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과 자천행을 항상 같이 하는 것이다. 자천하는 것은 누구나 다하고 있다. 생의 시작부터 쭉하는 것이니 그렇다. 하지만 자천행은 깨우친 사람이, 즉 계제가 어느정도 된사람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그런 단계에서 온전히 하게 된다는 것이지 그때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도는 자기로 부터이다. 이러하니 항상 자신을 득도한 사람처럼 행하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몸으로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자천을 시작하는 것이다.
깨우친 이후로 계제가 높아진 이후로 미루면서 자포자기하듯 하는 것은 곤란하다.
천중에는 모든 이론과 세계와 가치들이 날 중심으로 설립하는 것부터이다.
그래서 이미 우린 모두 도안에 있고 도로써 있다.
이는 자천과 저천행을 이미 하고 또 해야 한다.
이것도 자천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난! 나로서 존중받고 싶고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 즐겁고 능동적인 감정과 행동이 나오는 것을 하고 싶다.
이렇게 살고 이렇게 공부하고 이렇게 직장을 다니고 싶다. 이런것이 공부이고 이런것이 자천이 아니겠나?
일상의 순간순간이나 노래하기 전이나 그림 그리기, 걷기나 운동하기 전이나 어떤 것이든 하기전에 내 온몸을 관조하고 심호흡하면서 자천이 된다고 믿으면 된다. 이렇게 자신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무한한 힘을 느끼면서 자천이 될거라고 마음을 열면 된다. 이렇게 하면 어떤 일상이든 공부든 자천이 된다.
계제가 문제가 되는가? 참 우습다. 계제라는건 그렇게 딱딱한 것도 금지된 것도 틀에 얽메일 것도 아닌데 무엇이 그렇게 걱정이고 지나친 심리적 경직을 느끼는가?
노래로 계제를 못 올린다면 그림 그리면서, 말하고, 달리고, 일상을 살면서 못한다면 그게 어떻게 계제라는 것인가?
발상의 협소함과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막는 그런 생각을 왜 하는지 참 모르겠다.
도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가 그렇게 대단한 무언가로 보이는가 그럴듯한 환상과 권력과 관례처럼 격식과 형식이 있어야 하는가?
쯧쯧.. 사고의 얼어붇은 그런 경직과 한계속에서 사는 것이 힘들지 않은가?
자천 별거 아니다.
자천하면서 뭘해야 하는지 고민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숨쉬고 밥먹고 이 글을 읽고 뭔가 하겠다고 고민하는 그것이 이미 자천이다.
냉철한 판단, 이걸 안 가르친다.
이건 공자도 가르치고 소크라테스나 도덕경이나 불경이나 오직 이거만 가르치고 있는데 진짜 볼썽 사납단 말이야 자기를 판단하지도 못하니 이걸 우째야 하는건지..뭘 한 건지 얼마나 한건지 이걸 모르면 더 이상 할 수 있는게 없어 알아? 없다고.. 나? 나야 아무렴 어때?
난 사춘기 때부터 도에 뜻을 두었지만 오르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지 이미 처음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이지 내가 얼마나 대단한가는 아니거든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높은 도가 필요한거지 도가 높아지려는 생각이 먼저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