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82333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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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사] 3. (쉬어가기) 기자조선은 정말로 존재했을까?
[고조선사] 4. 패기가 넘치던 왕국(王國), 고조선(기원전 4세기)
[고조선사] 5. 우리 역사 최초의 전쟁 -고조선의 대몰락- (기원전 3세기 초반)'
1. 고조선 중심지가 평양으로 옮겨지다.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요동을 통채로 잃고 중심지를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부여는 잘못 들어간.. 하아..)
그런데 고조선이 진개의 침입 전부터 평양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진개의 침입을 받고 도망을 하면서 평양 일대를 새롭게 차지한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불명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성과가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으로 이동한 이후
고조선 지도부의 행적이 기록상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조선 지도부가 나라의 재정비에 들어갔음은 아주 당연한 수순 아닐까요?
당시 고조선 지도부의 목표는 '생존'이 되었을 것이니까요.
고조선 지도부가 평양으로 간 이후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았을 것입니다.
토착 주민들과 마찰 없이 조화롭게 지내야 할 것이고,
행정조직도 재편해야 하고,
연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적인 대비도 해야 합니다.
기록은 없지만 당연히 이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사견).
정말 안타깝지만 이후 반세기 가까이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재정비를 했을 것이란 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2. 진시황 중국을 통일하다.
약 반세기의 시간이 지나,
고조선이 재정비를 하는 동안 중국에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전국 7웅을 모두 통합하여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뎐 연나라는 진나라에 흡수되었고,
고조선은 진나라와 국경을 맞댑니다.
진나라와의 국경은 연과 마찬가지로 청천강으로 보입니다.
(잘못 들어간 부여...)
당시의 고조선왕은 부왕(혹은 비왕)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확인이 되는 최초의 임금입니다.
문헌에 따르면 부왕은 무리하게 진나라와 맞서지는 않았는데요.
기록을 한 번 보시죠.
<위략>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왕의 외교상 전략은 '표면적 복속'이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진나라에 복속을 하여 침략의 위험을 낮추지만,
실제로는 조회에 나가지 않아 완전히 복속되지 않는 실리를 챙겼습니다.
사실 당시 진의 주된 관심은 흉노였기 때문에
고조선의 부왕이 형식상 복종한 것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고,
부왕도 실질적으로 굴복한 것은 아니니
나름대로 만족하며 외교적 안정을 누린 것으로 보입니다(사견).
덕분에 고조선은 진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수십년간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왕' 시절의 외교였습니다.
3. 고조선의 준왕 국력을 증강시키다.
기원전 3세기 후반.. 부왕이 죽고 그 아들 준왕이 즉위했습니다.
연에게 밀려 평안도에 정착한지도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고조선은 나름대로 외교적 안정 속에서
내부적으로 안정을 찾았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사견).
이러한 시대에 준왕의 시대적 임무는 무엇이었을까요?
안정을 넘어 확장을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준왕의 정책을 살펴보죠.
<위략>
부(否)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년이 지나 진승과 항우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준에게 망명하므로
준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준왕의 정확한 즉위 시기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진시황의 통일과 장성 건축이 있었던 때에는 부왕의 즉위기였으니
준왕은 그 이후에 즉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침 진나라는 항우와 유방의 쟁패로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으니,
중국의 백성들이 고조선으로 유입이 되었습니다.
고대의 인구는 곧 국가의 국력!
준왕은 최대한 중국의 난민을 받아들여 인구를 증가시켰습니다.
이들은 청천강 너머로 고조선으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고조선에 유입된 난민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가져다 줌과 동시에
노동력이 되어 주어 고조선의 국력 상승에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사견).
준왕은 중국의 난민들을 고조선의 서부지역에 거주시켰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북쪽'을 '서쪽'으로 표기를 많이 하기도 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삼국시대에도 온달과 연개소문이 끝까지 되찾고자 한 땅이 죽령 이북 한강 땅인데
온달과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죽령 이서란 표현을 씁니다),
준왕은 나라 북쪽의 청천강 유역 국경에 중국 난민들을 배치했지 싶습니다(사견).
준왕은 적극적인 중국 난민 포용으로 국력을 키우고자 했습니다.
4. 고조선의 영토 확장!
기원전 202년 한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였습니다.
진나라에 이어 한나라라는 거대한 세력이
고조선과 국경을 맞댄 것이었습니다.
당초 진나라는 황제가 모든 지역을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했는데,
한나라는 측근들을 그 지역의 왕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는 군국제를 실시했습니다.
이에 한나라 고조 유방은 자신의 측근 노관을 과거 연나라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때 한나라 측은 고조선과의 국경을 재정립하는데요.
관련 기록을 보시죠.
<위략>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을 연나라 왕으로 삼으니
조선과 연은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사기> 조선열전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조선을) 요동의 외요(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한나라는 기원전 202년 고조선과의 국경을 정리하면서
'패수'를 새로운 국경으로 삼습니다.
패수는 각 시대마다 그 위치비정이 다른데요.
적어도 이 때의 '패수'는 압록강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입니다.
이 떄의 패수를 요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엄연히 중국의 요동군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조선이 요동까지 점령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하는 패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청천강 이북에서 패수가 될만한 강은 압록강 밖에 없습니다.
뒷연재에서 보겠지만 패수는 훗날 한과 고조선의 치열한 전쟁터가 됩니다.
이런 전쟁터로 활용될 공간이자 국경으로 적합한 것은 압록강이 적절합니다.
그래서 저도 다수설대로 압록강설을 취합니다.
어쨌거나 <사기>는 한나라가 국경을 패수로 정한 이유를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라고 했는데요.
이 말인 즉슨 고조선과의 충돌을 염두하고
지키기 쉬운 곳만 지키고 나머지는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기록에는 고조선과 한의 직접적인 무력충돌이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의 위협이 없었다면
굳이 한나라가 '너무 멀어서 지키기가 어렵다'면서
패수로 후퇴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니다.
따라서 저는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 준왕이 중국 세력에 대해 침략, 약탈
혹은 공격일 수도 있는 유형력을 가했다고 봅니다(사견).
(고조선 준왕은 압록강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잘못 들어간 부여.. 으으..)
그렇습니다!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연에게 밀려 청천강 이남으로 가야했지만,
이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준왕 대에 이르러 꾸준히 중국 난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고,
중국 세력을 압박하고,
결국엔 영역을 확장까지 하였습니다.
연에게 밀려난지 100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고조선은 생존, 안정, 확장까지 모두 다 해냈습니다.
이 정도면 화려한 부활 아닐까요?
이후 고조선은 어떻게 될까요?
다음화에서 계속..
한울리카 올림
댓펌
복속했으나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절묘하네요
이는 이후 우리역사의 국가들에게도 계속 이어진 입장이었습니다.
고구려도 백제도 형식적으로는 중국을 '상국'으로 인정하나
실질적으로는 그들의 의사에 반해서 행동하고
심지어 고구려는 공격도 하는 모습을 보이죠.
이러한 전략을 고조선 때부터 썼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디서는 고조선 유민들이 마한과 진한으로 유입되어
지배층이 되었디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지배층이라고 꼭 집어서 말을 못합니다.
기원전 6~4세기부터
고조선 사람들이 전라도 지방에 유입이 된 건 맞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먼 훗날 마한이 되긴 하는데
지배층이라고 꼭 집어서 말을 못합니다.
그리고 조선 멸망 이후에
고조선 유민들이 경상도 지방에 유입이 된 것도 맞습니다.
이들이 진한과 변한의 토대가 되는데
꼭 집어서 지배층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게
피지배층도 조선의 유민들이기 때문입니다.
부여와 조선은 댓글에선 큰 연관성은 없다고 말씀해주셨는데 부여가 우리 고대사에 미친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은 만큼 과연 우리의 시각에서 부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때 당시 조선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부여와 고조선은 서로 연관이 적습니다.
다만 둘 다 우리 역사의 원형이 되는 국가격으로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저는 그래도 이 두 국가 모두 우리의 뿌리가 되는 나라라는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고조선은 삼한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부여는 백제 왕실이 직계를 자처할 정도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구려도 부여와의 항쟁 속에서 성장하고
궁극적으로는 부여를 흡수할 정도로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듯 고조선이나 부여나
모두 우리의 원형이 되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만 더 여쭈고 싶은 게 있는데, 그때 당시 조선과 부여는 서로 교류가 잦았나요?
위치 상 매우 가까우니 없진 않았을 거 같은데
문헌으로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고고학에 따른 연구결과는
제가 다 챙겨보지 못했지만
제가 본 것 중엔 딱히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조선이나 부여나
모두 대한민국의 영역이 아니러
현재로서는 고고학으로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워
단시일 내에 어떤 결론이 나긴 어려워 보입니다.
훗날 통일이 되어 고조선 유물발굴로
새로운 연구결과가 도출되기만을 기다립니다.
고조선은 예족인가
고조선을 예로 부른 문헌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예라는 명칭도 고조선 멸망 이후에 부여, 동예 같은 세력을 지칭할 때 주로 확인이 됩니다.
여담이지만 예, 맥 같은 명칭도
서기 1~3세기 정도에 주로 쓰이고
서기 4세기를 넘어가면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