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윌리엄스'가 전하는 늦가을의 旅愁, <여행자의 노래>
독일의 낭만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가을날:Herbsttag>이라는 글에서 "지금 집이 없거나 혼자인 이는 이리저리 불안스레 방황할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시인 월명사(月明師)는 '제망매가(祭亡妹歌)'에서 인생의 만남과 헤어짐이 "가을철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부질없는 것임을 노래하였다. 고금(古今)의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고독과 방황의 계절 가을을 가슴속에 깊이 새기며 수많은 글과 그림, 노래들을 쏟아내었다.
Carl Julius von Leypold, <Wanderde in the Storm>
특히, 늦가을에 듣는 방랑의 노래들은 우수(憂愁)가 가득하고 처연(凄然)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추억과 상실, 연민과 체념의 정한(情恨)으로 끌고 간다. 예술 가곡으로 지어진 '방랑(放浪)'의 노래들은 매우 많으며, 대개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을 그 바탕에 깔고 있고, 사랑했던 이에 대한 실연이 그 방랑의 원인이 된다.
'슈베르트'는 <방랑자:Der Wanderer>에서 "차디찬 태양과 시들은 초원을 방랑하며 희망의 나라를 꿈꾸는 젊은이"를 묘사하고 있고, '브람스'의 통절가곡 <겨울의 하르쯔 여행:Harzreise im Winter>에는 실연을 당한 청년이 스스로 학대하며 겨울 산을 방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노르웨이의 음악가 "그리그'는 <이별:Abschied>에서 "나는 떠나가는 여름이고, 그대는 스러져가는 초목이요"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세기말의 작곡가 '말러'는 <나는 이 세상에서 잊혀지고:Ich bin der Welt abhanden gekommen>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세상으로부터 이제 그 누구도 나의 일을 듣지 못할 것이오"라고 스스로 비관하고 있다.
또한 많은 가곡 작곡가들이 여러 연가곡(連歌曲)을 통해 방황하는 여행자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Der Winterreise>가 그러하고, '슈만'의 <리더크라이스:Liederkreis>가 또한 그러하다. '말러'의 4개의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에는 사랑하는 이에게서 배신을 당한 이의 고뇌가 들어 있다. 만년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4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를 통해 인생의 막다른 길에 들어선 이가 느끼는 깊은 통찰과 달관의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1872-1958)'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활동으로 당시 '퍼셀(Henry Purcell)' 이후 침체기에 있던 영국음악을 이끌어 '브리튼(Benjamin Britten)'으로 이어지는 영국음악의 부흥기를 주도한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그는 9곡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현악곡과 협주곡, 실내악곡을 남긴 대 작곡가이나, 그의 음악성의 본질은 성악곡, 특히 가곡에 있었다. 그는 생전에 300여 곡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성악곡이었다. 그의 가곡사랑과 민요에 대한 열정은 매우 각별하여, 친구 음악가 '홀스트(Gustav Holst)'와 함께 삼십여 년 간에 걸쳐 영국 각지의 민요 800여 곡을 채집해 그것을 토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와 같은 취향에 대해 작곡가는 그의 자서전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율(영국 민요)들을 접한 경험들은 소나타나 푸가를 공부한 것보다 더 좋은 음악 공부가 되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영국 민요협회에 가입하여 그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 영어로 된 통일 찬송가집(English Hymnal)을 새롭게 편찬하여 독일계 찬가에 경도되어 있던 영국 전례음악에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국민음악>이라는 저서 서문에서 "예술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이며, 바로 자신의 고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을 주장하였는데, 영국 음악의 부흥은 외국의 모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자국의 소재들을 끌어내어 활용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오랜 전통과 명성에 빛나는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 평생을 음악교육과 지휘, 작곡에 투신하였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에는 스스로 참전하거나 피난민을 돕는 사업을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Songs of Travel:여행자의 노래>는 <보물섬:Treasure Island>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1850-1894)'의 시에 의한 작품이다.
이 시는 '스티븐슨' 사후 1895년에 출판된 시집 <Songs of Travel and Other Verses> 중 9개의 시에 의한 연가곡으로, 사랑의 슬픔 속에서 방황하는 방랑자의 이야기를 통해 삶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을 노래하고 있다.
작곡가는 이 시집에 수록된 총 44개의 시에서 1,3,4,6,9,,11,14,16,22번의 아홉 개의 시를 선택하여 곡을 붙인 후 다시 배열하여 바리톤을 위한 아홉 곡의 연가곡으로 탄생시켰다.
이 아홉 곡의 연가곡은 유기적으로 그 줄거리와 정서가 연결되어 있으며, 주제 멜로디를 1곡부터 9곡까지 일관되게 사용하여 작품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홉 곡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 1 곡 The Vagabond(방랑자)
제 2 곡 Let Beauty Awake(美가 눈뜨게 하라)
제 3 곡 The Roadside Fire(길가의 모닥불)
제 4 곡 Youth and Love(젊음과 사랑)
제 5 곡 In Dreams(꿈에)
제 6 곡 The Infinite Shining Heavens(가없이 빛나는 하늘)
제 7 곡 Whither must I wander? (어디로 갈까?)
제 8 곡 Bright is the ring of words(밝게 울리는 목소리는)
제 9 곡 I have trod the upward and the downward slope(오르막 내리막 다 겪었네)
Graeme Willson, <Moorland Wanderer>
이 아홉 곡의 줄거리를 순서대로 엮어보면, 다음과 같은 방랑행(放浪行)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대체로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와 비슷한 플롯이다.
"(1곡)한 젊은이가 사랑을 잃고 며칠동안 번민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절망과 체념 속에서 방랑을 시작한다. 때는 늦은 가을철, 그는 세상 친구와 이별하고 나그네의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2곡)방랑의 여정에서 나그네는 낮에는 새를 동무 삼고 밤에는 별을 우러르며 그가 그토록 동경하고 추구했던 사랑과 미(美)에 대한 생각에 골몰한다. 실연의 상처가 컸기에 그에게 보여진 세상의 모습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가 추구하는 진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새롭게 다진다. (3곡)길가에서 밤을 지새며 모닥불의 연기 속에 연인의 모습을 투영한다. 그는 연인에게 줄 조그마한 브로치와 장난감을 만든다. 그러나 결국 다 팽개치고 노래를 하나 지어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할 진정으로 가치 있는 선물은 세상에서 얻거나 자연의 매개물로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방랑 생활 속에서도 결코 그녀를 잊은 일이 없다. (4곡)곧게 뻗은 길을 가면서 나그네는 환상을 본다. 길 옆 화원에는 황금빛 정자가 펼쳐져 있다. 밤이 되어 별이 쏟아질 때 쾌락의 유혹이 그를 엄습하나, 그를 뿌리치고 오직 그녀만 생각한다. (5곡)청년은 불길한 꿈을 꾼다. 초췌한 모습으로 그가 사랑한 소녀가 서 있다. 찬란한 아침과 같던 우아함도, 그토록 맹세했던 소중한 마음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그녀는 청년 앞에서 잠시 눈물을 흘리나 이미 그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있다. 그러나 청년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한다. (6곡)꿈에서 깨어난 청년은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본다. 그 별 하나 하나에 슬픔과 죽음이 스며들어 있다. 별들은 소리 없이 먼 곳에서 빛나며 죽는다. 청년이 간직했던 이상 또한 별처럼 사그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빵보다 별이 더 소중하다. 새벽 무렵 별 하나가 그 청년에게로 내려온다. (7곡)방랑의 길에 후회와 두려움이 스며든다. 차디찬 빗줄기와 겨울바람은 그의 신념을 무디게 하였다. 그는 예전의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기나, 자신은 이미 그 곳을 떠나온 지 오래이다. 고향 마을에 봄이 오고 꽃과 새도 돌아오련만, 나는 영원히 이 길을 떠나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8곡)나그네는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닌 '말'과 '노래'의 힘에 대해 노래한다. 노래를 부른 이가 비록 세상을 떠났더라도 그의 노래는 옛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옛 애인이 추억하게 한다. (9곡)방랑의 길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안았던 청년은 이제 그 희망마저 포기해 버린다. 그는 세상에 안녕을 고하며 사랑과 삶의 끈을 놓는다."
제 7 곡 Whither must I wander? (어디로 갈까?)
이 곡은 이 연가곡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곡으로, 선율이 아름답고 소박하다. 유절(有節)형식으로 작곡되었고 선율은 반복되지만 반주부가 변형되어 음악에 변화를 주고 있다. 그리고 반주부의 리듬형과 선율이 성악선율과 같이 움직여 이해와 가창에 쉽다.
3연 24행으로 구성된 원 시는 방황하는 방랑자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방랑자는 자신이 떠나 온 옛 보금자리와 그 곳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진한 향수에 젖는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나면서 지금 방황하는 방랑자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모두 3절로 되어있는 이 곡은 각 절마다 A-A'-B-A'의 단순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두 악절은 주어진 박자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평범하게 흘러가고, A와 대비되는 B악절에서 resoluto(단호하게)의 악상으로 바뀌며 강하게 솟구친 후 조금 느려졌다가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가 조용히 마쳐진다.
선율은 가사의 의미와 관련없이 흘러가지만, 원 시가 각운(脚韻)이 지켜지는 정형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사와 선율이 잘 대응되고 있다. 각 절마다 짧은 간주가 나온다.
곡은 마단조, 4/4박자로 기품있고 거침없이 흘러간다. 짧은 전주에 이어 주 멜로디가 연주된다. "도 레미 레도라시 도레미솔 파미"로 시작되는 선율은 다소 담백하고 사념없이 울려 마치 방랑하는 젊은이의 발걸음을 또박또박 세듯이 흐른다. 그러나 그 걸음은 다소 움츠러지고 맥이 빠져 있다. 마치 오랜 방황으로 굶주리고 지친 발걸음으로 어디 갈 곳도 없이 헤매며 옛날의 행복했던 집을 회상하는 방랑자의 심정을 표현하는 듯 하다. 선율과 똑같이 동형진행으로 움직이는 피아노 반주는 영국 민요의 고유 음정(단 3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각 절에서 사 단조의 B부분은 이 가곡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데, 주 선율과 똑같은 리듬이나 멜로디 라인이 한층 더 올라가 있어 다소 격앙되고 극적인 모습이 표출되고 있다. 곡은 다시 A' 부분으로 되돌아가면서 표현의 대비와 분위기의 환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곡은 원래의 마 단조로 조용히 마친다.
Whither must I wander ? Home no more home to me, whither must I wander?
Home was home then, my dear, full of kindly faces,
Spring shall come, come again, calling up the moorfowl, |
(어디로 갈까?) 나에게 이제 집이 아닌 집,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 땐 집이 집이었다, 정 많은 얼굴들이 가득하던,
봄은 오고, 또 오고, 붉은 뇌조 불러낸다. |
Ludwig Munther, <Hiker in the dawn>
시인 박기섭은 <11월>이라는 시에서, 늦가을의 11월 정서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11월은 어머니가 없는 달이다. 벼 벤 그루터기 봇물은 잦아들고, 떠나선 다시 못 오는, 방물장수의 낯선 길"... 11월 늦가을은 우리를 지탱해 주었던 풍요롭고 자비로웠던 모성(母性)이 떠나고, 옆구리 속으로 메마른 찬바람이 들어오는 때이다. 이 시절에 따뜻한 차를 서로 건네며 노래 한 자락, 시 한 구절 읊어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
노래 : 바리톤 데이빗 매컬(David McCoul) 반주 Kay Kim(케이 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