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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만주여!

북만주에서 온 편지 (김장춘)

작성자홍화평|작성시간20.07.02|조회수194 목록 댓글 2

오피니언-3]

김좌진의 후손이라 자처해 온 사람들은 선조묘 파묘를 준비하라!

  

길림성 왕청현에서 김장춘씨가 한국의 전재진에게 보낸 이메일 편지


 온갖 고난과 역경을 피신과 은둔생활로 저항해 온 김장춘 일가의 파란만장했던 시기는 바로 장군이 순국하신 19301월 그날부터 중국의 토지개혁과 문화혁명기였다. 인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빈농空农을 주축으로 한 토지개혁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로 중국인이 봉건착취제도의 뿌리를 철저히 뽑은 중대한 사회개혁으로 중국 민주혁명의 기본적인 임무였다. 중국공산당은 민주혁명기간, 철두철미한 토지개혁 강령을 제시하였고, 해방구역의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신중국 건립 전, 전 국토 면적의 약 3분의 1에 달하는 둥베이東北, 허베이華北 등의 중국공산당 혁명기지는 이미 기본적으로 농토개혁을 완성하였고, 봉건착취제도를 소멸시켰다. 신중국 건립 이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의 규정에 따라 국가는 체계적으로 봉건봉건토지소유제를 농민토지소유제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1947년 말부터 1953년 봄까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신 해방구역의 농촌에서는 당의 지도로 토지제도 개혁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런 와중에 김좌진 장군의 장남 창렬은 부친이 흉탄에 맞아 순국하시자 부친의 원수를 찾아 복수에 나섰다. 약담배를 필 정도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했단다. 김장춘씨는 본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 사무총장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오숙근 할머니는 가족을 이끌고 장군을 따라 만주로 와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에서 피신과 은둔생활로 살다가 1948년 장남 창렬이 토지개혁심판대에서 맞아 죽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현장에서 정신을 잃고 졸도하였습니다. 장군의 둘째아들 김창규와 인척 오춘택이 교대로 업고 집으로 돌아와서 정성들여 간병했지만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김창규가 약방에 약 지으러 간 사이에 잠든 어린 손자 명환을 끌어안고 돌아가셨습니다. 장군의 아들 창렬과 오숙근 할머니의 묘는 보청에 있습니다.

오숙근 여사께서는 해방 후 딸린 아들과 손자들까지 있어서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 있었다. 1946년부터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에 대해 비장의 카드로 내민 토지개혁공작단의 활동이 막바지에 이른 1948년 봄이었다. 오숙근여사의 큰아들 김창렬은 보청에서 중공의 토지개혁 심판대에 서게 된다. 토지개혁심판대는 김창렬을 토비 김좌진의 아들로 지목했고, 동북항일련군 장령 두 명을 일본군에게 밀고하여 죽게 했다는 허무맹랑한 간첩죄목을 씌웠다. 이 날 김창렬은 어머니의 눈앞에서 맞아죽었다. 그의 심판조서에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인 김뇌진이라는 이름도 같이 쓰여 있다.

장군의 장남 창렬과 부인 오숙근 여사의 최후는 이렇게 처참했다. 그 후 장군의 손자 명환은 장성하여 5남매를 두었고 명환의 둘째 아들 장춘은 장군의 둘째 아들 창규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들이 김좌진 장군의 정통 혈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김장춘이 물려받은 장군의 유물은 어느 작전세력들에 의해 사취당하였고, 아마도 그들이 폐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단 한 가지 유물이라면 장군이 쓰시던 군사작전지도가 남아있다. 그리고 중국 정부 측의 기록과 김명환의 자필 기록과 주변사람들의 증언과 김장춘의 성장과정에서 종조부 김창규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그래서 김장춘은 지금까지 장군의 후손이라 자처해 온 사람들은 선조 묘 파묘를 준비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유전자대조검사로서 과학적, 합법적, 사실적으로 그 진위를 가르자는 것이다. 김장춘이 말하는 장군의 후손이라고 자처해 온 사람들이란 나혜국의 아들 김철한과 김계월의 아들이라는 김두한을 말한다.

(정리: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 사무총장 전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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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광원 | 작성시간 21.01.10
    “장군의 후손이라고 자처해 온 사람들
    김철한과 김계월의 아들이라는 김두한을 말한다.
  • 작성자이광원 | 작성시간 21.01.10 『오숙근 할머니는 가족을 이끌고 장군을 따라 만주로 와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에서 피신과 은둔생활로 살다가 1948년 장남 창렬이 토지개혁심판대에서 맞아 죽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현장에서 정신을 잃고 졸도하였습니다. 장군의 둘째아들 김창규와 인척 오춘택이 교대로 업고 집으로 돌아와서 정성들여 간병했지만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김창규가 약방에 약 지으러 간 사이에 잠든 어린 손자 명환을 끌어안고 돌아가셨습니다. 장군의 아들 창렬과 오숙근 할머니의 묘는 보청에 있습니다.』

    오숙근 여사께서는 해방 후 딸린 아들과 손자들까지 있어서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 있었다. 1946년부터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에 대해 「비장의 카드」로 내민 토지개혁공작단의 활동이 막바지에 이른 1948년 봄이었다. 오숙근여사의 큰아들 김창렬은 보청에서 중공의 토지개혁 심판대에 서게 된다. 토지개혁심판대는 김창렬을 토비 김좌진의 아들로 지목했고, 동북항일련군 장령 두 명을 일본군에게 밀고하여 죽게 했다는 허무맹랑한 간첩죄목을 씌웠다. 이 날 김창렬은 어머니의 눈앞에서 맞아죽었다. 그의 심판조서에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인 김뇌진이라는 이름도 같이 쓰여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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