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道可道, 非常道,
도道는 (귀·코·손·눈이 일부러 일삼아 또렷하게) 가리키거나 (뚜렷하게)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한 도道는 소리·냄새·모양·모습이 저절로 그러하게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바가) 늘 그러한 (태극太極으로서의) 도道가 아니며,
道者, 易所謂太極是也. 無聲臭, 無方體. 若指名以爲道, 則非經常悠久之道也.
“도道”는 『역경易經』이 일컫는 태극太極 그것이다. (그런데 태극太極은 사람의 귀로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나 (코로 뚜렷하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가지는 바가 없으며, (손으로 또렷하게 만질 수 있는) 모양(方; 形象)이나 (눈으로 뚜렷하게 살필 수 있는) 모습(體; 狀態)을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만약 (귀·코·손·눈이 일부러 일삼아) 가리키는 바나 이름 지어 부르는 바(名; 聲·臭·方·體)로써 “도道”를 삼으면, (그렇게 한 “도道”는 소리·냄새·모양·모습이 저절로 그러하게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바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고, “늘 그러하며”, 오래 가고, 오래 보이는 (태극太極으로서의) “도道”가 “아닌” 것이다.
名可名, 非常名.
음陰·양陽은 (음陰·양陽으로)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한 음陰·양陽은 저절로 그러하게 바뀌거나 본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달라지는 기氣로서의) 음陰·양陽이 아니다.
名者, 易所謂陰陽是也. 氣化已形. 然後動而闢者, 名之爲陽. 靜而闔者, 名之爲陰. 其名乃立. 然陰陽, 又名之始. 故其體物不遺. 與太極, 同其功用. 若執一以爲名, 則非經常悠久之名也.
“명名”은 『역경易經』이 일컫는 음陰·양陽(의 기氣) 그것이다. (그런데 음陰·양陽의) 기氣는 (저절로 그러하게)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化; 狀態)일 따름이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바뀌는 자연의) 모양(形; 形象)일 따름이다. (따라서 예컨대 걸음을) 걷는 모습이나 (문을) 여는 모양이 있고 난 이후, 그것을 (양陽으로) “이름 지어 부르며”, 양陽으로 일삼는다. (걸음을) 멈추는 모습이나 (문을) 닫는 모양이 있고 난 이후, 그것을 (음陰으로) “이름 지어 부르며”, 음陰으로 일삼는다. 그 (음陰·양陽의) “이름”은 그렇게 세워진다. 따라서 (“이름”이 세워진 이후의) 음陰·양陽은 이른바 “(저절로 그러하게 바뀌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달라지는 자연에 대해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의 시작점이 된다. 따라서 (“이름”이 세워지기 이전의 음陰·양陽은) 그 (저절로 그러하게 바뀌는 자연의) 본체(本體·體; 自然·道)와 (그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달라지는 자연의) 공능(功能·物; 無爲·德)이 떠나가지 않는다. (“이름”이 세워지기 이전의 음陰·양陽은 그 저절로 그러하게 바뀌는 자연의 본체로서의) 태극(太極; 道·自然)과 더불어 하며, 그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달라지는 자연의) 공능(功能·功用; 德·無爲)(으로서의 태극太極)과 더불어 한다. 따라서 (귀·코·손·눈이 일부러 일삼아) 붙잡은 (“이름”의) 하나인 “음陰·양陽”은 이른바 (저절로 그러하게 바뀌는 자연의 본체이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달라지는 자연의 공능功能인 태극太極이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고, “늘 그러하며”, 오래 가고, 오래 보이는 (기氣로서의) “음陰·양陽”이 “아닌” 것이다.
無名天地之始,
(도道가 지어 부를) 이름을 가지는 바가 없는 것은 (그것이)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며,
無名, 卽無極也. 天地方生之始, 已有無極. 混兮! 窈兮! 本無其名. 故天地旣生之後, 太極雖具, 亦象無極, 不可以名之也.
“(지어 부를) 이름을 가지는 바가 없다無名”는 말은 이른바 (귀·코·손·눈이 또렷하게 가리키거나 뚜렷하게 붙잡을 수 있는) 끝점(極; 聲·臭·方·體)을 가지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이 이른바 생겨나는 “시작점”은 이른바 (그) 끝점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가진다. (따라서) 어렴풋하다! 어슴푸레하다! 따라서 그 (지어 부를) “이름”을 가지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이른바 생겨난 다음, 태극太極이 이른바 갖추어지게 되지만, (태극太極은) 또한 (그 모습이나) 모양이 (그) 끝점을 가지는 바가 없는데, (따라서 생겨난 다음의 “하늘과 땅”) 그것을 (또한)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것이다.
有名萬物之母.
(음陰·양陽이 지어 부른) 이름을 가지는 바가 있는 것은 (그것이) 만물의 어미이기 때문이다.
陰陽化, 生五行. 錯綜, 爲萬物. 則陰陽, 乃萬物之母也.
음陰·양陽은 (바뀌고) 달라지게 되면, 오행五行이 생겨나게 된다. (오행五行이) 섞이고 모이게 되면, “만물”이 일삼아지게 된다. 따라서 음陰·양陽이 이른바 “만물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故常無欲以觀其妙,
따라서 (그 마음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대로)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해야 하는데, 따라서 그 (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어렴풋한 바를 (참되게) 살피게 되며,
此句及下句, 令人就一心, 體認道體之眞也. 言居常無事之時, 試使一心虛靜無欲. 則此正陰陽初生, 太極初乘之時, 無限妙理, 化化生生. 盖觀于此, 知吾言之不誣也.
이 문장과 다음 문장은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가 참된 도道의 본체를 본래대로) 한결같이 일삼는 마음을 취하게 하는 문장이자,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바無爲가) 참된 도道의 본체를 (본래대로 한결같이) 느끼게 하고 알아차리게 하는 문장이다. (“상무욕常無欲”은) 이른바 (마음이)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때에 자리하게 하라는 말로서,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빈 바와 조용한 바를 (본래대로) 한결같이 맛보게 하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음을 (본래대로) 한결같이 일삼게 하라는 뜻이다. (“관기묘觀其妙”는)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음陰·양陽이 처음에 (자신을) 낳고, 태극太極이 처음에 (자신을) 올라타던 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한” 이치(理; 性·命·自然·無爲·道·德)가 (그) 끝점을 다한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이, (저절로 그러하게) 바뀌고 (달라지며, 달라지고) 바뀌며, (만물을) 낳고 (만물을) 생겨나게 하던 때를 참되게 일삼게 된다는 뜻이다. 이른바, 이것을 살피건대, 노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리게 된다.
常有欲以觀其徼.
(그 마음이)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면, 따라서 그 (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시작되는 경계를 (참되게) 살피게 된다.
欲, 凡情意, 皆是也. 徼, 舊註, 讀作竅. 而朱子以爲當作邊徼之徼. 徼, 境也, 終也. 若一心不虛不靜, 情欲紛然萌芽. 則此正陰陽已生五行之時. 故氣機爲生, 太極爲客. 推盪汨撓. 漸失其本然之體. 而末流境界. 爲善惡, 爲禍福, 爲吉凶, 爲存亡. 盖觀于此, 又知吾言之不誣也.
“욕欲”은 이른바 마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뜻, 이른바 그것이다. “요徼”에 대해 옛 주註는 ‘규(竅; 구멍)’로 읽고 썼다. 그리고 주자朱子는 이른바 ‘변(邊; 가장자리)’과 ‘요(徼; 끄트머리)’로 “요徼”를 (읽고) 썼다. (내가 보기에) “요徼”는 (마음에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시작되는 경계이자, (마음에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끝나는 경계이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해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한결같던 마음(一心; 太極)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텅 비어 있지 못하고, 조용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에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 意)가 얽히고설키게 되며, 싹트고 움트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음陰·양陽이 이른바 오행五行을 낳은 때를 참되게 일삼게 된다. 따라서 (그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기운(氣; 欲)의 모양·모습(機; 意)이 (마음에서) 생겨남을 일삼게 되고,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주인이었던) 태극(太極; 道·德·性·命)이 (마음의) 손님으로 일삼아지게 된다. (따라서 그 기운의 모양·모습이 마음을) 잡아 올리고, 잡아 흔들며, 잡아 누르고, 잡아 굽히게 된다. (따라서 마음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본체(體; 自然·無爲·性·命)를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의) 경계로 흘러가게 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선善을 일삼기도 하고, 악惡을 일삼기도 하며, 화禍를 일삼기도 하고, 복福을 일삼기도 하며, 길한 바를 일삼기도 하고, 흉한 바를 일삼기도 하며,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 대로 오래) 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채 일찍) 죽기도 한다. 이른바, 이것을 살피건대, 또한 노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리게 된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태극太極과 음陰·양陽) 이 두 가지는 생겨난 데를 같이하지만, (그 지어 불린) 이름이 다르다. (그) 같이하는 (생겨난) 데, 그것을 일컬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어렴풋한 바라 한다.
兩, 謂道與名也. 太極陰陽生, 則俱生. 是, 其出之同也. 一, 則無名. 一, 則有名. 是, 其名之異也. 太極, 固冲漠靚深. 而陰陽之初, 亦冲漠靚深. 故又曰, 同謂之玄.
“두 가지兩”는 이른바 “도(道; 太極)”와 “명(名; 陰·陽)”이다. 태극太極과 음陰·양陽의 생겨남은 이른바 (그) 생겨나는 데(生; 無極·自然·無爲)를 더불어 한다. 이것이 그 “생겨난 데가 같다”는 말의 뜻이다. 하나(一; 太極)는 이른바 (지어 부를) “이름을 가지는 바가 없다.” 하나(一; 陰·陽)는 이른바 (지어 부른) “이름을 가지는 바가 있다.” 이것이 그 “이름”이 “다르다”는 말의 뜻이다. 태극太極은 (본래대로) 한결같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텅 비어 있고, 조용하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해) 맑고, 깊다. 그리고 음陰·양陽의 처음(初; 오행五行을 낳기 이전) 또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텅 비어 있고, 조용하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해) 맑고, 깊다. 따라서 또한 일컬었다. “(그) 같이하는 (생겨난) 데, 그것을 일컬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한 바(玄; 無爲·自然·無極)라 한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태극太極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어렴풋하다. 가장 어렴풋하다. (따라서) 모든 어렴풋한 바가 (그것을) 말미암아 생겨난다.
雖同謂之玄. 而太極, 乃其玄中之玄. 其玄尤玄. 故衆妙, 由此而出也. 門者, 物之所從出也.
이른바, “(그) 같이하는 (생겨난) 데, 그것을 일컬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한 바라 한다.” 그런데 태극太極은 이른바 그 “어렴풋한 바” 가운데에서도 “그것은 어렴풋하다.” 그 “어렴풋한 바” 가운데에서도 가장 “어렴풋하다.” 따라서 “모든 (그) 어렴풋한 바(妙; 玄)”가 그것을 말미암아 “생겨난다.” “문門이다”는 말은 (그) 모든 (“어렴풋한”) 것이 말미암아(從; 由) 생겨나는 바이다는 뜻이다.
右第一章. 凡一章, 爲一節. 而象太極之一. 老子, 見大易. 專言陰陽, 不言五行. 遂以爲太極具於陰靜之中者, 乃天地始生之本然. 而道於是乎! 在也!
여기까지가 제1장에 대한 풀이다. (덧붙여, 첫째) 이른바 제1장은 하나의 주제를 일삼는다. 이른바, 그 하나의 주제는 태극(太極; 道·德·無爲·自然)의 (변화) 모양·모습이다. (이른바) 노자는 (자연의 변화 모양·모습을 설명한) 『역경易經』을 자세하게 살폈다. (그런데) 음陰·양陽에 대해 자세하게 일컬었지만, 오행五行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일컫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無極) 태극(太極; 道)이 갖추어지는 바를 일삼음으로써, 이른바 (오행五行을 낳기 이전인 처음의 양陽과) 음陰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조용한 바 가운데 다다른 사람은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하늘과 땅이 시작되게 하고 생겨나게 한 본래의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모양·모습(本; 性·命) 대로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도(道; 太極)는 이른바 (저절로) 그러한 바(是; 無爲·自然)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과 더불어) 자리하는 바(在; 性·命)이기 때문이다!
故修身理性, 化民治國, 皆是道之推焉. 而以無制有, 以虛制實, 以靜制動, 以柔弱制强剛. 雖如仁義, 亦以五行所稟, 不屑爲也.
따라서 (『도덕경道德經』에서 자신의) 몸(身; 心·命)을 닦고, 성性을 지키며, 백성과 (더불어) 어우러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모두 그 도(道; 太極·無爲·自然)가 받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바無爲로써,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바有爲를 다스렸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빈 바로써,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가득 찬 바를 다스렸으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조용한 바로써,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시끄러운 바를 다스렸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해) 부드럽고 연한 바로써,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굳세고 단단한 바를 다스렸던 것이다. 요컨대, 예컨대, 인仁·의義는 (노자가 보기에) 이른바 (마음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얽키고 설킨 모양·모습이자, 음陰·양陽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싹트고 움튼 모양·모습으로서의) 오행五行을 품은 바였는데, (따라서 노자는 그것을) 자세하게 일컫지 않았던 것이다.
其, 爲此書, 自以其言, 侔擬造化, 且凡分章作節, 皆以易數立象. 孔子曰, 知者見之, 謂之知, 又曰, 知者過之, 指老子也. 然其於易理, 則看得深切. 故邵子曰, 老子, 得易之體. 朱子曰, 老子, 見得此箇道理. 又曰, 至妙之理, 有生生之意, 程子所取老氏之說者也. 其, 許與老子, 亦已多矣.
(둘째) 노자는 이 책을 쓸 때 자신의 말이 지어내는 바(造; 의미의 모양)를 꾀하고, 어우러지는 바(化; 의미의 모습)를 본뜨는 것부터, 이른바 장章(의 모양)을 나누고, 주제(의 모습)를 가르는 것까지, 모두 『역경易經』(의 내용)으로써 모두 (자신의) 모양·모습을 세웠다. 공자는 일컬었다. “(자연의 변화 모양·모습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역경易經』) 그것을 살피는 사람이며, (『역경易經』을 살핀 사람) 그를 일컬어 (자연의 변화 모양·모습을) 알아차린 사람이라 한다.” 또한, 일컬었다. “알아차린 사람은 (자신이 알아차린 바)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손꼽아 보건대, (그러한 사람은) 노자이다. 이렇듯, 노자는 『역경易經』의 이치(理; 自然·無爲)에 대해, 이른바 살핀 바와 얻은 바가 깊고 컸었다. 따라서 소옹邵雍은 일컬었다. “노자는 (저절로 그러하게 바뀌는 자연에 따라 사람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달라져야 한다는) 『역경易經』의 본체(體; 自然·無爲)를 얻었다.” 주자朱子는 일컬었다. “노자는 (자연이 저절로 그러하게 양陽하고 음陰한다는 『역경易經』의) 그 도(道; 自然)를 살펴서, (사람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자리하고 일삼아야 한다는 자신의) 그 이치(理; 無爲)를 얻었다.” 또한, 일컬었다. “(예컨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지극하게 어렴풋한 바가 (자연의) 이치이다(는 주장),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자연의) 뜻이다(는 주장), 정자程子·顥가 취한 노자의 주장들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노자(의 주장)에 대해 인정한 사례가 또한 많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