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 자연적인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
중요한 질문이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대답은, 인간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는 것이다
그냥 나이를 먹고, 노년에서 죽음으로 바뀌는 데에 어떤 질병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은 단지 노년의 극치이다.
몸과 두뇌 속의 모든 것이 기능을 그친다. 이것이 자연적인 죽음의 일반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 자연적인 죽음은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닌다. 자연적인 죽음에 도달하려면 자연스런 삶을 살아야 한다.
자연적인 죽음은 금지 없이, 억압 없이, 자연스럽게 산 삶의 절정이다.
동물들이 살고, 새들이 살고 나무들이 사는 방식이다. 아무 분열 없이‥‥‥
마치 그대가 부재해서 삶이 저절로 움직이듯이 그대 쪽에서 차단하지 않고 그대를 통해 자연이 흐르도록 하는
내려놓음의 삶. 그대가 삶을 살기보다는 삶이 그대를 사는 것. 그대는 두번째다.
그럴 때 그 절정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될 것이다. 내 정의에 따르면 오로지 각성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엔 모든 삶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모든 죽음도 부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면서 어떻게 자연스런 죽음에 도달하겠는가?
죽음은 생애의 클라이막스를 반영할 것이다 응축된 형태 속에 그대가 살아온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따라서 극소수의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죽는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건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조건들은 맨 처음부터 우리가 자연 이상이어야 한다고,
그저 자연적인 것은 동물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초자연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아주 논리적인 듯이 보인다.
모든 종교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연을 넘어서는 걸 의미한다고 가르쳐 왔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을 넘어서는 이성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아무도 자연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자연성을, 자연발생적인 아름다움을, 자신의 순수성을 파괴하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인간은 자연을 초월할 필요가 없다. 그대에게 말하노니, 인간은 자연을 충만하게 해야 한다. 어떤 동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이다.
종교는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했다. 그들은 동물들은 자연적이며 그대들은 초자연적이어야 한다고 구분을 지었다.
어떤 동물도 단식을 하지 않는다. 어떤 동물에게도 단식이 성스러운 것이라고 속일 수 없다.
동물들이 아는 것은 배고픔밖에 없고, 그들에겐 단식과 배고픔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동물에게 자연을 거스르도록 설득할 수는 없다.
인간에겐 적어도 자연에 대항하여 싸울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소위 종교인들에게 호기를 제공했다.
인간은 결코 승리하지는 못할 테지만 싸울 수는 있다.
싸움 속에서 그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모든 기쁨과 자신의 모든 사랑,
자신의 모든 위엄을 파괴했고, 동물보다 높은 것이 된 게 아니라 낮은 것이 되었다.
그대는 어떤 야생 동물도 호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 말만 들어도 세상의 동물들이 전부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한마디로 바보 같은 얘기다.
그러나 암놈이 허용되지 않는 동물원에서는 동물들이 절대적인 필요에 의해 호모섹스로 전환한다.
그러나 인간은 온 세상을 동물원으로 바꾸었다.
수백만, 수억의 사람들이 호모이고 레스비언이고 소도미스트(sodomist, 獸姦者)이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그대에게 자연을 초월하라고 초자연적 신성에 이르라고 가르쳤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뭐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면 결과가 좋지 않은 법이다.
여러 종교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을 자연을 초월한 존새로 만들려고 애써 왔다.
결과는 예외 없이 실패였다. 그대는 자연적 존재로 태어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발을 당겨 자신을 땅바닥에서 들어 올리려는 짓과 같다.
잠깐 튀어오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방 땅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어쩌면 골절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날 수 없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해 오던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넘어서려고, 자신을 자연 위로 끌어올리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자연과 나뉘어지지 않았건만 그런 생각은 그들의 에고와 들어맞았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므로 자연을 넘어서야 한다. 인간은 동물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동물들을 동물같이 행동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동물들이 자연을 약간 넘어서도록 만들려고 애써 왔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개하고 산책을 할 때 개들에게 옷을 입혔다.
개들이 자연쩍이 되지 못하게, 벌거벗어 알몸이 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이 개들에게 어울리는 데도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개를 동물들보다 조금 더 높게 끌어올리려고 애쓰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는 걸상 다리도 천으로 감췄다는 걸 알면 놀랄 것이다.
단지 그것이 '다리'이며 다리는 감춰야 한다는 이유로....
거의 백 년이라는 긴 생애를 살았던 버틀런트 러셀은 자신이 어렸을 때에는 여자의 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적인 흥분을 일으켰다고 회상하고 있다.
당시에는 드레스가 발을 덮도록 되어 있어서 보통 때에는 발을 볼 수가 없었다.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왕족의 여자들은 다리가 하나라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왕족은 평범한 일반 시민과는 무언가 달라야 했고, 그들의 다리가 두 개로 갈라졌는지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에고는‥‥‥ 왕족들은 "그건 말도 안 된다. 우리는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다." 하고 털어놓지 않았다.
에고가 그들을 막았다. 사람들이 높이 받들어 모시는데 뭐가 걱정이랴. 그냥 왕족으로 남자.
왕족들이 평민과 왕족 간의 혼례를 허용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평민은 모든 사실을 폭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진배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왕족의 위엄 같은 것은 없다. "
그러나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런 관념을 유지해 왔다.
나도 그대들이 동물과 다르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그대가 자연을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대는 자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동물들보다 더 자연적이 될 수 있다.
동물들은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깊은 혼수 상태에 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해 오던 짓 이상을 하지 못한다.
그대는 어떤 동물보다도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그대는 자연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자연의 높이와 똑같이 올라갈 수 있지만, 어떻게 해도 그것을 초월할 수는 없다.
그대는 더욱 자연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더욱 다차원적으로 자연적이 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종교적인 사람이란, 자연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연스럽고 넘치도록 자연스러우며
모든 차원으로 본성이 개발되어서 더 개발될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동물들은 갇혀 있다. 그들의 존재에는 일정하게 제한된 테두리가 있다.
인간에겐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지성과 자유가 있다.
자연을 전체적으로 탐험하고 나면 그대는 집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자연이 그대의 집이다. 그렇게 되면 죽음은 기쁨이고 축제다. 그러면 그대는 아무 불만 없이 죽는다.
그대는 깊은 감사를 가지고 죽는다.
왜냐하면 삶은 그대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주었고, 죽음은 단순히 그대가 살아온 모든 것의 최고점인 까닭이다.
그것은 촛불이 꺼지기 전에 가장 밝게 빛나는 이치와 같다. 자연스런 인간은 죽기 전에 잠시나마 가장 눈부시게 산다.
그 사람 전체가 빛이고 진리 자체이다. 나에겐 이것이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취해야 하는 것이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주어졌지만 그대가 개척해야 하고 성취해야 하며, 그대 스스로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참된 인간의 죽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죽어 갈 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돌연 야릇한 기쁨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대의 눈물은 슬픔이나 아픔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와 지복의 눈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충만된 인생을 살아온 인간이 자연스럽게 죽을 때에는 자신의 존재를 자연 전체에다 흩뿌리기 때문이다.
그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에 흠뻑 젖는다‥‥‥
돌연한 신선함, 미풍, 새로운 향기, 그리고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 하고 얻어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새로운 느낌이 온다.
나는 그대들에게 삶의 예술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죽음의 예술로 불려야 할 것이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