려 3∼4 살 어린 점 등을 이상하게 여겨 지난 2000년부터 진짜 뿌리찾기에 나선 결과 순웅 장군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대동보 제작에 나섰다. 2009년 9월에는 대종회 명칭도 대장군공파에서 태자파로 바꿨다.
정사(正史) 기록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어머니는 경순왕의 첫째부인 죽방부인 박씨고, 은열공은 고려에 손국(遜國. 나라를 넘김)을 결정한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다.
경주김씨 태자파가 마의태자가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근거로 삼은 문건은 크게 두가지. 조선시대 인물인 경주김씨 세신공(1668∼1736)이 쓴 ‘월성가승원대세계(月城家乘遠代世系)’와 1934년에 발행된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로, 월성가승원대세계에는 ‘순웅과 경순왕 사이에 세계(世系)의 기록을 잃었다. 그러나 (順雄과 敬順王 사이의) 연대가 매우 가깝다’는 등의 문구가 나오며, 삼성연원보에는 김일(金鎰. 마의태자의 이름)의 두 아들이 선웅(善雄)과 순웅으로 분명히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 족보에 근거한 경주김씨 태자파의 주장에 대하여 여타 김씨 문중들은 반발하고 있다. 부안(扶寧)김씨 대종회(회장 김창원) 측은 ‘마의태자의 두 아들은 선웅, 순웅이 아닌 기로(箕輅)와 교(較)로, 두 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입산하여 설악산 근처에서 시녀(侍女)의 손에 의해 양육되다 마의태자가 돌아가신 후 세상에 나왔다’며 “두 형제는 고려의 탄압을 피해 기로공은 부령현(지금의 전북 부안)에 정착해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고 교공도 강원도 통천에 자리 잡아 그 후손들이 본관을 통천으로 행관했다‘고 주장했다.
마의태자가 경주김씨가 아니라 부안김씨. 통천김씨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신라 김알지(金閼智) 후손들의 연합체인 ’신라김씨 연합대종원‘도 같은 입장이다.
(이하의 내용은 (가)항과 같음)
5. 결론
1998년 이래 벌어진 정통계보 훼손의 출발점은 경주김씨 중앙종친회의 무책임한 행태였다. 소위 종사연구를 한다고 하면서 개인적인 논술에 대하여 검증도 거치지 않고 인쇄물을 배포하였으며, 이후에 벌어지는 각각의 대종회에서 조작 날조하는 계보에 대하여 공식적인 입장을 제때에 표명하지도 않았다.
이는 중앙종친회의 집행 간부들조차 종사연구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10년 넘게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후임자들도 잘못된 원인에 대하여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종사연구지 계림 제1집에 게재한 태사공 휘 인관의 상계대 심구에 근거한 태사공파 대종회의 대동보 발간은 차치하고, 대안군 영단 조성과 영단비의 비명 내용에 대하여 다른 종파가 제기한 문제점들을 방치하면서 이윽고 태자파라는 쿠테타 세력을 탄생 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종사연구의 자세가 선조들에게 득죄하는 행태를 보인 점에 대해 중앙종친회는 공식적인 논의를 거쳐 해명하여야 할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중앙종친회는 계파 논쟁과 무관하다는 무 책임론을 주장한다면, 과거에 진행했던 종사연구를 무효화하고 재출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랜 족보에 근거하여 정통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여러 종파의 입장에서 모순이 발견되고 있는 상계대 에 관하여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여 새로운 정통계보를 정립하려면 역사학계의 권위자들의 도움도 받아야 할 것이며, 문헌의 고증은 분명히 권위 있는 작업을 거쳐야 마땅하다.
태사공파 대종회에서는 대안군 영단비명을 다른 종파와 협의도 하지 않고 새겨 넣은 문구들에 관하여 사과하고, 협의를 거쳐 영단비를 재제작함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앞으로의 연구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래된 고보(古譜)를 위주로 하고, 각종의 역사 문헌을 검증하여 시대 별 선조들의 행적록(行蹟錄)을 작성하는 일이다.
둘째, 선계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외세 침탈과 각종 정변으로 점철되어 있는 우리 역사의 중심에서 꿋꿋하게 유지하여온 선조들의 가승(家乘)을 영광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부끄럽다면 차라리 할아버지를 욕한 과거시험의 답안을 부끄럽게 여겨 삿갓을 쓰고 살았던 삿갓 시인 김병연의 행태를 따르든가.....
셋째, 불분명한 선계대를 잇기 위해 조작한 부분이 있다면 다른 종파와의 협의를 거쳐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 정리해야 마땅하다. 일방적으로 자기네 종파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편협한 자세를 버려야 180만 종친이 화합할 수 있는 종사연구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
넷째, 종사연구나 종파의 각종 행사에서 민주주의 방식이 올바른 결정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하겠다. 다시는 태사공파나 소위 태자파 처럼 후손들이 박수쳐서 조상을 바꾸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 부록 ★
Ⅰ. 사단법인 신라문화보존회의 회신문
소위 대장군공파에서 사단법인 신라문화보존회에 요청한 경순대왕 약사 내용 수정보완 요구에 대한 신라문화보존회가 회신한 내용 입니다. 순웅장군공께서 마의태자의 子이니 아니니 하는 부분에서 도움이 되실 겁니다. |
敬順大王世系圖를 修正하지 못하는 理由
1. 貴 門中에서 送付한 大將軍公世系 및 法院決定文을 檢討한 結果 金景大가 私纂한 雜誌水準의 新羅三姓淵源譜를 典據로 한 貴門中의 世系圖는 本會에서 認定할 수 없고 法院決定文에서도 “김순웅과 마의태자 김일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아니하였지만...”이라 하였는데 貴 門中에서 마치 법원에서 系代가 認證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語不成說이고 宗人들을 欺罔하는 行爲입니다.
決定文 “판단(2) 1784년 金殷說 묘지(墓誌)가 발견됨에 따라 경순왕 첫째 아들은 김일(金鎰)이고...”하였는데 新羅三姓淵源譜(소을6호증)에는 金鎰이 敬順大王의 여섯째 아들로 登載되어 있습니다.
貴 門中에서 “소을6호증”을 提出할 때 金鎰의 子 善雄 ․ 順雄등 以下系代만 提出하여 却下決定을 誘導하려 하였는지는 不知하나 金殷說의 墓誌 내용과 三姓淵源譜의 내용은 완전히 相馳됩니다. 本會에서는 三姓淵源譜라는 僞造된 雜書는 認定할 수 없습니다.
2. 金之岱(淸道金氏 貫祖)公에 關하여 貴門中에서 提示한 世系에는 敬順大王 六世孫 元鼎公의 次子로 그 兄은 之說로 表記하고 있으나 高麗史에 의하면 金之岱는 1190년(明宗20年)生으로 神宗 ․ 熙宗 ․ 康宗 ․ 高宗을 거쳐 元宗7年(1266)에 별세한 분으로 敬順大王의 9세손입니다. 더구나 敬順大王의 四子 殷說의 7세손인 余興公의 三兄弟中 三子로 長兄은 之璜이고 次兄은 之球이며 之岱公에게 之說이라는 兄이 없습니다.
3. 貴 門中에서 本會가 發刊한 敬順大王 略史를 修整補完하지 않으면 “法的問題 警告”등 傲慢放恣한 文句를 使用하여 憲法에 保障된 學問硏究나 出版의 自由를 침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貴 門中에서 法的問題를 提起하신다면 언제든지 對應할 準備가 되어 있음을 告知하는 바이니 諒知하시기 바랍니다.
Ⅱ. 경주김씨 중앙종친회 경고
1. 전국의 종친들은 계보연구회가 발표하는 계보도는 단지 그들만의 연구물일뿐 역사적 신뢰성이 의심되므로 활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계보연구회는 향후 연구지에 계보도를 게재할 경우 일반 독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두에 연구의 목적과 방법, 그리고 연구물의 신뢰한계를 명시하여 계보도 오용에 따른 책임한계를 분명히 하기 바랍니다.
그간 계보연구회에서 발표하는 계보도에 관하여 중앙종친회에서는 종사연구위원회를 열어 여러 차례의 논의를 하고 계보연구회의 발표물에 따른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엄중 경고한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보연구회가 계속 간행한 2004년 추, 동 합본 연구지에 수록된 계보들은 경주김씨 각 종파의 선계대 뿐만 아니라 시조 대보공 후 여러 본관들의 연원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계통을 보이고 있다. 경주김씨 중앙종친회와 무관하게 운영되고 있는 계보연구회의 단순한 연구 활동이 자칫 황당한 역사 소설처럼 각색되어 각 종파 내에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으므로 그 계보도의 신뢰성이나 이용에 관하여 적절한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위 내용은 경주김씨 중앙종친회 총재단회의(2005년 2월 18일)에서 논의하여 공지하는 것이고, 경주김씨종보(제357호,2005년 2월 28일자)에 게재하였으므로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慶州金氏의 正統系譜
발행인 金 緊 洙 편집인 金 鍾 元
발간일 2012년 6월 28일 |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김형재 작성시간 13.10.28 김경대가 삼성연원보를 저작겸 발행자로 기록했다면 타문중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으로 이 자체가 삼류소설로 인정한셈이다. 붉은 글자 삼성연원보 계보에서 경순대왕의 김일(마의태자) 첫째부터 15왕자를 누가 믿겠는가?
이런 역사를 개인이 무슨 자격으로 저작 발행은 눈감고 아웅하는 발상이다.
족보는 오래된 것이 옳다고 한 말에 공감합니다. 연대도 맞지 않는 삼성연원보는 잡보 맞네요.
족보는 소설을 쓰듯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은 만들수 없는 것이므로 각 문중의 소문중 의견까지 포함하여 문중을 대표하는 대종회에서만이 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주김씨의 정통계보는 여타 문중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