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세간적인 행위를 좋아하지 않으며 세간적인 행위를 즐거워하지 않고, 세간적인 행위의 즐거움에 관여하지 않는 동안에는 비구들이여! 비구들에게는 번영이 기대될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잡다한]일을 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잡다한]일을 하기를 기뻐하지 않고 [잡다한] 일을 하는 즐거움에 몰입하지 않는한,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또한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담화(談話)를 즐거워하지 않고, 담화의 즐거움에 관여하지 않는 동안에는, 비구들이여! 비구들에게는 번영이 기대될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말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말하기를 기뻐하지 않고 말하는 즐거움에 몰입하지 않는한,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또한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수면을 즐거워하지 않고 수면의 즐거움에 관여하지 않는 동안에는, 비구들이여! 비구들에게는 번영이 기대될 분 쇠망은 없을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잠자기를 즐겨하지 않고 잠자기를 기뻐하지 않고 잠자는 즐거움에 몰입하지 않는한,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또한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모여서 잡담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즐거움에 관여하지 않는 동안에는, 비구들이여! 비구들에게는 번영이 기대될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무리지어 살기를 즐겨하지 않고 무리지어 살기를 기뻐하지 않고 무리지어 사는 즐거움에 몰입하지 않는한,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또한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나쁜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나쁜 욕망에 지배받지 않는 동안에는, 비구들이여! 비구들에게는 번영이 기대될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삿된 원들을 갖지 않고 삿된 원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한,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또한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나쁜 친구를 사귀지 않고, 나쁜 동료를 사귀지 않는 동안에는, 비구들이여! 비구들에게는 번영이 기대될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삿된 친구가 되지 않고 삿된 동료가 되지 않고 삿된 벗이 되지 않는한,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또한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약간의 수승한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중도에 수행을 포기하지 않는 동안에는, 비구들이여! 비구들에게는 번영이 기대될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낮은 경지의 특별한 증득을 얻었다 하여 도중에 포기해 버리지 않는한,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비구들이여! 이상과 같이 쇠망이 오지 않는 일곱 가지 가르침이 비구들 사이에 존속하고, 또한 비구들이 이러한 일곱 가지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는 동안에는, 비구들이여! 비구들에게는 번영이 기대될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니라."
출처 :우리절 보현정사 원문보기▶ 글쓴이 : 사람들
앞의 글은 디가 니까야(장부長部: 길게 설한경) 각묵스님의 글이다.
앞에 것은 전체를 향해 한말이고 여긴 개개인에게 말하는 계율이다.
잡다한 일이란 옷을 찾아다니는것, 옷을 만든는 것, 바늘 통, 발우집, 허리띠, 물거르개, 책상등을 만드는 것 또는 이런일로 온종일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강의시간에 강의를 듣고 독경시간에는 독경을 하고, 탑전에 참배할 시간에는 탑전에 참배를 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시간에는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잡다한 일 하기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고 장부 주석서에 설명하고 있다.
좀스럽다. 이게 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옆길로 새거나 관심을 두지 말고 곧장 그 목적만 보고 살라는 것이다. 경마에서 말이 주의를 딴데 쓰지 못하도록 눈가리개(이게 정말 이 목적인지는 나도 모르는데 그렇게 보인다.) 를 하고 앞으로만 달리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한곳으로만 신경을 집중하게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많으면 그중에 지나치게 딴짓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건 사실인데 그것을 제어 하겠다고 하기 시작하면 권위적이고 강압적이 되어가기가 쉽다. 이러지 말하고 억압하기는 쉬어도 억압하는 사람이 정말 경중을 잘 살펴서 이끌기는 어렵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중 누가 더 힘들까?
보기에 따라 헛짓의 정의도 다르기 때문에 누군 헛짓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해서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 있는 것이라 논란이 있다. 이런 고민을 안할 수도 없고 너무 하면 행동하기가 어렵다. 개인의 재량이 있어야 하는 부분일거 같다.
즉, 헛짓거리 하지말라는 것이고 쓸데없는 짓 말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런 것이 정말 헛짓이고 아무 쓰잘데기가 없을까? 오로지 공부만 해야하고 그래야만 공부의 진전이 있을까?
내 경험으로 아니었다. 나도 어릴때부터 먼지모를 조바심과 헛짓을 하는 것에 대한 압박으로 오직 도만 닦겠다고 이거 외엔 전혀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 성격이 나는 한가지만 한다. 어디가도 거기만 갔다오면 된다. 중간에 다른 곳을 가거나 다른일로 시간을 지체하거나 다른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지금도 해야 할일 외에 다른 것으로 지체되는 것을 지나치게 싫어한다. 하지만 이게 별로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노력만큼의 결과가 그대로 나오는게 도의 공부에선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자기 위주로만 공부하고 자기만 공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공부는 나와 내 주위와 이사회와 전체와의 연관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지 나 혼자만의 성취도 아니고 깨우침도 아니다. 이걸 내가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나 개인만을 생각하며 공부한단 말인가..
내가 게으르지 않고 잡다한 일을 안한다고 내 공부가 될 것이 아니다. 이런 것도 생각해야 한다.
나 혼자의 성취마저도 전체적 사회와 주변과의 연관속에서 일어나는 연기이다. 이걸 말하기는 쉬워도 정말로 자신이 절실이 깨닫기는 어려운 일이다.
너무 자지말고 둘, 셋 등으로 짝지어서 대화나 잡담이나 세간의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한다. 나쁜 친구나 욕망을 참으라고 하는데 자천하다보면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점점 절감한다. 친구나 주위사람과의 대화에서부터 뭔가 아쉬움과 소통의 단절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과 사귀고 어울리는 것에 조심해야 한다. 나쁜 사람이야 당연하겠지만 일반적인 사람과도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세간에서 자천한다고 세속의 즐거움이나 욕망을 마냥 쫓을 수도 그렇다고 금욕적으로 단절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인데 그래서 적당히 자제하고 적당히 즐기는 균형을 잡아야 하는 출가한 사람보다 어쩌면 더 힘든 자제력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난 그러니 즐길건 즐기라고 한다. 욕구도 충족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이득과 자기 삶의 질을 높이라고 권한다.
다만 그안에서 자기의 성찰과 자천행을 한다는 것을 잊지말며 자천이 다함께 사는 최선이 무언지 연구하고 그 방안을 찾는 것이지 자기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수행중 느끼는 경험에 만족하지 말고 또 그런 약간의 수승한 경지를 가지고 다른 비구들에게 자랑하고 말하며 비교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기고 이런 자랑을 욕심내며 또는 상대적으로 좌절하는 것이나 부러워하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위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 들어있지 않나 내 맘대로 해석 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비구들끼리 말하고 사귀는 여러행위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오해를 만들고 작은 것에 으쓱하고 또 기죽고 하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경계하는 것이지 무조건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닐 겁니다.
또 안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 말라고 했으니 조심해서 해야겠죠
주위사람과 대화하고 욕망분출하는 것이 꼭 해가 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죠
도움도 되고 해도되는 것이며 해가 되어도 해보면서 자신이 알아내야 한다고 난 생각해서 권장아닌 권장을 합니다.
온실처럼 모두 보호하고 막고 좋은 것만 가르칠 수 없고 실생활과 현장의 치열함에서 커야 합니다.
왜냐하면 돌아갈 곳도 현실이며 지금 있는 곳도 현실이니까요
이렇게 세간에서 떨어져 무리지어 따로 장소를 마련하여 자천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서양인의 말처럼 언제부터인가 제정분리사회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엔 상징성이 있지 않나 해요
왕자였다는 것도 미심쩍거든요 난 이 열반경자체를 다 허구로 봅니다.
여기에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과는 상관없는 재구성이 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래야 하구요 그게 아니면 좀 실망스럽죠
그냥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쓸 하등의 이유가 없거든요 이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물론 있겠죠 그런데 개인적인 견해론 만약 그런것이라면 이걸 쓴사람의 공부가 비천하다고 하겠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행동은 숨쉬고 발까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석가모니의 전기를 쓰면서 단순히 있는 그대로 썻다면 심히 우려되는 수준이라고 보는거죠
그런데 아난존자가 120살까지 살았고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자라고 하면서 이러한 경전들을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데 변명이 좀 궁색하다.
많은 것이 부처의 가르침인건 사실인데 다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서 글로 하거나 정리를 하느냐가 관건이다. 있는 사실대로 들은대로만 쓴다면 이게 좀 그렇다는 거지 점점 대승경전으로 가면서 사실에 입각한 것에서 어떤 가르침을 위해 상황설정과 가정을 하면서 글을 쓴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은 더 사실이라고 보고 화엄경이나 법화경같은 것은 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런식으로 보면 이 대반열반경이 사실에 입각해서 쓴것이 맞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어느정도 사실이고 어느정도 재구성인가가 문제인데 사회적 상황이나 부처가 죽어가는 상황은 맞을 것이다. 거기에 설하신 것은 꼭 그때 설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보며 여러 부처의 말은 나중에 재구성해서 만든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냥 내주장이고 이래야 한다고 생각해서이다.
왜냐하면 안그러면 부처가 너무 불쌍하다. 이런 똑같은 말을 수십년동안 떠벌린다면 이건 사람을 미치라는 소리이다. 그리고 발전도 없다. 작년에 한말을 또하면 비구들이 발전이 없는 건지 부처가 발전이 없는건지 모두다 욕이 된다. 일관성있게 가르침을 똑같이 설해야 한다고 한다면 난 일관성을 아무대나 들이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말의 일관성이 아니다. 사람은 가르치기만 하면된다. 가리치는데 말이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건 배우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지 내 설명의 일관성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경전을 만든느건 부처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를 이용해 가르침을 남기는 것이며 가르침이 목적이다. 그게 아니라, 즉 가르침이 목적이 아니라면 부처가 한평생을 헛짓을 한게 된다. 부처의 일대기를 이용해서 가르칠려고 해야지 누가 부처의 일대기를 기록하라고 했나? 그정도도 모른다면 좀 거시기 하다.
그리고 이건 그냥 붙이는 말인데 믿어도 되고 안믿어도 된다.
부처의 일대기 자체가 하나의 설정이다. 짐짓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고행하고 그렇게 만나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가르침을 만들고 그렇게 산 것이다.
그렇다고 삶에 진지함이 없었냐면 오히려 더 진지하게 산 것이 된다. 한평생을 그렇게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산다는 건 힘겨운 일이다. 그안의 마음씀은 진짜이다.
이 짐짓하는 것과 그안의 진지함을 어쩌면 이중적인 상황을 이해하려면 그만한 공부를 해야하며 이것을 조금은 몸으로 겪어야 열반의 의미를 엿본게 된다.
왕으로 있으면서 정치자체가 가르치는 것이며 백성을 수행시키는 것이 정치인 세상이었던 것인데 이러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가르칠수도 있지 않나 싶은데 어인일인지 이 체계가 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세상에서 진정으로 중요하고 우리 인간이 해야할 것이 아라한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왜 더많은 백성을 놔두고 출가하는 사람에게만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에게만 말씀을 주는 것일까요?
이건 서구인이 말하는 미분별에서 분별로 다시 전분별로 진화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식으론 전일한 세상에서 또는 일(1)의 세상에서 음양인 2의 세상, 분리하고 분화하며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상 이런 나눔은 강, 약, 소유와 착취, 주와 종이 위와 아래가 하는 식으로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와 배타성이 나오고 계급이나 지금의 힘의 논리를 만드는 세상이 됩니다. 이게 정치와 수행의 나눔도 일어난 것이 되겠죠 세상이 무조건 분리되고 나누어지는 세상입니다. 그꽃이 과학이겠죠 나누면 다되는, 나누고 자르는데 혈안이 되었죠
신이라는 개념이 이때 구분된 것이며 그전엔 신이 없고 그런 것이 필요없는 의미가 있는데 이때 구분된 신개념으로 이전 시대의 어떤 것을 신이라고 구분하며 규정하는 오류를 하더니 신밑으로 스스로 종속되는 바보짓도 했다.
그리고 이제 올세상은 신선세상인데 인간과 신(세상, 인간...) 그리고 이 둘을 아우르는 전일이 합쳐저서 삼(3)이 되는 세상으로 처음의 전일과 구분하고 이미 다른 전일이니 온일이라고 하죠
전일, 음양, 온일 이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천이 있어왔고 이지구의 거스를수 없는 틀의 흐름이다. 지구 운명이다.
이걸 공간적으로 하면 흔히 말하는 문명의 서쪽으로의 옮겨짐이다. 마지막의 서쪽은 백인이 그리고 미국이 하고 있으며 이것이 음양시대의 끝이다.
우리보단 차이나쪽이 차이나쪽보단 인도쪽이 인도쪽보단 유럽쪽이 유럽쪽보다 미국쪽이 더 분별적이다. 단순히 분별을 잘한다가 아니라 분별을 옳다고 여긴다.
이미 온일의 시대는 진입했으며 사람들이 바라는 후천의 개벽일지 모르지만 글세 이 의미를 오해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온일시대의 의미체계를 음양시대의 의미체계로 이해하려는 오류를 하고 있는건 아닌가 한다. 온일은 음양도, 전일도 아닌 온일이다. 이걸 알아야 한다.
이 음양시대의 진입으로 일어나는 수천년의 그리고 석가모니의 입장에선 앞으로 고통과 공포와 아픔과 끔찍한 세상의 흐름을 알고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며 가슴 아파하면서 힘들었을지는 난 모르겠다.
그의 가르침이 우울하고 부정적이며 오히려 위안을 주려하고 있으며 이것이 앞으로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위한 것은 아닌지
일체개고이니 마음을 비우고 자기의 수행에 힘쓰라고 하는 것이 가르침 이전에 삶의 위안으로 보인다.
세존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있다. 방일하지 말고 잠자지말고 잡담하지말고 때로 어울리지말고 욕망에 빠지지 말고 작은 경지에 만족하지 말라고 한다.
난 할건 하라고 하고 싶다.
하지 말것과 할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사람이 다르면 해도 되기도 하고 하지 말아야 하기도 한다.
누구는 말하면서 깨닫기도 하고 누구는 쓸대없는 말만 즐기기도 하며 말을 듣기보다 자기 주장을 하기를 즐기기도 한다.
자천에 도움되기도 아니기도 하는데 이런 것은 그사람의 성향에 따라 억지로 참고 억누를 것은 아니지만, 이걸 너무 억지로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도 병이 되는 것이라 능동적으로 그리고 지혜롭게 자기를 고치거나 이끄는 것은 필요하다.
계라는 것이 무조건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끄는 방법을 찾고 연습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다루어야 한다. 이게 공부의 시작이다.
넌 이게 부족하니 이걸해라 하거나 말도없이 넌 이걸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스승이나 제삼자가 알아서 가르침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고 이런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전에 자기의 문제나 성향이나 태도를 남이 알려주는 것은 근원적인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승의 초월적인 능력을 운운하며 더 잘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이미 남에게 의지하고 종속하려하며 크고 신이한 것에 복종하려는 노예근성이 있는 것이다.
자천은 자기의 길이라고 하는데 왜 시작부터 누군가에게 의지 하려 하는가?
자기를 남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 이전에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스스로 알아낸 자기가 스승이 알려준 나보다 더 절실함이 있는 것이다. 공부는 진지하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거짓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난다. 그 허술함이..
부처님 말이나 내말이나 모두 정답은 아니다. 읽고 생각한 자신이 찾아가야 하는 길이다.
누구도 답을 말해줄 생각은 없다. 가르침은 진실과는 다르다. 가르침을 진실과 헷갈려 한다면 갈길이 한참이 멀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무엇에 의지하려하는가? 오직 나아가려는 자기의 심연의 바람이 있을 뿐이다.
재미로 말하면 이 심연의 바람이 자아를 고집하는 걸까요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