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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HO> 수도에 임하는 올바른 마음가짐

작성자작약|작성시간12.07.06|조회수63 목록 댓글 1

<질문 : 삭티파트에 있어서, 매개체와 구도자 사이에 심령적인(psychic) 속박 관계가 성립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만일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이 관계는 구도자에게 해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유용한 것일까요?>

 

 

 

 

속박 관계는 결코 유용할 수 없다. 얽매이는 것 자체가 나쁘다. 집착이 깊을수록 더 나쁜 상황이 된다.

 

심령적인 속박 관계는 매우 나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슬로 그대를 묶는다면 그대의 육체가 영향받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사랑의 사슬로 그대를 묶으면 그 영향력이 더 깊어진다. 그 사슬을 부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그리고 누군가 쉬라드하(shraddha)의 사슬, 즉 신뢰의 사슬로 그대를 묶는다면 이것은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

 

이 때는 그 사슬을 부수는 것이 배신으로 여겨질 것이다.

 

 

모든 속박은 나쁘다. 그리고 심령적인 속박은 더 나쁘다.

 

삭티파트에서 매개체로 작용하는 사람은 결코 그대를 속박하지 않는다.

 

만일 속박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매개체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에게 묶일 가능성은 높다. 그는 그대에게 커다란 은총을 내려 주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의 발 밑에 엎드려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맹세할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에 주의 깊게 깨어 있어야 한다. 집착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인 길에서는 모든 집착이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고 나면 감사의 느낌이 그대를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를 해방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감사할 때 거기에 무슨 집착의 문제가 있는가?

 

오히려 나의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 내면에 무거운 짐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감사를 표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그대를 구속할 것이다.

 

감사를 표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완결 짓는다. 감사함은 속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인 자유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항상 속박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설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매달린다.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목소리가 두려움을 덜어 주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면 매달릴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용기를 북돋우려고 한다.

 

 

인간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이나 붙잡으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지푸라기는 그의 생명을 구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푸라기는 그와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에 질린 마음은 아무것이나 잡으려고 한다.

 

스승이든 물건이든 아무것이라도 잡고 매달린다. 우리는 이렇게 매달림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두려움이 모든 속박의 뿌리다.

 

 

구도자는 안전을 경계해야 한다. 구도자에게는 안전에 대한 욕망이 가장 큰 집착이다.

 

한순간이라도 안전을 추구한다면 그는 이미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분의 보호 밑에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스승의 그늘 아래 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길을 잃은 것이다.

 

구도자에게 안전은 없다. 불안전이 구도자에 대한 축복이다.

 

위험이 클수록 영혼이 대담해지고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안전한 만큼 그는 허약해진다.

 

 

도움을 받는 것과 의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삭티파트는 그대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 도움은 그대로 하여금 아무 도움없이 설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 도움을 통해 그대는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삭티파트의 도움은 이런 의도로 주어지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얼마 후에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울 것이고 아버지는 손을 놓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아이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은 아직 걷는 법을 배우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 때 아이의 손을 놓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손을 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그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치는 목적이다.

 

만일 아이가 계속 손을 잡는 것을 허용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는 아이의 적이다.

 

 

그런데 많은 아버지와 구루들이 이렇게 한다. 이것은 도움을 주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들은 그대에게 제 발로 우뚝 설 수 있는 강인함과 건강을 주는 동시에

 

평생 동안 목발에 의지해야 하는 불구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와 구루들을 기쁘게 한다.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그대 홀로 설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만족시킨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에고가 만족을 얻는다.

 

이런 구루는 진정한 구루가 아니다. 진정한 구루는 그대가 내미는 손길을 뿌리치고 스스로 걸으라고 분명히 말한다.

 

여러 번 넘어져도 아무 해가 없다.

 

그대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넘어져야 한다.

 

그리고 넘어지는 데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 없이 넘어져야 한다.

 

 

마음은 항상 어딘가에 기대려고 한다. 그래서 속박이 시작된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구도자는 항상 '나는 안전을 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대는 안전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만일 진리에 대한 열망이 진실하다면 그대는 안전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허구적인 관념들은 많은 보호벽을 만들어 준다. 이런 관념들은 아주 신속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의 산에 오르지 못한다.

 

그는 몽상에서 나온 허구적인 관념들에 물들고 '이제 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고 믿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제 자리에 움츠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어떤 유형의 집착이든지 위험하다. 그리고 스승에 대한 집착은 더 위험하다.

 

이것은 영적인 집착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적인 집착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영적인 자유라는 말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영적인 구속이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상에서 영적인 구속보다 심한 구속은 없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자유의 영혼이 솟아나는 네 번째 신체가 아직 미개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직 세 번째 신체까지만 개발되었다.

 

 

고등법원 판사나 대학 교수가 어리석은 자의 발 밑에 앉아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저 사람 발 밑에 앉아 있다면 틀림없이 무엇인가 있다.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판사나 대학 교수는 세 번째 신체까지 완전히 개발되었다.

 

그들의 지성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네 번째 신체에 관한 한 그들은 아무것도 무른다.

 

네 번째 신체에 대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하다.

 

그리고 지성과 이성의 개발에 관여하는 그들의 세 번째 신체는 끝없는 토론과 생각에 완전히 지쳐서

 

이제 휴식을 원한다.

 

지쳐 버린 지성은 전혀 비지성적인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극단적인 활동 후에 지쳐 버린 것은 무엇이든지 그 본성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치달린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것이 어느 아쉬람(ashram)에서든 대학 교수나 고등법원 판사를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그는 지쳤다. 그는 자신의 지성에 신물이 났다. 이제 그는 이 지성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비합리적인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그는 지성의 눈을 감아 버리고 맹목적으로 무엇이든지 믿으려고 들것이다.

 

그는 박식함과 이성, 토론이 자신을 아무데로도 이끌지 못했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것들을 버리려고 한다.

 

 

이것이 그들의 근본 취지다. 이런 것들과 관계를 끊기 위하여 그는 전혀 반대되는 것에 매달린다.

 

그리고 이 지성인을 신뢰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흉내내기 시작한다. 그는 매우 지성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네 번째 신체에 관한 한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네 번째 신체가 조금이라도 개발된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항복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는 지성적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어떤 것을 가졌다.

 

 

이런 속박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네 번째 신체가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네 번째 신체가 개발된 사람에게 매달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 자신의 네 번째 신체를 개발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이해함으로써만 그대 자신의 네 번째 신체를 개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이해해야 한다는 골치 아픈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그대는 무작정 그에게 매달린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해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당신의 발을 붙들고 늘어질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지옥의 강을 건너가면 나도 당신과 한께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배에 매달려 천국의 강을 건너갈 것이다."

 

이해 안에서 성장하려면 고통을 통과해야 한다. 이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변형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해는 하나의 노력이며 수행이다. 이해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해는 혁명이다. 이해를 통해 변형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변한다.

 

낡은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 무작정 매달리는 것이 더 낫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추종함으로써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 홀로 가야 한다.

 

 

이 길은 전적으로 홀로 가야 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집착이든 방해가 된다.

 

어떤 일별을 얻을 때마다 그것을 통해 배우고 이해하라. 그 일별을 얻을 때마다 그것을 통해 배우고 이해하라.

 

그 일별을 환영하라. 그러나 거기에 멈추지 말라. 휴게소에 집을 짓지 말라.

 

그대에게 내민 손을 잡고 매달리지 말라. 그 손을 하나의 이정표로 생각하라.

 

그대는 '더 나아갈 필요가 없다. 여기에 머물러라. 이곳이 피안의 세계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은 스스로 묶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편에는 자신의 두려움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묶어 두려는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보고 그는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들이 왜 나를 따르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확실히 나는 무엇인가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들이 왜 나를 믿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주변에는 많은 구도자를 끌어 모으려는 구루병이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구루병에 걸린 사람은 더 많은 추종자를 모으려고 혈안이 된다.

 

그리고 추종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자신의 앎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나는 무엇인가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왜 나를 따르겠는가?'하고 생각한다.

 

이런 추리가 그를 의기양양하게 만든다.

 

이 추종자들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 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낄 것이다.

 

추종자가 사라지면 그의 앎도 사라진다.

 

 

이렇게 수많은 마인드 게임(mind game)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게임을 경계하라. 이 게임은 양방향에서 진행된다.

 

오늘은 구루에게 묶여 있는 제자가 내일은 다른 사람들을 속박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연쇄 반응이다. 오늘은 제자인 사람이 내일은 구루가 될 것이다.

 

그가 얼마 동안이나 제자로 남아 있겠는가?

 

오늘 누군가에게 매달려 있는 사람은 내일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매달리도록 만들 것이다.

 

 

이런 속박은 연쇄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네 번째 신체의 미개발에 있다.

 

이 신체를 개발하면 그대는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그 때는 더 이상 속박의 문제가 없다.

 

이 말은 비인간적으로 되거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속박이 있는 곳에 관계는 없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속박이 있다.

 

우리는 '신성한 결혼의 끈으로 묶여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청첩장을 보낼 때도 '아들이 애정의 끈으로 묶일 것입니다.'라고 쓴다.

 

그러나 속박이 있는 곳에 관계는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먼 훗날에는 아버지가 청첩장을 보내면서 '제 딸이 아무개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라고 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것이 더 지성적으로 보인다.

 

'아무개의 사랑이 그녀를 자유롭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 더 지성적이다. 이 때는 아무 구속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된다. 사랑은 자유를 탄생시켜야 한다.

 

사랑조차 속박이 된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 자유를 얻을 것인가?

 

 

속박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행이 있다. 거기에 지옥이 있다.

 

밖에서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부에는 모든 것이 썩어 있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또는 친구 사이의 속박을 경계하라. 속박이 있는 곳에 관계는 없다.

 

그리고 관계가 있는 곳에서 속박은 불가능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끈으로 맺어져야만 관계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우리와 묶여 있지 않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을 낯선 사람에게 털어놓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한 여자가 불과 한 시간 전에 만난 사람에게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하지 못할 말을 낯선 사람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속박이 없을 때는 관계가 더 쉬워진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낯선 사람들을 진실하게 대하면서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낯선 사람과 있을 때는 구속이 없다. 따라서 관계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구속이 있을 뿐 관계가 없다.

 

이 때는 어떤 사람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형식적인 의무처럼 보인다.

 

 

구루와 제자 사이에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모든 관계가 아름답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속박은 아름다워질 수 없다. 관계는 해방을 의미한다.

 

 

선사들에게는 아름다운 관습이 있었다.

 

제자가 일정한 수련을 마치면 선사는 자신의 반대파에게 제자를 보내 공부하게 했다.

 

선사는 '너는 한 쪽에서 배웠으니 이제 다른 쪽에서 가서 배워라.'하고 말했다.

 

구도자는 스승의 말에 따라 이 사원에서 저 사원으로 옮겨 다녔으며, 스승의 경쟁자들 밑에 들어가 공부했다.

 

스승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가서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네 스스로 판단하라.

 

양쪽 말을 다 들은 후에는 남는 것이 진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서 배워라."

 

 

이런 말은 영적인 성장이 절정에 달했을 때만 가능하다. 이 때는 아무것도 그대를 속박할 수 없다.

 

나는 이 나라에서 스승이 제자를 속박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내보내는 풍토가 조성되었을 때

 

놀랄 만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듣고 배우라고 그대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스승은 나쁜 스승일 리 없다.

 

설령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 해도 그는 옳은 스승이다.

 

'다른 곳에 가서 배워라.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스승이 있다면

 

설령 그의 가르침 전부가 거짓으로 드러날지라도 그대는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그대를 기꺼이 다른 곳으로 보내는 스승은 나쁜 스승일 리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스승이 구도자를 묶어 두고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든 스승이 구도자를 묶어 두고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제자가 다른 스승에게 가서 배우는 것을 금지한다.

 

 

경전에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원으로 가지 말라. 미친 코끼리가 달려들어도 다른 사원으로 피신하느니 그냥 밟혀 죽는 게 낫다."

 

그들은 구도자의 귀에 다른 말이 들어갈까봐 항상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어떤 스승의 가르침이 옳다 해도 그가 그대를 묶어두고 있다면 그는 틀린 스승이다.

 

그런 스승에게는 감사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은 그대를 노예로 만들뿐이다.

 

그는 그대의 정신을 파괴하고 그대의 영혼을 죽인다. 이것을 이해하면 속박의 문제는 없다.

 

 

 

<질문 : 당신께서는 순수한 삭티파트에는 속박의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맞다. 거기에 속박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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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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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작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7.06 제가 직, 간접적으로 겪어본 많은 종교,수련 단체들도 자신의 단체에 속해있는 의사나 교수 판검사 군장성,연예인등 사회적 성공인사들을 홍보에 많이 활용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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