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당신의 대담한 실험에 과학적인 조사를 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특정한 정신적 질병에 유용한 특별한 명상 방편이 있습니까?
말릭 박사(Doctor Malik).
과학은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와서 보라고 과학자들을 초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그들을 환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곳에서 진짜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외형만을 볼 뿐 영혼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방법론 자체가 그것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과학자에게 ‘이 장미꽃 좀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과학자는 장미꽃을 분석한다.
그는 장미꽃을 화학 성분의 조합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는 장미꽃에 수분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색깔과 향기는 어떤 성분이고 흙과 공기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말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관점에 의해 보여지는 모든 것, 그의 방법론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방법론은 한계가 있다. 그는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밝혀 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과학적으로는 장미꽃에서 어떠한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없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가슴을 지닌 인간으로서 그는 장미꽃이 아름답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자로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장미꽃을 과학적으로 파고들면 그는 아름다움을 제외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장미꽃에 아름다움은 없다. 그것은 당신의 투영이다. 아름다움은 당신의 눈에 있는 것이지 장미꽃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꿈이고 개념이다. 당신이 그 꿈과 개념을 장미꽃에 투영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훨씬 더 과학적으로 밀고 나가면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아름다움은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지 않는다.
그에게 무엇인가 주면 그는 즉각 그것을 물질로 전락시킬 것이다.
위대함을 간직한 모든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를 간직한 모든 것, 초월의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과학자들은 언제라도 이 곳에 올 수 있다. 명상과 음악, 여러 치료 요법들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와서 관찰하라.
얼마든지 와서 보라. 그러나 그들은 겉모양밖에 보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핵심까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나와 영적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다른 명상가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다.
그들 또한 명상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다. 이것은 과학적 방법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과학적 방법론은 상황에 말려들지 않고 철저한 관찰자의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면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참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초연하고 냉정한 관찰자로 남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직접 참여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들어, 사랑이 그렇다.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두 연인이 키스하는 것을 본다면 그대는 과학적으로 뭐라고 말하겠는가?
키스는 입술을 통해 세균이 전달되는 현상이다. 과학적으로 본다면 이 밖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키스가 세균의 전달 현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키스의 아름다움, 키스의 영혼이 사라진다.
키스는 아주 추한 현상이 되어 버린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과학자의 수중에서 사랑은 화학적 현상으로 전락한다. 사랑은 호르몬의 분비 현상이 된다.
사랑은 성 호르몬의 분비선과 관련된 현상이지, 전체적 존재로서의 한 개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사랑은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의 문제다. 그것은 생물학적 관심이다.
이때 사랑은 시적인 요소를 상실하고 아주 평범한 현상으로 전락한다. 성스러움을 잃고 아주 세속적인 현상이 된다.
말릭 박사, 그대를 환영한다. 그대의 친구들 또한 환영한다.
말릭은 델리 대학의 정신과 교수다.
그대는 언제든지 여기에 올 수 있다. 이미 여기에 와 있다.
그대의 동료들을 데리고 와도 좋고, 그대가 과학적 연구, 과학적 검증이라고 부르는 모든 일을 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무엇을 알게 되든 그것은 표피에 불과할 것이라고 미리 말해 두고 싶다.
만일 진정으로 알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과학자가 아니라 시인, 연인, 명상가, 참여자로 와야 한다. 그래야만 핵심을 알 수 있다.
과학은 모든 것을 가장 낮은 단위로 끌어내린다.
과학은 모든 것을 추하게 만든다.
연꽃에 대해 물으면 과학자는 진흙 외에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연꽃은 진흙에서 나온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연꽃은 단순히 진흙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붓다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그대는 전혀 다른 시각을 접하게 될 것이다.
붓다는 진흙이 숨어 있는 연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다. 이것이 진정으로 종교적인 시각이다.
이런 시각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 모든 것을 가장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종교적인 접근 방식은 가장 높은 차원을 믿는다. 가장 낮은 요소는 그릇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과학적 접근 방식은 가장 낮은 요소를 믿는다.
과학적 방식으로 볼 때, 가장 높은 차원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칼 막스는 인간의 의식이 생물학적 조건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의식은 부산물이고 부수적인 현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은 무시해도 된다. 중요한 요소로 고려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이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칼 막스의 말에서 기인한다.
만일 의식이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대는 원하는 만큼 많은 그림자를 죽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을 죽여도 그대는 결코 아무것도 죽이는 게 아니다!
그들이 그림자고 부산물에 불과하다면 걱정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육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모든 신성이 먼지 덩어리로 전락한다.
과학은 종교로부터 배워야 한다. 거기에 과학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의 운명은 파멸로 치달을 것이다. 과학과 더불어 인간의 미래 또한 파멸할 것이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방식 또한 과학적이다.
과학적 접근방식 안에서 인간은 실종된다. 영혼이 사라지고 인간은 기계로 전락한다.
그리고 기계를 파괴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고 양심에 찔리는 일도 없다.
명상은 내적인 현상이다.
명상은 그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고요함이다. 그것은 지복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명상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다. 전적인 침묵이 있을 뿐이다.
과학적 조사에 의해서는 결코 명상을 발견할 수 없다.
만일 붓다를 관찰한다면 그대는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대는 붓다의 가장 깊은 핵심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부분에 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행동이 인간의 본질은 아니다.
현대의 정신의학은 기본적으로 행동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들은 오직 행동하는 자만을 믿는다. 행동은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을 믿지 않는다. 영혼은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다음의 세 단어 즉 psychiatry(정신의학), psychology(심리학), psychotherapy(심리 치료)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psyche'라는 단어는 영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영혼을 완전히 부정한다.
심리학자들이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방법론 자체가 조잡하기 때문에 영혼이
부정되는 것이다.
가령, 음악을 듣고자 할 때 눈을 통해 음악을 들을 수는 없다.
그런데 그대는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보아도 음악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눈에 보여야만 음악을 인정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갖고 있다면, 그대의 방법론 자체가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음악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듣는게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다.
모든 방법론이 저마다 한계를 갖고 있다.
과학적 방법론은 매우 거칠다.
과학이 물질의 세계는 잘 꿰뚫어 보면서도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이 멀어 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자가 과학자이기를 고집하는 한 영혼의 세계는 실존하지 않는다.
사랑, 시, 음악, 아름다움, 지복 등 모든 것이 비실존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크나큰 편견이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적인 동시에 음악적이 될 수 있는 과학을 원했다.
그는 통합된 과학을 원했다. 나의 염원 또한 이와 같다.
진정한 과학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질 것이다.
하나는 객관적 측면, 객관적 과학이고, 다른 측면은 주관적 측면, 주관적 과학이다.
이것이 종교와 과학이 만나는 지점이 될 것이다.
과학은 객관적 과학이고, 종교는 주관적 과학이다.
그리고 인간은 둘 다다. 인간은 내면과 외면이 만나는 곳이다.
말릭 박사, 그대는 묻는다.
당신의 대담한 실험에 과학적인 조사를 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당신의 대담한 실험에 과학적인 조사를 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나는 완벽하게 찬성한다. 그대는 언제라도 올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참여자가 될 용기가 없는 한, 나의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축제를 벌이지 않는 한
그대는 육체만을 알고 영혼을 놓칠 것이다.
그대는 관찰하는 방관자의 입장을 버리고 이 공동체에 녹아들어야 한다. 이때 그대는 내부와 외부 양쪽 모두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가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서 내부를 알게 될 것이고, 한 명의 과학자로서 외부를 알게 될 것이다.
특정한 정신적 질병에 유용한 특별한 명상 방편이 있습니까?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의 정신 의학은 질병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들은 정상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현대 심리학과 그로부터 파생된 모든 분야가 기본적으로 임상 모델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태도다.
인간의 병적인 면만을 들여다보는 것은 옳지 않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이런 점에서부터 빗나갔다.
그는 아주 소중한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핵심을 놓쳤다.
그의 관심은 비정상적인 질병 상태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질병만을 연구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아무 희망이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질병을 연구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병든 사람들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상태가 무엇인지 모르면 그들을 도울 수 없다. 기껏해야 그들을 사회에 적응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회 자체가 병들었다.
이것이 현대의 정신의학, 정신분석, 심리치료 요법이 계속 하고 있는 일이다.
누군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때마다 정신의학은 그를 사회에 다시 적응시키려고 한다.
사회에 적응하는 것만이 정상적인 상태로 여겨진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 자체가 비정상이라면 그런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실제로, 현대에 이르러 심리학에 대해 커다란 의심이 일어나고 있다.
랭(영국의 정신과 의사, 반(反)정신의학의 제창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 전반에 걸쳐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이 사회 자체가 비정상적이다. 그런데 그대는 사람들을 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 비정상적인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다.
그대는 이 사회, 기존 체제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대가 약물, 전기 충격, 정신 분석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상적인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너무나 정상적이기 때문에 이 비정상적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붓다를 생각해 보라.
붓다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다. 붓다들은 언제나 혁명적이었다.
그들은 사회에 순종할 수 없다. 그들은 사회를 따를 수 없다. 사회 자체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커다란 저주 아래 유지되고 있다. 이 저주는 성직자와 정치가들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사회는 그들의 공모 아래 유지되고 있다.
사회는 사람들이 건강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건강한 사람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사람들이 지성적으로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성적인 사람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교육제도는 사람들이 지성적으로 되는 것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존재한다.
교육 제도는 모든 사람을 평범한 인간, 어리석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존재한다.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25년 동안 세뇌시키면 누구든지 어리석은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 모든 사람을 별볼일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
교육 제도는 사람들에게 배운 것을 재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지성의 기준이다.
이것은 앵무새와 같은 기억 장치의 기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을 지성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지성이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지성은 반복 재생산과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지성은 반복을 거부한다.
지성적인 사람은 언제나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기 고유의 삶을 원한다. 그는 이미 정해진 형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지성은 언제나 독창적이다.
그런데 대학은 독창적인 사람들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창적인 사람들을 제거한다.
대학의 모든 노력은 독창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독창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사회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쉽게 조종되지 않을 것이고, 서기관, 공무원, 역무원, 학교선생 등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쉽사리 유능한 기계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정해진 형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통찰에 의해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거지가 될지언정 음악가로 살기를 고집할 것이다.
설령 국무총리가 될 기회가 주어져도 그는 차라리 거지가 되어 음악을 계속 연주하는 삶을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지성이다.
그대 자신의 통찰과 빛, 그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살아야만 그대는 행복해진다. 그래야만 만족을 얻는다.
국무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 지성도 필요없다.
사실, 지성적인 사람은 절대로 국무총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성적인 사람이 왜 정치판에 끼여들겠는가? 왜 그가 그렇게 추악한 게임에 말려들겠는가?
그는 시인이나 화가, 무용수가 되기를 바랄지언정 정치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야만적이고 폭력을 즐기는 사람들만이 남을 지배하려 든다. 지성적인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대학은 지성을 파괴한다. 세상의 교육 제도는 지성을 파괴한다.
그들은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 그리고 사회는 비정상적이다. 아주 비정상적이다.
3천 년 동안 5천 번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사회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사회를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류는 언제나 남을 죽이거나 자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무슨 사회가 이런가?
그런데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은 사람들을 사회에 적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근거로 심리학자들은 예수가 비정상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가 정신병자였다고 말한다. 예수는 정신 병자였다!
그리고 예수를 죽인 랍비들은 정상이었다. 예수는 정신 병자고 빌라도는 정상이었다.
예수가 정신 병자라면 붓다도 정신 병자다.
마하비라, 피타고라스, 파탄잘리, 노자, 짜라투스트라 등 모두가 정신 병자다. 소크라테스도 정신병자다.
그리고 그를 독살하기로 결정한 어리석은 재판관들은 정상이다.
말릭 박사, 지구 전체가 정신 병원이다.
말릭 박사는 델리에 산다. 그는 델리가 온갖 종류의 정신 병자들을 끌어당기는 도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병든 사람인가?
건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어떻게 질병을 정의할 수 있는가?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빗나갔다. 그는 병든 사람들만 연구했기 때문이다.
병든 사람을 연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병은 항상 표피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건강이란 중심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강은 그대 내면의 중심에서 솟아난다. 질병은 표피적인 현상에 불과하지만 건강은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붓다를 연구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는 붓다에게서 아무 증상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가서 ‘건강의 정의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 보라.
그대는 놀랄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의사는 아무도 없다.
기껏해야 그들은 ‘병들지 않은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무슨 정의가 이런 식인가? 병들지 않은 사람이 건강하다고?
건강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그들은 건강을 부정적으로 정의한다.
그들은 질병을 정의할 수 있다. 암이 무엇이고 결핵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다.
온갖 질병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건강은 정의되지 않는 채 남는다.
건강은 결코 연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심리학이 전체적이고 통합된 사람들에게 근거를 두지 않는 한, 깨달은 사람들, 주의 깊게 깨어 있으며 모든 종류의 동일시를 초월한 사람들, 순수한 의식이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연구하지 않는한 심리학은...
그러나 이때 심리학은 그 방법론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생물학, 물리학, 화학, 자연과학을 흉내내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이때 심리학은 문학, 시, 음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계속해서 과학의 길을 따르기보다는 예술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
프로이트가 기본적으로 의사였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심리학을 만든 그의 개념은 의학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그는 병든 사람들을 연구했으며,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 전체가 질병에 기초하고 있다.
그대가 병든 사람을 치료하면 오직 병든 사람들만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대가 인간에 관해 알게 되는 모든 것은 병든 사람들을 통해 얻은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된다.
프로이트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틀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병든 사람에 대한 것이지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인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가령, 그대가 눈먼 사람들만을 연구하고 ‘인간에게는 눈이 없다.‘고 결론짓는다고 하자.
이것이 제대로 된 이해인가?
이것은 인간에 관해서는 진실이 아니다. 오직 눈먼 사람들에 대해서만 진실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병든 사람들만 대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인간을 정의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그들의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다.
먼저 그들은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 둘 다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심리학은 붓다들에 관한 심리학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심리학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기울이는 나의 노력은 정신과 의사나 심리 요법가의 노력과 다르다.
나는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은 그대 안에 있는 건강의 근원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나는 그대를 치료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사는 그대를 자유롭게하는 것이다.
그대는 묻는다.
특정한 정신적 질병에 유용한 특별한 명상 방편이 있습니까?
특정한 정신적 질병에 유용한 특별한 명상 방편이 있습니까?
아니다.
이 말은 명상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도움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의 일치다.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이곳에서 내가 하는 기본적인 일은 붓다를 창조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이곳에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는다.
물론 몇몇 사람들이 와서 도움을 받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이 곳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다. 이 곳은 영적인 공동체다.
물론, 이 곳에서는 테라피가 행해진다. 그러나 이 테라피들은 특별히 병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의 시각에 의하면 인류 전체가 병들고 비정상적인 상태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행해지는 테라피는 특정한 종류의 질병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소위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정상이 되도록 도울 뿐이다.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병든 사람들에 의해 양육된다.
부모와 선생 등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그들을 교육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의 질병은 아이들에게까지 옮겨 간다.
그대 자신에게 어떤 일이 행해졌는지 깨닫고 그 모든 세뇌화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정상이 될 수 없다.
여기에서는 60종류의 테라피가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단지 보통 사람들을 돕기 위함이다.
소위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사실은 그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정상인이 되는 첫 단계다.
‘나는 정상이 아니다.’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때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대 안에 커다란 자각이 일어난다. 무엇인가 시급하게 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난다.
우리는 사람들이 힌두교인, 기독교인, 모하메드교인, 공산주의자라는 세뇌 작용을 떨쳐 버리도록 돕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든 세뇌 작용을 떨쳐 버리도록 돕는다.
왜냐하면 세뇌되지 않은 인간만이 진정한 자연인이고 정상인이기 때문이다. 세뇌작용은 인간을 왜곡시킨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관심사는 특별히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의 일은 소위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때로는 병든 사람들이 와서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외곽에서 일어나는 부수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명상이 특별한 질병에 도움을 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 모든 명상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준다. 모든 명상법은 기본적으로 내면의 침묵이라는 똑같은 지점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방법론은 능동적일 수도 있고 수동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향하는 목표는 동일하다. 수피의 방편일 수도 있고 선의 방편일 수도 있지만 목표는 똑같다.
어떻게 하면 그대를 침묵하게 해서 모든 사념이 사라지고 여여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로 만드느냐, 이것이
모든 방편의 목적이다.
나의 정의에 의하면 신은 ‘여여한 실상(that which is)'이다.
이 여여한 실상을 보기 시작하면 그대는 그 실상과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다. 이때 건강이 솟아난다.
그대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이 우주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말릭 박사, 만일 그대와 친구들이 이곳에 온다면 어떤 명상법이 어떤 질병에 도움이 되는지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엄청난 혜택을 줄 것이다.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은 병든 사람들을 돕는다.
그러나 종교는 이미 건강하면서도 건강의 최고 정점을 알고 싶은 사람, 건강의 최고 봉우리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아브라함 마슬로우는 이것을 ‘정상 체험(peak experience)'이라고 불렀다.
그 정상 체험은 모든 사람의 타고난 권리다.
만일 그 정상 체험이 없다면 그대는 무엇인가 매우 소중한 것을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아브라함 마슬로우와 인성 심리학보다 한발 앞서간다. 종교는 정상 체험을 얻는 문제만이 아니다.
정상 체험은 오고가는 것이다. 그 정상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깊은 성적 오르가즘에 도달했을 때 그대는 정상에 서 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순간 이미 그대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정상에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머물만한 공간이 없다.
모든 정상 체험은 시지푸스 신화다.
시지푸스는 바위를 언덕 꼭대기까지 굴리고 올라간다. 그러나 정상은 협소하고 바위는 너무 크다.
시지푸스는 신을 거역한 죄로 처벌받았다. 그는 바위를 정상까지 굴리고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정상에 도달하는 순간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관련된 이야기다. 정상에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기나긴 여행을 한다. 그리고 일단 도달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정상에 도달했음을 아는 순간 이미 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정상에는 머물 공간이 없다.
종교는 정상 체험을 얻도록 돕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초보자를 위한 단계다.
종교는 오직 아름다운 체험을 얻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오르가즘 의식을 얻도록 돕는다.
종교가 목표로 삼는 것은 정상 체험도 아니고 오르가즘의 체험도 아니다. 하루 이십사 시간 내내 엑스터시 상태로 머무는
오르가즘 의식이 그 목표다.
이때 그대의 삶 전체가 순간마다 축제가 된다.
여기에서 내가 기울이는 노력은 종교적인 일이다.
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정상 체험을 앎으로써 그 정상에 영원히 머물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정상에 영원히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대는 다른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즉 어떻게 하면 오르가즘 의식을 창조하느냐 하는 것이다.
정상은 하나의 체험이고, 체험은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오르가즘 의식은 그대의 존재 자체를 변형시킨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이며 부활이다.
정상 체험을 얻는 것은 병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그것이 나의 관심사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도움을 주기는 한다.
그러므로 말릭 박사, 그대의 의도는 완벽하게 옳다.
그대와 그대의 친구들을 환영한다. 여기에 와서 과학적으로 연구하라.
그리고 직접 참여해서 연구하라. 어떤 명상이 어떤 병에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라.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분명 그런 일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 나의 목적은 전혀 다른데 있다.
나의 목적과는 다른 많은 일들이 부수적인 현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외곽에서 일어나는 그런 부수적인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 관심은 전혀 그릇되지 않다.
여기에서 진행되는 실험이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하다.
-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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