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엔 왕도 없었고 왕같은 것도 없었다.
사람이 여럿이 살다보면 서로간에 지켜야 할것도 있고 배려해야 할 것도 잇을 것이다.
이것을 하지 말아야 할것을 위주로 규율을 정할 것인가 해야 할것을 위주로 의무를 정할 것인가 고민도 해야 할 것이다. 요즘은 이 고민을 안하고 당연히 지키고 하지 말아야 할 규율을 만드는게 맞다고 보는 듯도 하다.
옆나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고 우리의 의지가 사라져 갈 때 충이라는 규율이 우리의 의지를 대신하고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왕이 나라를 대표하게 되었고 사람을 대표하게 되었으며 삶의 의미도 대표하게 되어 모든 것이 왕 중심으로 재편된다.
충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 버릇을 들일려고 가족과 인간관계도 충을 위주로 설정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나라에 정부에 기업에 위사람 상사 윗어른 나이많은 사람들 모두 충성해야 할 사람들이다.
참 간단하고 쉬운 법칙이다.
이렇게 살면 내 인생이 의미가 있다고 한다.
우리의 고대엔 유교적으로 변질된 충이 없어도 나라에 내자신에 주위에 마음을 다해 이로움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 가고 있었다.
우리가 배운것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내목숨과 의지를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옳은 판단을 하기위해 세상의, 인간의 이치를 공부했고 그것을 이루고 견지하기 위해 힘을 기르고 단련하였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내가 가야 할 그 뜻을 위해 무한한 힘을 기르고 투철한 의지와 맑은 눈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을 옆나라는 신선이나 군자라고 부르더니 이런 것을 도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변질시키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론으로 파헤치며 뭔가 아는 듯이 착각을 하는 듯하다.
우린 하지 말아야 할것보다 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한다.
내가 인생을 바치고 내 의지를 다해 이루고 힘써야 할 그것을 찾고 성취하기 위한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지 누구나 무엇에 이용당하거나 제어될 것이 아니다.
난 스스로 나이고 내가 하고싶은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일 뿐이다.
이것을 남이 무어라 하든 그것은 그들의 이해일 뿐이다.
제대로 이해했으면 나와같은 길을 갈 것이고 오해했다면 또다른 사람을 얽어메며 못살게 굴 것이다.
자기의 이해를 남에게 미치려고 하는 굴곡된 권력욕이 있으니 그렇다.
언제쯤 우리는 우리의 본래를 되찾을려나??
수도에서는 이 본래를 신성와 하늘과 하나되는 따위로 이해하는 듯하다.
이런 것도 고대에 우리가 신처럼 보이고 하늘을 넘나드는 것을 부러워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신과 하늘의 의미를 모르니 언제까지나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것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 사람들은 항상 의미를 오해하는가?
하늘을 보고 신을 우러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세움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해하기가 어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