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귀한 일은 무릇 어렵고도 드물다
들뢰즈는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를 철학자들의 예수라고 칭했다. 실제로 스피노자가 자신의 생과 글을 통해 보여 준 윤리적 영웅성은 예수의 그것과 비교될 만큼 깊고 강력한 내공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자신의 대표 저서를 '윤리학'이란 뜻의 『에티카(Ehtica)』로 명명한 것은 매우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스피노자는 특이한 철학자이다. 고독과 반항이란 예술가들에게 적합한 용어일지도 모르지만, 끊임없이 현실적 유토피아를 추구했던 이 철학자의 삶에서 우리는 같은 예술적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사회적 무관심과 탄압 속에서 스피노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이 철학자들이 아닌 괴테, 하이네, 바이런 등의 예술가였다는 점에서도 그의 철학이 예술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는 것은 확인된다.
그는 원하기만 했다면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나 공식 지식인으로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낮에도 밤에도 저주를 받아라"는 말과 함께 유대인 사회에서 추방된 후, 기독교 사회에 동참하는 것조차도 거부한 채, 렌즈를 갈아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주관과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용기와 담력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죽기 전 『에티카』의 출판을 놓고 "진리는 주인이 없다"는 말과 함께 책에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을 것을 부탁한 겸손함과 자기 비움은 어떤 신념에 근거한 것인가?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렵고도 드물다"는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은 스피노자의 특별한 사상과 인생을 요약해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오랫동안 저주받고 배척당한 그의 이론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0년 후 현실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이론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정착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틈바구니를 아웃사이더만의 독창적인 통찰로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고독이 지향한 것은 진실이었다. 당대의 시공에서는 거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던 스피노자의 철학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현실적인 힘을 발휘함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진실이 지닌 그 무한한 파장력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비웃거나 탄식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오로지 이해하기를
왜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토록 많은 배척을 받았던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로 우리는 그의 비판적 자유정신을 들 수 있다. 많은 서구 철학이 권력 체계의 중심부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한 데 반해,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 스피노자는 평생 자유를 위해 싸웠으며 권력자들에 대한 반항을 그치지 않았다. 『신학·정치 논고』에서 그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에티카』는 이러한 자유의 본성을 밝히고 자유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씌어진 책이다.
스피노자의 자유는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유의지와 성격을 달리한다. 실존주의자들과 이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의지란 인간의 이성적 측면만을 중시하는 데 반해, 스피노자의 자유는 인간의 이성과 신체적·운명적 한계를 모두 통괄하고 있는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자유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과 이해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동물이라서, 인간을 기준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기질이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두려움에서 불멸에 대한 기대와 종교적 신념이 발생한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비판하고 주체의 환상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 탈근대적인 사상가들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모습을 한 성서의 하느님'에는 많은 모순이 있으며, 신은 결코 인격신일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이 지닌 현대성 역시 의미가 깊다.
노발리스는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에티카』의 첫 장을 여는 신이란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이란 기독교의 신도 알라의 신도 아닌 범신론적 신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신이 세상을 창조한 초월적 존재라면, 스피노자에게 신은 무한하고 영원한 세상 그 자체이며, 따라서 '신'이란 말 대신 '세상'이나 '우주'를 대입해도 논지가 성립된다.
신에 대한 명상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 스피노자는 이어 전 우주적 차원에서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에티카』 제5장에서 자신이 불멸의 존재이기를 바라는 환상과 자만을 버리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판명하게 인식할수록 인간은 신을 더욱더 사랑하게 된다"고 밝힌다. 요컨대 슬픔, 기쁨, 욕망 등의 감정이 자연, 우주의 질서에 따른 것임을 인지하고 이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종의 운명애를 지니게 될 때, 인간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 가령 질투와 분노, 탐욕 등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해한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한에서만 증오하고 분노하며, 모든 슬픔과 과오는 결국 무지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타자가 나에게 행하는 여러 악행들이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필연적인 체계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이를 깨닫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 비난, 증오의 태도는 사라지게 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했다면, 어떻게 그를 비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는가? 자연 변천에 대한 숙명적인 앎을 보유하고 슬픔과 다른 정념들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어떤 일이 닥쳐도 평온함을 유지하게 되며, 더 나아가 모든 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숙고가 아니라 삶에 대한 숙고이다
서구의 철학 전통은 죽음과 불안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현세를 부정하는 기독교적 철학을 비롯하여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가령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으로 점지된 존재로 규정하면서 죽음을 망각하는 것은 무지와 경박함이라고 보았으며,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권태와 욕구 불만 사이에서 방황하는 허무한 존재로 인식했다.
이에 반해 스피노자는 인간을 예속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미신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죽음이 아닌 삶으로부터 인생을 관망할 것을 권장한다. 이와 같은 초인적 열망을 인간적 차원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그가 제시한 지복에 대한 가능성은 사실 많은 철학자들의 반박을 받고 있는 부분이다. 헤겔은 스피노자가 유한 세계의 부정성을 무시했다고 비판했으며, 아도르노와 코제브는 그의 철학이 허무맹랑하다고 말했다. 바로 이 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존재론을 넘어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간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죽음과 불안, 슬픔과 이별이 실존적 인간조건이라면 어떻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가? 생존 경쟁과 가식으로 운명지어진 인간세계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미친 자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죽음의 두려움을 외면하고자 하는 여러 노력들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했다는 주장은 삶의 현실과 모순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죽음과 관련된 생각은 실존적이고 구체적인 우리 삶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며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 문화를 구축하는 원동력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우리는 각자 안에 커다른 죽음을 지니고 있다. ··· 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었다"고 말했다. 즉, 아무리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 해도 우리는 존재론적 원리에 따라 이를 무조건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죽음이 아닌 삶을 생각하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이 너무 당위적 성격을 띠기에 오히려 죽음을 직시하라는 하이데거의 분석이 스피노자의 지혜보다 현실적으로 더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의 유일한 관심사는 바로 죽음이 아닌가? 돈, 권력, 미, 사랑 등도 그것들이 죽음으로 향한 유한한 시간성의 존재인 인간의 생명을 좀더 연장해 준다는 점에 있어 의미를 지닐 뿐이다. 장켈레비츠는 『죽음』이라는 그의 유명한 저서에서 죽음에 대한 현자들의 외면과 조소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아무리 대단한 현자와 철학자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에 냉정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이성의 힘을 강조하지만 죽음의 두려움과 욕망의 힘은 일반적으로 이성의 힘을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무조건 무시했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그가 삶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실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물론 우리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삶에 대한 명상만을 할 수도, 하이데거의 말처럼 죽음에 대한 명상만을 할 수도 없다.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면서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성향이라면 그러한 자연적 본성에서 탈피하도록 노력하는 것에 인간의 위대성이 있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주장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모든 아름다운 것은 귀하고 힘들다"고 한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은 죽음에 대한 현자들의 도전을 설명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많은 철학자들이 삶의 부정적인 힘과 그 역량을 무시했다고 비난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스피노자 윤리학의 강렬함이 발견된다.
『에티카』는 순수한 긍정에 상응하는 진정한 기쁨의 철학이며, 여기서 그리는 철인은 살아 있음에 전율과 기쁨을 느끼는 적극적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나 낭만적 광기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유한한 인생의 허무함을 깊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철학자들이 그 사실을 탄식하며 그로부터의 도피를 갈구하는 인간적인 철학을 제시했다면, 그는 이 사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음에 도전장을 내밀며 "우리는 어떻게 긍정적으로 될 수 있는가?" 하는 영웅적인 화두를 던진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외부적 요건에 의해 스스로가 파괴되는 것을 방치하고 정념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다. 그리고 이 사실은, 왜 인간이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나쁜 것을 선택하는지, 왜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지, 왜 비극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지를 설명해 준다. 인간은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학, 증오, 파괴에서 느끼는 쾌감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고, 자유 상태가 요구하는 위험과 책임을 피하기 위해 노예 상태를 자발적으로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티카』는 이러한 본성적 수동성에도 불구하고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은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하므로 "증오는 사랑과 어진 마음으로 물리쳐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이성의 힘으로 파토스적 예속에서 에토스적 자유로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모든 슬픈 수동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사회적으로 유용할지라도 나쁘며 폭정을 내포한다는 스피노자의 주장을 발전시킨다면, 사랑은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사랑은 외적 원인에 대한 앎을 동반한 기쁨이며, 증오란 외적 원인에 대한 앎을 동반한 슬픔이다. 즉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너로 인해 내가 더 완벽해진다", "너는 나를 기쁘게 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만 "행복한 사랑은 없다"는 아라공의 유명한 시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설과 소설은 사랑의 비극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피노자에게 있어 진정한 사랑과 소유욕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불행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가 다른 이성을 사랑한다거나 내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에서 슬픔을 느낀다면 그 사랑은 결국 자기애나 자기 연민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을 소유와 이기적 정념이 아닌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으로 파악한 스피노자의 사랑론은 소외와 고독의 문제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개별적인 사물들을 더 많이 파악할수록 신을 더 많이 인식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존재론적 폭력과 전쟁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긍정과 기쁨이다. 기쁨이란 "인간이 덜 완벽한 상태에서 더 완벽한 상태로 발전되어 가는 이행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며 슬픔은 이와 반대되는 정서이다. 기쁨 자체가 선이라는 이러한 주장 역시 희생을 동반한 고통을 윤리적으로 우수한 감정으로 생각하는 서구의 도덕주의와 기독교 전통에서 매우 낯선 것임이 분명하다.
기독교 전통이 희생과 겸양의 미덕을 강조했다면,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자신의 활동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인 자기만족이 진정한 최고선이라는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또한 선과 악은 사회 규범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단순한 도덕적 순종을 넘어서는 보다 적극적인 개인적 윤리를 제시한다.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전체와 보편성에 우선권을 두었던 여느 철학자들과 달리 그가 개인의 특수성을 강력하게 옹호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윤리학의 중심에는 살아있는 구체적 존재가 있다. 스피노자에 있어 개별적인 인간은 전체에 종속되어야 할 보잘것없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일부분이며 무한한 실체를 부분적으로 실현한다. 따라서 『에티카』는 개별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요, 부분은 전체를 통해서 전체는 부분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신적 필연성의 관점에서 고찰할 경우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을 보유하므로 어떤 것도 경멸을 받아서는 안 되며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긍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을 불편하게 했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문구, "우리는 우리가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는 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영원성을 믿는다는 것은 종교적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이 신비주의적 성향의 문장에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절대적 낙관론은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자아로부터의 탈퇴에 근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신에 대한 지성적인 사랑을 통해 전체 속에 용해된다면 나는 이 전체처럼 파괴될 수 없는 것이 되며 영원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기적이고 정념에 의한 존재론적인 자아를 부정한다. 더 나아가 죽음과 삶의 경계선마저 부정한다. 영원성과 불멸성은 구분되어야 한다. 불멸은 인간의 신격화에 대한 열망이다. 즉,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불멸이 죽음의 극복이라면, 스피노자의 영원성이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대한 부정이다. 영원은 죽음 후의 천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삶 그 자체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인간의 정의는 실체가 아닌 양태와 관계를 통해 가능하며 양태적 신성을 보유한 개체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없다. 모든 개인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가치로서 존재할 수 있으며 인류가 지닌 최선을 구현할 수 있다. 『에티카』 안에서 특수자는 주인공이 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
스피노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에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 힘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부른다. 코나투스는 쉽게 신체적, 권력적 욕구로 해석될 소산이 있으며, 실제로 스피노자는 자주 유물론자, 무신론자로 오해받았다. 그러나 필자가 경험한 스피노자는 유물론자, 관념론자의 구별을 넘어서는 현자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의 코나투스는 육체와 정신의 유기적 합일체로서 "본질에 의해서만 정의된 인간의 힘", 즉 '덕'과 일치한다.
『에티카』에 따르면, 덕의 기초는 인간의 기본적인 코나투스, 즉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노력을 통해 정신과 육체, 나와 타자는 상호 상승을 지향한다. 요컨대 서구의 철학이 인식을 통한 객체와 주체의 이원론적 구분과 타자의 지배를 추구했다면, 『에티카』는 심신 일원론의 이해와 실천을 통한 모두의 자유를 추구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슬픔의 원인을 이해함으로써만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언자라고도 불리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바로 이 점에서 완성된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는 동양의 지혜 가운데 도가의 자연론, 불교의 불성론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다. 유대감을 상실한 서구의 이원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세계관이 거세게 비판되고 있는 지금 동양적 가치와 서양적 가치, 삶과 이론의 접목으로서의 『에티카』는 현대인이 앓고 있는 삶의 분열증을 치료해 주리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렌즈를 갈아 생계를 유지했던 스피노자의 일생을 두고 사람들은 그의 인생이 영혼의 렌즈를 가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스피노자의 자서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 『에티카』는 얼음의 순수와 불꽃의 정열을 동시에 발산하는 역동적 눈빛이며 내적 혁명의 산 증거이다. 그 속에서 현실에 몸담은 자의 겸손함과 신적 세계의 원대함이 교차되며 꿈과 현실은 더 이상 모순되지 않는다.
지복은 덕의 보상이 아니라 덕 그 자체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삶과 자유, 행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행복은 덕을 실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니라 덕의 행위 그 자체라고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의가 나의 행동 양태에 의해 결정되듯이, 인간의 행복은 인간의 행위 자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지 기독교적 천국이나 사회적 명예에 의해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정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그의 주장에서 우리는 순수 윤리학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의미란 곧 행복이다. 그리고 이는 비극적 운명을 점지받은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영웅적인 도전을 의미한다. 냉소주의와 허무주의가 팽배한 21세기에 희망과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당히 낯선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에티카』가 강조하듯이 부정적인 힘은 긍정적인 힘에 의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어떤 시인은 "나는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나 자신을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에게 가는 길과 나에게 가는 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보편적인 철학적 질문은 구체적 삶에 대한 의문과 놀라움에서 시작된다. 왜 내가 실망했는지, 불행한지, 슬픈지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질문에서 시작된 『에티카』는,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용서함으로써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
킴으로써, 철학이 삶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임을 일깨워준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스피노자가 주장하듯이 자유는 필연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가? 자유를 염두에 두고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스피노자의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의 한 요소에 불과하며 전체에 의해서 결정된 자연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연성을 인지하는 것은 비관적 운명주의에 동의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자유가 시작된다. 이성에 의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갈등과 슬픔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소유와 정복이 아닌, 이해와 해방이 바로 절대적 자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필연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과연 이런 달관의 자세가 도인이 아닌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과, "필연성의 이해가 해방보다는 체념 그리고 책임감의 거부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2. 스피노자는 "이성에 따라 인도되는 인간은 오직 자기에게만 복종하는 고독 속에서 보다는 공통된 결정에 따라 생활하는 국가에서 훨씬 더 자유롭다"고 말했다. 공동체가 반드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일까? 아니면 스피노자가 주장했듯 개인의 자유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일까?
무정부주의자들은 국가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고 자유를 억압한다는 사실을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배가 아니다. 그것은 공포에 의해서 인간을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며, 인간을 국가가 세워진 것과 다른 것에 소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개인을 공포에서 해방시키려는 것이며, 개인을 안전하게 살게 하려는 것, 즉 개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생존하고 행동하는 자신의 자연권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피노자는 국가의 주권과 개인의 자유가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국가의 목적은 자유의 실현에 있으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거하려고 할 때 그 국가는 붕괴의 길로 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주장했듯이 개인의 자유와 국가라는 법적 공동체와의 이상적인 공존은 가능할까? 분명한 것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므로 자아실현과 행복은 공동체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 역시 개인주의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서로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인간이라는 생물체는 이미 멸종했을 것이며 자유를 실현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공존은 필수적이면서도 어려운 문제임이 분명하며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선 스피노자가 강조한 이성적 태도가 필요하다.
3. 신앙은 모두 미신인가?
스피노자는 "그들 자신의 사적인 일을 정해진 계획에 따라 해결할 수 있거나 그들에게 운명이 호의적이었다면 사람들은 결코 미신의 포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신앙을 선택함을 비판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미신이란 이성의 결핍, 신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착각이며 이것은 정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군중들을 예속하는 지배수단이 된다. 그러나 모든 종교적 믿음이 미신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예언, 징조, 자연현상의 초자연적인 원인을 믿는 것을 미신으로 정의한다. 미신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초월적 힘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며 그 힘에 호소함으로써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미신이고 무엇이 진정한 신앙일까? 신을 믿는 것과 산타클로스나 유령을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와 같은 전통 깊은 종교도 자기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는 미신이라고 배타시하기도 했으며, 같은 종교 내에서도 그 종교 교리에 내포되지 않은 것은 미신으로 평가해왔다. 미신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믿음은 인간의 허약함을 증명하는 무지의 결과일 뿐일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동물이다. 동물 중 인간은 유일하게 자신의 유한성과 실존적 허약성을 인식하며 동시에 초월성, 성스러움과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주장했듯이 이성적 깨달음만으로 신앙의 문제를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죽음보다 삶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가 추구해야 할 당위적 목표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서구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썼으며 그 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종교적 믿음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