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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역사적 이유 (2) ...jpg

작성자흥미돋는글|작성시간26.05.26|조회수490 목록 댓글 1

출처: https://www.fmkorea.com/986414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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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역사적 이유 (1) ...jpg

 

 

 

5. 불러동맹

 

[ 카프리비 ]

 

비스마르크 사퇴 이후 빌헬름 2세는 신노정 (Neuer Kurs) 을 시작하며 임명한 독일 수상은 레오 폰 카브리비인데 그는 능력있고 성실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역량을 아득히 초과하는 업무를 물려받았음.

 

사실상 그 동안 독일 헌법 및 유럽 외교 시스템 자체가 거의 비스마르크 주도하에 설계되었고 그는 영문도 모른채 이 모든걸 떠맡았고.

 

당시 독일에게 가장 긴박한 논건은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 갱신 문제.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 ]

 

이 재보장조약은 비스마르크 주도 밀실 협상으로 카프리비는 수상이 되기 직전까지도 전혀 인지를 못하고 있었음. 취임한지 단 1주일만에 갱신 만기일이 다가왔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카프리비는 외교 실정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었고 외무부 핵심 인사였던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의 말을 듣고 재보장조약 갱신을 거부.

 

홀슈타인의 갱신 거부 근거는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으로 인해 이를 모르는 오스트리아가 재보장조약을 인지할시 동맹을 파기할거라는것.

 

 

또한 러시아와의 동맹은 러시아와 유라시아에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는 영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기회를 차단할거라 주장. 이에 설득당한 카프리비는 ' 보다 간단하고 투명한 외교 ' 로 비스마르크식 비밀 외교에서 탈피하려함.

 

그런데 정작 러시아 대사는 빌헬름 2세에게 재보장조약 갱신 확약을 받은 상황이라 이에 어처구니 없어했고. 러시아는 이제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를 혼자서 맞서야 할 처지.

 

그러나 러시아와 비슷하게 고립된 강대국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프랑스.  얼마 안가 프랑스 해군이 러시아 해군 기지인 크론슈타트에 방문했고 차르가 직접 마중나가 환대. 이는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물꼬를 트는 계기.

 

 

그리고 이 접촉이 있고 단 1년만에 프랑스와 러시아는 군사협약을 맺음. 그 중 2번 조항이 결정적. " 프랑스나 러시아가 삼국동맹중 한 국가에게라도 공격받으면 프랑스나 러시아는 즉시 군대를 동원한다 "

 

2년 후 1894년에 이르면 협약을 상호 비준하며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확립.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은 깨졌고 동시에 러시아 또한 서쪽에 독일 병력을 묶어둘 보험을 마련.

 

 

 

그 뿐 아니라 러시아의 경우 인구는 유럽 최대라 할 만 했으나 자본력이 미진했음. 실제 1877-187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는 거의 파산 위기에 몰릴 정도로.

 

그렇기에 프랑스와의 동맹은 절호의 기회로 런던 다음가는 유럽 금융가인 파리의 자본력을 끌어와 러시아 철도 개발, 산업화, 군사 현대화에 쏟음.

 

이런 철도 개발로 인한 동원 속도 상승은 동부전선에서 동맹국에 압력을 가하는 요인이 됨. 여기서 다루고 가야 하는 인물이 테오필 델카세 (Théophile Delcassé).

 

 

델카세는 남프랑스 아리에주 출신으로 언론인과 하원의원 경력을 거쳐 식민부 그리고 외무부로 올라간 인물로 매우 현실주의적이며 명확한 목표의식을 가진 인물.

 

델카세는 1899년 8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해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재확인했고, 이를 통해 러시아 황제의 파리 방문을 유도하고,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공개 신호를 주었음.

 

그리고 델카세의 대독일 포위망에서 마지막 퍼즐 조각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대영제국. 이 당시 대영제국은 정점에 있으면서도 쇠락에 한 참 불안해하던 상황.

 

 

 

6. 보어전쟁

 

[ 영국 해군 집결 ]

 

1897년 영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군림한 군주 빅토리아를 위해 당시 세계의 수도이자 힘의 상징이었던 런던에서 다이아몬드 쥬빌리가 개최.

 

세계 약 4분의 1을 지배하던 사상 최대의 제국에 소속된 식민지들인 인도, 아프리카, 캐나다에서 호주, 남아공, 말레이시아등의 식민지 병사들이 쥬빌리 군사행진에 참석하며 장관을 이룸.

 

동시에 대영제국 해군이 집결해 사상 최대의 관함식으로 영국이 세계의 바다를 지배함을 과시. 그야말로 세계는 전율했음.

 

 

 

프랑스의 르 피가로는 '영국은 이미 로마랑 맞먹거나 능가했다' 고 했으며 뉴욕 타임스는 " 미국은 이 지구란 행성을 지배할 운명인 거대한 영국의 일부 " 라고 까지 말하며. 

 

그러나 이 와중 의구심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는데 키플링이 그러했음. "우리의 해군은 녹아 사라지며 우리 제국의 화려함은 한 때 영화를 누리고 멸망한 니베네나 티레를 연상시킨다 " 며.

 

 

그리고 키플링 외에도 영국의 미래에 비관적인 이가 있었는데 그는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영국 총리. 부유하며, 신경질적이고, 음울한 전형적인 영국 귀족.

 

하지만 동시에 그는 매우 뛰어난 지능을 가졌으며 수십명이 넘는 영국 총리들 가운데 가장 외교에 이해가 밝은 인물이기도 했음. 그렇기에 그는 영국과 서구 문명에 대해 회의적 스탠스.

 

이를 잘 보여주는 그의 표현은 " 무엇이 일어나든 영국과 서구에 안좋은쪽으로 흐를테니, 그냥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끔 하는게 이득이다 " 라는것. 

 

 

실로 그런것이 꼭대기에 오른 국가나 문명은 곧 내려갈길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개스코인세실의 불안대로 2차 보어전쟁이 터짐. 계기는 트란스발에 터진 세계 최대의 황금 광산.

 

보어전쟁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케이프 타운에 있던 영국계들이 골드 러쉬를 갔는데 당시 보어의 실세인 크루거는 그런 영국계를 외국인 (Uitlander) 라 부르며 세금만 거두고 정치적 권리는 주지 않았음.

 

이에 영국계는 본국인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다이아몬드 광산 재벌인 세실 로즈는 이런 영국계가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보어 공화국이 전복되고 영국이 이집트에서 남아공까지 모든 아프리카 지역을 지배한다고 구상.

 

 

그러나 그의 친구인 리앤더 제임슨 (Leander Jameson)을 통해 일으킨 반란 기도는 철저한 실패로 돌아갔고, 유럽전역에서는 이런 영국의 일방적 침공에 분개.

 

그 후 1899년 케이프 식민지 장관인 알프레드 밀너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인 크루거가 블룸폰테인에 만나 회담을 가지는데 영국계에게도 투표를 주라고 밀너는 요구했고, 크루거는 거부.

 

영국은 증원군을 보냈고, 보어는 최후통첩을 보내 물리지 않으면 전쟁이라고 했으나 영국군이 물러나지 않아 결국 전쟁에 돌입. 영국은 대규모 군대로 손쉬운 승리를 거둘거라 예상했으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음.

 

 

초기 수차례 패배와 함께 45만명을 동원하고 2억 1000만 파운드란 보불전쟁 독일이 쓴 전비 2배를 써가면서도 전쟁을 종식시키는데는 무려 3년이나 걸림.

 

물론 결국 승리야 거뒀지만 이는 런던 정치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만약에 아프리카의 조그만 식민지에게 이리 고전한다면 프랑스, 독일, 러시아등 유럽 강대국과 전면전에서 어떻게 승리하겠느냐? 는 것.

 

게다가 영국은 그 때까지만해도 화려한 고립이라며 유럽에 동맹이 없었음. 영국이 국경 분쟁이나 그외 경제-외교에서 협력을 할 수 있을지언정 공식 동맹을 맺으면 불필요한 전쟁에 말려들기 때문에.

 

 

그러나 보어전쟁으로 영국의 진짜 실력이 자신들이 생각했던만큼 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

 

여기에 보어전쟁 당시 유럽의 여론은 험악했던걸 넘어 프랑스와 러시아가 대륙동맹 (Continental League) 을 결성해 보어편으로 개입 얘기도 나옴.

 

 

 

이에 한 때 보어에 동정적이었던 독일은 영국 편을 들고,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또한 " 이 전쟁에서 난 영국인이오 " 라며 영국편을 들어 이런 시도는 무마.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것으로 처음에 영국의 식민부 장관 조셉 체임벌린이 동맹을 위해 손을 벌린곳은 바로 독일이었다는것.

 

 

7. 건함경쟁

 

 

당시 독일 수상인 폰 뷜로 (Von Bulow) 는 영국 의회제를 나약하다고 경시했기에 독일이 짐짓 뜸들이면 독일의 협상력이 더 강해져 영국이 더 좋은 조건으로 나올것이라 생각.

 

그러나 출신부터 버밍엄에서 자본가로 성공한 자수성가답게 조지 체임벌린은 ' 독일이 영국 조건을 안받는다면 다른 국가의 문을 두드릴것이다 ' 라고 선회.

 

그리고 접촉한곳은 유럽이 아닌 동아시아의 일본.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 해군의 전력을 보다 유럽에 집중하면서 일본이 극동 러시아의 견제를 맡게 한 것.

 

 

이렇게 한 이유는 유럽 최강의 육군과 영국을 능가하는 제조업 을 보유한 독일이 영국과 우호관계가 되는 제안을 신속히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유럽 패권과 세계 제국을 늘 언급했기 때문.

 

빌헬름 2세는 브라질에 독일 이민자들을 통해 신 독일을 남미땅에 만든다거나, 메소포타미아 식민지부터 열강들끼리 중국 분할등을 언급하며 군함 생산에 몰두.

 

 

이는 그의 어릴적 경험이 큼. 그의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별장인 오스본 하우스로부터 약 8km 떨어진곳에 영국 해군 기지가 위치. 그리고 거기서 빌헬름은 어떻게 대영제국이 만들어졌는지 확인함.

 

실제로 빌헬름은 " 그 항구들에서 위엄찬 영국 해군의 모습을 보았고 나 또한 이런 대함대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 고 말함.

 

 

여기에 기름을 부은것이 미국의 알프레드 머핸 제독이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야말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자기 어릴적 경험을 마치 구체화라도 한 이책에 빌헬름은 그야말로 전율했음.

 

그리고 그는 해군 장교들에게 이 책을 필수적으로 탐독하라고 명령.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음. 그 명령을 떠받들 해군 장교들이 거의 없었다는것.

 

그도 그럴게 프로이센은 수백년동안 대륙 세력으로 해안가를 지키는 소규모 함대만 있지 세계 해군이라 할만한 대규모 해군을 육성해본 경험이 없었음.

 

 

또한 이게 의미하는건 독일이 세계제국을 세울려고 해도 언제나 영국 해군의 자비 아래 가능하다는것이고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었음.

 

그러나 운좋게도 이런 빌헬름의 비전을 공유하는 이가 있었는데 이는 티르피츠로 그는 오만했으나 그럼에도 빌헬름은 그를 기용했음.

 

왜냐면 그가 빌헬름이 만족하는 답을 주었기에. " 독일은 전함들을 가져야 합니다. 영국이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재단할때 쓴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러운 그런 전함 말입니다. " 라고.

 

 

그래서 빌헬름은 제국의회에 36개의 순양함을 위한 예산을 달라고 했을정도였으나 제국의회는 고작 4척의 순양함만을 만들 예산을 책정.

 

그러나 티르피츠가 해군장관으로 오르고 해군 증강 계획안을 내놓는데 전함 위주로 이는 러시아 해안가에는 과도한 수준이었고 프랑스와의 전쟁에는 큰 유용성이 없었음. 사실상 목표는 영국.

 

 

이런 티르피츠와 빌헬름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기는 해서 1898년 1차 해군법을 제정.

 

매년 7척의 군함을 건조. 이어 보어전쟁 시기 독일 우편선을 밀무역선으로 착각한 영국해군에 나포. 영국이 비록 사과했어도 독일 여론은 불탔음.

 

그렇게 독일은 독일의 해외 이익을 보호하자는 명분하에 1900년 2차 해군법을 제정해 전함을 기존 19척의 2배인 38척으로 증가하는걸로 목표를 잡음.

 

 

비록 이는 전함을 62척 보유한 영국 해군력에 맞먹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는 영국이 경계하기엔 충분한것이였음.

 

독일이 세계 전역에 흩어져있는 영국 해군 특성상 유럽에만 집중 가능한 독일 해군은 영국에 잘하면 이길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던만큼. 

 

그리고 이런 독일의 해군 증강은 1906년, 1908년, 1912년 3차, 4차, 5차 해군법이 제정되며 더 가시화. 당연하게도 이런 위협에 영국은 유럽내 독일을 카운터 할 조력자 또한 찾게 되었음.

 

 

 

8. 영불협상

 

 

사실 1898년까지만해도 영국 해군성은 프랑스나 러시아 해군에 대해 더 우려. 실제로 1889년 제정된 해군 방위법 ( Naval Defence Act )에서 영국 해군이 2위 + 3위 해군 이상 규모라는건 프랑스와 러시아를 염두에 둔 것.

 

그러나 1902년부터 얘기가 좀 달라지기 시작. 영국 해군성의 수장인 셀본경은 "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증강중 " 이라고 언급.

 

영국 왕립 해군은 단순히 세계를 지배하는 도구가 아니라 영국 본토를 지키는 방패로 독일이 북해에서 영국 해군을 누른다는건 영국이 간과할만한것이 아니었음.

 

 

 

그래서 유럽대륙내 열강들을 물색했는데 러시아는 아직까지도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는 경쟁자이며,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의존적. 남은건 프랑스.

 

영불관계는 처음부터 썩 좋았던건 아님. 그도 그럴게 이집트에 프랑스 자본으로 지은 수에즈 운하를 영국이 접수하며 프랑스와 영국의 관계는 상당한 텐션이 존재.

 

이건 파쇼다 사건때 절정에 이르는데 파쇼다 사건의 배경을 말해보자면 쟝 밥티스트 마샹이 이끄는 소규모 원정대가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입해 수단 국경에 도달.

 

 

 

실질적인 이집트의 통치자는 영국이었으나 마흐디 반란이 일어나던 시점에 프랑스가 마흐디 반란을 진압후 나일강 상류를 장악한다면 이집트 지배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판단.

 

그렇기에 영국은 키치너 장군이 이끄는 영국-이집트 혼성군을 보내 옴두르만 전투에서 마흐디 군대를 괴멸시킴. 그리고 파쇼다에서 프랑스 원정대를 마주하게 됨.

 

병력 규모로는 키치너가 1,500명에 마샹은 100명으로 영국이 훨씬 우월해 붙었으면 영국이 이겼을 가능성이 높으나 식민지에서의 전쟁은 곧 본국간 전쟁으로 이어질수 있었음.

 

 

 

그러나 당시 영국 총리인 솔즈베리 후작이 판단하기에 프랑스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판단했고 그것은 옳았음. 프랑스 원정대는 지부티로 군대를 물림. 이때 현실적 후퇴 판단을 한 사람이 불러동맹에서 활약하는 델카세.

 

하지만 명예욕이 강한 프랑스인들이 이걸 쉽사리 잊을리는 없었고, 보어전쟁에서 영국을 가장 맹렬히 비판한것도 프랑스 언론이였고 제 7대 대통령인 에밀 루베는 러시아 외교관에게 "프랑스의 주적은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요" 라고 했을 정도.

 

그러나 델카세는 현실주의 그 자체였고, 영국에 대해 깊은 신뢰를 했던건 아니나 프랑스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전략을 시정할수 있는 유연성을 가졌음.

 

 

 

델카세가 보기에 보어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영국이 무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국이 아예 한 물간것 또한 아니었음. 그렇기에 프랑스가 건설한 수에즈 운하를 되찾아올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낮았고.

 

그래서 델카세는 떠올림. "약점을 노출한 영국과 차라리 동맹이 되는게 어떨까?" 하고. 이 제안에 영국에 있던 프랑스 대사인 폴 캄봉도 동의.

 

폴 캄봉은 흥미로운 인물인데 영국이 서구 문명 중심인 프랑스보다 문화적으로 떨어진다 생각하여 20년동안 영국에 거주하면서 한번도 영어를 쓴 적이 없음.

 

 

그럼에도 그는 영국과 프랑스가 나날이 국력이 증가하는 독일에 대항할 자연스러운 동반자라고 주장. 하지만 시작은 독일 저격이 아니었음.

 

시작은 모로코 식민화에서 영국의 지원을 얻기 위함. 그도 그럴게 프랑스 입장에서 모로코는 알제리 지배를 확립한 그 순간 당연히 추가되어야할 다음 식민지였기에.

 

문제는 독일과 영국 또한 모로코에 깊은 상업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것. 그러나 영국이 모로코를 프랑스가 먹는데에 동의해주고 프랑스가 이집트를 완전 포기한다면 모로코는 프랑스 식민지가 될 수 있었음.

 

 

 

마지막 남은 문제는 프랑스 대중들이 여기에 설득될수 있느냐였는데 하나의 사건이 터짐. 1903년 에드워드 7세가 영불해협을 건너 파리를 방문하는데 프랑스 대중들은 "파쇼다 만세 (Vive Fashoda)" 를 외치며 냉담한 반응.

 

하지만 그의 인간미는 상상이상. 그는 극장에서 여배우를 극찬했는데, "부인, 런던에서 프랑스의 품위와 정신을 보여줘 박수갈채를 받은것을 기억합니다 " 라며 흠잡을데 없는 프랑스어로 발언.

 

그리고 이 발언이 극장가에 퍼졌고, 나아가 파리 전체로 번지며 에드워드 7세가 파리를 떠날때 파리지앵들은 "에드워드 만세 (Vive Edourard) " 를 외침.

 

 

 

델카세는 이에 대한 회답으로 1904년 4월 8일 런던을 방문. 외무상인 랜즈다운 후작과 몇가지 협정을 체결하는데 이게 바로 우리가 아는 영불협상, 앙탕트 코르디알 (Entente Cordiale).

 

그러나 이 당시까지만해도 이는 독일 저격용 정식 군사동맹이라기보다는 식민지 이해관계 조정 협약에 가까운것이었음. 그렇기에 랜즈다운 후작 입장에서 이는 이전의 화려한 고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

 

 

 

 

그럼에도 앙탕트 코르디알은 과소평가 될 수 도 없는데, 전통적인 영국의 고립에서 점차 벗어났음. 그리고 영국과 삼국동맹과의 친선관계가 틀어지며 비스마르크 체제의 종언.

 

이렇게 비스마르크가 두려워했던 프랑스가 아닌 독일의 유럽내 고립이 가시화. 하지만 단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레이트 게임에서 충돌하는 두 강대국인 영국과 러시아 이해관계를 동시에 조율해야 한다는것이였으나 이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해결됨.

 

 

3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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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고양이는귀여워 | 작성시간 26.05.26 잘봣어 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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