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본기에 나타난 신라왕들
1대 시조 혁거세 거서간
시조는 성이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일에 즉위해, 왕호를 거서간이라 하였다. 이때 나이가 13세였으며,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과 골짜기에 나뉘어 살면서 6촌을 이루었다. 첫째가 알천의 양산촌, 둘째가 돌산의 고허촌, 셋째가 취산의 진지촌, 넷째가 무산의 대수촌, 다섯째가 금산의 가리촌, 여섯째가 명활산의 고야촌이니, 이것이 진한의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의 기슭을 보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웬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자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고 큰 알만 하나 있었다. 알을 가르자 그 속에서 한 어린 아이가 나오므로 거두어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자 뛰어나게 숙성하였다. 6부의 사람들은 그의 출생이 신이하다 하여 받들어 높이더니, 이때 와서 그를 옹립해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은 처음 그가 나온 큰 알이 박과 같은 모양이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하였다. 거서간이란 진한 말로 왕을 이른다.
5년 봄 정월에 용이 알영의 우물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기르고, 우물 이름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자라니 덕스러운 용모가 있으므로, 시조가 듣고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어진 덕행이 있어 내조를 잘하니,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이라고 일컬었다.
8년에 왜인들이 군사를 몰아와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우리 시조가 거룩한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만 돌아갔다.
9년 봄 3월에 혜성이 왕량성 자리에 나타났다.
14년 여름 4월에 혜성이 삼성 자리에 나타났다.
17년에 왕이 6부를 돌아다니며 위무했는데 왕비 알영도 따라다녔다.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토지의 이용을 면밀히 하도록 하였다.
19년 봄 정월에 변한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21년에 수도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 하였다. 이 해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26년 봄 정월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30년 여름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우리 변경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적가리가 들을 뒤덮고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이곳 사람들은 서로 훔치지 않으니 도의가 있는 나라라고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내어 습격하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냥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방문하였다. 마한 왕이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와서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분 성인께서 일어나시면서부터 백성의 일이 정비되고 하늘의 시운이 화목하니,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들은 서로 존경하고 겸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외경심을 품지 않음이 없는데도, 우리 왕께서는 겸허하게도 저를 보내어 방문의 예를 닦게 하시니 오히려 예의에 넘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화를 내시어 군사로 위협하시니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마한 왕은 크게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하여 말리자 그만 돌아가도록 놓아주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의 난리를 견디지 못해 동쪽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 마한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다가 이때 와서 점차 번성해졌기 때문에, 마한이 꺼려 이러한 질책을 하였던 것이다. 호공이란 이는 그 혈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은데, 본래 왜인으로서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고 불렀다.
39년에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이가 왕에게 아뢰었다. "서한의 왕이 지난 번에 우리 사신을 욕보였으니, 이제 그의 장례를 기회로 정벌하면 그 나라 정도는 쉽게 평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왕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따르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40년에 백제의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53년에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였다. "우리 왕께서 남한에 성인이 나셨다는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저를 보내 드리는 것입니다."
54년 봄 2월 기유에 혜성이 하고성 자리에 나타났다.
60년 가을 9월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나더니 심하게 우뢰가 치고 비가 쏟아졌으며,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년 봄 3월에 거서간이 승하하였다. 사릉에 장사 지냈는데,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2대 남해 차차웅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혁거세의 적자이다. 몸이 장대하고 성품이 깊고 두터웠으며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고, 왕비는 운제부인이다. 아버지를 이어 즉위해, 곧 원년이라고 일컬었다.
원년 가을 7월에 낙랑의 군사가 이르러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성인께서 돌아가시고 내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외람되이 왕위에 있게 되니 조심스럽기가 마치 물을 건너는 것만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범해 오니, 이 또한 내가 덕이 부족한 탓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들은 우리의 국상을 요행으로 여겨 함부로 군사를 몰아 왔으니, 반드시 하늘이 돕지 않을 것입니다. 별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적들이 조금 뒤에 물러나 돌아갔다.
3년 봄 정월에 시조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초하루 병진에 일식이 있었다.
5년 봄 정월에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맏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7년 가을 7월에 탈해를 대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11년 왜인들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노략하니, 6부의 굳센 병사들을 출동시켜 막았다. 그러자 낙랑은 우리 내부가 허실할 것으로 여기고 몰려와서 금성을 공격하니 상황이 매우 위급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가 두려워 물러나 알천 가에 주둔해 돌무더기 스무 개를 만들어놓고 달아났다. 6부의 병사 1천 명이 추격했는데,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서 돌무더기를 보고 적의 규모가 큰 것으로 여겨 추격을 그쳤다.
15년에 수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에는 누리가 생겼다.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휼하였다.
16년 봄 2월에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을 얻어 바쳤다.
19년에 크게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겨울 11월에는 물이 얼지 않았다.
20년 가을에 태백성이 태미성 자리에 들어갔다.
21년 가을 9월에 누리가 생겼다. 왕이 죽었다. 사릉원에 장사 지냈다.
3대 유리 이사금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고, 왕비는 일지 갈문왕의 딸이다.
처음에 남해가 죽었을 때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대보인 탈해가 평소 덕망이 있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밀어 양보하였다. 탈해가 말하였다. "임금의 자리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합니다." 이에 시험삼아 떡을 깨물어 보니 유리의 이 자국이 많았다. 이에 곧 좌우의 신하들이 받들어 왕위에 올리고 왕호을 이사금이라 하였다.
2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5년 겨울 11월에 왕이 나라 안을 두루 다니다가 한 노파가 굶주림과 추위로 곧 죽으려 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잘기르지 못해 늙고 유약한 이들이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이는 나의 죄다" 하고, 옷을 벗어 덮어주고 음식을 주어 먹였다. 이어 관리에게 명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늘고 병들어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찾아 위문하고 물자를 지급해 부양하게 하였다. 이에 이웃 나라 백성 가운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이 해에 민간의 풍속이 즐겁고 평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으니, 이것이 가악의 시초이다.
9년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아울러 성씨를 내려주었다. 양산부에는 양부라 하고 성은 이씨로, 고허부는 사량부라 하고 성은 최씨로, 대수부는 점량부라 하고 성은 손씨로, 간진부는 본피부라 하고 성은 정시로, 가리부는 한기부라 하고 성은 배씨로, 명활부는 습비부라 하고 성은 설씨로 하였다.
또 관위 17등급을 두었으니 1등은 이벌찬, 2등은 이척찬, 3등은 잡찬, 4등은 파진찬, 5등은 대아찬, 6등은 아찬, 7등은 일길찬, 8등은 사찬, 9등은 급벌찬, 10등은 대나마, 11등은 나마, 12등은 대사, 13등은 소사, 14등은 길사, 15등은 대오, 16등은 소오, 17등은 조위라고 하였다.
왕은 이처럼 6부의 이름을 정한 다음 이를 둘로 나누고, 왕녀 두 사람이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패를 나누어 편을 짓도록 하였다. 이들은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이 대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해 밤 열 시경에 파하였다. 그 후 8월 15일이 되어 그 성적으 많고 적음을 평가해 진 쪽에서는 술과 음식을 마련해서 이긴 쪽에게 배풀었다. 이 자리에는 노래와 춤과 온갖 오락이 다 벌어졌으니, 이를 일러 가배라고 하였다. 이때 진 쪽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조로 "회소! 회소!"라고 했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우아하니, 뒷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 노래를 지어 회소곡이라 하였다.
11년에 수도의 땅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물이 솟구쳤다. 여름 6월에 홍수가 났다.
13년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14년에 고구려 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해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투항해 와서 6부에 나뉘어 살았다.
17년 가을 9월에 화려현과 불내현 사람들이 함께 모의해 기병을 이끌고 북쪽 지역을 침범했는데, 맥국의 우두머리가 눈사를 동원하여 고하 서쪽에서 요격해 깨뜨렸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19년 가을 8월에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해 잡은 짐승을 바쳤다.
31년 봄 2월에 혜성이 자미궁 자리에 나타났다.
33년 여름 4월에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났는데, 조금 있다가 서북쪽에서 폭우가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4년 가을 9월에 왕이 병에 걸려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국척이요 지위는 대보의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공적과 명성을 드러냈다. 나의 두 아들은 그 재주가 탈해에 비해 훨씬 못미치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탈해가 왕위를 잇게 하라.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사릉원 안에 장사 지냈다.
4대 탈해 이사금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다. 처음 그 나라 왕이 여인국의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그 나라 왕이 말하였다.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릴 일이다." 그녀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떠가는 대로 놓아두었다.
맨 처음 금관국의 바닷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 어구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시조 혁거세가 왕위에 있은 지 39년이었다. 때마침 해변에 있던 한 할머니가 밧줄로 해안에 끌어당겨 궤를 열어보니, 아이 하나가 들어 있어서 거두어 길렀다. 아이가 장성하니 키가 9척이나 되고 풍모가 수려하고 지식이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니, 처음 궤가 떠내려 왔을 때 가치 한 마리가 울면서 따라 날고 있었으므로, 까치 '작'자를 줄여 석씨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또한 궤를 풀고 나왔으니 마땅히 탈해라고 이름하자."
탈해는 처음에 고기를 낚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한 번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며 골상이 매우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해 공명을 세우라."이에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는데, 아울러 지리도 알게 되었다. 그는 양산 아래에 사는 호공의 집을 바라보고 길한 땅이라고 생각해 속임수를 써서 빼앗아 살았다. 그 땅이 뒷날 월성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왕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딸을 아내로 주었다. 남해왕 7년에는 그를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죽으려 할 때 말하였다. "선왕께서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아들과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사람이 왕위를 잇게 하라'고 하셔서 과인이 먼저 왕위에 올랐으니 이제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겠다."
2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로 임명하였다. 2월에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년 봄 3월에 왕이 토함산에 오르니, 검은 구름이 덮개처럼 왕의 머리에 떠서 한참 있다가 흩어졌다. 여름 5월에 왜국과 우호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6월에 혜성이 천선성 자리에 나타났다.
5년 가을 8월에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7년 겨울 10월에 백제 왕이 영토를 넓혀 낭자곡성까지 이르러서 사신을 보내와 만날 것을 청했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8년 가을 8월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기병 2천 명을 보내 공격해 쫓았다. 12얼에 지진이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9년 봄 3월 어느 날 밤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을 무렵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금빛의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본 대로 아뢰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 열어보니, 그 안에 작은 사내 아이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빼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을 보고 이르기를 "이 아이야말로 어찌 하늘이 내게 주신 자식이 아니겠는가!"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니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또 그가 금빛 궤 속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계림'으로 고쳐 이름하고, 그로 인해 이를 국호로 삼았다.
10년에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해 탈취하고, 2백 명을 머물러 두고 지키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우리가 다시 빼앗았다.
11년 봄 정월에 박씨 귀척에게 나라 안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그 칭호를 주주, 군주라 하였다. 2월에 순정을 이벌찬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14년에 백제가 와서 침범하였다.
17년에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로를 보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그곳에서 죽었다.
18년 가을 8월에 백제가 변경을 노략하니 병사를 보내 막았다.
19년에 크게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니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20년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를 쳐서 와산성을 다시 회복하고, 백제로부터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1년 가을 8월에 아찬 길문이 황산진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그 공로를 포상하였다.
23년 봄 2월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고, 또 북방에도 혜성이 출현하더니 20일 만에 없어졌다.
24년 여름 4월에 수도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의 동문이 저절로 무너져내렸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 지냈다.
5대 파사 이사금
파사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으로 허루 갈문왕의 딸이다.
처음 탈해가 죽었을 때 신료들이 유리의 맏아들 일성을 즉위시키고자 했으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적자이기는 하지만 이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파사는 절약하고 검소하여 씀씀이를 줄이고 백성을 아끼니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친히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3월에 주와 군을 돌아다니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구휼했으며, 감옥의 죄수들을 조사해 참수형과 교수형이 아니면 모두 용서하였다.
3년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가 비어 있고 병장기는 무디어졌으니 만일 홍수나 가뭄이 들거나 변경에 사건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막아내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부들이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게 하고 군사를 조련해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게 할 일이다."
5년 봄 2월에 명선을 이찬에 임명하고, 윤량을 파진찬에 임명하였다. 여름 5월에 고타군주가 푸른 소를 바쳤다. 남신현에서는 보리 이삭이 한 줄기에 여러 개가 달리더니, 크게 풍년이 들어 길에 가는 이들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6년 봄 정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여름 4월에 객성이 자미궁에 들어갔다.
8년 가을 7월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짐이 덕이 없이 이 나라를 차지하고 있으니,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경계를 접하였는데, 덕망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가 두려워하기에 부족하다. 마땅히 성새와 보루를 수리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과 마두성의 두 성을 쌓았다.
11년 가을 7월에 사신 열 사람을 나누어 보내서 주주와 군주 가운데 공무에 부지런하지 않거나 밭과 들을 크게 황폐하게 한 이들을 감찰해 강등시키거나 해직시켰다.
14년 봄 2월에 왕이 고소부리군을 순행하여 친히 나이 많은 이들을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주었다. 겨울 10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15년 봄 2월에 가야의 적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였다. 아찬 길원을 보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쳐서 쫓아냈다. 가을 8월에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17년 가을 7월에 폭풍이 남쪽에서 불어와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9월에 가야인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가성주 장세를 보내 막게 했으나 적군에게 살해되었다. 왕이 노하여 용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워 그들을 쳐부수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18년 봄 정월에 군사를 일으켜 가야를 치려 했으나, 그 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므로 그만두었다.
21년 가을 7월에 우박이 내려 날던 새가 맞아 죽었다. 겨울 10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어 민가가 무너지고 죽는 이가 생겼다.
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 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23년 가을 8월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영토를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판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난차하게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연로해 아는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해서 수로왕을 불러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귀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해 모여서 수로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무도 이찬으로서 접대하게 했는데 유독 한기부만이 지위가 낮은 이가 접대하게 하니, 수로가 노하여 종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주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탐하리는 달아나 음즙벌국 타추간의 집에 숨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수색했으나, 타추가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몰아 음즙벌국을 치니, 음즙벌주와 그 무리가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과 압독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25년 봄 정월에 뭇 별들이 비오듯 떨어져 내렸으나, 땅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가을 7월에 실직이 배반하므로 군사를 내서 토벌하고 평정했으며, 그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겼다.
26년 봄 정월에 왕이 압독에 행차하여 빈궁한 이들을 구휼하였다. 3월에 왕이 압독에서 돌아왔다. 가을 8월에 마두성 성주에게 명해 가야를 치게 하였다.
29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백성이 굶주리자 10도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군사를 보내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쳐서 병합하였다.
30년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하여 재해를 물리쳐줄 것을 빌었더니 누리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32년 여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33년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사릉원 안에 장사 지냈다.
6대 지마 이사금
지마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파사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사성부인이고, 왕비는 김씨 애례 부인으로 갈문돵 마제의 딸이다.
처음에 파사왕이 유찬의 못가에서 사냥할 때 태자가 따라갔다. 사냥을 마친 다음 한기부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찬 허루가 향연을 베풀었다. 술이 오르자 허루의 아내가 어린 딸을 이끌고 나오자, 태자가 그녀를 보고 기뻐하였다. 허루가 달가워하지 않자 왕이 허루에게 말하기를 "이곳 지명이 대포인데 공이 여기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서 즐기게 하니, 마땅히 지위를 주다로 하여 이찬의 윗자리에 있게 하리라" 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아주었다. 주다는 뒷날 각간이라고 하였다.
2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였다.
3년 봄 3월에 우박이 내려 보리의 싹이 상하였고, 여름 4월에는 홍수가 나니, 죄수들을 다시 심사하여 사형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주었다.
4년 봄 2월에 가야가 남쪽 변경을 노략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 정벌에 나서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건넜는데, 가야인들이 수풀 사이에 복병을 숨겨두고 기다렸다. 왕이 깨닫지 못하고 곧바로 나아가니, 복병이 뛰어나와 몇 겹으로 에워쌌다. 이에 왕은 군사를 지휘해 명렬하게 싸워서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5년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치게 하고, 왕도 정예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따르자, 가야가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때마침 오래도록 비가 내리니 그냥 돌아왔다.
9년 봄 2월에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졌는데 그 소리가 우뢰 같았다. 3월에는 수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0년 2월에 대증산성을 쌓았다. 여름 4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1년 여름 4월에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리더니, 저물녘이 되어서야 그쳤다. 수도의 주민들 사이에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헛소문이 나돌아 사람들이 다투어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으니, 왕이 이찬 익종 등에게 그들을 타일러 멈추도록 하였다.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치더니,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12년 봄 3월에 왜국과 강화하였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5월에는 금성 동쪽의 민가가 꺼져내려 못이 되더니, 연꽂이 생겨났다.
14년 봄 정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에 대거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다시 대령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 오니,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백제가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되자, 적들이 듣고 물러갔다.
17년 가을 8월에 혜성의 긴 꼬리가 하늘 끝까지 뻗쳤다. 겨울 10월에는 나라 동쪽에 지진이 있었다.
23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7대 일성 이사금
일성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유리왕의 맏아들이다. 왕비는 박씨로 지소례왕의 딸이다.
원년 9월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친히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3년 봄 정월에 웅선을 이찬으로 임명해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해 맡아보게 하고, 근종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4년 봄 2월에 말갈이 국경에 들어와 장령의 다서 목책을 불태웠다.
5년 본 2월에 금성에 정사당을 두었다. 가을 7월에 알천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여 친히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6년 가을 8월에 말갈이 장령을 습격해 주민들을 사로잡고 노략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쳐들어왔다가, 눈이 심하게 내리자 그만 물러갔다.
10년 여름 6월 을축에 형혹성이 진성을 침범하였다.
11년 봄 2월에 명령을 내려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에게 하늘과 같은 것이니,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 보완하고 밭과 들을 널리 개간하라"고 하였다. 또 명령을 내려 민간에서 금, 은, 구슬, 옥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13년 겨울 10월에 압독이 배반하므로 군사를 내어 토벌하고 평정했으며, 그 남은 무리를 남쪽 지방으로 옮겼다.
14년 가을 7월에 신료들에게 명해 각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나 장수가 될 만한 이를 천거하게 하였다.
16년 가을 8월에 혜성이 천시성 자리에 나타났다. 겨울 11월에 우뢰가 있었고, 수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0년 겨울 10월에 궁궐 문이 불탔다.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더니, 또 동북방에도 나타났다.
21년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8대 아달라 이사금
아달라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일성의 맏아들이다. 키가 7척이요, 코가 크고 얼굴 모습이 특이하였다. 어머니는 박씨로 지소례왕의 딸이고, 왕비는 박씨 내례부인이니 지마왕의 딸이다.
원년 3월에 계원을 이차으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2년 봄 정월에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년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 길을 열었다.
4년 봄 2월에 처음으로 감물현과 마산현을 두었다. 3월에 장령진에 순행하여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 군복을 내려주었다.
5년 봄 3월에 죽령 길을 열었다. 왜인이 와서 방문하였다.
7년 여름 4월에 폭우로 알천 물이 넘쳐 인가가 물에 잠기고 떠내려갔으며,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8년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치고, 바닷고기가 많이 물 밖으로 나와서 죽었다.
9년에 사도성에 순행하여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11년 봄 2월에 용이 수도에 나타났다.
12년 겨울 10월에 아찬 길선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자,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백제로 도망해 들어갔다. 왕이 글을 보내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내어 치자, 백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식량이 다해 그만 돌아왔다.
14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나라 서쪽 두 성을 습격해 깨뜨리고, 주민 1천 명을 노략해 갔다. 8월에 일길찬 흥선을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이를 치게 하였다. 또 왕이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다다르니, 백제가 크게 드려워해 노략해간 남녀를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17년 봄 2월에 시조묘를 중수하였다. 가을 7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고,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변경을 노략하였다.
19년 봄 2월에 시조묘에 변고가 있었다. 수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0년 여름 5월에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였다.
21년 봄 정월에 흙비가 내렸다. 2월에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이 말랐다.
31년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9대 벌휴 이사금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석씨이고 탈해왕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성이 김씨로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가 죽었을 때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벌휴를 왕으로 세웠다. 왕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또 사람의 정직한 것과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을 알아맞히니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군주와 우군주로 임명해 소문국을 치게 하였다. 군주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3년 봄 정월에 주와 군을 순행하여 풍속을 살폈다. 여름 5월 그믐 임신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에 남신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4년 봄 3월에 주와 군에 명해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농사철을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5년 봄 2월에 백제가 쳐들어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파진찬 구도에게 명해 군사를 내서 막게 하였다.
6년 가을 7월에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이기고, 5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7년 가을 8월에 백제가 서쪽 국경의 원산향을 습격하고, 다시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날랜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니 백제 군사가 짐짓 거짓으로 달아났다. 구도는 추격해 와산까지 갔다가 백제군에 패하였다. 왕은 구도가 실책했다 하여 부곡성주로 강직시키고, 설지를 좌군주로 삼았다.
8년 가을 9월에 치우기성이 각성과 항성 자리에 나타났다.
10년 봄 정월 초하루 갑인에 일식이 있었다. 3월에 한기부 여자가 한꺼번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다. 6월에 왜인들이 크게 굶주려서 우리에게 와 먹을 것을 구하는 이가 1천 명이나 되었다.
13년 여름 4월에 궁궐 남쪽의 큰 나무에 벼락이 쳤고, 또 금성 동문에도 벼락이 쳤다. 왕이 죽었다.
10대 내해 이사금
내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벌휴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이고, 왕비는 석씨로 조분왕의 누이이다. 왕은 용모와 위의가 걸출하고 빼어났으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전왕의 태자인 골정과 둘째 아들 이매가 먼저 죽었고, 장손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매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니, 이가 내해 이사금이다. 이 해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오지 않다가 왕이 즉위하는 날 큰 비가 내리므로, 백성들이 즐거워 경축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3년 여름 4월에 시조묘 앞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에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났으므로 수재를 만난 주와 현은 1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해주고, 7월에는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4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5년 가을 7월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고, 서리가 내려 초목을 죽였다. 9월 초하루 겨오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6년 봄 2월에 가야국이 화친을 요청하였다. 3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크게 가물어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해 가벼운 죄는 용서하였다.
8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전염병을 많이 알았다.
10년 봄 2월에 진충을 일벌찬으로 임명해 국정을 맡아보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8월에 여우가 금상과 시조묘의 뜰에서 울었다.
12년 봄 정월에 왕자 이음을 이벌찬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겸해 맡아보게 하였다.
13년 봄 2월에 서쪽의 군과 읍을 돌아보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왜인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14년 가을 7월에 포상팔국이 가라를 침략하고자 계획하니, 가라의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해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도록 하였다. 여덟 나라의 장군을 쳐 죽이고, 잡혀갔던 6천 명을 빼앗아 되돌려왔다.
17년 봄 3월에 가야가 왕자를ㄹ 보내 볼모로 삼았다. 여름 5월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19년 봄 3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꺾었다. 가을 7월에 백제가 와서 나라 서쪽 요거성을 공격해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이음에게 명해 정예병 6천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을 깨뜨렸다.
23년 가을 7월에 무기고의 병기들이 저절로 나오더니, 백제 사람들이 와서 장산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쳐서 쫓았다.
25년 봄 3월에 이벌찬 이음이 죽었다. 충훤을 이벌찬으로 임명해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양산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27년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를 해쳤다. 남신현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 몇 달이 지난 뒤에 다시 살아났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우두주에 들어왔다.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으나 웅곡에 이르러 적에게 패해 홀로 말을 타고 돌아오니, 그를 진주로 강직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29년 가을 7월에 이벌찬 연진이 봉산 아래에서 백제와 싸워 깨뜨리고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8월에 봉산성을 쌓았다.
31년 봄에 비가 오지 않더니, 가을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백성들이 굶주리니 창고을 열어 구제하였다.
34년 여름 4월에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었다. 가을 9월에 지진이 있었다. 겨울 10월에 큰 눈이 와서 5척이나 쌓였다.
35년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11대 조분 이사금
조분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석씨요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골정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김씨 옥모부인이니 구도 갈문왕의 딸이며, 왕비 아이혜부인은 내해왕의 딸이다. 전왕이 장차 죽으려 할 때 유언하여 사위 조분에게 왕위를 잇게 하였다. 왕은 키가 크고 외모가 훌륭했으며, 일이 닥치면 명쾌하게 판단해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였다.
원년에 연충을 이찬으로 임명해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7월에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2년 가을 7월에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쳐부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3년 여름 4월에 왜인이 갑자기 들이닥쳐 금성을 포위하므로, 왕이 몸소 나가 싸웠다. 적들이 무너져 달아나니, 날랜 기병을 보내 쫓아가 쳐서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4년 여름 4월에 크게 바람이 불어 가옥의 기와를 날려 보냈다. 5월에 왜병이 동쪽 변경을 노략하였다. 가을 7월에 이찬 우로가 사도에서 왜인과 싸웠는데,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 적들의 배를 불사르니, 적들은 물에 뛰어들어 모조리 죽었다.
7년 봄 2월에 골벌국의 왕 아음부가 무리를 이끌고 와 항복하니 집과 전장을 주어 편안히 살게 하고, 그 딸을 군으로 만들었다.
11년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3년 가을에 크게 풍년이 들었고, 고타군에서는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15년 봄 정월에 이찬 우로를 사불한으로 임명해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16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지켰다. 그날 밤 몹시 추웠는데 우로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몸소 땔나무를 태워 덮혀주니, 무리가 마음 속으로 감격하였다.
17년 겨울 10월에 동남방 하늘에 흰 기운이 피륙을 편 듯이 뻗쳤다. 11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18년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12대 첨해 이사금
첨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조분왕의 친동생이다.
원년 가을 7월에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으로 봉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삼아 국정을 맡아보게 하였다. 2월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3년 여름 4월에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가을 7월에 궁궐 남쪽에 남당을 짓고, 양부를 이찬으로 삼았다.
5년 봄 정월에 처음으로 남당에서 정사를 보았다. 한기부 사람 부도라는 이가 집안이 가난한데도 아첨하지 않고 글씨와 계산에 뛰어나 당시에 이름이 나 있었으므로, 왕이 불러 아찬으로 삼고 물장고의 사무를 맡겼다.
7년 여름 4월에 용이 궁궐 동쪽 못에 나타나고, 금성 남쪽의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자 시조묘와 명산에 빌고 제사를 지냈더니 곧 비가 내렸다. 이 행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많았다.
9년 가을 9월에 백제가 침입해 오자 일벌찬 익종이 괴곡 서쪽에서 맞아 싸우다가 적들에게 살해되었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 왔으나 물리쳤다.
10년 봄 3월에 나라 동쪽 바다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왔는데, 몸길이가 3장이고 높이는 1장 2척이나 되었다. 겨울 10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13년 가을 7월에 가물고 누리가 있더니 흉년이 들어 도적이 많았다.
14년 여름에 홍수가 나서 40여 군데의 산이 무너졌다. 가을 7월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서 25일 만에야 사라졌다.
15년 봄 2월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 극종을 성주로 삼았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겨울 12월 28일에 왕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13대 미추 이사금
미추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 박씨는 갈문왕 이칠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왕의 선조 알지는 계림에서 나왔는데,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았으니, 구도는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우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처음이었다.
원년 봄 3월에 용이 궁궐 동쪽 못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금성 서쪽 문에 화재가 나서 불길이 번져 인가 3백여 호가 불탔다.
2년 봄 정월에 이찬 양부를 서불한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관련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2월에 왕이 친히 국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으며, 왕의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으로 봉하였다.
3년 봄 2월에 왕이 동쪽으로 행차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3월에 왕이 황산에 가서 나이 많은 이와 가난하여 제 힘으로 살 수 없는 이들을 위문하고 구휼하였다.
5년 가을 8월에 백제가 쳐들어와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나가 치자,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으로 임명하고, 사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 왕이 친히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어 듣고, 또 다섯 사람을 보내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고충과 우환을 위문하게 하였다.
11년 봄 2월에 명령을 내려 무릇 농사를 해치는 일은 일체 없애도록 하였다.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겨울 11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15년 봄 2월에 신료들이 궁실을 고쳐 지을 것을 요청했으나, 왕이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라 하여 따르지 않았다.
17년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쳐들어와 괴곡성을 에워싸자, 파진찬 정원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19년 여름 4월에 가뭄이 들자 죄수들을 다시 조사해주었다.
20년 봄 정월에 홍권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양질을 일길찬으로 광겸을 사찬으로 삼았다. 2월에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9월에 양산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22년 가을 9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여 겨울 10월에 괴곡성을 에워싸므로, 일길찬 양질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23년 봄 2월에 나라 서쪽의 여러 성들을 둘러보며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대릉에 장사 지냈다.
14대 유례 이사금
유례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조분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내음의 딸이다. 그녀가 일찍이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오더니 곧 임신을 하였다. 바야흐로 유례를 낳던 날 저녁이 되자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찼다.
2년 봄 정월에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2월에 이찬 홍권을 서불한으로 임명해 중요한 정무를 맡겼다.
3년 봄 정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3월에 가물었다.
4년 여름 4월에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해 불을 놓아 태우고, 사람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6년 여름 5월에 왜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선박을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였다.
7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8년 봄 정월에 말구를 이벌찬으로 임명하였다. 말구는 충성스럽고 곧았으며 지략이 있었으므로, 왕이 늘 방문헤 정사를 요체를 물었다.
9년 여름 6월에 왜병이 사도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일길찬 대곡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고 복구하게 하였다. 가을 7월에 가물더니 누리가 생겼다.
10년 봄2월에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 80여 가를 이주시켰다.
11년 여름에 왜병이 와서 장봉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12년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왜인들이 우리 성읍을 여러 차례 침범해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없으니, 내가 백제와 함께 계책을 내서 일시에 바다를 건너 들어가 그 나라를 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하였다. "저희들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니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나가 싸우다가 예측하지 못한 위험이 있을까 두렵고, 더구나 백제는 속임수가 많아서 늘 우리 나라를 집어삼킬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역시 함께 일을 도모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렇겠다."
14년 봄 정월에 지량을 이찬으로, 장흔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사찬으로 삼았다. 이서고국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자, 우리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방어했으나 물리치지 못하였다. 이때 문득 이상한 군사들이 나타났는데,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았는데, 우리 군사와 함께 적군을 쳐서 깨뜨린 다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람들 가운데는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를에 쌓여 있는 것을 본 이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나라 사람들은 "선왕께서 음병으로 싸움을 도우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15년 봄 2월에 수도에 안개가 짙게 끼어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는데, 닷새 만에야 걷혔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15대 기림 이사금
기림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조분 이사금의 소자이다. 아버지는 걸수 이찬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두터워서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장흔을 이찬으로 임명해 중안과 지방의 군사 관련 일을 겸해 맡아보게 하였다. 2월에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년 봄 정월에 왜국과 사절을 교환하였다. 2월에 왕이 비열홀에 행차하여 친히 나이 많은 이와 가난한 이들을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3월에 우두주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귀의해 왔다.
7년 가을 8월에 지진이 있어 샘물이 치솟았다. 9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어 민가를 무너뜨렸으며, 죽은 사람도 있었다.
10년에 국호를 다시 '신라'라고 하였다.
13년 여름 5월에 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하자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사면해주었다.
6월에 와이 죽었다.
16대 흘해 이사금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내해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우로 각간이고, 어머니 명원부인은 조분왕의 딸이다.
우로는 임금에 섬김에 공로가 있어 여러 차례 승진해 서불한이 되었는데, 흘해의 용모가 빼어나고 두뇌가 명민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여느 사람과는 다른 것을 보고 여러 후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이때 와서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해 말하기를 "흘해는 어리면서도 노성한 덕행이 있다" 하고, 곧 그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다.
2년 봄 정월에 급리를 아찬으로 삼아 정사의 요긴한 바를 맡기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관련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2월에 왕이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년 봄 3월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의 배필을 구하니, 아찬 급리의 딸을 보내주었다.
9년 봄 2월에 왕이 명령하였다. "지난 번 가뭄으로 농사가 순조롭게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땅이 기름지고 생기가 일어나 농사 일이 바야흐로 시작될 터이니, 무릇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모두 중지하라."
21년에 처음으로 벽골지를 만드니, 그 둑의 둘레가 1천 8백보였다.
28년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백제를 방문하였다.
35년 봄 정월에 왜국이 사신을 보내 혼인할 것을 청하자, 딸이 이미 출가했다 하여 거절하였다.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궁궐 남쪽의 큰 나무가 뽑혔다.
36년 봄 정월에 강세를 이벌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에 왜 왕이 글을 보내 국교를 끊었다.
37년에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이르러 변경의 민가를 노략하더니, 다시 나와 금성을 에워싸고 급히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를 내어 서로 싸우고자 했으나 이벌찬 강세가 말하였다. "적들은 멀리서 왔으므로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으니, 시간을 늦추어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왕이 그렇겠다고 여겨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이 양식이 다 떨어져 막 물러가려 하자, 강세에게 명해 굳센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쫓아버렸다.
38년에 궁궐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다.
41년 봄 3월에 황새가 월성 모퉁이에 둥지를 틀었다. 여름 4월에 큰 비가 열흘이나 내려 평지에 물이 3, 4척이나 고이고, 관청과 민가 건물이 물에 잠기고 떠내려갔으며, 산이 열세 군데나 무너졌다.
47년 여름 4월에 왕이 죽었다.
17대 내물 이사금
내물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김씨이고 구도 갈문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말구 각간이고,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다. 왕비는 김시로 미추왕의 딸이다. 흘해가 죽었을 때 아들이 없으므로 내물이 왕위를 이었다.
2년 봄에 왕이 사신을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보살피게 하고, 각각 곡식 3곡을 내려주었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행식이 빼어난 이들에게는 관직 한 등급씩을 주었다.
3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더니, 자줏빛 구름이 묘당 위에 서리고 신이한 새들이 묘당 뜰에 모여들었다.
7년 여름 4월에 시조묘 뜰이 나무들이 가지를 이어 하나로 어우러졌다.
9년 여름 4월에 왜병이 크게 들이닥쳤다. 왕이 듣고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해 풀 인형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벌려 세우고, 용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들에 매복시켰다. 왜인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곧바로 나오니, 복병을 일으켜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인들이 크게 패해 달아나자 우리 군사가 추격해 거의 다 죽였다.
11년 봄 3월에 백제 사람이 와서 방문하였다. 여름 4월에 홍수가 나서 산 열세 군데가 무너졌다.
13년 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진상하였다.
17년 봄과 여름에 가물더니, 이 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떠돌아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왕이 사신을 보내 곡식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휼하였다.
18년에 백제 독산성주가 무리 3백 명을 거느리고 와 투항해 오니, 왕이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우리 두 나라가 화목하고 우호하여 형제처럼 지낼 것을 약속했는데 이제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간 백성을 받아들이니, 이는 화친하는 뜻에 매우 어긋나는 것이며 대왕께 기대하던 바가 아닙니다.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였다. "백성이란 변함없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이 있으면 오고 싫증이 나면 가는 것은 본래부터 그러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안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지는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리 심합니까?" 백제가 그 말을 듣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21년 가을 7월에 부사군에서 뿔이 하나 달린 사슴을 진상하였다. 이 해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24년 여름 4월에 양산에서 작은 참새가 큰 새를 낳았다.
26년 봄과 여름에 가물더니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렸다. 위두를 부견의 전진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부견이 위두에 물었다.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해동이 일들이 예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위두가 대답하였다. "역시 중국에서 시대가 변하고 국호가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지금 해동이 어찌 예전과 같겠습니까?"
33년 여름 4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더니, 6월에 또 지진이 있었다. 겨울에는 물이 얼지 않았다.
34년 봄 정월에 수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월에 흙이 섞인 비가 내렸다. 가을 7월에 누리가 생기더니,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37년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다 하여,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38년 여름 5월에 왜인들이 와서 금성을 에워싸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울 것을 요청했으나, 왕은 "지금은 적들이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죽을 곳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 하여 성문을 닫아 걸고 있자, 적들이 아무 소득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이 돌아가는 길목을 막게 하고, 다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끼고 공격해 크게 쳐부수니, 죽이고 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40년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내보내 실직의 들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42년 가을 7월에 북쪽 변경의 하슬라에 가뭄이 들고 누리가 생겨서 농사를 망치고 백성들이 굶주리니, 죄수들을 살펴 사면하고 1년의 납세를 면제해주었다.
44년 가을 7월에 날고 있는 누리떼가 들판을 뒤덮었다.
45년 가을 8월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겨울 10월에 왕이 늘 타고 다니는 궁중 마구간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프게 울었다.
46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에 가 있던 볼모 실성이 돌아왔다.
47년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18대 실성 이사금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이르니, 알지의 후손이요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나 되었으며, 명민하고 통달하여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죽고 그의 아들이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옹립해 왕위를 잇게 하였다.
원년 3월에 왜국과 우호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삼았다.
2년 봄 정월에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아 군사와 정무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7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4년 여름 4월에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막아 다시 싸워 깨뜨리고, 3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5년 가을 7월에 나라 서쪽에 누리가 생겨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고, 11월에는 물이 얼지 않았다.
6년 봄 3월에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더니, 여름 6월에 또 남쪽 변경에 침입하여 1백 명을 노략해 갔다.
7년 봄 2월에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비축하고서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군사를 미처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 시설을 치고자 하였다 이때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였다. "제가 들으니 '무리란 훙한 도구요, 싸움이란 위험한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나라를 치다가 만일 실패한다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험한 곳에 의지해 관문을 설치하여 그들이 오면 막아서 우리를 침범해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우리할 때는 나가 사로잡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남을 이용할 것이요,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대책 가운데 으뜸일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좇았다.
11년에 내물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12년 가을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멀리서 보면 누각같이 생겼고 향기가 자우갛여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이것은 필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복받은 땅이다"라고 하여, 이후로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 새롤 평양주의 큰 다리를 낙성하였다.
14년 가을 7월에 왕이 혈성의 들판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고, 또 금성의 남문에서 활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8월에 왜인들과 다불어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
15년 봄 3월에 동해 해변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뿔이 나 있었으며 그 크기가 수레에 가득 찼다. 여름 5월에 토함산이 무너지고, 우물물이 3장이나 솟구쳤다.
16년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19대 눌지 마립간
눌지 마립간이 왕위에 오르니 내물왕의 아들이다. 어머니 보반부인은 미추왕의 딸이다.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내물왕이 왕위에 있은 지 37년에 실성을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자 내물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해 내물의 아들을 해쳐서 그 원한을 풀고자 하였다. 이에 사람을 보내 자기가 고구려애 있을 때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이를 불러들여 은밀히 지시하기를 "눌지를 보거든 죽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눌지를 보내 중도에서 그와 맞닥뜨리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은 눌지의 됨됨이가 시원스럽고 우아하여 군자의 풍모가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고백하기를 "당신 나라 왕이 나를 시켜 당신을 해치라고 했으나 지금 당신을 만나고 보니 차마 살해할 수 없습니다" 하고는 그냥 돌아가버렸다. 눌지가 이를 원망해 도리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왕의 아우 복호가 고구려로부터 제상 나마와 함게 돌아왔다. 가을에는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4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이니,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파는 이마저 있었다. 죄수들을 조사해 죄를 용서해주었다.
7년 여름 4월에 남당에서 늙은이들을 대접했는데, 왕이 친히 음식을 집어주고 곡식과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8년 봄 2월에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교빙의 예를 닦았다.
13년에 새로 시제를 쌓았는데, 둑의 둘레가 2천 1백 70보였다.
15년 여름 4월에 왜병이 와서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명활성을 에워쌌지만 아무 소들이 없이 물러갔다.
17년 여름므 5월에 미사흔이 죽었다. 그에게 서불한을 추증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18년 봄 2월에 백제 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더니, 가을 9월에 다시 흰 매를 보내왔다. 겨울 10월에 왕이 황금과 명주를 백제에 보내 답례하였다.
22년에 백성들에게 우차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
24년에 왜인들이 남쪽 변경을 침범해 백성을 노략해 갔다. 여름 6월에는 다시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28년 여름 4월에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에워쌌다가, 양식이 다하자 그냥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내어 뒤쫓고자 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였다. "병가의 말에 '궁지에 몰린 도적을 쫓지 말라'고 했으니 왕께서는 그만두소서." 왕은 듣지 않고 긱병 수천여 명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어우러져 싸웠으나, 적들에게 패해 죽은 장수와 병사들이 절반이 넘었다. 왕이 창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오르니,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이때 홀연히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적들은 신이 돕는 것이라고 생각해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 돌아갔다.
34년 가을 7월에 고구려 변경의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하슬라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보내서 그를 엄습해 죽였다. 고구려 왕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사람을 보내 와 통고하기를 "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를 닦아 매우 기쁘게 여기던 터에, 지금 군사를 내서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이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 곧 군사를 일으켜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이에 왕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자 그대로 돌아갔다.
38년 8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9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니,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42년 봄 2월에 지진이 있어 금성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20대 자비 마립간
자비 마립간이 왕위에 오르니, 눌지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 김씨는 실성의 딸이다.
2년 봄 2월에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여름 4월에 왜인들이 병선 1백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와 월성을 에워싸니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왕이 성에서 지키다가 적들이 바야흐로 물러나려 하자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부수고, 달아나는 것을 추격해 바다 어귀에 이르니, 적들 가운데 물에 빠져 죽는 이가 절반이 넘었다.
4년 봄 2월에 왕이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용이 금성 우물 가운데 나타났다.
5년 여름 5월에 왜인들이 활개성을 쳐부수고 백성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6년 봄 2월에 왜인들이 삽량성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자, 왕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매복해 기다리고 있다가 요격해서 크게 쳐부수었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강역을 침범하므로 변경을 따라 두 개의 성을 쌓았다. 가을 7월에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10년 봄에 해당 부서에 명해 전함을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하늘이 붉어지더니 큰 별이 북방에서 동남방으로 흘러갔다.
11년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을 습격하였.
가을 9월에 하슬라 사람 가운데 나이 15세 이상 되는 이들을 징발해 이하에 성을 쌓았다.
12년 봄 정월에 수도의 마을 이름들을 정하였다.
13년에 삼년산성을 쌓았다.
14년 봄 2월에 모로성을 쌓았다.
16년 봄 정월에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장군과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에 명활성을 수리하였다.
17년에 일보,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거련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쳤다. 백제 왕 경이 아들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군사를 내서 백제를 구하게 했으나,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백제는 이미 함락되었고 경 역시 살해되었다.
18년 봄 정월에 왕이 명활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19년 여름 6월에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해 쳐부수게 하고 2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20년 여름 5월에 왜인들이 군사를 일으켜 다섯 갈래로 쳐들어왔다가 끝내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갔다.
21년 봄 2월 밤에 붉은 빛이 피륙을 편 듯 땅에서 하늘까지 뻗치었다. 겨울 10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22년 봄 2월 3일에 왕이 죽었다.
21대 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이 왕위에 오르니, 자비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 김씨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다. 왕비 선혜부인은 내숙 이벌찬의 딸이다. 소지는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운 행실이 있었으며 겸손하게 삼가고 스스로 단속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원년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관료들에게 관작을 1등급 올려주었다.
2년 봄 2월에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5월에 수도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10월에 백성이 굶주리자 창고의 곡식을 풀어서 구휼하였다. 11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봄 2월에 왕이 비열성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무하고 군복을 내려주었다.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침입해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와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들이 무너져 물러갔다. 그들을 추격해 이하 서쪽에서 쳐부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4년 봄 2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혔고, 금성 남문에 화재가 있었다. 여름 4월에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왕이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명해 죄수를 다시 조사해주도록 하였다. 5월에 왜구들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6년 3월에 토성이 달을 침범하였고,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리 군사와 백제가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공격해 크게 쳐부수었다.
7년 봄 2월에 구벌성을 쌓았다. 여름 4월에 왕이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묘당을 관리하는 민호 20가를 더 두었다. 5월에 백제가 와서 방문하였다.
8년 봄 정월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임병하였다. 일선 지역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해 삼년성과 굴산성의 두 성을 고쳐 쌓았다. 여름 4월에 왜구들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가을 8월에 낭산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년 봄 2월에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였다. 나을은 시조가 처음 내어난 곳이다. 3월에 처음으로 우역을 두고 해당 관부에 명해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월성을 보수하였다.
10년 봄 정월에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름 6월에 동양에서 눈이 여섯 개 달린 거북을 바쳤는데, 배 아래에 글자가 있었다. 가을 7월에 도나성을 쌓았다.
11년 봄 정월에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가을 9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해 과현까지 왔다가, 겨울 10월에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12년 봄 2월에 비라성을 다시 쌓았다. 3월에 용이 추라정에 나타났다. 처음으로 수도에 시장을 개설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1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스스로를 죄책하고 평상시보다 음식의 가짓수를 줄였다.
15년 봄 3월에 백제 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자, 왕이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 가을 7월에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해 왜적을 방비하였다.
16년 여름 4월에 홍수가 났다. 가을 7월에 장군 실죽 등이 고구려와 살수의 들판에서 싸우다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을 지켰는데, 고구려 군사가 이를 에워쌌다. 백제 왕 모대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여 포위를 풀었다.
17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에워싸자 백제가 구원을 청해 왔다.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니, 고구려 군사가 무너졌다. 백제 왕이 사신을 보내와 감사하였다.
18년 봄 2월에 가야국에서 흰 꿩을 보내왔는데, 꼬리 길이가 5척이나 되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가 우산성에 쳐들어오자, 장군 실죽이 나가 이하에서 쳐부수었다. 8월에 왕이 남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사를 살폈다.
19년 여름 4월에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22년 봄 3월에 왜인들이 장봉진을 쳐서 함락시켰다.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며,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났고, 수도에 황색 안개가 끼어 사방의 시야를 막았다.
가을 9월에 왕이 날기군에 행차하였다. 날기군 사람 파로에게 딸이 있었는데 이름은 벽화이고 나이는 열여섯으로 참으로 한 나라의 미색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수놓은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색깔있는 비단으로 덮어 가려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올리는 것으로 여기고 열어 보니 단정한 소녀여서 괴이하게 여겨 받지 않았다. 궁궐에 돌아와서는 그 생각이 그치지 않아 두세 차례 남몰래 은밀히 다녀 그 집에 가서 그녀와 관계하였다. 길이 고타군을 지나게 되어 어느 노파의 집에 묵었는데,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요즘 사람들은 국왕이 어떠한 임금이라고 여기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이들은 성인이라고 하지만 저만은 그것을 의심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만히 들어보니 왕이 날기군의 여자를 사랑해 여러 차례 복장을 숨기고 온다 하니, 무릇 옹이 고기의 옷을 입는다면 고기잡이의 손아귀에 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거니와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니 이러고도 성인이라 한다면 어느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왕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워 곧 몰래 그 여자를 맞아다가 궁궐의 별실에 두고, 아들 하나를 낳기에 이르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22대 지증 마립간
지증 마립간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이다. 내물왕의 증손자요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니, 소지왕의 재종 아우이다. 어머니는 조생부인으로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시 연제부인으로 등흔 이찬의 딸이다. 체격이 매우 크고 담력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전왕이 죽었을 때 아들이 없으므로 왕위를 이으니, 이때 나이가 64세였다.
3년 봄 3월에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지하였다. 이전에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사람을 순장했는데, 이때 와서 그것을 금지한 것이다.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3월에 주와 군의 장관에게 일일이 명해 농사를 권장하게 하고, 처음으로 소를 이용해 논밭을 갈게 하였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라 일컫고, 혹은 '사로'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란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니,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나 '왕'을 일컬었으니,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우리 말로만 왕호를 일컫고 정식 칭호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왕이 그대로 좇았다.
5년 여름 4월에 상복법을 제정해 반포, 시행하였다. 가을 9월에 일꾼을 징발해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개 성을 쌓았다.
6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국내의 주와 군과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삼으니, 군주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겨을 11월에 처음으로 해당 부서에 명해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또 선박 이용 제도를 제정하였다.
10년 봄 정월에 수도에 동쪽 시장을 설치하였다. 3월에 함정을 설치하여 맹수의 피해를 제거하였다.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되었다. 우산국은 명주(溟州) 바로 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혹은 울릉도라도 한다. 땅은 사방 1백 리이나, 지형이 험한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 사람들은 우매하고 사나워서 위엄으로 불러들이기는 어렵고 계책을 써서 굴복시킬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곧 나무를 깎아 사자 인형을 많이 만들어서 병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다라 속임수로 통고하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어놓아 짓밟아 죽일 것이다"라고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해 곧 항복하였다.
15년 봄 정월에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고, 가을 7월에는 6부 및 남부 지방 주민들을 이곳에 옮겨 채웠다.
이 해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 신라의 시호법은 이때 비롯되었다.
23대 법흥왕
법흥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원종이고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어머지는 연제부인이고,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왕은 키가 7척이나 되었고,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여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3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용이 양산의 우물 가운데 나타났다.
4년 여름 4월에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하였다.
5년 봄 2월에 주산성을 쌓았다.
7년 봄 정월에 율령을 반포하고, 비로소 백관의 공복을 제정해 주색과 자색의 복색으로 관위의 등급을 매겼다.
8년에 사신을 양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9년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냈다.
11년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국경에 나가 새로 개척한 땅을 둘러보았는데, 가야국 왕이 찾아와서 만났다.
15년에 불법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왔는데, 일선군 사람 모례가 자기 집 가운데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편안히 머물게 하였다. 이때 양에서 사신을 보내 옷가지와 향을 내려주었는데,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쓰임새를 알지 못해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면서 두루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것을 보고 그 이름을 일컬어 말하였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자욱이 피어 오르는 까닭에 정성이 신성한 데 이르게 됩니다. 이른바 신성이라는 것은 삼보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니 첫째가 불보, 둘째가 법보, 셋째가 승보입니다. 만약 이것을 태우면서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한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때마침 왕녀의 병이 위독해 왕이 묵호자를 시켜 향을 사르고 발원을 드리게 했더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가 궁궐을 나와 모례를 보고 자기가 받은 예물을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 갈 데가 있어서 작별하고자 한다"라고 하더니, 조금 있다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 때에 이르러 아도 화상이라는 이가 있어 시중드는 사람 셋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생김새가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아도는 몇 년 동안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그를 시중들던 세 사람이 머물러 있으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이따금 불교를 믿고 받드는 이들이 생겼다.
이때 와서 법흥왕 역시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구설이 비등하므로 왕도 난처하였다. 이때 가까운 신하 이차돈이 왕에게 아뢰었다. "청컨대 제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논란을 진정시키소서!" 이에 왕이 말하였다. "본래 불도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가 대답하였다. "만약 불도가 펴질 수만 있다면 저는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왕이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물으니, 다들 말하였다. "지금 승려들을 보면 박박 깎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있으며, 강론하는 것은 괴이한 속임수요 떳떳한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저들을 제멋대로 놓아둔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까 염려되니, 저희들은 비록 이 자리에서 중죄를 입을지라도 감히 조칙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이차돈만이 홀로 말하였다.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범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은 다음에야, 범상하지 않은 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불교의 연원이 심오한 것을 듣고 보면 아마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말이 강고해 깨뜨릴 수 없다. 너만이 홀로 다른 말을 하니 둘 다 따를 수는 없다."
마침내 형리에게 내려 그의 목을 베려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해 말하였다. "내가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가게 되었구나. 만약 부처에게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을 때 반드시 기이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윽고 그의 목을 베자 잘린 자리에서 피가 솟구치는데, 색깔이 희어서 마치 젖과 같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 행사에 관한 일을 헐뜯지 못하였다.
16년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하였다.
18년 봄 3월에 고나련 부서에 명해 제방을 수리하였다. 여름 4월에 이찬 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해 국사를 총괄해 맡아보게 하였다. 상대등이라는 관직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다.
19년 금관국주 김구혜가 왕비 및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던,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자기 나라의 재물과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상등의 관위를 주었으며, 본래 그들 나라를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까지 이르렀다.
23년 처음으로 연호를 일컬어 '건원 원녀'이라고 하였다.
25년 봄 정월에 교서를 내려 외직의 관료들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27년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으며,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
24대 진흥왕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삼맥종이고,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의 아우인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부인으로 법흥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이다. 왕이 어렸기 때문에 왕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원년 8월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 관료들에게 관작을 1등급씩 올려주었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있었고,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2년 봄 3월에 눈이 1척이나 내렸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해 중앙과 지방의 군사 관련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5년 봄 2월에 흥륜사가 낙성되었다. 3월에 사람들이 출가해 승려가 되어서 불교를 신봉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6년 가을 7월에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아뢰었다.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을 기록해, 그 포찬할 것과 폄절할 것을 후세 만대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찬하지 않는다면 뒷날 무엇을 보겠습니까?" 왕이 수긍하여 대아찬 거칠부 등을 시켜서 문사들을 널리 모아 그들에게『국사』를 수찬하게 하였다.
9년 봄 2월에 고구려와 예인들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 주령을 보내 정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니 죽이고 사로잡은 적들이 매우 많았다.
10년 봄에 양에서 사신과 그곳에 들어가 공부하던 승려 각덕을 보내 부처의 사리를 전송해왔다. 왕은 백관에게 명하여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11년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시켰다.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해 군사를 내어 쳐서 두 성을 배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 명을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12년 봄 정월에 연호를 고쳐 '개국'이라 하였다.
3월에 왕이 순수하여 낭성에서 묵었는데,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이 하림궁에 머물며 그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작곡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이 열두 줄의 거문고를 만들어 열두 달의 음률을 상징하고, 곧 우륵을 시켜 그 곡을 짓게 하였다. 우륵이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투신해 오니, 그 악기를 가야금이라 하였다.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고, 승세를 몰아 10개 군을 빼앗았다.
13년에 왕이 계고와 법지와 만덕 등 세 사람에게 명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쳤으며,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을 다 이루자 왕이 그들에게 연주하게 하더니, "지난 번 낭성에서 들은 연주와 다르지 않구나!" 하고 후하게 상을 주었다.
14년 봄 2월에 왕이 관련 부서에 명해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했는데 황룡이 그 터에서 나타났다. 왕은 의아하게 여겨 궁궐을 고쳐 절을 만들고, 이름을 내려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이해 소비로 삼았다.
15년 가을 7월에 명활성을 수리해 쌓았다. 백제 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16년 봄 정월에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에 행차하여 영토를 개척하고 국경을 정하였다. 11월에 북한산에서 돌아왔는데, 왕이 지나오는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 1년 간의 납제를 면제해주고, 특별히 두 가지 사형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 원래대로 회복시켜 주었다.
17년 가을 7월에 비열홀주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삼았다.
18년에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다. 사벌주를 폐지하고 감문주를 두었으며, 사찬 기종을 군주로 삼았다.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19년 봄 2월에 귀족 집안의 자제 및 6부의 호민들을 옮겨서 국원경을 채웠다. 나마 신득이 포노를 만들어 바쳐 성 위에 설치하였다.
23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변경 주민들을 침략하였다.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9월에 가야가 배반하므로 왕이 이사부에게 명해 토벌하게 하고, 사다함을 그 부장으로 임명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치달려 전단문에 들어가 흰 깃발을 세우니, 온 성중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도착하니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왕이 좋은 밭과 사로잡은 포로 2백 명을 그에게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여 왕이 억지로 권해서야 받았다가, 포로들은 방면해 양인으로 만들어주고, 밭은 나누어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주니, 나라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25년에 사신을 북제에 보내 교역하였다.
27년에 왕자 동륜을 왕태자로 삼았다. 황룡사 짓는 일이 끝났다.
29년에 연호를 고쳐 '대창'이라 하였다.
33년 봄 정월에 연호를 고쳐 '홍제'라고 하였다. 3월에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 겨울 10월 20일에 전쟁에서 죽은 사졸들을 위해 바깥의 절에서 팔관연회를 일 동안 베풀었다.
35년 봄 3월에 황룡사의 장륙상 주조를 마쳤는데, 구리의 무게가 3만 5천 7근이었고 도금한 무게는 1만 1백 98푼이었다.
36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황룡사 장륙상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발꿈치까지 적셨다.
37년 봄에 비로소 원화를 만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벙법이 없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사람들이 무리지어 노닐도록 해서 그 행동거지를 살핀 다음에 천거해 쓰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어여쁜 여자 두 사람을 뽑으니 한 사람은 남모요, 또 한 사람은 준정이었다. 무리 3백여 명을 모았는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더니,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그녀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서 죽였다. 이에 준정은 죽음을 당하였고, 그 무리들도 화목을 잃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 뒤 다시 미모의 남자를 골라 단장하고 꾸며서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게 되었다. 낭도의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혹은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며, 산과 강을 찾아 노닐어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그 사람됨의 옳고 그름을 알아 그 가운데 훌륭한 이를 가려서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은『화랑세기』에서 말하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사가 여기
에서 생겨났다"라고 했던 것이다.
최치원은 난랑비 서문에서 말하였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름하여 '풍류'라고 한다. 이 가르침을 창설한 근원은『선사』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니, 실로 세 가지 가르침을 포함해 뭇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집에 들어와 부모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과 같은 것은 노나라 공자의 가르침이요, 아우런 작위적 일이 없는 가운데서도 말로 표현할 없는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근본 뜻이며, 모든 악행을 짓지 않고 모든 선행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인도 석가모니의 교화이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흥이라 하였으며,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더니,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스스로 법호를 법운이라고 하면서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그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 왕이 죽었을 때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25대 진지왕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사륜이요 진흐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이고, 왕비는 지도부인이다.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가 왕위에 올랐다.
원년에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다.
2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우리 서쪽 변경의 주와 군을 핌범하였다. 왕이 이찬 세종에게 명해 군사를 내보내 일선의 북쪽에서 격파하고, 3천 7백 명의 목을 베었다. 내리서성을 쌓았다.
3년 가을 7월에 백제의 알야산성을 빼앗았다.
4년 봄 2월에 백제가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서 산산성, 마지현성, 내리서성의 길을 막았다.
가을 7월 17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지라 하였으며, 영경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26대 진평왕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백정이요, 진흥왕의 태자 동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부인으로 갈문황 입종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으로 갈문왕 복승의 딸이다. 왕은 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신체가 장대하였으며, 품은 뜻이 굳건하고 식견이 밝아 사리에 통달하였다.
원년 8월에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왕의 친동생 백반을 진정 갈문왕으로, 국반을 진안 갈문왕으로 봉하였다.
2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임명하였다.
6년 봄 2월에 연호를 고쳐 '건복'이라 하였다. 3월에 조부령 한 명을 두어 공부(貢賦) 관련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승부령 한 명을 두어 수레 관련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7년 봄 3월에 가물어 왕이 정전에 자리하지 않고 평상시보다 음식의 가짓수를 줄였으며, 남당에 나가 친히 죄수들을 다시 조사해주었다.
8년 여름 5월에 우뢰와 벼락이 치더니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13년 가을 7월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8백 54보였다.
15년 가을 7월에 명활성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 보였으며, 서형산성은 둘레가 2천 보였다.
24년 가을 8월에 백제가 아막성에 쳐들어오니, 왕이 장군과 병사들에게 맞아 싸우게 하여 크게 이겼다. 귀산과 취향이 죽었다.
25년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므로, 왕이 친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았다.
27년 가을 8월에 군사를 내서 백제를 침공하였다.
30년에 고구려가 자주 국토를 침범하는 것을 우려해 수에 군사를 요청해서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이에 원광에게 명해 군사를 요청하는 표문을 짓게 하였더니, 원광이 말하기를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이를 없애는 것은 사문이 할 바가 아니나, 제가 대왕의 땅에 살면서 대왕의 물과 곡식을 먹는 바에야 감히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 하고, 곧 글을 지어 올렸다.
2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해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4월에 고구려가 우면산성을 함락시켰다.
33년에 왕이 수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했더니, 수 양제가 허락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가잠성을 1백일 동안 에워쌌다. 현령 찬덕이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해 죽고 성은 함락되었다.
35년 가을 7월에 수의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 이르니 백고좌를 베풀고, 원광 등 법사들을 맞이해 불경을 강설하였다.
38년 겨울 10월에 백제가 모산성에 쳐들어왔다.
40년에 북한산주의 군주 변품이 가잠성을 회복할 목적으로 군사를 내보내 백제와 싸웠다. 해론이 종군하여 적에게 달려들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43년 가을 7월에 왕이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45년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였다.
46년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우리의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 등 여섯 성을 에워쌌다. 이에 세 성이 함락당하고 혹은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가 봉잠, 앵잠, 기현 등 세 성의 병사를 합해 굳게 지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47년 겨울 11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교역하였다. 아울러 고구려가 길을 막아 교역할 수 없게 하고, 또 자주 침입한다고 호소하였다.
48년 가을 7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교역하였다. 당 고조는 주자사를 보내와 조서를 내려 고구려와 함께 화목할 것을 권유하였다.
8월에 백제가 주재성을 치자, 성주 동소가 막아 싸우다가 죽었다. 고허성을 쌓았다.
49년 봄 3월에 바람이 크게 불고, 흙이 섞인 비가 5일 동안 내렸다. 가을 7월에 백제 장군 사걸이 서쪽 변경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여 명을 잡아갔다.
50년 봄 2월에 백제가 가잠성을 에워싸니, 왕이 군사를 내보내 쳐부수었다. 여름에 크게 가물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비를 빌었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린 나머지 자녀를 팔았다.
51년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준과 서현,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을 침공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 진을 벌이는데 그 군사들의 기세가 매우 왕성하므로 우리 군사는 그거서을 보고 두려워 거의 다 싸울 마음이 없게 되었다. 유신이 말하였다. "나는 '옷깃을 흔들어 떨치면 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들어올리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들었다. 내가 바로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 즉시 말에 걸터 올라 검을 빼들고 적진을 향해 곧장 달려나가 세 번을 드나드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혹은 적장의 목을 베고 혹은 적군의 깃발을 뽑아 왔다. 여러 군사들이 그 승세를 타고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나아가 쳐서 5천여 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그 성이 그만 항복하였다.
검군전
검군은 대사의 관등을 가진 구문의 이들이다. 사량궁의 사인이 되었다. 건복 44년 8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망쳤다. 다음해 봄과 여름에 큰 기근이 있게 되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어 식량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때 궁중의 사인들이 같이 모의하여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 나누어가졌다. 검군은 홀로 받지 않았다.
사인들이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다 받는데 그대 혼자 거절하니 무슨 이유인가? 양이 적어서이면 더 달라고 하라." 검군이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근랑의 낭도에 이름을 올리고 풍월도를 닦은 사람이다. 진실로 의가 아니면 수천 금의 이익이 있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때 대일 이찬의 아들이 화랑이 되었는데 이름이 근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검군이 궁에서 나와 근랑의 집에 갔다. 사인들은 은밀히 모의하기를 "이 자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새어나갈 것이다" 하여 드디어 그를 불러들였다. 검군은 자기를 죽이기로 모의한 것을 알고 근랑과 헤어지며 말하기를, 금일 이후로는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근랑이 이유를 물으니 검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듭 물으니 그 대략을 이야기하였다. 근랑이 말하기를 "왜 해당 관에 고발하지 않는가?" 하니, 검군이 대답하였다. "자기가 죽는 것이 두려워 많은 사람들을 죄인되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 하니, "저들이 잘못되고 내가 바른데 도리어 내가 도망한단 말인가? 장부의 할 바가 아니다" 라고 하며 드디어 돌아갔다.
사인들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사과하는 척하며 은밀히 음식에 독약을 놓았다. 검군은 그것을 알고도 먹고 죽었다.
군자들이 말하였다. "검군이 죽지 않을 일에 죽었으니 태산보다 털을 더 중히 여긴 자라 할 수 있다."
52년에 대궁 뜰의 땅이 갈라졌다.
53년 봄 2월에 흰 개가 궁궐 담장 위에 올라갔다. 여름 5월에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그 사실을 알아차려 칠숙을 잡아다가 동쪽 시가에서 목을 베고, 아울러 그 9족을 죽였다. 아천 석품은 도망해 백제 국경까지 갔다가 처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돌아와 총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한 나무꾼을 만나 자기 옷을 벗어 나무꾼의 해진 옷과 바꾸어 입은 다음, 땔나무를 짊어지고 몰래 집에 왔다가 붙들려서 처형당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쳤는데, 위징이 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당 태종은 사신에 딸려 돌려보냈다. 흰 무지개가 궁궐 우물물을 머금고, 토성이 달을 범하였다.
54년 봄 정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평이라 하고, 한지에 장사 지냈다.
27대 선덕(여)왕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명민하였다. 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위에 올려 세우고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다.
전왕 때에 당에서 가져 온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더니, 덕만이 말하였다. "이 꽃은 비록 빼어나게 아름답지만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웃으며 묻기를,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라고 하니, 덕만이 대답하였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런 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무릇 여자가 아름다우면 남성들이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까닭에서입니다. 이 꽃이 빼어나게 아름다운데도 그것을 그린 위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꽃씨를 심었더니 과연 말 그대로였다. 그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원년 2월에 대신 을제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와 제 힘으로 살 수 없는 이들을 위문하고 구휼하였다. 12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으며, 1년 동안 여러 주와 군의 납세를 면제해주었다.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다. 분황사가 낙성되었다. 3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알만하였다.
5년 봄 정월에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왕이 병에 걸렸는데 의술과 기도가 모두 효험이 없자,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어 승려들을 모아 인왕경을 갈설하게 하였으며, 1백 명의 승려에게 도첩을 주었다.
여름 5월에 두꺼지바 옥문지에 크게 모여들었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두꺼비의 성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국경 지대에 땅 이름을 옥문곡이라 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으니, 생각건대 혹시 이웃 나라 군사가 몰래 그 가운데 잠입한 것이 아닐까?" 하고, 곧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수색하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갑사 5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곳에 매복하고 있었다. 알천이 이를 엄습해 모두 죽였다.
7년 봄 3월에 칠중선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35보를 옮겨 갔다. 가을 9월에 노란 꽃비가 내렸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겅의 칠중성을 침공하니,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해 산록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해 그들을 안정시키고 모이게 하였다.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이들이 매우 많았다.
8년 봄 2월에 하슬주를 북소경으로 만들고, 사찬 진주를 시켜 지키게 하였다. 가을 7월에 동해의 물이 붉어지고 뜨거워져서 물고기들이 죽었다.
9년 여름 5월에 왕이 자제들을 당에 보내 국학에 들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에서도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11년 가을 7월에 백제 왕 의자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아 당으로 가는 길을 끊으려 하니, 왕이 당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 위급한 사정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 싸움의 보복을 하고자 하여, 곧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에서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이가 바로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으며 사람이나 물건이 앞에 지나가도 개닫지 못하더니, 이윽고 말하기를 "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집어삼키지 못하겠는냐!" 하고, 즉시 왕에게 나아가 "제가 사명을 받들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은 평소에 춘추의 이름을 들었는데, 군사의 호위를 엄히 한 다음 그를 만났다. 춘추가 의견을 아뢰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처럼 잔인하고 탐욕스럽게 우리 영토를 침범하므로, 우리 임금께서 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하여 이렇게 저를 보내 대왕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구려 왕이 말하였다. "죽령은 몬래 우리 땅이니 네가 만약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 있다." 춘추가 대답하였다. "제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고자 하는 터에, 대왕께서는 환란을 구원해 이웃 나라와 잘 지낼 생각은 않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고 겁박하여 땅을 되돌려줄 것만을 요구하시니, 저는 죽음이 있을지언정 그 밖의 것은 모르겠습니다." 고장은 그의 말이 불손한 데 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는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 왕에게 알렸다. 왕이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해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몰아 한간을 건너 고구려 남쪽 국경에 들어서자, 구구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춘추를 풀어 돌려보냈다. 왕이 유신을 압량주 군주로 임명하였다.
12년 가을 9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아뢰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 나라를 침범하고 능멸하여 여러 차레 공격을 받은 것이 수십 성입니다. 저들 두 나라는 군사를 연합해 기필코 빼앗으려 하여 이번 9월에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하니, 우리 나라의 사직이 필시 온전할 수 없을 듯합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 대국에 운명을 맡기니, 원컨대 일부 군사를 빌려 구원해주시기 바랍니다."
태종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실로 너희가 두 나라의 침구에 시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화친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발길을 돌리자마자 뉘우치던 것을 뒤집어버리니, 이는 생각이 너희 나라를 집어삼켜 없애고 그 땅을 갈라 차지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너희 나라에서는 무슨 기묘한 꾀를 마련해 그들이 막무가내로 날뛰는 것을 모면하려 하는가?" 사신이 말하였다. "우리 왕께서는 일이 막다른 곳에 이르고 계책이 다해 오직 위급한 사정을 대국에 알려 나라의 보전을 바랄 따름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내고 거란과 말갈을 함쳐 곧바로 요동으로 들어가면, 너희 나라는 저절로 풀려나 1년 동안은 포위 상태를 누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이어지는 군사가 없는 것을 알면 도리어 침략과 모욕을 함부로 하여 네 나라가 다 같이 소란스러워질 것이니, 너희도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대책이 될 것이다. 나는 또 너희에게 수천 개의 붉은 옷과 붉은 기을 줄 수 있으니, 두 나라 군사가 이르렀을 때 그것들을 세워 벌여두면 저들이 보고 우리 나라 군사인 줄로 알아 반드시 모두 달아날 것이다. 이것이 둘째 대책이 될 것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함을 믿고서 전투 병기를 정비하지 않고, 남녀가 어지러이 뒤섞여 서로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다. 우리는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무장한 군사를 실어 소리없이 바다에 떠 곧바로 그 땅을 습격할 것이다. 또 너희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웃 나라들이 업신여기며 임금의 근본을 잃고 도적을 불러들여 평안할 날이 없는 것이니, 내가 종친 한 사람을 보내 너희 나라 임금으로 임명하겠다. 그러나 그 자신 홀로 왕노릇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맡아 호위하다가 너희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너희에게 맡겨 스스로 지키게 할 것인 바, 이것이 셋째 대책이 될 것이다. 너는 잘 생각하라. 장차 어느 대책을 따르겠는가?" 사신은 다만 "예"라고 할 뿐 대답이 없었다. 태종은 그가 용렬하고 무능하여 군사를 빌리고 위급함을 호소할 인재가 못되는 것을 한탄하였다.
13년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문서를 지니고 와 고구려에 주게 하고, 이어 말하였다. "신라는 운명을 우리 나라에 맡기고 조공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너희는 백제와 함께 마땅히 곧 군사를 거둘 일이다. 만약 다시 신라를 친다면 내년에는 의당 군사를 내서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개소문이 현장에게 말하였다. "고구려와 신라는 원수가 되어 틈이 벌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 지난 날 수가 침략했을 대 신라가 그 틈을 타고 고구려의 5백 리 땅을 탈취해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 그 땅과 성들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이 전쟁은 아마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현장은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다시 추궁해 이야기할 것인가?"라고 했으나, 소문은 끝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크게 이기고 일곱 성을 빼앗았다.
14년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유신이 백제를 정벌하고 돌아와서 아직 왕을 뵙지도 않았는데, 백제의 대군이 다시 변경을 침구하였다. 왕이 유신에게 출정을 명하니 유신은 마침내 집에도 가지 않고 나가 쳐부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유신이 □□□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한 터에 또 백제가 다시 와서 침범한다는 급보가 이르렀다. 왕은 사태가 위급하므로 말하였다. "나라가 보존되고 멸망하는 것이 공의 한 몸에 매였으니,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가서 대책을 꾀하기 바란다." 유신이 또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해 서쪽으로 행군하는데, 길이 자기 집 문 앞으로 지나게 되었다. 온 집안의 남녀가 우러러보면서 울었으나,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3월에 황룡사탑을 처음으로 세우니 이는 자장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여름 5월에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침략하자 왕은 군사 3만 명을 내어 이를 도왔다. 백제가 이 빈 틈을 타고 나라의 서쪽 일곱 성을 습격해 탈취하였다.
16년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반역을 꾀하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성공하지 못하였다.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 지냈다.
28대 진덕(여)왕
진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승만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 갈문왕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승만은 자태와 바탕이 넉넉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이나 되었고 손을 늘어뜨리면 무릎을 넘었다.
원년 정월 17일에 비담을 목베어 죽었는데, 이에 연루되어 죽은 이가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 군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연호를 고쳐 '대화'라고 하였다. 8월에 혜성이 남방에 나타나고 또 뭇 별들이 북방으로 흘러갔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 감물, 동잠의 세 성을 에워쌌다. 왕이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악전고투하여 기운이 다했을 때 유신의 휘하 비령자와 그의 아들 거진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싸우다 죽으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떨쳐 일어나 쳐부수어 적군 3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에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2년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백제 장군 의직이 서쪽 변경을 침범해 요거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이를 근심해 압독주 도독 유신에게 대책을 강구하라 하였다. 유신이 이에 사졸들을 훈계하고 독려하여 거느리고 나가자, 의직이 가로막았다. 유신이 군사를 세 갈래 길로 나누어서 사이에 끼고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패해 달아났다. 유신이 달아나는 그들을 추격해 거의 다 죽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겨울에 감질허를 사신으로 당에 보냈는데, 태종이 어사에게 물었다. "신라가 신하로 우리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일컫는가?" 질허가 말하였다. "일찍이 대국 조정에서 정삭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 이래 사사로이 연호를 가져왔습니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감히 그러하겠습니까?" 태종이 수긍하였다. 이찬 김춘추와 그이 아들 문왕을 당에 보내 입조시켰더니, 태종이 광록경 유형을 교외까지 보내 맞이하였다. 이윽고 일행이 도착하자 춘추의 위의가 빼어나고 늠름한 것을 보고 두터이 예우하였다. 춘추가 국학에 나아가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고자 청하니, 태종이 허락하였다.
한 번은 연회에 불러 만나보고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내려주면서 물었다. "그대는 무슨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가?" 춘추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우리 나라는 후미진 바다 한 구석에 있어서 공순하게 대국 조정을 섬긴 지 여러 해이나, 백제가 억세고도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범하고 능멸함을 멋대로 하더니, 급기야 지난 해에는 대군을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짓밞아서 대국에 입조할 길조차 막아버렸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조정의 군사를 빌려주시어 저 흉악한 무리를 잘라 없애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 백성들은 남김없이 저들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이니, 그러고서야 산 넘고 물 건너 조알하고 조공하는 일은 더 이상 바랄 수가 없을까 합니다." 태종이 깊이 동감하고 군사를 출정시켜줄 것을 허락하였다. 춘추가 또 관리들의 공복을 고쳐서 중국 제도를 따르겠다고 했더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의복을 내다가 춘추와 그 수행원들에게 내려주고, 조서를 내려 춘추를 특진으로 삼고 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 작위를 수여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오려 할 때에는 조칙을 내려 3품 이상 관리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전송하게 하니, 그 예우함이 매우 면밀하였다. 춘추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저에게 아들 일곱이 있으니, 폐하 곁을 떠나지 않고 숙위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곧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 □□에게 명해 머물게 하였다.
춘추는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는데, 그를 수행하던 온군해가 높다란 관모와 큰 옷차람으로 배 위에 앉아 있었더니, 고구려 순라병들은 그를 춘추로 여기고 잡아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니, 왕이 이 일을 듣고 애통해 하였으며, 온군해에게 대아찬의 관위를 추증하고 그 자손들에게 넉넉히 포상하였다.
3년 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 조정의 의관 복제를 착용하였다.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석토성 등 일곱 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 죽지, 천존 등에게 명해 나가 막게 했는데,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싸우기를 열흘 동안이나 하였지만 물리치지 못하고 도살성 아래 주둔하게 되었다. 유신이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와서 정탐을 할 것이니,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체하고 함부로 누구냐고 묻지 말라!" 이어 사람을 시켜 진영 사이를 돌며 말하게 하기를 "견고히 지켜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서 결전하리라!"라고 하였다. 백제 첩자가 이를 듣고 은상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은상 등은 증원군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해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등이 진격해 적들을 크게 쳐부수고 장교 1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또 군졸 8천 9백 80명의 목을 베고 전투마 1만 필을 노획했으며, 병장기 같은 것이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4년 여름 4월에 교서를 내려 진골로서 관위에 있는 이는 상아홀을 지니게 하였다. 6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백제 군사를 쳐부순 사실을 알렸다. 또 왕은 5언 율시의 '태평송'을 비단에 수를 놓아 춘추의 아들 법민을 시켜 당 고종에게 바쳤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 '영휘'를 쓰기 시작하였다.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와 백관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새해를 축하하는 예법이 이 때 비롯되었다.
2월에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고, 파진찬 죽지를 집사중시로 임명해 기밀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6년 봄 정월에 파진찬 천효를 좌리방부령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수도에 큰 눈이 내렸으며, 왕궁의 남쪽 문이 까닭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8년 봄 3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 지냈다.
신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까지 28명의 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이라 하였다.
29대 태종 무열왕
태종 무열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서현 각찬의 딸이다.
왕은 풍채가 아륾답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 진덕왕을 섬겨 관위는 이찬을 지냈다.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섭정을 청했으나, 알천은 굳게 사양해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오늘날 덕망이 높고 두터운 것이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제할 영웅 호걸이라고 할 만하다." 마침내 춘추공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춘추는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부득이해 왕위에 나아갔다.
원년 여름 4월에 왕의 아버지를 추봉해 문흥대왕이라 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라 하였으며,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5월에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해 율령을 상세히 참작해서 이방부격 60여 조를 찬수해 제정하게 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파진찬 문충을 중시로 삼았다. 고구려와 백제 및 말갈이 군사를 연합해 우리 북쪽 영토를 침략하여 33개 성을 빼앗았다. 왕이 사신을 당에 보내 도움을 청했더니 3월에 당에서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우위중랑장 소정방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삼고, 여러 아들 가운데 문왕을 이찬으로, 노차를 해찬으로, 인태를 각찬으로,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에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에서는 흰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고, 발은 여덟 개였다. 왕의 딸 지조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 고루를 월성 안에 세웠다.
4년 가을 7월에 일선군에 홍수가 나서 물에 빠져 죽은 이가 300여 명이나 되었다. 동쪽 토함산에서는 땅이 불타 3년 만에야 꺼졌다. 흥륜사 문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 북쪽 바위가 무너지면서 부서지더니 쌀이 되었다. 그것을 먹어보니 창고의 묵은 쌀 같았다.
5년 봄 정월에 중시 문충의 직위를 고쳐 이찬으로 하고, 문왕을 중시로 하였다. 3월에 왕이 하슬라는 그 땅이 말갈과 이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편안할 수 없다고하여, 경을 폐지하고 주로 삼아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으로 북진을 만들었다.
6년 여름 4월에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자, 왕이 바야흐로 이를 치고자 하여 사신을 당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가을 8월에 아찬 진주를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9월에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진상하였다. 공주 기군강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1백 척이었고, 이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었는데, 당에 군사를 요청했던 일에 회보가 없는 까닭에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났는데, 마치 죽은 신하인 장춘과 파랑 같았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비록 몸은 백골이지만 여전히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 당에 가서 고조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 백제를 치게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왕께서 근심하며 기다리는 것이 이와 같으시므로 아룁니다"라고 하더니,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왕은 크게 놀라 기이한 일이라고 여겨 두 집안의 자손들에게 두터이 상을 주고, 아울러 해당 관리에게 명해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7년 봄 정월에 상대등 금강이 죽자,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서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륙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 백제를 치게 했으며, 왕에게도 칙명을 내려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성원하게 하였다.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를 떠나, 6월 18일에 남천정에 이르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니 전함이 꼬리를 잇대었으며, 해류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10일에 백제 남쪽에 도착해서 대왕의 병력과 회합해서 의자의 도성을 무찌르려고 합니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대군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계시는데, 대장군께서 왔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틀림없이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부리나케 달려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면서 법민을 되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하자 왕이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 등에게 명해 정예 병력 5만 명을 이끌고 그에 부응하게 하였으며, 왕 자신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의 들로 진군해 가니, 백제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먼저 요해처를 차지하고 세 곳에 진영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제 번을 싸웠으나 불리하였으며, 사졸들은 힘이 다하고 말았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이에게는 충성보다 귀중한 것이 없고, 자식의 도리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 위기를 당해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가 함께 온전히 갖추어질 것이다." 이에 반굴이 "삼가 분부 말씀 들어 알겠습니다" 하고, 곧장 적진으로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좌장군 품일도 이들 관장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 나이가 겨우 열여섯 살이지만 뜻과 기백이 제법 용맹하니 오늘 싸움에서 3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관장이 "예!" 하고는, 갑옷에 말을 타고 창 하나를 가지고 적진으로 달려 들어갔으나, 적들에게 사로잡혀 계백에게 보내졌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더니 그가 어린 나이에도 용맹한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이내 탄식해 말하기를 "신라를 적대할 수 없겠구나. 소년조차 이러하니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떠하겠는가!" 하고는 그만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은 아버지에게 고하기를 "제가 적군 속에 들어가 적장을 베고 그 기를 뽑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적진을 향해 질풍처럼 쳐나갔다. 계백이 그를 붙잡아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잡아 드니, 흐르는 피가 옷소매를 적셨다. 품일이 말하였다.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만 같구나! 나라 일에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3군에서 이 모습을 보고 격정이 솟구쳐 죽음을 각오하고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자, 백제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이 여기서 죽었으며, 좌평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 날 정방과 부총관 김인문 등은 기벌포에 도착해 백제군을 만나 맞아 쳐서 크게 이겼다. 유신 등이 당의 군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뒤늦게 왔다 하여 신라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 베려 하였다. 그러자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의 전투를 보지 않은 터에 기일에 늦은 것으로 죄를 삼으려 하니, 나는 무고하게 치욕을 당할 수 없다.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을 벌인 뒤에 백제를 쳐부수리라." 이윽고 도끼를 들고 군문 앞에 서니, 머리털이 꼿꼿이 곧추서고 허리춤에서는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정방의 발등을 밟으면서 "신라군이 변랸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정방이 곧 문영에게 들씌웠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의 왕자가 좌평 각가를 시켜 당의 장수에게 글을 보내 철병할 것을 애걸하였다.
12일에 당과 신라의 군사가 □□□ 의자의 도성을 에워싸고자 소부리의 들로 나아갔다. 정방은 꺼려지는 바가 있는지 앞에 나서지 못하는데, 유신이 그를 설득해 두 나라 군사가 용감하게 네 갈래로 일제히 떨쳐 나갔다. 백제의 왕자가 또다시 상좌평을 시켜서 고기와 가축 등을 풍성하게 보냈으나 정방이 받지 않고 물리쳤으며, 백제 왕의 서자 궁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정방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13일에 의자는 측근을 거느리고 밤에 달아나서 웅진성으로 들어가고, 의자의 아들 융과 대좌평 전복 등이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지난 날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어버린 탓에 내가 20년 동안 가슴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더니, 오늘에야 네 목숨이 내 손 안에 들었구나!" 융은 땅에 엎드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18일에 의자가 태자와 웅진 방령의 군사 등을 이끌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의자가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에서 소부리성에 이르렀으며, 제감 천복을 당에 보내 승전 보고를 하였다.
8월 2일에 술자리를 크게 열어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정방 및 장수들과 함께 높은 당 위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당 아래 앉혔으며, 간혹 의자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날 모척을 잡아 죽였다. 모척은 신라 사람이었는데 백제로 도망해 들어가서 대야성의 검일과 함께 모의해 성을 함락시켰으므로 그의 목을 벤 것이다. 또 검일을 붙방아 그이 죄를 꼽기를 "네가 대야성에 있을 때 모척과 모의해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살라 없애 온 성 안에 먹을 것이 떨어져 패멸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요, 품석 부부를 강박해 죽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며, 백제와 함께 와서 본국을 공격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이다" 하고는,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잔당들은 남잠, 정현 등의 성에 웅거해 있었고, 또 좌평 정무는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에 주둔하면서 당과 신라 사람들을 노략하였다.
26일에 임존의 큰 목책을 공격했으나 적의 병력이 많고 지세가 험준해 이기지 못하였으며,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부수었다.
9월 3일에 낭장 유인원이 병력 1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남아 지키게 되었는데,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 급찬 길나와 함께 병력 7천 명을 거느리고 그를 도왔다. 정방은 백제 왕 및 왕족, 신료 93명,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갔으며, 김인문과 사찬 유돈, 대나마 중지 등이 함께 갔다.
23일에 백제의 잔당들이 사비에 들어와서 사로잡혀 항복한 이들을 빼앗아가려 하였다 유수 유인원이 당과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서 쫓았다. 적들은 물러나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가 너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모여 주둔하면서 틈을 엿보아 성읍을 노략하였다. 백제 사람 가운데 등을 돌려 그들에게 호응하는 성이 20여개나 되었다.
당 고조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보내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28일에 삼년산성에 도착해 조서를 전하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해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해 섰다. 칙명을 전한 다음 문도는 고조가 보낸 물건을 왕에게 주려다가 갑작스레 발작이 일어나 그 자리에서 죽었으므로, 수행원이 대리해 일을 마쳤다.
10월 9일에 왕이 태자와 여러 군단을 거느리고 이례성을 공격해, 18일에 성을 빼앗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20여 성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30일에 사비의 남쪽 산마울에 있던 백제군이 목책을 쳐서 1천 5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1일에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했는데 군주 필부가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5일에 왕이 계탄을 건너 왕흥사잠성을 쳐서 7일만에 이겼으며,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22일에 왕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전공을 평가해 게금족 선복을 급찬으로 삼고, 군사 두질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 미지활, 보홍이, 설유 등 네 사람에게도 관직을 차등있게 추증하였다. 백제 사람들도 아울러 재주를 헤아려 임용했는데, 좌평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 자간에게는 일길찬의 관위를 수여해 총관에 보임하였고, 은솔 무수에게는 대나마의 관위를 수여하고 대감에 보임했으며, 은솔 인수에게는 대나마의 관위를 주어 제감에 임명하였다.
8년 봄 2월에 백제의 잔당들이 사비성에 쳐들어왔다.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삼아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와 아찬 충상 등을 부장으로 하고,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이찬 진왕을 부장으로 했으며, 아찬 의복을 하주장군으로, 무훌과 욱천 등을 남천대감으로, 문품을 서당장군으로, 의광을 낭당장군으로 삼아서 달려가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 중간쯤 왔을 대 품일이 휘하 군사를 나누어 두량윤성 남쪽으로 먼저 가서 진영 세울 곳을 둘러보았다. 이 때 백제 사람들이 우리 진영이 정돈되지 못한 것을 보고 갑작스레 튀어나와 불의에 급습하니, 우리 군사가 크게 놀라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대군이 도착해 고사비성 바깥에 주둔하고 두량윤성으로 진공했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되돌리니, 대당과 서당이 앞서 행군하고 하주 병력이 후군이 되어 행군하였다. 빈골양에 이르러 백제 군사를 만나 서로 싸우다 패해 물러나니, 죽은 이는 비록 적었지만 잃어버린 병장기와 군수물자가 매우 많았다. 상주와 낭당의 군사는 각산에서 적을 만나 진격해 물리치고, 마침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서 2천 명을 잡아 목을 베었다. 왕은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를 증파해 구원하게 했는데, 자시혜진에 이르렀을 때 선발군이 철수하여 가소천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그냥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에 대해 그 책임을 따져서 차등을 두어 처벌하였다.
5월 9일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과 말갈 장군 생해가 군사를 합해 술천성에 쳐들어 왔다가 이기지 못하자, 방향을 바꿔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포차를 벌여놓고 돌을 쏘아 날리니, 맞는 곳마다 성가퀴와 누옥이 속속 무너졌다. 성주인 대사 동타천은 사람들에게 마름쇠를 성밖에 던져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 창고를 헐어내 그 재목을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얽고 밧불로 그물 매듭을 쳐서 마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쳐 매달게 했으며, 그 안쪽에 노포를 설치해 지켰다. 당시 성 안에는 겨우 남녀 2천 8백 명이 있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리고 허약한 이들까지 능숙하게 격려해 강대한 적들과 맞서 버틴 것이 무릇 20여 일이었다. 그러나 식량이 바닥나고 힘은 다하였다. 이에 동타천이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느닷없이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우뢰와 비가 벽력같이 쏟아지니, 적들은 의아해하고 두려워하며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왕이 동타천을 가상히 여겨 표창하고 대나마의 관위에 발탁하였다.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에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보가 되더니,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이라고 하였으며, 영경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묘호를 올려 태종이라 하였다. 당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30대 문무왕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법민이고 태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로 소펀 서현의 막내딸이요 유신의 누이이다.
그녀의 언니가 꿈속에서 서형산 마루에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오줌이 흘러 나라 안에 가득 찼다. 꿈을 깨어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동생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 하고는, 비단 치마를 꿈값으로 주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공을 차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내고 말았다. 유신이 말하였다.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 이윽고 함께 집으로 가서 술자리를 벌여놓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꿰매라고 했는데, 보희는 사정이 있어 나오지 않고 그 동생이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달았다. 담백한 화장과 가벼운 옷단장에 빛나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를 눈부시게 하였다. 춘추가 이를 보고 기뻐하여 곧 청혼하고 성례를 했으며, 뒤미쳐 임신해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가 법민이다. 왕비 자의왕후는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자태가 영특했으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원년 6월에 당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인문과 유돈 등이 와서 왕에게 고하였다. "당 고종이 이미 소정방을 보내 35도의 수군과 육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면서, 드디어 왕께도 군사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비록 상중이나 고종의 칙명을 어기기가 어려울까 합니다."
가을 7월 17일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인문, 진주, 흠돌을 대당장군으로, 천존, 죽지, 천품을 귀당총관으로, 품일, 충상, 의복을 상주총관으로, 군관, 수세, 고순을 남천주총관으로, 술실, 달관, 문영을 수약주총관으로, 문훈, 진순을 하서주총관으로, 진복을 서당총관으로, 의광을 낭당총관으로, 위지를 계금대감으로 임명하였다.
8월에 대왕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시이곡정에 이르러 머물렀을 때, □□ 사자가 와서 보고하였다. "백제의 잔당들이 옹산성에 웅거해 길을 막고 있으므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왕이 먼저 사신을 보내 그들을 타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9월 19일에 대왕이 웅현정에 나아가 머물면서 여러 총관들과 대감들을 집결시켜놓고 친히 나와 훈계하였다. 25일에 군사를 내보내 에워사고, 27일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을 불사른 다음 수천 명을 베어 죽이고서야 마침내 항복을 받았다. 전공을 논의해 각간이나 이찬으로서 총관으로 있는 이들에게는 칼을 내려주고, 잡찬, 파진찬, 대아찬으로서 총관으로 있는 이들에게는 창을 주었으며, 그 이하는 각각 관위를 1품씩 올려주었다. 웅현성을 쌓았다. 상주총관 품일이 일모산군 태수 대당과 사시산군 태수 철천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을 쳐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백제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가 무리들과 함께 의논해 항복하였다. 조복에게는 급찬의 관위를 주고 아울러 고타야군 태수 직을 수여했으며, 파가에게도 급찬의 관위를 주고 겸하여 밭과 집과 옷가지를 내려주었다.
겨울 10월 29일에 대왕이 당 고종의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수도로 돌아왔다. 당의 사신이 조상하고 위로했으며, 겸하여 조칙으로 전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고 여러 빛깔의 비단 5백 단을 증여하였다. 유신 등이 군사를 쉬게 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함자도총관 유덕민이 와서 칙지를 전해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고 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유신과 인문, 양도 등 아홉 명의 장군에게 명해 수레 2천여 대에다가 쌀 4천 석과 조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18일에 풍수촌에서 묵었다. 얼음이 미끄럽고 길이 험해 수레가 갈 수 없으므로 짐을 모두 소와 말에 실었다. 23일에 칠중하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 귀당제감 성천과 군사 술천 등이 이현에서 적병을 만나 쳐죽였다.
2월 1일에 유신 등이 장새에 이르니 평양과의 거리가 3만 6천 보 였다. 먼저 보기감 열기 등 15명을 보내 당의 군영으로 가게 하였다. 이 날 바람과 눈으로 날씨가 몹시 차서 얼어붙을 지경이었으므로, 사람과 말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6일에 양오에 이르렀다.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 드을 보내 군량을 전해주고, 소정방에게 은 5천 7백 푸노가 가는 베 30필, 두발 30냥, 우황 19냥을 선물하였다. 소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싸움을 그만두고 돌아가버렸다. 유신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되짚어 과천을 건넜다. 고구려 군사들이 쫓아오자 군사를 되돌려 싸워서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소형 아달혜 등을 사로잡았으며, 노획한 병장기가 1만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전공을 논의해 본피궁의 재화와 전장과 노복을 반으로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내려주었다.
탐라국주인 좌평 도동음률이 와서 항복하였다. 탐라는 무덕 연간 이래로 백제에 신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좌평으로 관직의 이름을 삼았는데, 이 때 와서 우리에게 항복하고 속국이 되었다.
8월에 백제의 잔당들이 내사지성에 모여들어 악행을 하므로, 흠순 등 19명의 장군들을 보내 쳐부수게 하였다. 대당총관 진주와 남천주총관 진흠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아 한가로이 방일하면서 나라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마침내 베어 죽이고 아울러 그 일족을 다 죽였다.
사찬 여동이 어머니를 때렸더니 하늘에서 우뢰가 울리고 비가 퍼붓는 가운데 벼락을 맞아 죽었는데, 그 몸 위에 '수□당(須□堂)'의 세 글자가 씌여 있었다.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3년 봄 정월에 남산신성에 긴 창고를 짓고 부산성을 쌓았다. 2월에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거물성과 사평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으며, 덕안성을 공격해 1천 70명의 목을 베었다.
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과 승려 도침이 전왕의 아들 부여풍을 맞이해 왕으로 세우고, 유진랑장 유인원을 웅진성에서 포위하였다. 당 고종이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삼아 전 도독 왕문도의 병력을 통솔해 우리 군사와 함께 백제 진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도중에 여기저기에서 싸워 진지를 함락시키니 향하는 곳마다 막아서는 이가 없었다. 복신 등은 유인원을 에워쌌던 것을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가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여 그의 군사를 아우르고 당에 저항해 도망한 이들을 불러들여 세력이 매우 커졌다. 유인궤는 유인원과 합세해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종이 조서를 내려 우위위장군 손인사를 보내 군사 40만 명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이르러서 웅진부성으로 나가게 하였다. 욍이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들을 거느리고 그들과 합세해 두릉윤성과 주류성 등 여러 성들을 쳐서 모두 함락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내 달아나고,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은 그들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는데, 유독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해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이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군사를 되돌려 설리정으로 왔다. 전공을 논의해 차등있게 포상을 시행하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또 의복을 만들어 머물로 지키고 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지급하였다.
4년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 들어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아찬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았다.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역시 중국의 의복을 입게 하였다.
2월에 관련 부서에 명해 여러 왕들의 능원에 각각 백성 20호씩을 옮겨 살게 하였다. 각간 김인문과 이찬 촌존이 당의 칙사 유인원 및 백제의 부여륭과 함께 웅진에서 맹약을 하였다.
3월에 백제 잔당이 사비산성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키자, 웅진 도독이 군사를 일으켜 쳐부수었다. 지진이 있었다. 성천과 구일 등 28명을 웅진부성에 보내 당나라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장군 인문, 품일, 군관, 문영 등에게 명해 일선과 한산 두 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부성의 병력과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쳐서 패멸시켰다.
8월 14일에 지진이 있어 백성들의 가옥이 무너졌는데, 남쪽 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사람들이 함부로 재화와 전답을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5년 봄 2월 중시 문훈이 은퇴하자 이찬 진복을 중시로 삼았다. 이찬 문왕이 죽으니, 왕자의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와 조문하고 겸하여 자줏빛 옷 한 벌, 허리띠 한 벌, 채색 능직 비단 1백 필, 생초 2백 필을 보내왔다. 왕이 당의 사신에게 금과 비단을 더욱 두터이 주었다.
가을 8월에 왕이 칙사 유인원 및 웅진 도독 부여륭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에서 맹약을 하였다. 처음에 백제가 부여장 때부터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자주 강토를 침노하므로 우리가 사신을 들여보내 구원을 요청하느라 사신들의 왕래가 길에 이어졌는데,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다음 군사를 되돌리자, 그 남은 무리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진수사 유인원 및 유인궤 등과 함께 몇 해 동안이나 이들을 경략한 끝에 차츰 평정하게 되었다 이에 당 고종은 부여륭에게 조서를 내려 돌아가서 남은 백성들을 위무하고, 나아가 우리와 화친하라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흰 말을 잡아 맹세하는데, 먼저 하늘과 땅 및 산천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 입에 백마의 피를 머금었다.
피 바르는 절차를 마친 다음 제물들은 제단의 북쪽 땅에 묻고, 그 문서는 우리의 종묘에 간직해 두었다. 이리하여 유인궤는 우리의 사신과 백제, 탐라, 왜 등 네 나라의 사신을 거느리고 뱃길로 서쪽으로 돌아가서 태산의 제사에 참석하였다. 왕자 정명을 태자로 삼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겨울에 일선주와 거열주의 주민들이 군수품을 하서주로 수송하였다.
6년 봄 2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에 영묘사에 화재가 있었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천존의 아들 한림과 유신의 아들 삼광이 모두 나마로서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겨울 12월에 당에서는 이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 안륙 출신 학처준을 보좌로 삼아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의 권신 연정토가 12성과 7백 63호, 3천 5백 43명을 이끌고 와서 투항하였다. 연정토와 그 예하 관료 24명에게는 옷가지와 식량과 집을 지급하고 왕도와 주, 부 등에 안치하였으며, 그 가운데 8개 성은 완비되어 있었으므로 사졸들을 보내 진무해 지키도록 하였다.
7년 가을 7월에 3일 동안 큰 술자리를 베풀었다. 당 고종이 조칙을 내려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쟁터에 가게 하니, 왕이 즉시 지경을 파진찬으로,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 고종이 칙령으로 일원 대아찬을 운휘장군으로 삼으니, 왕이 명하여 궁궐 뜰에서 칙명을 받게 하였다. 대나마 집항세를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에게는 비열도를 따라서, 그리고 우리 군사를 징발해서는 다곡과 해곡의 두 길을 따라서 평양으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이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수도를 출발해, 9월에 한성정에 이르러, 영공을 기다렸다.
겨울 10월 2일에 영공이 평양성 북쪽 2백 리 지점에 이르러 이동혜촌주 대나마 강심을 보내 거란 기병 80여 명을 거느리고 아진함성을 지나 한성에 도착해서 편지를 보내와 군사 동원 기일을 독촉하니, 대왕이 그대로 좇았다. 11월 11일에 장새에 이르렀을 때,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왕의 군사 역시 되돌아왔다. 아울러 강심에게 급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 5백 석을 내려주었다.
12월에 중시 문훈이 죽었다. 당의 유진장군 유인원이 천자의 칙명을 전해 고구려 정벌을ㄹ 도우라 하고, 아울러 왕에게 대장군의 정절을 내려주었다.
8년 봄에 아마가 와서 항복하엿따. 원기와 정토를 당에 들여보냈더니, 정토는 그곳에 남아 돌아오지 않고 원기만 돌아왔다. 이후로는 여자를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고종의 조칙이 있었다.
3월에 차진찬 지경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비열홀주를 설치하고, 이어 파진찬 용문을 총관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혜성이 천선성 자리에 머물렀다.
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으로 삼고 각간 김인문, 흠순, 천존, 문충과 집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개원, 흠돌을 대당총관으로 삼았다. 또 이찬 진순과 죽지를 경정총관으로 , 이찬 품일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총관으로, 이찬 인태를 비열도총관으로, 잡찬 군관과 대아찬 도유, 아찬 용장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잡찬 숭신과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를 비열성주 행군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선광과 아찬 장순, 순장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파친찬 의복과 아찬 천광을 서당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을 계금당총관으로 삼았다.
22일에 웅진부성의 우인원이 귀간 미힐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 및 한성 등 2군 12성이 귀순하여 항복했음을 알려오니, 왕이 일길찬 진공을 보내 치하하였다. 인문, 천존, 도유 등이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병력을 거느리고 당의 군영으로 갔다. 27일에는 왕이 수도를 떠나 당의 군영으로 가고, 29일에는 여러 방면의 총관들이 떠나갔다. 왕은 유신이 풍병에 걸렸다 하여 수도에 남아 있도록 하였다. 인문 등이 영공을 만나 영류산 아래로 진군하였다.
가을 7월 16일에 왕이 한성주에 도착해서 여러 총관들에게 교시하여, 가서 당나라 군사와 회집하에 하였다. 문영 등은 사천의 들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9월 21일에 당나라 군사와 합세해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게 가서 항복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영공이 왕 보장과 왕자 복남, 덕남 및 대신 등 20여만 명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이때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 돌아가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홍원도 일행을 따라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멸망시킬 때 왕은 한성을 떠나 평양을 목표로 하여 일차양에서 머물다가, 당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겨울 10월 22일에 유신에게 태대각간의 관위를 내려주고, 김인문에게는 대각간을 주었으며, 그밖에 이찬의 장군 등은 모두 각간으로 삼고, 소판 이하는 모두 관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 대당소감 본득은 사천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고, 한산주 소감 박형한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여 공로가 으뜸이었으며, 흑악령 선극은 평양성 대문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모두 일길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조 1천 석을 내려주었다. 서당당주 김둔산은 평양 군영 전추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사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조 7백 석을 내려주었다. 군사인 남한산의 북거는 평양성 북문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술간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 1천 석을 내려주었다 군사인 부양의 구기는 평양의 남교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술간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 7백 석을 내려주었다. 가군사인 비열홀의 세활은 평양의 소성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고간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 5백 석을 내려주었다. 한산주 소감 김상경은 사천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공로가 으듬이었으므로, 일길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조 1천 석을 내려주었다. 아술의 사찬 구율은 사천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나와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군령도 없이 멋대로 위험한 길에 들어갔다 하여 그 전공이 비록 으뜸이지만 등록되지 않았다. 그러자 구율은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목을 매서 죽으려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구해 죽지 못하였다.
25일에 왕이 수도로 돌아오는 도중 욕돌역에 이르자 국원경의 사신 용장 대아찬이 사사로이 자리를 베풀어 왕과 여러 시종들을 대접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나마 긴주의 아들 능안의 나이 15세였는데 가야의 춤을 추어 보였다. 왕이 그의 얼굴과 거동이 단아하고 고운 것을 보고는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며 금잔으로 술을 권하고 폐백을 자못 후하게 내려주었다.
11월 5일에 왕이 사로잡은 고구려 사람 7천 명을 데리고 수도로 들어왔다. 6일에는 문문 관료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묘당에 조알하고 고하였다. "삼가 선왕의 뜻을 이어 당과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문초해 그 괴수를 처단하여 국운이 태평해졌으므로, 감히 고하니 신령이여, 들으소서." 18일에는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소감 이상에게는 10□□필을, 그를 시종한 이에게는 20필을 내려주었다. 12월에 영묘사에 화재가 있었다.
9년 봄 정월에 신혜법사를 정관대서성으로 삼았다. 당의 승려 법안이 와서 천자의 명령을 전하고 자석을 구하였다. 2월 21일에 대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교서를 내렸다.
"지난 날 우리 신라는 두 나라와 사이가 벌어져 북쪽을 치고 서쪽을 침공하느라 잠시도 평안한 해가 없었다. 군사들은 뼈를 드러낸 채 들에 쌓이고 몸뚱이와 머리가 서로 멀리 나뉘어 뒹굴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가엾게 여기시어 임금의 존귀함도 잊으시고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고자 대궐에 이르셨거니와, 이는 본디 두 나라를 평정해 길이 싸움을 없이 하고, 여러 대 동안 깊이 맺힌 원한을 씻으며, 백성들이 가련한 목숨을 보전하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비록 평정되었으나 고구려를 미처 멸망시키지 못한 채 과인인 그 평정을 완수할 유업을 계승해 마침내 선왕의 뜻을 다 이루게 되었으니, 이제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고 사방이 잠잠하고 태평해졌다.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이는 이미 모두 포상을 받았고 전사한 이의 혼백을 위해 명복을 빌 자용도 추증하였다. 다만 옥중에세만은 그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은혜를 입지 못하고, 칼을 쓰고 족쇄에 묶여 있는 고통에서 아직 다시 새로워질 수 있는 혜택을 받지 못했으니, 생각이 이 일에 미치면 자고 먹는 것도 편안하지 못하다. 이제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해야 할 것이니, 총장 2년 2월 21일 새벽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5역죄를 범해 사형에 처해질 죄수 이하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이들은 그 죄질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빠짐없이 석방할 것이요, 앞서 사면을 받은 이후 다시 죄를 저질러 관작을 빼앗긴 이들도 모두 원래대로 회복시켜 줄 것이며, 도적질한 이는 그 몸만 석방하되 재물로 상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징수의 기한을 두지 말라. 백성 가운데 빈한하여 남의 곡식을 빌렸다가 흉년이 든 지방에 사는 이는 본래의 부채와 이자 모두 상환을 면제해주고, 만약 풍녕이 든 지방에 사는 이라면 올해 수확 때까지 기다려 다만 원래의 부채만 갚게 하고 그 이자는 면제해주어라. □□ 30일을 기한으로 관련 부서는 받들어 집행하라."
여름 5월에 천정, 비열홀, 각련 등 세 군의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지진산 급찬 등을 당에 들여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 흠순 각간과 양도 파진찬을 당에 들여보내 사죄하였다. 겨울에 당의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 구진천 사찬을 데리고 돌아갔다. 당 고종이 그에게 나무로 쇠뇌를 만들게 했더니 화살이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고종이 물었다. "듣자하니 너희 나라에서는 쇠뇌를 만들어 쏘면 1천 보를 간다는데 지금 겨우 30보를 가니 어찌된 일이냐?" 사찬이 대답하였다. "재질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국의 목재를 가져온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고종이 사신을 보내 나무를 구하므로 곧 나무와 함께 복한 대나마를 보냈다. 이윽고 고쳐 만들도록 명을 받았는데, 쏘아보니 60보를 갔다. 그 까닭을 물으니 사찬이 대답하였다. "저 역시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나무가 바다를 건너오면서 습기가 찼던 것 같습니다." 고종은 그가 짐짓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중죄로 위협했으나, 끝내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않았다.
말 목장을 모두 1백 74개소에 나누어 두었다. 소내에 22개소, 관에 10개소를 소속시키고, 김유신 태대각간에게 6개소, 김인문 태각간에게 5개소, 각간 7명에게 각각 3개소, 이찬 5명에게 각각 2개소, 소판 4명에게 각각 2개소, 파진찬 6명과 대아찬 12명에게 각각 1개소씩을 내려주고, 이하 74개소는 적당하게 내려주었다.
10년 봄 정월에 고종이 흠순의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해 가두어두었는데 끝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왕이 멋대로 백제의 땅과 유민을 차지했다 하여 고종이 문책하고 노하여 거듭 사자를 억류했기 때문이다.
3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더불어 각각 정예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니, □□□ 말갈 병사가 먼저 개돈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에 그들을 상대해 싸워서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겼으며, 목을 벤 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뒤를 이어 이르니 우리 군사가 백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6월에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장 대형이 남은 백성들을 거두어 모아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의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일행이 서해의 사야도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임금으로 떠받들고, 소형 다식 등을 보내 애걸하였다.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옳은 의리이니, 오직 대국에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선왕이 도의를 잃고 패멸당하였으나, 이제 저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찾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고 제후의 나라가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지방 금마저에 자리잡게 하였다.
한기부의 여인이 한꺼번에 3남 1녀를 출산하였으므로, 벼 2백 석을 내려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신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 도독부에 보내서 화친을 요청했으나, 도독부에서는 듣지 않고 바로 사마 예군을 보내 우리를 정탐하게 하였다. 왕이 저들에게 우리에 대한 음모가 있음을 알고, 예군을 억류해 돌려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63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 주민들을 내지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은 12성을 빼앗고 적병을 쳐서 7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전투마와 병장기들을 매우 많이 노획하였다. 왕이 돌아와 중신, 의관, 달관, 흥원 등이 □□□사 진영에서 퇴각한 것은 그 죄가 마땅히 죽여야 할 만한 것이지만 용서하여 면직히키고, 창길우□□□□일에게는 각각 급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사찬 수미산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함형 원년 세차 경오 가을 8월1일 신축에 신라 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명을 보낸다. 공의 태조 중모왕은 덕을 북쪽에 쌓고 공을 남쪽 바다에 세워, 위풍은 청구에 떨쳤으며, 어진 교화가 현도를 뒤덮었다. 자손이 서로 이어 근본과 가지가 끊이지 않고 개척한 땅은 천리나 되어 거의 8백 년이 되려 할 때, 남건과 남산의 형제에 이르러 화란이 안에서부터 일어나고 골육 사이에 틈이 나 집안과 나라가 파탄되고 망하니, 종묘 사직은 인멸되었으며, 생령들은 동요하고 들끓어 마음 둘 데가 없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험과 난관을 피해 다니다가 이웃 나라에 홀몸을 던져오니, 그 유랑의 온갖 고생이야 진 문광의 자취와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은 위 선공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백성에게 임금이 없을 수 없으며, 하늘은 반드시 사랑을 베풀어주실 것이니, 선왕의 바른 후계자로는 오직 공이 있을 뿐이요, 제사를 주관할 이 또한 공말고 누가 있겠는가? 이제 삼가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사신을로 보내 책명을 전하게 하여 공을 고구려 왕으로 삼는다. 공은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으고 옛 왕통을 이어 일으켜서, 길이 이웃 나라가 되어 일마다 형제와 같이 할 것이니, 삼가고 삼가라! 아울러 멥쌀 2천 석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능라 다섯 필, 견직 및 가는 베 각각 열, 솜 열다섯 저울을 보내니 왕을 이를 받아라."
12월에 토성이 달에 들어가고,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중시 지경이 물러났다. 왜국이 국호를 '일본'으로 고치고 스스로 말하였다. "해돋는 곳에 가까우므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한성주 총관 수세가 백제의 □□□□□□, 마침 그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진주를 보내 베어 죽였다.
11년 봄 정월에 이찬 예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군사를 내어 백제를 침공해서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 부과가 죽었다. 말갈 군사가 와서 설구성을 에워쌌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차 물러나려 할 때,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 3백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당나라 군사가 와서 백제를 구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 □□□□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옹포를 지키게 하였다. 흰 물고기가 뛰어들었는데 □□□□□□□□□□ 1촌이었다. 여름 4월에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다.
6월에 장군 죽지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림성 벼를 짓밟게 하고,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더불어 석성에서 싸워 5천 3백여 명을 목베어 죽이고 백제 장군 두 사람과 당나라 과의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
가을 7월 26일에 당의 총관 설인귀가 임윤법사를 시켜서 협박과 회유의 글을 보내자 대왕이 답장을 보내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았다.
9월에 당나라 장군 고간 등이 번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해,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대방을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6일에 당의 운송선 70여 척을 공격해 낭장 겸이대후와 사졸 1백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물에 빠져 죽은 이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급찬 당천의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그에게 사찬의 관위를 수여하였다.
12년 봄 정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의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 2월에 백제의 가림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또 이근행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일시에 평양에 이르러서 여덟 개의 군영을 짓고 머물러 주둔하였다. 8월에는 한시성과 마읍성을 쳐서 이기고, 병력을 백수성에서 5백 보쯤 떨어진 곳에 진주시켜 진영을 만들었다. 우리 군사가 고구려 군사와 함께 이들을 맞받아 싸워서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 등이 퇴각하니 추격해 석문에 이르러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으며,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과 산세, 아찬 능신과 두선, 일길찬 안나함과 양신 등이 죽었다. 한산주의 주장성을 쌓으니, 주위가 4천 3백 60보였다.
9월에 혜성이 일곱 번이나 북방에 출현하였다.
왕은 지난 번에 백제가 당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청해 우리를 침노하려 들자 사태의 형세가 급박하여 황제에게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토벌했던 바, 이로 말미암아 대국의 조정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과 나마 변산을 보내 억류해 두었던 당나라 병선랑장 겸이대후, 내주 사마 왕예, 본열주 장사 왕익, 웅주 도독 부사마 예군, 증산 사마 법총, 그리고 군사 1백 70명을 돌려보내면서 표문을 보내 무마하였다. 이와 아울러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매, 우황 1백 20푼, 금 1백 20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예물로 보냈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해 사람들이 굶주렸다.
13년 봄 정월에 큰 별이 황룡사와 재성 중간에 떨어졌다. 강수를 사찬으로 임명하고, 해마다 조 2백 석을 내려주었다. 2월에 서형산성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에 호랑이가 대궁의 뜰에 들어왔으므로 죽였다.
가을 7월 1일에 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가 반역하여 당에 붙고자 획책했는데, 그 일이 누설되어 처형당하고 처자식은 천인으로 만들었다. 8월에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삼았다. 사열산성을 증축하였다.
9월에 국원성, 북형산성, 소문성, 이산성 및 수약주의 주양성, 달함군의 주잠성, 거열주의 만흥사산성, 삽량주의 골쟁현성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당의 군사가 말갈 및 거란 병력과 함께 북쪽 변경에 침입해 와, 무릇 아홉 번을 싸워 우리 군사가 승리하고 2천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당나라 군사 가운데 호로와 왕봉의 두 강에 뻐져 죽은 이들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을 쳐서 항복을 받고, 거란과 말갈의 군사는 대양성과 동자성을 쳐서 패멸시켰다.
처음으로 외사정을 두었는데, 주에는 2명, 군에는 1명이었다. 처음에 태종왕이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국경을 지키는 수병을 없앴던 것을, 이때 와서 다시 두었다.
14년 봄 정월에 당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대나마 덕복이 역술을 배워 지니고 돌아오니, 새 역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왕이 당에 저항하는 고구려의 반민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또 당의 수도에 있던 왕의 아우 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는 한편, 좌서자 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 대장군 이근행을 보좌로 삼아 군사를 동원해 와서 치게 하였다.
2월에 궁궐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 가을 7월에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을 무너뜨렸다. 8월에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에 의안법사를 대서성으로 임명하고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였다.
왕이 영묘사 앞길에 행차하여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의 6진병법을 관람하였다.
15년 봄 정월에 구리로 만든 관부 및 주와 군의 인장을 주조해 나누어주었다.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우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자 고종이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 진무대사로 삼아 경략하게 하였다. 왕이 그제야 사신을 들여보내 조공하고 또 사죄했더니 황제가 용서하여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이에 따라 김인문이 중도에서 돌아오게 되니 다시 고쳐서 그를 임해군공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왕은 백제 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마침내 고구려의 남쪽 지경까지 다다라 주와 군을 만들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병력과 함께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군단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하였다.
가을 9월에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처형된 것을 기화로, 풍훈을 길잡이 삼아 천성에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 문훈 등이 맞받아 싸워 이기고 1천 4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물러나 달아나므로, 전투마 1천 필을 획득하였다.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었다. 우리 군사가 이를 쳐서 쫓아버리고 전투마 3만 3백 80필을 노획하였으며, 그 밖의 병장기도 이에 맞먹었다. 사신을 토산물과 함께 당에 들여보냈다. 안북하를 따라서 관문과 성채를 설치했으며, 또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들어와 노략질하므로 성주 소나가 맞아 싸우다가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의 군사와 함께 쳐들어와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했는데, 소수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에워싸고 쳐 없애려 하니, 현령 탈기가 백성을 거느리고 막다가 힘이 다해 다 함께 죽었다. 당나라 군사는 다시 석현성을 에워싸 함락시키니, 현령 선백과 실모 둥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더불어 열 여덟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하여 모두 이기고, 6천 47명의 목을 베었으며, 전투마 2백 필을 얻었다.
16년 봄 2월에 고승 의상이 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에 혜성이 북하성과 적수성 사이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6, 7보 가량 되었다. 당나라 군사가 도림성에 쳐들어와 함릭시키니, 현령 거시지가 전사하였다. 양궁을 지었다.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니고 설인귀와 더불어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 패배했으나, 다시 진군해 스물 두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를 이기고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재상 진순이 은퇴를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17년 봄 3월에 왕이 강무전의 남쪽 문에서 활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처음으로 좌사록관을 두었다.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18년 봄 정월에 선부령 한 명을 두고 선박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좌·우리방부경을 각 한 명씩 더 두었다. 북원소경을 두고, 대아찬 오기에게 이를 지키게 하였다. 3월에 대아찬 춘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았다. 5월에 북원에서 기이한 새를 바쳤는데, 깃에 무늬가 있고 다리에는 털이 나 있었다.
19년 봄 정월에 중시 춘장이 병으로 사직하고, 서불한 천존이 중시가 되었다. 2월에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진무하였다. 궁궐을 중수했는데 자못 웅장하고 화려함을 다하였다. 여름 4월에 형혹성이 우림성 자리에 머물렀다. 6월에 태백성이 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 자리를 침범하였다. 가을 8우러에 태백성이 달에 들어갔다. 각간 천존이 죽었다. 동궁을 처음으로 짓고 비로소 안팎에 있는 모든 문들의 현판 이름을 제정하였다. 사천왕사가 낙성되었다. 남산성을 증축하였다.
20년 봄 2월에 이찬 김군관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금은의 그릇과 여러 빛깔의 비단 1백 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려주고, 마침내 왕의 누이를 그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으뜸이며 교화의 기초는 후사를 잇는 것이 제일인데, 왕에게는 아내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어진 짝을 생각하고 있을 것인 바, 오랫동안 내조할 배필을 비어 두어 끝내 집안을 일으킬 사업을 빠뜨려서는 안될 일이다. 이제 좋은 때 길한 날을 택해 옛 법도에 따라 과인의 누이의 딸을 반려로 삼게 한다. 왕은 의당 함께 정을 돈독히 하여 삼가 조상의 묘사를 받들고, 자손이 번창하여 길이 반석같이 융성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여름 5월에 고구려 왕이 대장군 연무 등을 시켜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신 안승은 아룁니다. 대아찬 김관장이 와서 교지를 받들어 전하고 아룰러 교서를 내렸거니와, 대왕의 생질을 저희 지방의 안주인으로 삼으시고 곧이어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니, 기쁨과 두려움이 마음에 엇갈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요임금의 딸이 순에게 시집가고 주실의 왕녀가 제나라에 시집간 것은 본디 거룩한 덕을 드날린 것이요 범속한 임물에 관계될 바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본래 용렬한 부류로 행동과 재능에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다행히 창성하는 시운을 만나 거룩한 교화에 흠뻑 젖어 매양 특별한 은택을 입고 보답할 길이 없었는데, 이제 거듭 대왕의 총애를 입게 되어 인친을 내려주시니, 마침내 꽃은 농염하게 피어 경사를 표하고 사라은 화락하여 덕을 이루었습니다. 좋은 날 좋은 때를 가려 저의 집으로 출가하게 하시니, 억 년 동안에도 만나기 어려운 일을 하루아침에 얻었는 바, 이러한 일이야 본래 바라지도 못하던 일이요, 뜻밖의 기쁨이니, 어찌 한두 명의 부형들만이 이 은혜를 받았다 할 것이겠습니까? 선조 이하 모두가 진실로 기뻐할 은총입니다. 저는 아직 대왕의 교지를 받지 못해 감히 곧 가서 알현하지 못하나, 지극한 기쁨을 이기지 못해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글을 올려 아룁니다."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였다.
21년 봄 정월 초하루에 종일토록 캄캄해 밤과 같이 어두웠다. 사찬 무선이 정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비열홀을 수비하였다. 우사록관을 두었다. 여름 5월에 지진이 있었으며 유성이 삼대성 자리를 침범하였다. 6월에 천구성이 서남방에 떨어졌다.
왕이 도성을 새롭게 하고자 승려 의상에게 물었더니, 의상이 대답하였다. "비록 초야의 띠집에서 살더라도 바른 도를 행한다면 비록 사람을 수고롭게 해 궁성을 짓는다 해도 또한 이로울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그만 공사를 중지하였다.
가을 7월 1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언대로 동해 어구의 큰 돌 위에 장사 지냈다. 세속에서 전해오기로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 하니, 이로 인해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이라고 하였다. 왕이 남긴 조서는 이러하다.
"과인이 어지러운 시운과 전쟁의 때를 만나 서쪽을 치고 복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역자들을 토벌하고 붙좇는 이를 불러들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들이 평안해졌다. 위로는 조종의 끼치신 사람을 위로해 올리고 아래로는 부자의 오랜 원수를 갚았다. 산 이나 죽은 이 모두에게 두루 상을 추증하고 안팎에 고르게 관작을 나누어 주었으며, 병장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백성들을 어질고 오래 살도록 이끌었다. 납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덜어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백성들은 안도하고 나라 안에 근심이 없게 되었다. 창고에는 곡식이 산처럼 쌓이고 감옥에는 풀만이 무성하니, 저승에서나 이승에서나 부끄러움이 없다 할 것이며, 상하의 여러 인사들에게도 저버린 바가 없다 하겠다. 그러나 풍상을 무릅쓰다 보니 마침내 고질병이 생겼으며, 정무에 애쓰다 보니 더욱 깊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운수는 떠나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이니, 갑자기 명계로 돌아간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이 어진 덕행을 쌓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뭇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를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남은 이를 섬기는 예의를 잃지 말라. 종묘 사직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워두어서는 안될 것이니, 태자는 장사 지내기 전에 곧장 관 앞에서 왕위를 이어 오르라.
또한 산과 골짜기는 모습을 바꾸고 사람의 세대도 변하니, 오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 향로의 광채를 볼 것이며, 위 임금의 서릉 유적에서도 오직 동작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뿐이다. 옛날에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사책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개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나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임종 후 열흘이 되면 바로 왕궁의 고문 밖 뜰에서 서역의 법식에 따라 불로 태워 장사 지내고, 상복을 입는 경중이야 본래 정해진 규례가 있을 터이나 장례 절차는 힘써 검약하게 하라. 변방의 성들과 방위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는 일에 긴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과 격식 가운데 불편한 것들은 즉시 편의대로 고쳐 반포할 것이며, 멀고 가까운 곳에 모두 포고해 나의 이러한 뜻을 알리고 책임자가 시행하게 하라."
김유신전
김유신은 왕경 사람이다. 그이 12대 할아버지는 수로인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수 없지만, 후한 건무 18년 임인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가야'라 했다가, 후에 나라 이름을 '금관국'으로 고쳤다. 그이 자손이 대를 이어 수로의 9세손인 구해에 이르렀는데, 그는 혹은 구차휴라도고 하며, 유신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유신의 조부 무력은 신주도 행군총관이 되어 일찍이 군대를 거느리고백제의 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목벤 바 있다. 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관등과 관직이 소판과 대량주 도독에 이르렀다.
처음에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여 눈짓으로 꾀어서 중매를 기다리지도 않고 야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장차 함께 떠나려 하자, 숙흘종은 비로소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홀연히 별채의 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는 이들이 놀라 흩어지자, 만명은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와 마침내 서현과 더불어 만노군으로 달아났다.
서현이 경진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형혹성과 진성 두 별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이었다. 만명 역시 신축일 밤 꿈속에서 금빛 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집 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임신을 하여 20개월 만에 유신을 낳았으니, 이때가 바로 진평왕 건복 12년이다.
유신이 15세에 화랑이 되자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하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라고 하였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에 유신의 나이 17세였는데, 고구려와 백제와 말갈이 나라의 강토를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이 북받쳐 적도들을 평정할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의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해 맹세하였다. "적국들이 도의가 없이 승냥이와 호랑이가 되어 우리 강토를 어지럽히니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저는 일개 미천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은 보잘것없으나 나라의 환란을 없애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바라건대 하늘을 굽어 살피시어 저를 도와주소서."
나흘 후 홀연히 한 노인이 거친 베옷을 입고 나타나서 물었다. "이곳은 독충과 맹수가 들끓어 두려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이 외진 곳에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어르신께서는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어르신의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처없이 인연에 따라 오고 가며, 이름은 난승이라고 한다."
유신은 그 말을 듣고 범상치 않은 사람인 줄을 알고, 다시 절하고 나아가 아뢰었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근심으로 가득 차서, 이곳에 와 무슨 계제를 만날 것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벙술을 일러주소서."
노인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유신은 눈물을 흘리며 부지런히 간청하기를 예닐곱 번이나 하였다. 그제야 노인은 말문을 열었다.
"그대는 아직 어린데도 삼국을 아우를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않으랴!"
이윽고 비법을 주면서 다시 말하였다.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의롭지 못한 데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 떠나 2리쯤 멀어지니, 유신이 쫓아가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오색빛만 찬연하였다.
건복 29년에 이웃의 적국들이 한층 더 핍밥해 오자 유신은 장렬한 마음이 더욱 격동하여 홀로 버검을 차고 인박산 골짜기에 들어갔다. 향을 사르고 하늘에 고하열 빌기를 마치 중악에서 맹세했던 것처럼 하고, 어울러 "천관께서는 빛을 드리워 보검에 영험함을 내려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3일째 밤에 허성과 각성의 빛무리가 밝게 아래로 드리워지더니, 보검이 마치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건복 46년 기축 가을 8월에 왕이 이찬 임말리와 파진찬 용춘과 백룡, 그리고 소판 대인과 서현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들이 군대를 내어 맞아 쳐오니 우리 측이 불리해 전사자가 매우 많아졌으며, 무리의 사기가 크게 꺾여 더 이상 싸우려는 마음을 갖지 못하였다. 유신은 이때 중당의 당주였는데, 어버지 서현 장군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우리 군이 패하고 있습니다. 저는 평소 스스로 마음 속에 충과 효를 기약해 왔던 바, 전투에 임해 용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으니 '옷깃을 들면 옷이 바로 되고 그물의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 했으니, 제가 바로 그 옷깃과 벼리가 되고자 합니다."
이내 곧 말에 올라 검을 뽑아 들고 참호를 뛰어나가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왔다. 우리 군대가 그 모습을 보고 승세를 타고 분연히 공격해, 5천여 명을 베어 죽이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낭비성 안에서는 크게 두려워해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선덕대왕 11년 임인에 백제가 대량주를 무너뜨렸을 때,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이 남편 김품석을 따라 죽게 되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의 군대를 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로 출발할 즈음 춘추는 유신에게 말하였다.
"내가 공과 더불어 한 몸으로 나라의 중신이 되어 있는 바, 이제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서 해를 입는다면 공께서는 무심할 것입니까?"
"공께서 만약 가신 뒤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제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의 왕정을 짓밟을 것입니다. 진정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나라 사람들을 보겠습니까?"
춘추는 감복하고 흡족하여 유신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머금고 맹세하였다.
"내가 일정을 헤아려 보니 60일이면 돌아올 것입니다. 만일 60일을 넘기고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겠습니다."
마침내 서로 헤어진 뒤, 유신은 압량주 군주가 되었고, 춘추는 훈신 사간과 함께 고구려에 교빙길을 떠났다. 일행이 대매현에 이르렀을 때 대매현 사람 두사지 사간이 푸른 베 3백 보를 춘추에게 선물하였다. 이윽고 고구려의 경계에 들어서자 고구려 왕은 태대대로 개금을 보내 춘추 일행을 맞이해 접대하게 했으며 연회를 융숭히 베풀었는데, 마침 어떤 이가 고구려 왕에게 고하여 아뢰었다.
"신라의 사신은 범용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그가 온 것은 아마 우리의 형세를 살피고자 함일 것입니다. 왕께서는 그 점을 헤아리셔서 후환이 없게 하소서."
그러자 고구려 왕은 이치에 어긋난 질문을하여 춘추가 대답하기 난처해하는 것을 빌미로 욕보이려 하였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디 우리 나라 땅이니, 만약 우리에게 반환하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하리라."
"국가의 토지란 신하된 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니, 신은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고구려 왕은 노하여 춘추를 가두고, 이에 죽이려 했으나 미처 죽이지는 않은 채로 두었다. 춘추는 푸른 베 3백 보를 고구려 왕이 총애하는 신하인 선도해에게 은밀히 선물하였다. 선도해는 음식을 갖추어 와서 서로 마시다가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농담하듯이 말하였다.
"당신은 일찍이 거북과 토끼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에 병이 들었는데, 의원 말이 '토끼의 간으로 약을 지으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바가 없었습니다. 이때 한 거북이 용왕에게 아뢰기를 '제가 구해 올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육지에 올라 토끼를 만나자, '바다 가운데 한 섬이 있는데 맑은 샘과 깨끗한 돌이 있고 무성한 숲과 맛좋은 과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가 이르지 못하고 사나운 매들도 침범하지 못한다. 네가 만약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편안하게 살면서 근심이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거북은 토끼를 등 위에 태우고 2, 3리쯤 헤엄쳐가다가 고개를 돌려 토끼에게 말하기를 '지금 용왕의 딸이 병에 걸렸는데 모름지기 토끼의 간이 약이 된다 하기에,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토끼는 '아뿔싸! 나는 신명의 후예여서 오장을 꺼내 씻어 넣을 수 있으니, 지난번 마음에 약간 번거로움이 있는 듯하여 간과 심장을 꺼내 씻어서 잠깐 바위 아래 두었다. 그런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서둘러 오느라 간이 아직 그곳에 있으니, 어찌 되돌아가 간을 가져오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너는 얻는 바를 구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비록 간이 없다 하더라도 문제없이 살 수 있으니, 어찌 서로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거북이 그 말을 믿고 되돌아가서 막 해안에 오르자마자 토끼는 거북으로부터 벗어나 수풀에 들어가더니, '너야말로 어리석구나! 어찌 간 없이 살 수 있는 이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거북은 민망해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합니다."
춘추가 그 이야기를 듣고 선도해의 의중을 깨달아 고구려 왕에게 글을 보내 제의하였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대국의 땅이니, 신이 귀국하게 되면 우리 왕께 청해 반환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거든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고구려 왕은 기뻐하였다.
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간 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나라 안의 용사 3천 명을 가려 뽑아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나라의 어려움에 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열사의 뜻이라 한다. 대저 한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면 백 명을 당할 수 있고, 백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면 천 명을 당할 수 있으며, 천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면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천하에 거리끼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붙잡혀 있거늘, 어찌 두렵다 하여 어려움을 피하겠는가!"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하였다.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곳으로 간다 한들,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왕에게 청해 떠날 날짜를 정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덕창이 사람을 시켜 고구려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고구려 왕은 이전에 춘추가 맹세하는 말을 들은 바 있고, 게다가 첩자의 보고까지 받으니 감히 더 이상 춘추를 억류하지 못하고 두터운 예를 베풀어 돌려보냈다. 춘추는 고구려 국경을 벗어나게 되자 호송하던 이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백제에 분풀이를 하고자하여 군대를 청하려 왔는데, 대왕은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땅을 요구하는 바, 이것은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난 번 대왕에게 글을 드리 건은 죽음을 모면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다가 선덕왕 13년에 소판이 되었다. 그해 가을 9월 왕이 유신을 상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 일곱 성을 정벌하게하여 크게 이겼으며, 이를 연유로 가혜의 나루를 개통하였다.
을사년 정월에 전장에서 돌아와 아직 왕을 알현하지도 못했는데, 국경을 지키는 관리로부터 백제의 대군이 쳐들어와 우리의 매리포성을 공격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을 상주 장군으로 삼아 백제군을 막게 하였다. 유신은 왕명을 받자 곧 말에 올라 처자식도 만나보지 않고 백제의 군사를 막아쳐서 쫓았으며, 머리를 벤 것이 2천 명이었다. 3월에 유신이 돌아와 왕궁에서 복명하고 미처 집에 돌아가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백제 군대가 그 국경 지대에 출동해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크게 우리를 쳐들어오려 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일러 말하였다.
"공은 수고루음을 꺼리지 말고 빨리 가서, 그들이 이르기 전에 대비하기를 바란다."
유신은 또자시 접에 들르지도 않은 채, 군사를 조련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서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이때 유신의 집안 사람들이 모두 문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이 문 앞을 지나치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다가, 50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말을 멈추더니, 집에서 마실 물을 거져오라하여 마시고 말하였다. "우리 집 물은 여전히 옛날 맛 그대로구나!"
그러자 군사들이 모두 말하였다. "대장군께서도 오히려 이와 같으신데, 우리들이 어찌 골유과 이별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유신이 국경에 이르자 백제인들은 우리 군사의 방위 태세를 보고 감히 핍박해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갔다. 대왕이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고, 유신에게 관작과 상을 더해주었다.
선덕왕 16년 정미는 선덕왕 치세 말년이요,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과 염종이 '여왕이 잘 디스리지 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위하고자 하였다. 왕은 궁성 안에서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 안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에 군영을 차려, 10일 동안 공방을 했으나 결말이 나지 않았다. 깊은 밤 자정 무렵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자, 비담 등이 사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지 아래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 한다. 이는 아마 여왕이 패망할 조짐일 것이다."
그러자 사졸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자 유신이 왕을 뵙고 아뢰었다.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람이 불러들이는 바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왕은 봉황이 나타났음에도 망하였고, 노나라는 기린을 잡은 뒤에 쇠망했으며, 은나라 고종은 꿩이 울었음에도 흥하였고, 정나라는 용들이 서로 싸웠음에도 창성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덕이 요망함을 이기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자리의 변괴 따위는 두려워할 것이 못됩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이윽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견서 연에 실려 날려보내니,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였다. 다음날 사람을 시켜 거리에서 소문을 내기를 '지난 밤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하여, 적군들로 의구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 말을 바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올리고 축문을 지어 축원하였다."
"하늘의 도리로 말하자면 양은 굳세고 음은 유약하며, 사람의 도리로 말하자면 임금은 존귀하고 신하는 비천하니, 진실로 이것이 뒤바뀐다면 크나큰 혼란일 것입니다. 지금 비담 등은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을 침범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른바 난신적자라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할 바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바이거늘, 이제 하늘이 마치 여기에 아무런 의지가 없는 듯하여 도리어 별의 괴변을 왕성에 나타내 보이시니, 이야말로 신이 의혹을 가져 깨닫지 못할 일입니다. 바라건대 하늘의 위엄으로써 사람의 행동거지에 따라 착한 이에게 좋게 대하고 악한 이를 미원하시어, 신명의 부끄러움을 짓지 마소서."
이윽고 여러 장군과 병졸을 독려해 떨쳐 공격하니 비담 등이 패해 달아났다. 그들을 추격해 목베고 일족을 모조리 죽였다.
겨울 10월에 백제군이 와서 무산, 감물, 동잠 등 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통솔해 막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고전하여 사기가 다하자, 유신은 비령자를 불러 말하였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비령자가 절하여 말하였다.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비령자가 적진에 달려가니, 그의 아들 거진과 그 집 종 합절이 그를 따라 적들의 칼과 창을 향해 돌진해 힘껏 싸우다 모두 죽었다. 군사들이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감격해 힘써 앞을 다투어 나가 적굼을 크게 깨뜨리고 3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진덕왕 태화 원년 무신에 춘추느 앞서 고구려에 대한 청병이 실패했기 때문에 마침내 당에 들어가 군대를 청하게 되었다. 그러자 당 태종이 물었다. "내가 너희 나라 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하냐?"
"유신이 비록 약간 재주와 지혜가 있다고는 하나 황제의 위엄을 빌리지 않고서야 어찌 쉽게 이웃 나라로부터의 환란을 없애겠습니까?"
"진정코 군자의 나라이다!"
이내 조칙을 내려 원병 파견을 허락하고, 장군 소정방에게 2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으면서 마치 군사 일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기며 여러 달을 지냈다. 압량주 사람들은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여겨 야유하고 비방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낸 날이 오래이니 힘에 여유가 있어 한 번 싸워볼 만한데도, 장군이 저토록 게을러빠졌으니 어찌할 것인가?"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이 쓸 만한 것을 알고서 대왕에게 아뢰었다. "민심을 살펴보니 이제 일을 벌일 만합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지난 번 대량주 전투를 설욕하고자 합니다."
"이는 적은 군사로 대군을 저촉하는 것이니, 그 위험함을 장차 어찌하려는가?"
"전쟁의 승부는 군대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인심이 어떠한가에 따라 좌우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왕은 억조 창생을 가지고서도 그들의 마음과 덕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에 한마음 한 뜻으로 뭉친 주나라의 어진 열 명의 신하들만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저희는 한 마음으로 죽음과 삶을 같이할 수 있으니, 저 백제 따위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제서야 왕이 허락하였다. 유신은 마침내 압량주의 군사를 뽑아 단련시켜서 적에게로 나아갔다. 대량성 밖에 이르자 백제군이 막아 저항하였다.우리 군을 짐짓 패해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달아나 옥문곡에 이르렀다. 백제군이 가벼이 여겨 대거 병사를 동원해서 추격해오자, 유신은 복병을 내보내 그 앞뒤를 공격해 크게 깨뜨리고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았으며, 죽이고 잡은 사졸의 수가 1천 명에 달하였다. 이윽고 사람을 시켜 백제 장군에게 제의하였다. "우리 나라 군주였던 품석과 그 부인 김씨의 유해가 너희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 비장 여덟 사람이 나에게 잡혀 땅바닥을 기면서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제 살던 언덕으로 향하는 뜻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너희가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보내서 살이 있는 여덟 명의 목숨과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자 백제의 중상 좌평이 백제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인들의 해골을 가지고 있어봐야 이로울 게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저들이 약속을 어기고 우리 측 여덟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은 저들에게 있고 옳음은 우리게게 있으니 무슨 근심할 게 있겠습니까?"
이윽고 품석 부부의 유골을 파내 나무 함에 넣어 보내오니, 유신이 말하였다.
"낙엽이 한 잎 진다한들 무성한 숲에 덜어지는 바가 없으며, 티끌 하나 더한다 한들 태산에 보태질 바도 없다."
곧 여덟 사람을 살려 보냈다. 그르고 승리의 기세를 타 백제 땅에 들어가 악성 등 열두 성을 함락히키고 2만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조정에서 그의 공로를 논의해 품계를 이찬으로 올려주고 상주행군 대총관으로 삼았다. 그 뒤 유신은 다시 적의 땅에 들어가서 진례성 등 아홉 성을 도륙하고 9천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6백 명을 사로잡았다. 당에 들어갔던 춘추가 군대 20만을 얻어 돌아와서 유신을 만나 서로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이 천명에 달려 있으니 살아 돌아와 다시 공과 만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제가 나라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두 번 백제와 크게 싸워 20개 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을 목베거나 사로잡았으며, 또 품석 공과 그 부인의 유골을 고향에 되돌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하늘이 도우셔서 이룬 것이지 저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31대 신문왕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정명이고 문무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왕후이다. 왕비 김씨는 소판 흠돌의딸인데, 왕이 태자로 있을 때 맞이하였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고 뒤에 아버지의 반란에 연루되어 왕궁을 떠났다. 문무왕 5년에 태자로 세워졌다가 이때 와서 왕위를 이었다.
원년 8월에 서불한 진복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8일에 소판 김흠돌,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다. 13일에 보덕왕이 사신 소형 수덕개를 보내 와 역적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였다.
16일에 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공이 있는 이에게 상을 주는 것은 지난 성현들의 좋은 규범이요, 죄가 있는 이를 처형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전이다. 과인이 보잘것없고 박덕한 몸으로 높은 왕업을 이어받아 지키느라 끼니마저 거르고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자리에 들면서 여러 중신들과 함께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자 했더니, 어찌 상중에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역적의 수괴, 흠돌, 흥원, 진공 등은 그 지위가 재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고 관직도 실상 은전에 힘입어 올랐는데, 한결같이 삼가서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고 이내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복락과 위세를 마음대로 만들어내며, 관료들을 업신여기고 위아래를 속이고 능멸하였다. 근자에는 끝없는 탐욕과 표학한 마음을 제멋대로 드러내 흉악하고 간사한 무리를 불러들이고 궁중의 측근들과 결탁하여 화란이 안팎으로 통하게 하였으며, 악한들이 서로 도와 굳게 기일을 정하고 반역을 일으키려 하였다. 과인은 위로 천지 신령의 보우에 힘입고 아래로 종묘 영령의 보살핌을 받아서, 흠돌 등의 악행이 쌓이고 죄악이 가득 차자 그 음모가 탄로되었으니, 이야말로 사람과 신명이 함께 내치는 바이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바이며, 도의를 짓밟고 풍기를 해치는 데 이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를 끌어모아 흉포한 무리를 쓸어 없애려 했더니, 혹은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고 혹은 궁궐 뜰에 나와 항복하였다. 그러나 잔 가지와 잎사귀 하나까지 철저히 찾아내 모두 처단하니, 3, 4일 사이에 적당의 우두머리들이 소탕되었다. 부득이한 일이었으나 여러 사람을 놀라고 동요하게 하였으니, 이 참담한 심정이야 어찌 잠시라도 잊겠는가! 이제는 이미 요망한 무리를 말끔히 쓸어 없애 멀고 가까운 데 걱정이 없게 되었으니, 소집한 병력을 신속하게 되돌려보내고 사방에 포고해 이 뜻을 알게 할 일이다."
28일에 왕이 이찬 군관을 처형하고,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규범은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근본이요, 관직에 있는 이의 도리는 두 마음을 먹지 않는 것이 으뜸인데, 병부령 이찬 군관은 반열의 순서에 따라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임금의 허물을 간하고 정성껏 보필해 순결한 절개를 조정에 바치지 않으며 명령을 받으면 제 몸을 잊은 채 티없는 정성을 사직을 위해 드러낼 줄을 모르고서 역신 흠돌 등과 관계를 맺어 그들의 역모 사실을 알고도 일찍이 고발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고 또한 공무에 충실한 뜻을 저버린 것이다. 어찌 그가 또다시 재상 자리에 앉아 함부로 나라의 헌장을 흐리게 할 것인가! 마땅히 무리들과 함께 내쳐서 후진들을 경계토록 할 것인바, 군관과 그의 아들 한 명에게는 자진하게 하고, 온 나라에 포고해 모두 다 알게 하라."
겨울 10월에 시위감을 없애고, 장군 6명을 두었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4월에 위화부령 2명을 두고 선거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5월에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6월에 국학을 세우고 경 1명을 두었으며, 또 공장부감 1명과 채전감 1명을 두었다.
3년 봄 2월에 순지를 중시로 삼았다. 일길찬 김흠운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먼저 이찬 문영과 파진찬 삼광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을 시켜 납채하게 했는데, 페백이 열다섯 짐이요,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말린 고기, 젓갈이 1백 35짐이었으며, 벼가 1백 50수레였다. 여름 4월에 평지에 눈이 1척이나 쌓였다.
5월 7일에 이찬 문영과 개원을 김흠운의 집에 보내 그의 딸을 부인으로 책봉하고, 그 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과 손문, 아찬 좌야과 길수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 및 양부와 사량부의 여자 각 30명씩 함께 맞이해 오게 하였다. 부인은 수레에 탔는데 죄우에서 시종하는 관인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성대하였으며,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궁궐로 들어갔다.
겨울 10월에 보덕왕 안승을 불러들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려 주었으며, 수도에 머무르게해 훌륭한 집과 좋은밭을 내려주었다. 혜성이 오거성 자리에 나타났다.
4년 겨울 10월에 저물녘부터 날이 밝을 무렵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11월에 안승의 조카뻘 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에서 모반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대문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더니, 관리들을 살해하고 읍을 장악해 반역하였다. 왕이 장졸들에게 명해 이를 치게 했는데 맞받아 싸우던 중에 당주 핍실이 죽었다. 그 성을 함락히키고 그곳 사람들을 나라 남쪽 지방의 주와 군으로 옮겼으며, 그 지역을 금마군으로 삼았다.
5년 봄에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임명하였다. 거열주에서 청주를 떼너내 설치하니, 비로소 9주를 갖추게 되었다. 대아찬 복세를 총관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를 사신으로 임명하였으며, 넘원소경을 설치하고 여러주와 군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나누어 살게 하였다. 봉성사가 완성되었다. 열므 4월에 망덕사가 완성되었다.
6년 봄 정월에 이찬 대장을 중시로 삼고, 예작부경 2명을 두었다. 2월에 석산, 마산, 고산, 사평의 네 현을 설치하였다. 사비주를 군으로 만들고, 웅천주를 주로 만들었다. 발라주를 군으로 만들고, 무진군을 주로 만들었다.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예기와 문장을 요청하였더니, 측천무후가 관련 부서에 명령해 길흉요례를 베끼고 문관사림 가운데서 규계에 관한 글을 골라 뽑아 50권을 만들어주게 하였다.
7년 봄 2월에 왕의 맏아들이 태어났다. 이날 날씨가 음침하고 어두컴컴하였으며, 우뢰와 번개가 심하였다. 3월에 일선주를 없애고 다시 사벌주를 두었으며, 파진찬 관장을 총관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음성서의 장관을 경으로 고쳤다.
대신들을 조묘에 보내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삼가 태조대왕, 진지대왕, 문흥대왕, 태종대왕, ㅁ누무대왕의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높은 왕업을 이어받아 지키느라 자나깨나 근심하고 애쓰면서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으나, 종묘의 돌보아 지켜주심과 하늘과 땅이 내려주시는 복록에 힘입어 사방은 안정되고 백성은 화락하며, 이역에서 온 손들은 보물을 배에 실어와 받들어 조공하고, 형벌이 맑아지자 송사가 잦아들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임금의 정사에 도의가 상실되고 하늘의 비추어보심에 의리가 어그러지니 별자리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이 빛을 잃으니, 두려움에 몸이 벌벌 떨려 마치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에 삼가 아무 관직의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제물을 차려서 살아계신 듯한 신령들께 정성을 바치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 보잘것없는 정성이나마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이 몸을 긍휼히 여기시어,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5사를 이룸에 차질이 없게 하시며, 농사는 풍년이 들고 역질은 없어져 의식이 풍족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니 안팎이 깨끗하고 조용해지며 도적은 사라지게 하시고, 이 풍요롱ㅁ을 자손들에게 드리워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해주소서. 삼가 아룁니다."
5월에 교서를 내려 문무 관료들에게 밭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가을에 사벌주성과 삽량주성을 쌓았다.
9년 봄 정월에 왕이 교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조를 차등있게 내려주는 것으로 불변의 고정된 법을 삼았다. 가을 윤 9월 26일에 왕이 장산성에 행차하였다. 서원경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0년 겨울 10월에 전야산군을 두었다.
11년 봄 3월 1일에 왕자 이홍을 태자로 봉하고, 13일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사화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 남원성을 쌓았다.
12년 봄에 대나무가 말랐다.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신문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 지냈다.
32대 효소왕
효소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륾이 이홍이고 신문왕의 태자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로 신목왕후이니, 일길찬 김흠운의 딸이다. 좌우리방부를 좌우이방부로 고쳤다.
원년 8월에 대아찬 원선을 중시로 삼았다. 고승 도증이 당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올렸다.
3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문영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김인문이 당에서 죽으니 나이 66세였다. 겨울에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았다.
4년에 자월로 정월을 삼았다. 개원을 상대들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중신 원선이 나이 들어 물러났다. 서시와 남시를 두었다.
6년 가을 7월에 완산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했는데, 서로 다른 이랑의 줄기가 합해져 하나의 이삭을 맺은 것이었다. 9월에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7년 봄 정월에 이찬 체원을 우두주 총관으로 임명하였다. 2월에 수도에서 땅이 흔들리고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를 부러뜨렸다. 3월에 일본국의 사신이 오자, 왕이 숭례전에서 불러 접견하였다. 가을 7월에 수도에 홍수가 났다.
8년 봄 2월에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헤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동해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가, 5일만에 예전처럼 돌아왔다. 9월에 동해의 물결이 맞무딪쳐서 그 소리가 왕도까지 들렸으며, 무기고 안에서 북과 뿔피리가 저절로 소리를 내 울어댔다. 신촌 사람 미힐이 무게가 1백 푼이나 되는 황금 한 개를 주워 바치니, 남변제일의 지위를 수여하고 조 1백 석을 내려주었다.
9년에 다시 인월로 정월을 삼았다. 여름 5월에 이찬 경영이 반역을 꾀하다 처형당하고, 중시 순원은 여기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6월에 세성이 달에 들어갔다.
10년 봄 2월에 혜성이 달에 들어갔다. 여름 5월에 영암군 태수 일길찬 제일이 공무를 저버리고 사리사욕에만 열중하므로, 곤장 1백 대의 천형을 내리고 섬으로 유배보냈다.
11년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효소라 하고, 망덕사 동쪽에 장사 지냈다.
33대 성덕왕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흥광이다. 왕의 본명은 융기였는데, 당 현종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 연간에 고쳤다. 신문왕의 둘쩨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죽었을 때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9월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고 문무 관료의 작위를 1등급식 더해주었으며, 1년 동안 여러 주와 군의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아찬 원훈을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삽량주에서 상수리나무 열매가 변해 밤이 되었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사신을 당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영묘사에 화재가 있었고, 수도에 홍수가 나서 빠져 죽은 이가 많았다. 중시 원훈히 물러나자 아찬 원문을 중시로 삼았다. 일본국의 사신이 왔는데 모두 2백 4명이었다. 아찬 김사양을 당에 보내 입조하게 하였다.
3년 봄 정월에 웅천주에서 금지를 진상하였다. 3월에 당에 들어갔던 김사양이 돌아와서 최승왕경을 바쳤다. 여름 5월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4년 봄 정월에 중시 원문이 죽었으므로, 아찬 신정을 중시로 임명하였따. 3월에 사신을ㄹ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가물었다. 가을 8월에 늙은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다. 9월에 교서를 내려 살생을 금하였다. 사신을 당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나라 동쪽 지방의 주와 군에 기근이 들어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사신을 보내 구휼하였다.
6년 봄 정월에 백성들 가운데 굶주려 죽는 이들이 많으므로 1인당 하루에 조 3승을 7월까지 지급해주었다. 2월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고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7년 봄 정월에 사벌주에서 상서로운 지초를 진상하였다. 2월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에는 진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9년 봄 정월에 천구성이 삼랑사 북쪽에 떨어졌다.
10년 봄 3월에 큰 눈이 왔다. 여름 5월에 가축 도살을 금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나라 남쪽의 주와 군을 순수하였다. 중시 문량이 죽었다. 11월에 왕이 백관잠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11년 3월에 이찬 위문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이 온천에 행차하였다. 가을 8월에 김유신의 처를 부인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 석을 내려주었다.
12년 겨울 12월에 개성을 쌓았다.
13년 봄 정월에 이찬 효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2월에 상문사를 고쳐 통문박사라 하고 표문 쓰는 일을 맡게 하였다. 왕자 김수충을 당에 들여보내 숙위하게 하였다. 여름에 가물었으며 사람들이 많이 전염병에 걸렸다. 가을에 삽령주의 산에서 상수리 열매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14년 6월에 크게 가물어 왕이 하서주 용명악의 거사 이효를 불러 임천사 못가에서 비를 빌게 하였더니, 곧 비가 내려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가을 9월에 태백성이 서자성을 가렸고, 겨울 10월에는 유성이 자미성을 침범하였으며, 12월에는 유성이 천창성 자리에서 태미성 자리로 들어갔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왕자 중경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15년 봄 정월에 유성이 달을 범하니 달이 빛을 잃었다. 성정왕후를 내보내면서 비단 5백 필, 맡 2백 결, 조 1만 석, 집 한 채를 내려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 저택을 사서 주었다.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갔으며, 숭례전이 허물어졌다. 여름 6월에 가물어 다시 거사 이효를 불러 기도하게 하였더니 곧 비가 내렸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16년 봄 2월에 의박사와 산박사를 1명씩 두었다. 3월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 여름 4월에 지진이 있었다. 6월에 태자 중경이 죽으니, 시호를 효상이라 하였다.
가을 9월에 당에 들어갔던 대감 김수충이 돌아와 문선왕과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바치므로, 곧 대학에 비치하였다.
17년 봄 2월에 왕이 나라 서쪽의 주와 군을 돌아다니면서 보살폈으며, 나이 많은 이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친히 위문하고 물자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3월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에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처음으로 물시계를 만들었다. 겨울 10월에 유성이 묘성 자리에서 규성 자리로 들어가니 작은 뭇 별들이 따라갔으며, 천구성이 동북방에 떨어졌다. 이 해에 한산주 도독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
18년 가을 9월에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쳤다.
19년 봄 3월에 이찬 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에 큰 비가 내려 산이 열 세 군데나 무너졌고, 우박이 내려 벼 모가 상하였다. 5월에 해당 관리를 시켜 해골들을 묻게 하였다.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쳤다.
20년 가을 7월에 하슬라 방면 장정 2천 명을 징발해 북쪽 경계에 장성을 쌓았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21년 가을 8월에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겨울 10월에 모벌군성을 쌓아서 일본 도적들의 침입로를 막았다.
22년 봄 3월에 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쳤는데 한 사람은 이름이 포정으로 아버지가 천승 나마였고, 또 한 사람은 이름이 정원으로 아버지가 충훈 대사였다. 그녀들에게 옷가지와 살림살이와 노비와 수레와 말을 주고 예를 갖추어 보냈더니, 당 현종이 말하기를 "이 여성들은 모두 신라 왕의 고종 누이들로서 멀리 일가붙이를 버리고 고국을 떠나 왔으니 차마 머물러 둘 수 없다" 하고, 후하게 베풀어 돌려보냈다.
23년 봄에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고 크게 죄수를 사면하였다. 웅천주에서 상서로운 지초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에 소덕왕비가 죽었다.
24년 봄 정월에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3월에 눈이 오고,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27년 가을 7월에 왕의 아우 김사종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겸하여 표를 올려서 자제들을 다으이 국학에 입학시켜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조칙을 내려 허락하였다.
30년 여름 4월에 죄수들을 사면하고 늙은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다. 일본국의 병선 3백 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 동쪽 변경을 습격하므로, 왕이 장수에게 명해 군사를 내서 크게 깨뜨렸다. 가을 9월에 백관을 적문에 모이게 해 수레에 장치한 쇠뇌 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31년 겨울 12월에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 윤충, 사인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32년 가을 7월에 당 현종이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들어와서 등주를 침구한다 하여, 태복원외경 김사란을 귀국시키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말갈 남쪽 지방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큰 눈이 1장 남짓이나 내려 산길이 막히고 죽은 사졸들이 절반을 넘어서자, 아무런 전공도 없이 돌아왔다.
33년 봄 정월에 모든 관료들에게 교서를 내려서 친히 북문으로 들어와 왕을 마주하고 상주하게 하였다.
34년 봄 정월에 형혹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35년 겨울 11월에 왕이 이찬 윤충, 사인, 영술을 보내 평양과 우두 두 주의 지세를 조사하고 살펴보게 하였다. 개가 재성의 고루에 올라가 3일 동안 짖었다.
36년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성덕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 지냈다.
34대 효성왕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승경이고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소덕왕후이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3월에 사정부의 승과 좌우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고쳤다. 이찬 정종을 상대들으로, 아찬 의충을 중시로 삼았다. 여름 5월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9월에 유성이 태미성 자리에 들어갔다.
2년 봄 2월에 당 현종이 성덕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오랫동안 안타까워하고 애처롭게 여기더니, 좌찬선대부 형숙을 홍려소경으로 삼아 보내와 조상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형숙이 장차 떠나려 할 때 현종이 형숙에게 말하였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불려 자못 글을 할 줄 알아서 중국과 비길 만하다. 그대는 독실한 유학자이므로 신절을 가지고 가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경전의 뚯을 펴 보여 그들에게 대국의 유교가 융성함을 알게 하라." 또 현종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 하여 솔부 병조참군 양계응을 부사로 삼아 보냈는데, 우리 나라의 고수들이 모두 그의 아래에 들었다. 이에 왕이 형숙 등에게 금, 보물, 약품 등을 후하게 주었다.
여름 4월에 당의 사신 형숙이 노자의 도덕경 등 문서들을 왕에게 바쳤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소부리군의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3년 봄 정월에 왕이 할아버지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선천궁이 낙성되었다. 3월에 이찬 순원의 딸 혜명을 맞이해 왕비로 삼았다. 여름 5월에 파진찬 헌영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가을 9월에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여우가 월성의 궁궐에서 울자, 개가 물어 죽였다.
4년 여름 5월에 진성이 헌원좌의 큰 별을 침범하였다.
가을 7월에 웬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예교 아래에서 나와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고, 효신공의 집 문 앞을 지나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8월에 파진찬 영종이 모반했다가 처형당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종의 딸이 후궁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왕이 그녀를 혹독히 사랑하여 은총이 날로 더하자 왕비가 이를 질투해 자기 친족과 함께 그녀를 죽이고자 모의하였기 때문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들에게 원한을 가져서 반역을 한 것이다.
5년 여름 4월에 대신 정종과 사인에게 명해 쇠뇌수들을 사열하게 하였다.
6년 봄 2월에 동부 지방에 지진이 있었는데 우뢰 같은 소리가 났다. 여름 5월에 유성이 삼대성 자리를 침범하였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효성이라 하고, 유언하여 명한 대로 관은 법류사 남쪽에서 불사르고 유골은 동해에 뿌렸다.
35대 경덕왕
경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헌영이고 효성왕의 친동생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을 태자로 세웠으므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비는 이찬 순정의 딸이다.
원년 겨울 10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2년 봄 3월에 주력공의 집 소가 한꺼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당 현종이 찬선대부 위요를 보내와 조상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서불한 김의충의 딸을 맞이해 왕비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지진이 있었다.
3년 봄 정월에 이찬 유정을 중시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겨울에 요사스러운 별이 중천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닷 말들이 그릇만하였으며 열흘 만에야 없어졌다.
4년 봄 정월에 이찬 김사인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수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5월에 가물었다. 중시 유정이 물러나고, 이찬 대정이 중시가 되었다. 가을 7월에 동궁을 수리하였다. 또 사정부와 소년감전과 예궁전을 설치하였다.
5년 여름 4월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고 근 술 잔치를 베풀었으며, 승려 1백 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6년 봄 정월에 중시를 시중으로 고쳤다. 국학의 여러 전공 과정에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3월에 진평왕릉에 벼락이 쳤다. 가을에 가물더니,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전염병이 돌자, 사신을 열 개 방면으로 내보내 안정시키고 위무하였다.
7년 봄 정월에 천구성이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에 태후가 새로 지은 영명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처음으로 정찰 1명을 두어서 백관을 규찰해 바로잡게 하였다. 아찬 정절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감찰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대곡성 등 14개의 군과 현을 두었다.
8년 봄 3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두었다.
12년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자 그냥 돌아갔다. 무진주에서 흰 꿩을 바쳤다.
13년 여름 4월에 수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5월에 성덕왕의 비를 내렸다. 우두주에서 상서로운 지초를 바쳤다.
14년 봄에 곡식이 귀해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의 향덕은 가난하여 봉양할 것이 없자, 다리의 살을 베어 그의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이를 듣고 그에게 물자를 자못 후하게 내려주고, 아울러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망덕사의 탑이 흔들렸다.
가을 7월에 죄수를 사면하였으며 늙은이, 병자,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찾아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이찬 김기를 시중으로 삼았다.
15년 봄 2월에 상대등 김사인이 근년에 재이가 자주 나타나는 까닭에 상소하여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극론하였더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16년 봄 정월에 상대등 김사인이 병으로 면직하자, 이찬 신충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에 중앙과 지방 관리들이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내려주었다. 가을 7월에 영창궁을 중수하였다. 8월에 조부에 사 2명을 더 두었다. 겨울 12월에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30현을 수속시켰다. 삽량주는 양주라 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수속시켰다. 청주는 강주라 하고 1주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한산주는 한주라 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소속시켰다. 수약주는 삭주라 하고 1주 1소경 ㅃ군 27현을 소속시켰다. 웅천주는 웅주라 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소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라 하고 1주 9군 25현을 소속시켰다. 완산주는 전주라 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소속시켰다. 무진주는 무주라 하고 1주 14군 44현을 소속시켰다.
17년 봄 정월에 시중 김기가 죽었으므로, 이찬 염상이 시중이 되었다. 2월에 왕이 교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 관리들 가운데 휴가를 청해 만 60일이 된 이는 해직하도록 결단하였다. 여름 4월에 의술을 정교하게 궁구한 의고나을 뽑아 궐내의 공봉의사에 충당하였다. 율령박사 2명을 두었다. 가을 7월 23일에 왕자가 태어났다. 우뢰와 번개가 심하더니 절 열여섯 곳에 벼락이 쳤다.
18년 본 정월에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으로 고치고, 대사는 낭중으로 고쳤으며, 집사사지는 집사원외랑으로, 집사사는 집사랑으로 고쳤다. 조부, 예부, 승부, 선부, 영객부, 좌우의방부, 사정부, 위화부, 예작전, 대학감, 대도서, 영창궁 등의 대사를 주부로 고치고, 상사서, 전사서, 음성서, 공장부, 채전 등의 대사는 주서라 하였다. 2월에 예부의 사지를 사례로 고치고, 조부의 사지를 사고, 영객부의 사지를 사의, 승부의 사지를 사목, 선부의 사지를 사주,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 병부의 노사지를 ㅏ병,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으로 고쳤다. 3월에 혜성이 나타나더니, 가을이 되어서야 없어졌다.
19년 본 정월에 도성 동북쪽에서 북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사람들이 귀신의 북소리라고들 하였다. 2월에 궁궐 안에 큰 못을 파고, 또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를 놓았다. 가을 7월에 왕자 건운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21년 여름 5월에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의 어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22년 8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두 번째 꽃이 피었다.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면직하였다.
대나마 이순은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세속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버려 왕이 여러 차례 불러도 나오지 않더니,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해 단속사를 창건해 세우고 그곳에서 살았다. 그 뒤 왕이 풍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궁궐 문에 찾아와 왕하게 한하여 아뢰었다. "들으니 옛날 걸과 주가 주색을 탐닉해 음탕한 쾌락을 그치지 않더니, 이로 말미암아 정치가 문란해지고 국가가 패망했다 합니다. 이처럼 엎어진 수레바퀴 바국이 앞에 있으니, 뒤따르는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니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거듭나시어 나라의 수명을 길이 하소서." 왕이 그 말을 듣고 감탄하여 곧 풍악을 그치게 하고, 다시 그를 내실로 이끌어 그가 말하는 오묘한 도리를 들었는데, 이야기가 세상을 다스리는 방책에까지 미치니 며칠이 되어서야 그쳤다.
23년 봄 정월에 이찬 만종이 상대등이 되고, 아찬 양상이 시중이 되었다. 3월에 혜성이 동남방에 나타나고, 용이 양산 아래 나타나더니 조금 있다가 날아가버렸다. 겨울 12월 11일에 크고 작은 유성들이 나타났는데, 보는 이들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24년 여름 4월에 지진이 있었다. 6월에 유성이 심성을 침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 서쪽 산에 장사 지냈다.
36대 혜공왕
혜공왕이 왕위에 이르니, 이름은 건운이고 경덕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월부인으로 서불한 의충의 딸이다. 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가 8세여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원년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이 태학에 행차하여 박사에게 상서의 뜻을 강의하게 하였다.
2년 봄 정월에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나타났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양리공 집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가 다섯 개였으며 다리 하나는 위를 향하고 있었다. 강주에서 땅이 꺼져 못이 되었는데, 길이와 너비가 50여척이나 되었고 물빛은 검푸렀다.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북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3년 여름 6월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7월에 별 세 개가 왕궁 뜰에 떨어져 서로 부딪쳤는데 그 빛이 불길처럼 세차게 흩어졌다. 9월에 김포현의 벼가 모두 쌀로 결실하였다.
4년 봄에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여름 5월에 사형죄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6월에 수도에 우뢰와 우박이 내려 초목을 해쳤다.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졌다.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았고 샘과 우물이 다 말랐다. 호랑이가 궁중에 들어왔다.
가을 7월에 일길찬 대공이 그의 아우 아찬 대렴과 함께 반역해 무리를 지어 33일 동안 왕궁을 에워쌌다. 왕의 군사가 이들을 토벌해 평정하고 9족을 처단하였다.
겨울 10월에 이찬 신유를 상대등으로, 이찬 김은거를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5년 봄 3월에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에 메뚜기가 메뚜기떼가 생기고 가물자, 왕이 백관들에게 각기 알고 있는 인사를 천거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치악현의 쥐 80여 마리가 평양을 향해 갔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6년 봄 정월에 왕이 서원경에 행차하면서 경유하는 주와 현의 죄수들을 특별 사면해주었다. 3월에 흙비가 내렸다. 5월 11일에 혜성이 오거성 북방에 나타났다가, 6월 12일이 되어서야 없어졌다. 29일에 호랑이가 집사성에 들어왔으므로 잡아죽였다. 가을 8월에 대아찬 김융이 반역하다가 처형당하였다. 겨울 11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11년 여름 6월에 이찬 김은거가 반역하다가 처형당하였다. 가을 8월에 이찬 염상과 시중 정문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다.
12년 봄 정월에 왕이 교서를 내려 백관들의 관직 이름을 모두 다 이전대로 복구하였다. 왕이 감은사에 행차하여 바다에 망제를 지냈다.
2월에 왕이 국학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 3월에 창부에 사 8명을 더 두었다.
13년 봄 3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더니, 여름 4월에 또 지진이 있었다. 상대등 양상이 상소하여 시국 정치를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15년 본 3월에 수도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가옥이 무너지고, 죽은 이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태백성이 달에 들어갔다. 백좌법회를 열었다.
16년 봄 정월에 노란 안개가 끼고, 2월에는 흙비가 내렸다 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장성하자 음악과 여색에 빠져들어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절제하지 않았다. 기강이 문란해지니 재난과 괴이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백성들의 마음은 갈팡질팡 안돈하지 못해 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하였다.
여름 4월에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경신이 군사를 동원해 지정 등을 베어 죽였다. 왕과 왕비도 반란병에게 살해되었다.
양상 등은 왕의 시호를 혜공이라 하였다.
37대 선덕왕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김씨요 이름은 양상으로 내물왕의 10세 손이다. 아버지는 해찬 효방이고, 어머니는 김씨 사소부인으로 성덕왕의 딸이다. 왕비 구족부인은 가간 양품의 딸이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아버지를 개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로 추존하였으며, 아내를 왕비로 삼았다. 이찬 경신을 상대등으로, 아찬 의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2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가을 7월에 사신을 파견해 패강 남쪽의 주와 군을 안정시키고 위무하였다.
3년 봄 2월에 왕이 한산주에 순행하여 민호들을 패강진으로 옮겼다. 가을 7월에 시림의 들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4년 봄 정월에 아찬 체신을 대곡진 군주로 임명하였다. 2월에 수도에 눈이 3척이나 내렸다.
5년 여름 4월에 왕이 왕위를 내놓으려 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세 번이나 표문을 올려 간하니 그제야 중지하였다.
6년 봄 정월에 왕이 병으로 누워 점차 위독해지자, 이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과인은 본래 재주와 덕이 얇고 가벼워 왕위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의 추대를 피하기 어려워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왕위에 있는 동안 농사는 순조롭게 되지 않고 백성의 살림은 공궁해졌으니, 이는 모두 나의 덕이 백성의 여망에 부합하지 못하고 정사가 하늘의 뜻에 들어맞지 아니한 까닭이다. 과인은 늘상 왕위를 물려주고 궁밖에 물러나 살고자 하였으나, 그 때마다 여러 관료와 신하들이 지성으로 만류해 내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 갑자기 병에 걸려 다시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매어 있으니, 돌이켜보면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내가 죽은 다음에는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하고, 유골은 동해에 뿌릴 일이다."
13일에 죽으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다.
38대 원성왕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경신이요 내물왕의 12세 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고, 왕비는 김씨로 신술 각간의 딸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반역하는 신하가 권세를 휘둘어 함부로 날뛰었던 바, 선덕이 당시 상대등으로서 임금의 측근에 있는 악당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서서 주창하엿다. 경신이 이에 참여하여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로가 있었으므로, 선덕이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이 죽었을 때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후사를 의논해 왕의 족자 주원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주원의 집은 수도의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서 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임금의 크나큰 지위에 나아가는 것은 본디 사람이 도모할 수 없는 것이니, 오늘 폭우가 쏟아지는 것은 아마도 하늘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아우이고 평소에 덕망이 높아 임금의 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순식간에 일치해 경신을 옹립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윽고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에 왕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을 추봉하여 현성대왕이라 하고, 증조부 이찬 의관을 신영대왕으로, 조부 이찬 위문을 흥평대왕으로, 아버지 일길찬 효양을 명덕대왕으로 추봉하였다. 또 어머니 박시를 소문태후라 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사당을 헐고 시조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조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으로 5묘를 삼았다. 문무 백관의 작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 이찬 병부령 충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이찬 제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가, 제공이 면직하자 이찬 세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전왕비 구족왕후를 바깥 궁으로 내보내고, 조 3만 4천 석을 내려주었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총관을 고쳐 도독이라고 하였다.
2년 여름 4월에 나라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가을 7월에 가물었다. 9월에 수도의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벼 3만 3천 2백 40석을 풀어서 나누어 구휼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벼 3만 3천 석을 내주었다.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현령 직을 주었다.
3년 봄 2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쳤다. 8월 초하루 신사에 일식이 있었다.
4년 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을 제정하여 고나직에 나가게 하였다. 춘추좌씨전 및 예기나 문선을 읽고 그 뜻에 능통하며 겸하여 논어, 효경에 밝은 이를 상품으로 하고, 곡례, 논어, 효경을 읽은 이를 중품으로 하며, 곡례, 효경을 읽은 이를 하품으로 하였다. 만약 5경과 3사와 제자백가서에 두로 능통한 이는 차례를 뛰어넘어서 발탁해 등용하였다. 이전에는 단지 활솜씨로 사람을 선발했던 것을 이때 와서 고친 것이다. 가을에 나라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떼가 생겼으며 도적들이 많아지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안정시키고 위무하였다.
5년 본 정월 초하루 갑진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의 백성들이 굶주리자 곡식을 내서 나누어주었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9월에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삼자, 집사자 모초가 논박하였다. "자옥은 문적 출신이 아니므로 수령 직을 맡길 수 없다." 그러자 시중이 제의하였다. "비록 문적 출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찍이 당에 들어가 학생이 되었던 사람이므로 역시 등용할 만하지 않겠는가?" 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6년 본 정월에 종기를 시중으로 삼았다. 벽골제를 증축하였는데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들을 징발하여 공사를 일으켰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3월에 일길찬 백어를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크게 가물었다.
여름 4월에 태백성과 진성이 동정 자리에 모였다. 5월에 곡식을 내서 한산주와 웅천주의 굶주린 주민들을 구휼하였다.
7년 봄 정월에 왕태자가 죽었다.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이찬 제공이 반역하다가 처형당하였다. 웅천주 향성 대사의 아내가 한꺼번에 세 사내아이를 낳았다.
8년 가을 7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미인 김정란을 바쳤다. 그녀는 나라 제일의 미인으로 몸에서 행내가 났다. 8월에 왕자 의영을 태자로 봉하였다. 겨울 11월 초하루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10년 봄 2월에 지진이 있었다. 태자 의영이 죽었다. 시호를 헌평이라 하였다.
11년 봄 정월에 혜충태자의 아들 준옹을 태자로 봉하였다. 여름 4월에 가뭄이 들자 왕이 친히 죄수들을 다시 심사해주었더니, 6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14년 본 3월에 궁궐 남쪽 누교에 화재가 일어나고, 망덕사의 두 탑이 부딪쳤다. 여름 6월에 가물었다. 굴자군 석남오 대사의 아내가 한꺼번에 3남 1녀를 낳았다.
겨울 12월 29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대로 관을 봉덕사 남쪽에서 불살랐다.
39대 소성왕
소성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준옹이요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고, 왕비는 김씨 계화부인으로 대아찬 숙명의 딸이다.
원년 봄 3월에 청주의 거로현을 학생녹읍으로 삼았다. 냉정현령 염철이 흰 사슴을 진상하였다. 여름 5월에 우두주 도독이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었다. "마치 소처럼 생긴 이상한 짐승이 있는데, 그 몸뚱이가 길고도 크며 꼬리는 3척쯤이나 되고, 털은 없는데 코가 길다란 놈이 현성천에서 오식양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가을 7월에 9척이나 되는 인삼을 얻었는데 매우 기이하게 여겨 당에 사신을 보내 진상하였더니, 당 덕종은 인삼이 아니라고 생각해 받지 않았다. 8월에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2년 봄 정월에 왕비 김씨를 왕후로 봉하고, 충분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려보냈으며, 서란전의 발은 날려간 곳을 알 수 없었고, 임해문과 인화문이 무너졌다. 6월에 왕자를 태자로 봉하였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소성이라 하였다.
40대 애장왕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청명이요 소성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김씨 계화부인이다.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아찬 병부령 언승이 섭정을 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이름을 중희로 고쳤다.
2년 봄 2월에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두 묘당을 따로 세우고 시조대왕 및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대왕, 조부 혜충대왕, 아버지 소성대왕을 5묘로 삼았다. 병부령 언승을 어룡성 사신으로 삼았다가 얼마 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 초하루 임술에 꼭 있어야 할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을 9월에 형혹성이 달에 들어가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고 우두주에서는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에 몹시 추워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 탐라국이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3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8월에 가야산의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삽량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겨울 12월에 균정에게 대아찬 관위를 수여하고, 가짜 왕자로 삼아 왜국에 볼모로 보내려 하였으나 균정이 사양하였다.
4년 여름 4월에 왕이 남쪽 교외에 나가서 보리 농사를 살폈다. 가을 7월에 일본국과 더불어 사절을 교환하고 우호를 맺었다.
5년 본 정월에 이찬 수승을 시중으로 삼았다. 여름 5월에 일본국에서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을 진상하였다. 가을 7월에 알천 가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삽량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였다. 우두주 난산현에서 누워 있던 돌이 일어섰다. 웅천주 소대현 부포의 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9월에 망덕사의 두 탑이 부딪쳤다.
6년 본 정월에 왕의 어머니 김씨를 대왕후로 봉하고 왕비 박씨를 왕후로 봉하였다. 가을 8월에 법규 20여 조목을 반포하였다.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자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새롭게 절을 창건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수리 보수하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쓰는 것과 금과 은으로 그릇을 만들어 쓰는 것을 금하고, 마땅히 관련 부서에서 널리 알려 시행하라 하였다.
8년 봄 2월에 왕이 숭례전에 앉아 음악 연주를 관람하였다. 가을 8월에 큰 눈이 내렸다.
9년 봄 2월에 일본국의 사신이 도착하자 왕이 두터운 예로 그들을 접대하였다. 사신을 열두 방면으로 보내 여러 군과 읍의 경계를 나누어 정하였다. 가을 7월 초하루 신사에 일식이 있었다.
10년 봄 정월에 달이 필성을 침범하였다. 여름 6월에 서형산성의 소금 창고가 울었는데 그 소리가 소 우는 것 같았으며, 벽사에서는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었다.
왕의 숙부 언승이 그의 아우 제옹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였다. 왕의 아우 체명이 왕을 시위하고 있다가 함께 해를 입었다.
왕에게 시호를 추증하여 애장이라 하였다.
41대 헌덕왕
헌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언승이요 소성왕의 친동생이다. 왕비 귀승부인은 예영 각간의 딸이다.
이찬 김숭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2년 본 정월에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2월에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사신을 파견해 국내의 제방을 수리하였다. 가을 7월에 유성이 자미성 자리에 들어갔다. 서원경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3년 여름 4월에 왕이 처음으로 평의전에 나가 정사를 보았다.
4년 봄에 균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이찬 충영이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가을 9월에 급찬 숭정을 북국에 사신으롤 보냈다.
5년 봄 2월에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현덕문에 화재가 있었다.
6년 봄 3월에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즐거움이 절정에 이르러 왕이 거문고를 타니, 이찬 충영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여름 5월에 나라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났다. 왕이 사신을 파견해 수재를 입은 주와 군의 주민들을 위무하고 1년 동안의 납세를 면제해주었다. 가을 8월에 수도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마치 밤과 같았다. 무진주 도독 헌창이 중앙에 들어와 시중이 되었다. 겨울 10월에 검모 대사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넷을 낳았다.
7년 여름 5월에 눈이 내렸다. 가을 8월 초하루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서쪽 변경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군사를 내 이를 쳐서 평정하였다. 큰 별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나타나 서쪽을 가리켰는데, 뻗친 빛의 길이가 6척쯤이나 되었고 폭은 2촌쯤 되었다.
8년 봄 정월에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려서 정동 지방에 가 먹을 것을 구하는 이가 1백 70명이나 되었다. 한산주 당은현에서는 길이 10척, 폭 8척, 높이 3척 5촌이나 되는 돌이 저절로 1백여 보를 옮아갔다. 여름 6월에 망덕사의 두 탑이 부딪쳤다.
9년 여름 5월에 비가 내리지 않아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더니, 가을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겨울 10월에 사람들이 많이 굶주려 죽자,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구휼하게 하였다.
11년 봄 정월에 이찬 진원의 나이가 70세가 되었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이찬 헌정이 병으로 걷지 못하자, 나이는 아직 70세가 되지 않았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목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3월에 초적들이 여기저기 일어나자 여러 주와 군의 도독과 태수에게 명령해 그들을 붙잡게 하였다.
가을 7월에 당의 운주 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헌종이 장차 토벌하고자 하여 조칙으로 양주 절도사 조공을 보내와 우리 군사를 징발하였다. 왕이 칙지를 받들어 순천군장군 김웅원에게 명해 갑옷을 갖춘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13년 봄에 백성들이 굶주려서 자손을 팔아 생존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가을 7월에 패강과 남천의 두 돌이 서로 싸웠다.
14년 봄 정월에 왕의 친동생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 하였다.
2월에 눈이 5척이나 내리고 나무들이 말랐다.
3월에 웅천주 도독 헌창이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했다 하여 반역하고, 국호를 '장안'이라고 하였으며, 연호를 세워 '경원 원년'이라고 하였다. 그는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의 네 도독과 국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사신들 및 여러 군과 현의 수령들을 위협해 자기 휘하의 무리로 삼았다. 청주 도독 향영은 몸을 빼내 추화군으로 달아나고, 한산, 우두, 삽량, 패강, 북원 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아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에 완산주의 장사 최웅과 주조인 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수도로 도망해 와서 사태를 보고하였다. 왕은 곧바로 최웅에게 급찬의 관위와 속함군 태수 직을 주고, 영충에게도 급찬의 관위를 주었으며, 드디어 장수 여덟 사람을 뽑아 왕도의 8방을 지키게 한 다음에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웅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이 그 뒤를 이었으며,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과 대아찬 우징 등이 3군을 통솔하여 정벌에 나섰다. 각간 충공과 잡찬 윤응은 문화의 관문을 지키고, 명기와 안락 두 화랑이 각각 종군을 청해, 명기는 낭도들과 함께 황산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으로 갔다. 그러자 헌창이 그의 장수를 보내 요로를 점거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장웅이 적병들을 도동현에서 만나 쳐부수었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의 군사와 합해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이겼으며, 계속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쳐 없앴다. 균정 등은 성산에서 적과 어우러져 싸워서 궤멸시켰다. 여러 부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적과 크게 싸워서 베어 죽이고 잡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헌창은 겨울 몸만 빼내 성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여러 부대가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기 열흘 만에 성이 바야흐로 함락당하려 하자, 헌창은 모면할 수 없을 것을 알고 자살하였다. 그의 종자가 머리와 몸뚱이를 베어 따로 묻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그 몸뚱이를 옛 무덤에서 찾아내 다시 베었다. 그의 친족과 도당 무릇 2백 39명을 죽이고 백성들을 풀어주었다. 그 뒤 전공을 논하여 관작과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아찬 녹진에게는 대아찬 관위를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은 적들과 가까이에 있었으나 반란군에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여, 7년 동안 납세를 면제해주었다.
이보다 앞서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못 가운데 이상한 새가 있었는데, 몸 길이가 5척이나 되고 검은 빛깔이었으며, 머리는 다섯 살 난 아이 머리만 하였고, 부리의 길이는 1척 5촌이나 되었다. 또 눈의 모습은 사람처럼 생겼고 모이주머니는 닷 되들이 그릇만 하였는데, 3일 만에 죽었으니 바로 헌창이 패망할 조짐이었다.
각간 충공의 딸 정교를 맞이하여 태자비로 삼았다. 패강의 산골짜기 사이에서 넘어진 나무가 싹을 틔웠는데, 하룻밤 만에 높이가 13척이요 둥치 둘레가 4척 7촌이나 자랐다. 여름 4월 13일에 달빛이 핏빛과 같았다. 가을 7월 12일에 태양에 검은 햇무리가 생겨 남북 방향을 가리켰다.
15년 본 정월 5일에 서원경에서는 벌레가 하늘에서 떨어져내렸고, 9일에는 희고 검고 붉은 세 종류의 벌레가 생겨 눈밭을 무릅쓰고 기어다녔는데, 햇볕을 보면 멈추었다. 원순과 평원 두 각간이 일흔 살이 되어 은퇴를 고하자, 왕이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여름 4월 12일에 유성이 천시성 자리에서 일어나 제좌를 침범하더니, 천시원의 동북쪽 별들과 직녀성, 왕량성을 지나 각도성에 이르러 셋으로 나누어졌는데, 북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는 사라져버렸다.
17년 봄 정월에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적도 수신 등 1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여 평양에 도읍을 세우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하니,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아 죽였다. 3월에 무진주 마미지현에 사는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와 몸뚱이가 둘이고 팔이 넷이었으며, 그 아이가 태어날 때 하늘이 크게 천둥을 쳤다.
가을에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 대양관군에 사는 황지 나마의 아내가 한꺼번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므로, 조 1백 석을 내려주었다.
18년 가을 7월에 우잠 태수 백영을 시켜서 한산 북쪽의 여러 주와 군의 주민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에 장성 3백 리를 쌓았다.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42대 흥덕왕
흥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수종인데 뒤에 고쳐 경휘라고 하였다. 헌덕왕의 친동생이다.
겨울 12월에 왕비 장화부인이 죽자 정목왕후로 추봉하였다. 왕이 왕비를 그리워하여 못내 잊지 못하고 서운해하면서 즐거움을 멀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들일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외짝 새에게도 제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의좋은 배필을 잃었는데 어찌 차마 무정하게 금방 다시 장가들겠는가!" 하고 끝내 듣지 않았으며, 시녀들까지도 가까이 하지 앟아 좌우에서 심부름하는 이로는 오직 내시뿐이었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3월에 고구려 승려 구덕이 당에 들어갔다가 불경을 가지고 돌아오니,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을 모이게 하여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가을 8월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수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3년 여름 4월 청해대사 궁복은 성이 장씨로 당나라 서주에 들어가 군중소장이 되었는데, 뒤에 귀국하여 왕을 알현한 다음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청해를 지키게 되었다.
한산주 표천현에 사는 요사스러운 사람이 빨리 부자가 되는 비술이 있다고 떠벌리자, 많은 사람들이 자못 이에 정신이 팔렸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사교를 가지고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를 처형하는 것은 선와의 법규이다" 하고, 그를 먼 섬으로 내쳐버렸다.
겨울 12월에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
5년 여름 4월에 왕이 병에 걸려 편치 않자 기도를 드리고, 아울러 승려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6년 봄 정월에 지진이 있었다. 시중 우징이 면직되고, 이찬 윤분이 시중이 되었다.
7년 봄과 여름에 가물더니 땅에 남아난 곡식이 없었다. 왕이 정전에 나가 앉지 않고 평상시보다 음식의 가짓수를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감옥수들을 사면하였더니, 가을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8월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왕이 사신을 시켜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위무하였다.
8년 봄에 나라 안에 큰 기근이 들었다. 여름 4월에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두 번째 꽃이 피었다.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으로 죽는 이가 많았다. 11월에 시중 윤분이 물러났다.
9년 봄 정월에 우징이 다시 시중이 되었다. 가을 9월에 왕이 서형산 아래에 행차하여 군대를 크게 사열하고, 무평문에 나와서 활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나라 남쪽의 주와 군을 순행하고 늙은이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찾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11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 여름 6월에 헤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호를 흥덕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하였다.
43대 희강왕
희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제륭이요 원성대왕의 손자 이찬 헌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포도부인이고, 왕비 문목부인은 갈문왕 충공의 딸이다.
처음에 흥덕왕이 죽었을 때 그의 당제 균정과 당제의 아들 제륭이 모두 임금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자 시중 김명과 아찬 이홍과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은 조카 예징 및 김양과 함께 그의 아버지 균정을 받들어, 양편이 한꺼번에 궁궐로 들어가 서로 싸웠다. 김양은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함께 달아나고, 균정은 살해되었으므로 뒤에 제륭이 곧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2년 봄 정월에 사형죄 이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아버지를 익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라 하였다. 시중 김명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으며, 아찬 이홍을 시중으로 삼았다. 아찬 우징이 자기 아버지 균정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말을 입밖에 내자, 김명과 이홍 등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5월에 우징이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처자와 함께 황산진 어구로 달아나 배를 타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로 가서 의탁하였다. 6월에 균정의 매제 아찬 예징과 아찬 양순이 우징에게로 도망해 와 투신하였다.
3년 봄 정월에 상대등 김명과 시중 이홍 등이 군사를 일으켜 안을 꾸며서 왕의 측근들을 죽이니, 왕은 자신도 온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그만 궁중에서 목을 맸다.
시호를 희강이라 하고,
소산에 장사 지냈다.
44대 민애왕
민애왕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으로 원성대왕의 증손이요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상대등이 되었는데, 시중 이홍과 함께 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이찬 김귀를 상대등으로, 아찬 헌숭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2월에 김양이 병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우징을 알현하였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이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마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하였다.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이홍은 임금과 아버지를 그릇되이 죽였으니 그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습니다. 원컨대 장군의 군사를 빌려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그러자 궁복이 말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정의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 하였으니, 내가 비록 용렬하나 그 명령을 좇겠습니다." 마침내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그의 벗 정년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아니면 이 환란을 평정할 수 없겠다."
겨울 12월에 김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 철야현에 이르렀다. 왕은 대감 김민주를 시켜 군사를 내서 맞아 싸우게 하였다.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보내 기마병 3천 명으로 부딪쳐 가서 거의 다 살상하였다.
2년 봄 윤 정월에 김양의 군사는 밤낮으로 행군하여, 19일에는 달벌의 언덕에 도착하였다. 왕은 군사들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 및 억훈 등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김양의 군사가 또 한 번 싸워 크게 이기니, 왕의 군사 가운데 죽은 이가 절반이 넘었다. 이때 왕은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측근들도 모두 흩어져 가버리고 혼자 서서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다가 월유택으로 도망해 들어갔으나, 병사들이 찾아내서 해쳤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라 하였다.
45대 신무왕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우징이고 원성대왕의 손자인 균정 상대등의 아들이며 희강왕의 종제이다. 예징 등이 먼저 궁성 내부를 깨끗이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맞이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아들 경응을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 대사 궁복을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 2천 호를 봉해주었다.
이홍은 두려워 처자식을 버려두고 산림으로 도망하였는데, 왕이 기병을 보내 쫓아서 잡아죽였다.
왕이 병으로 두러누웠는데 꿈에 이홍이 활을 쏘아 왕의 등을 맞혔다.
잠을 깨어보니 등에 종기가 생겨 있었다.
이 달 23일이 되어 죽으니,
시호를 신무라 하고,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 지냈다.
46대 문성왕
문성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경응이고 신무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정계부인이다.
8월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청해진 대사 궁복은 일찍이 군사로 아버지 신무를 도와 선왕의 큰 적당을 없앴으니 그 큰 공적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곧 진해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겸하여 그에 걸맞은 예복을 내려주었다.
2년 봄 정월에 예징을 상대등으로, 의종을 시중으로, 양순을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3년 봄에 수도에 전염병이 돌았다. 일길찬 홍필이 반역을 모의하다 발각되자 바다의 섬으로 도망해 들어갔는데, 체포하려다가 잡지 못하였다.
4년 본 3월에 이찬 위흔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5년 가을 7월에 호랑이 다섯 마리가 신궁의 동산에 들어왔다.
6년 봄 2월 초하루 갑진에 일식이 있었고, 태백성이 진성을 침범하였다. 가을 8월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7년 봄 3월에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맞이하여 둘째 왕비로 삼으려 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12월 초하루에 세 개의 해가 나란히 나타났다.
8년 봄에 청해진의 궁복이 왕이 자기 딸을 들여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웅거해 반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자니 뜻밖의 환란이 있을까 염려되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어떻게 처리할 바를 모르고 근심하였다. 무주 사람 염장이라는 이가 당시에 용맹과 힘으로 유명하였는데, 그가 찾아와 말하였다. "조정에서 다행히 제 말을 들어준다면 제가 한 사람의 군사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궁복의 머리를 베어 바치겠습니다." 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 염장은 짐짓 나라에 반역한 것처럼 하여 청해진에 몸을 의탁하였다. 궁복은 장사를 아꼈던 터라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이끌어 상객으로 삼고, 그와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급기야 술이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다음 그의 무리를 불러 설득하니, 그들은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9년 여름 5월에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 등이 반역하다 처형당하였다.
11년 가을 9월에 이찬 김식과 대흔 등이 반역해 처형당하고, 대아찬 흔린은 여기 연좌되어 죄를 입었다.
12년 봄 정월에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수도에 흙비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감옥의 죄수 가운데 사형수 이하를 사면하였다.
13년 봄 2월에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은 벽골군으로 옮겼다.
17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서남 지방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보살폈다. 겨울 12월에 진각성에 화재가 났다.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19년 가을 9월에 왕이 병이 들자 유언의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과인이 미미한 자질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위로는 하늘이 굽어보는 데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에 실망을 줄까 염려하느라,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는 것이 마치 깊은 물과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하였다. 공경대부와 여러 신하들이 죄우에서 붙들어주고 끌어주는 데 힘입어 왕위를 지탱해왔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병에 걸려 열흘이 되었으니, 정신이 흐릿하고 멍한 사이에 내 목숨은 아침 이슬처럼 스러질 듯하다. 생각해보면 선조로부터 이어온 왕업에는 그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되며, 군사와 정치에 관련된 제반 사무는 잠시라도 페기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서불한 의정은 선대 임금의 손자요 과인의 숙부로서, 효성과 우애가 있고 명민하며 관후하고 인자하여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정사를 끼고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삼가 받들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기를 만하다. 이에 무거운 짐을 벗어 어질고 덕있는 이에게 맡기려 하니 당부해 맡길 만한 적임자를 얻은 것이니, 다시 무슨 한될 일이 있겠는가? 하물며 나고 죽는 것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만물의 큰 기약이요 장수하고 일찍 죽으며 길고 짧은 것은 운명의 이미 정해진 분수이므로, 떠나는 이는 하늘의 이치를 이루는 것이니 뒤에 남는 이들은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너희 여러 신하들은 힘을 다하고 충성을 다 바쳐 가는 이를 보내고 남은 이를 섬겨 혹여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할 것이며, 나라 안에 널리 포고하여 나의 뜻을 밝게 알릴 일이다."
이레가 지나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 지냈다.
47대 헌안왕
헌안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의정이요 신무왕의 이복 아우이다. 어머니 조명부인은 선강왕의 딸이다. 문성왕의 유언으로 왕위에 올랐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 김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당성군 남쪽 강변에서 웬 큰 물고기가 나왔는데, 몸 길이가 40보나 되고 높이는 6장이었다.
3년 봄에 곡식이 귀해 사람들이 굶주리자, 왕이 사신을 보내 구휼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교서를 내려 제방을 튼튼하게 수리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다.
4년 가을 9월에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을 모이게 하였는데, 왕족 응렴이 나이 15세로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은 그의 뜻을 보고자 하여 문득 물었다. "그대는 한동안 돌아다니면서 배웠는데, 배울 만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는가?" 응렴이 대답하였다. "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자못 착한 행실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왕이 "어떤 것인가?" 하고 물으니, "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자기가 앞에 나서지 않고 남의 아래에 자리하는 이이고, 한 사람은 집안에 재물이 넉넉하여 의복을 사치할 만한데도 늘 삼베와 모시옷으로 기꺼워하는 이이며,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리는 사람이면서도 한 번도 남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는 이였습니다. 제가 본 바는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잠잠히 있다가 왕후에게 귀엣말로 "내가 사람들을 많이 겪였지만 응렴만한 이는 없소" 하고는, 그를 사위로 삼을 생각으로 돌아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삼가 몸을 아끼라. 나에게 딸 자식이 있으니 그대의 배필을 삼게 하리라." 다시 술을 가져다가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하였다.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큰 아이는 올해 스무 살이고 작은 아이는 열아홉 살이다. 그저 그대 마음에 드는 데로 장가를 들라." 응렴은 사양하다 못해 일어나 절을 하여 감사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고하였다. 부모가 말하였다. "듣자하니 왕의 두 딸의 얼굴은 언니가 동생만 못하다 하니, 만약 부득이하다면 동생에게 장가드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응렴은 여전히 망설이며 경정을 하지 못하다가 흥륜사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이 말하였다. "언니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이로움이 있을 것이고, 동생에게 장가들면 이와는 반대로 세 가지 손해가 있을 것이다." 응렴이 곧 왕에게 아뢰었다. "저는 감히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겠으니, 그저 왕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왕은 맏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다.
5년 본 정월에 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하자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이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 나라의 옛 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의 두 여왕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에 가까운 것이니 본받을 수 없다.사위 응렴은 나이는 비록 어리나 노성한 덕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들이 왕으로 옹립해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의 훌륭한 기업을 잃지 않을 것인 바, 과인은 죽더라도 또한 마음을 놓을 것이다."
이 달 29일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 지냈다.
48대 경문왕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응렴이고 희강왕의 아들 계명 아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광화부인이고, 왕비는 김씨 영화부인이다.
원년 3월에 왕이 무평문에 나와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이찬 김정을 상대등으로, 아찬 위진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2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8월에 당에 들어갔던 사신 아찬 부량 등 일행이 물에 빠져 죽었다.
3년 봄 2월에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 여러 사람에게 경서의 뜻을 강론하게 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겨울 10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꽃을 피웠다.
영화부인의 동생을 맞아들여 둘째 왕비로 삼았다. 그 뒤 다른 날 왕이 흥륜사 스님에게 묻기를 "대사가 전에 일렀던 바 세 가지 이로움이람 무엇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였다. "그 당시에 왕과 왕비께서 뜻대로 된 것을 기뻐하여 총애가 점점 깊어졌으니 이것이 첫째 이로움이고, 그로 인해 왕위를 이을 수 있었으니 이것이 둘째 이로움이며, 마침내 처음부터 바라던 작은 딸에게 장가들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셋째 이로움입니다." 왕이 듣고 크게 웃었다.
4년 봄 2월에 왕이 감은사에 행차하여 바다에 망제를 지냈다. 여름 4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다.
6년 봄 정월에 부인 김씨를 문의왕비로 봉하였으며, 왕자 정을 왕태자로 삼았다. 15일에는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구경하고, 아울러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겨울 10월에 이찬 윤흥이 아우 숙흥, 계흥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 일이 발각되자 대산군으로 달아났다. 왕이 명을 내려 추격해서 체포하여 목을 베고 일족을 처단하였다.
7년 봄 정월에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에 수도에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홍수가 나서 곡식이 익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사신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12월에 객성이 태백성을 침범하였다.
8년 봄 정월에 이찬 김예와 김현 등이 반역을 꾀하다 처형당하였다. 여름 6월에 황룡사 탑에 담벼락이 쳤다.
9년 가을 7월에 학생 이동 등 세 사람을 진봉사 김윤에 딸려 당에 보내 학업을 익히게 하고, 아울러 책값으로 은 3백 냥을 내려주었다.
10년 여름 4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5월에 왕비가 죽었다. 가을 7월에 홍수가 났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으며, 백성들 사이에 전염병이 많이 돌았다.
12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에 나라 안의 주와 군에서 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쳤다.
13년 봄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게다가 전염병이 돌자, 왕이 사신을 파견해 진휼해주었다. 가을 9월에 황룡사 탑이 완성되었는데, 9층에다가 높이가 22장이었다.
14년 여름 5월에 이찬 근종이 반역을 꾀해 대궐을 침범하므로, 금군을 출동시켜 쳐부수었다. 근종이 그이 도당들과 함께 밤에 성을 빠져나가니, 추격해 잡아서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였다.
최치원이 당에서 급제하였다.
15년 봄 2월에 수도와 나라 동쪽 지방에 지진이 있었다.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야 없어졌다. 여름 5월에 용이 왕궁의 우물에 나타나더니, 조금 있다가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모여들자 날아갔다.
가을 7월 8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문이라 하였다.
49대 헌강왕
헌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정이고 경문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이고 왕비는 의명부인이다. 왕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책보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모두 입으로 외웠다.
2년 봄 2월에 황룡사에서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백고좌를 베풀어 불경을 강론하였는데, 왕이 친히 행차하여 들었다.
3년 봄 정월에 우리 태조대왕이 송악군에서 태어났다.
4년 가을 7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려다 황소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8월에 일본국의 사신이 이르니, 왕이 조원전에서 그를 접견하였다.
5년 봄 2월에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에게 명해 강론하게 하였다. 3월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 앞에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형용이 해괴하고 옷차림도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은 산과 바다의 정령들이라고 여겻다.
여름 6월에 일길찬 신홍이 반역하다 사형을 당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준례문에 나가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11월에 왕이 혈성의 들에서 사냥을 하였다.
6년 봄 2월에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가을 8월에 웅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수도의 민가들이 즐비하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지금 민간에서 집을 기와로 덮고 띠풀로 지붕을 이지 않는다 하고, 밥을 숯으로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민공이 대답하기를 "저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 하고, 이어 아뢰었다. "주상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래로 음양이 조화롭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 변경 지역은 잠잠하고 도시에서는 기쁘게 즐기니, 이는 전하의 어진 덕이 불러들인 바입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였다. "이는 그대들의 보좌에 힘입은 것이지 내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
7년 봄 3월에 왕이 여러 신하들과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무르익자 왕은 거문고를 두드리고 좌우에서는 각각 노래와 시를 불러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고 파하였다.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명주 열 개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에 고미현이 여인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9년 봄 2월에 왕이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각각 시를 한 수식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11년 봄 2월에 호랑이가 궁궐 뜰에 들어왔다. 3월에 최치원이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황소의 적당을 쳐부순 것을 축하하였다.
12년 봄에 북진에서 아뢰기를 "적나라 사람들이 우리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걸어놓고 갔습니다"라 하고, 드디어 가져와 바쳤다. 그 나무 조각에는 글자 열다섯 자가 씌어 있었는데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들이 함께 신라와 화친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여름 6월에 왕이 병으로 편치 않으니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해주고 또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어 불경을 강설하였다.
가을 7월 5일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
50대 정강왕
정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황이고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8월에 이찬 준흥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나라 서쪽 지방이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2년 봄 정월에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고 왕이 친히 행차하여 강론을 들었다. 한주의 이찬 김요가 반역하니 군사를 내어 죽였다.
여름 5월에 왕은 병이 악화되자 시중 준흥에게 말하였다. "내 병이 위독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 틀림없는데, 불행하게도 뒤를 이을 아들이 없다. 그러나 나의 누이 만은 천품이 명민하고 체격이 장부 같으니, 그대들은 의당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서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
가을 7월 5일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
51대 진성(여)왕
진성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만이고 헌강왕의 누이동생이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왕이 친히 행차하여 설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2년 봄 2월에 소량리의 돌이 저절로 움직여갔다. 왕이 평소에 각간 위홍과 정을 통하더니, 이 때 와서는 늘상 궁궐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 아울러 그에게 명해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정리하고 편집하게 하여, 이를 삼대목이라고 하였다. 위홍이 죽게 되자 시호를 추증하여 혜성대왕이라 하였다. 이후부터는 몰래 젊은 미남 두세 명을 끌어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아울러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이들이 제멋대로 방자히 굴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나돌며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하니,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이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이가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정의 거리에 방을 써 붙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수색했으나 잡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왕에게 말하였다. "이는 틀림없이 문인으로서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한 이의 소행일 것인 바, 아마 대야주의 은자 거인이 아닌가 합니다." 왕이 거인을 잡아 수도의 감옥에 가두게 하고 장차 처형하려 하였다. 거인이 분하고 원통하여 감옥 벽에 글을 쓰기를 "우공이 통곡하자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비통함을 머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다. 지금 나의 깊은 시름 돌아보니 옛 일과 같은데, 하늘은 말없이 맑게 개어 푸르기만 할 뿐이가?"라고 하였다. 그 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벼락이 내리치면서 우박이 쏟아졌다. 왕이 두려워 거인을 풀어주고 돌려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병으로 편치 않자 죄수들을 살펴 사형죄 이하를 사면하고, 승려 60명에게 도첩을 수여하자 왕의 병이 곧 나았다. 여름 5월에 가물었다.
3년에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들이 공물과 부세를 보내오지 않아, 창고가 비고 나라 재정이 궁핍하였다. 왕이 사신들을 보내 독촉하였더니 이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 때 원종과 애노 등은 사벌주에 웅거해 반란하였다. 왕이 나마 영기에게 명해 사로잡게 하였는데 영기는 적들의 보루를 바라보고 두려워 나아가지 못하였다. 촌주 우련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겨우 나이 10세에 불과한 우련의 아들에게 아버지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4년 봄 정월에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생겼다. 15일에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보았다.
5년 겨울 10월에 북원 적당의 우두머리 양길이 자기 막료 궁예를 보내 기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 동쪽의 부락과 명주 관내의 주천 등 10여 군과 현을 습격하였다.
6년에 완산의 적당 견훤이 완산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후백제를 일컬으니, 무주 동남쪽의 군현들이 항복해 붙었다.
8년 봄 2월에 최치원이 시국과 정무에 관한 의견 10여 조목을 올리자, 왕이 좋게 여겨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에 궁예가 북원에서 하슬라로 들어오니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였고,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9년 가을 8월에 궁예가 저족과 성천의 두 군을 쳐서 빼앗고, 또 한주 관내의 부약과 철원 등 10여 군과 현을 깨뜨렸다.
겨울 10월에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삼았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을 구경하다가 지나는 길옆에서 자태가 아름다운 한 여자를 보았다. 왕이 마음 속으로 사랑하여 뒤쪽 수레에 태우게 해서 왕의 장막에 이르러 야합하였으며,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과 용모가 크게 빼어나므로,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궐내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나의 형제 자매는 골격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데 이 아이의 등 위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 헌강왕의 아들이겠구나!" 하고, 곧 관련 부서에 명해 예를 갖추어 태자로 봉하고 공경하게 하였다.
10년에 도적들이 나라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바지를 붉게 하여 스스로 구분되는 표시를 삼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적고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주와 현을 도륙하고, 수도의 서부 모량리까지 와서 민가들을 겁탈하고 노략해갔다.
11년 여름 6월에 왕이 좌우의 측근들에게 이르기를 "이즈음 몇 년 이래로 백성들이 곤궁하고 도적들은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내가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사양하여 물려줄 나의 뜻이 결정되었다" 하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전하였다.
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에서 죽으니,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에서 장사 지냈다.
52대 효공왕
효공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요이고 헌강왕의 서자이다. 어머니는 김씨이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 백관에게 작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
2년 봄 서불한 준흥을 상대등으로, 아찬 계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에 궁예가 패서도 및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탈취하고 드디어 송악군에 도읍하였다.
3년 봄 3월에 이찬 예겸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북원 적당의 우두머리 양길이 궁예가 자기에게 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꺼려 국원 등 10여 성주들과 함께 그를 치기로 계획하였으나, 비뇌성 아래까지 진군하였다가 오히려 양길의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4년 겨울 10월에 국원, 청주, 괴양 등지 적당의 우두머리 청길, 신훤 등이 성을 들어서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5년에 궁예가 왕을 일컬었다. 가을 8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대야성을 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금성 남쪽으로 군사를 옮겨 연변의 부락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8년에 궁예가 온갖 관부를 두었는데,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였다.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는 '무태 원년'이라고 하였다. 패서도의 10여 주와 현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9년 봄 2월에 별이 비오듯이 떨어졌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에 궁예가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8월에 궁예가 군사를 움직여 우리의 변경 읍락들을 침탈하였으며, 다시 죽령 동북쪽까지 이르렀다. 왕은 강토가 날로 깎여 나간다는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였으나, 이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여러 성주들에게 명해 삼가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견고히 해 굳게 지키라고 하였다.
11년에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모두 견훤에게 빼앗겼다.
12년 봄 2월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13년 여름 6월에 궁예가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거느리고 와서 진도군의 항복을 받고 또 고이도성을 깨뜨렸다.
14년에 견훤이 직접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나주성을 에워싸고 열흘이 지나도 풀지 않았다. 그러자 궁예가 수군을 발동해 습격하니,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15년 봄 정월 초하루 병술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천첩에게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 은영이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므로, 은영은 그 천첩을 잡아다 죽여버렸다.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고 하였다.
16년 여름 4월에 왕이 죽었다. 호를 효공이라 하고, 사자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53대 신덕왕
신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경휘로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아버지 예겸은 정강대왕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고, 어머니는 정화부인이며, 왕비 김씨는 헌강대왕의 딸이다. 효공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원년 5월에 아들 승영을 왕태자로 삼고,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년 봄 3월에 궁예가 연호 '수덕만세'를 고쳐 '정개 원년'이라고 하였다.
4년 여름 4월에 참포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서 물결의 높이가 20장 가량이나 치솟았는데 3일 만에야 잠잠해졌다.
5년 가을 8월에 견훤이 대야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있었는데 그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6년 봄 정월에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신덕이라 하고,
죽성에 장사지냈다.
54대 경명왕
경명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승영이고 신덕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의성왕후이다.
원년 8월에 왕의 아우인 이찬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삼았다.
2년 봄 2월에 일길찬 현승이 반역해 처형당하였다.
여름 6월에 궁예 휘하의 인심이 홀연히 변해 태조를 추대하였다. 궁예는 빠져나와 달아나다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태조가 왕위에 올라 새로이 원년을 일컬었다. 가을 7월에 상주 적당의 우두머리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3년에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 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어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우리 태조께서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4년 봄 정월에 왕이 태조와 더불어 사절을 교환하고 우호를 닦았다. 2월에 강주장군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후백제 임금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진례로 진군해 오자, 왕이 아찬 김률을 태조에게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해 군사를 출동시켜서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를 듣고 바로 물러갔다.
5년 봄 정월에 김률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난 해 고려에 사절로 갔을 때 고려왕이 제게 묻기를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이른바 장륙존상과 구층탑과 성대가 그것이라 하는데, 불상과 탑은 아직 있는 줄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가?'라고 하였는데, 제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성대라는 것이 어떤 보물인가?"라고 물었으나 잘 아는 이가 없었다. 이때 나이 아흔을 넘긴 황룡사의 승려 하나가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들었는데 성대는 바로 진평대왕이 차시던 것으로서 여러 대를 전해오면서 남쪽 창고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마침내 왕이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따로 날을 받아 재계하고 제사를 드린 다음에야,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하였고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2월에 말갈의 별부인 달고의 군사가 북쪽 변경에 와서 노략하였다. 이 때 태조의 장수 견권이 삭주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거느리고 쳐서 크게 개뜨리니, 한 필을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시켜 편지를 보내 태조에게 감사하였다. 여름 4월에 수도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6년 봄 정월에 하지성 장군 원봉과 명주 장군 순식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태조는 그들의 귀순을 기념하여 원봉의 본거지 성을 순주라 하였으며, 순식에게는 왕씨 성을 내려주었다. 이달에 진보성 장군 홍술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7년 가을 7월에 명지성 장군 성달과 경산부 장군 양문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8년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명이라 하고, 황복사
복쪽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상하는 제사를 지냈다.
55대 경애왕
경애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위응이고 경명왕의 친동생이다.
원년 9월에 태조에게 사절을 보내 방문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 겨울 10월에 고울부 장군 능문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는데, 태조가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 돌려보냈으니, 그 성이 신라의 왕도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11월에 후백제 임금 견훤이 조카 진호를 고려에 볼모로 보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이르기를 "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이 많아서 그와 화친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태조가 수긍하였다.
3년 여름 4월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일부러 죽였다고 여겨 분노한 나머지 군사를 일으켜 웅진으로 진군해 왔다. 태조가 여러 성들에 명령하여 성루를 굳게 지키고 나가지 말라 하였다. 왕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견훤이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 번 북을 울려 위엄을 떨친다면, 견훤은 틀립없이 저절로 패멸할 것입니다." 태조가 사신에게 말하였다.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악이 가득 차서 제풀에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일 따름이다."
4년 봄 정월에 태조가 친히 백제를 치니 왕이 군사를 내어 이를 도왔다.
3월에 황룡사 탑이 요동하더니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가 친히 근암성을 격파하였다.
여름 4월에 강주 관하 돌산향 등 네 향이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가을 9월에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사를 습격하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 굳센 병사 1만 명을 내어 가서 구하게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이르지 않은 탓에, 겨울 11월에 왕경을 덮쳐 들어왔다. 이 때 왕은 왕비와 궁녀 및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여 즐겁게 노느라 적병들이 들이닥치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느닷없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왕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친척, 대신, 관료 등 남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뛰어 달아나고 숨었다.
적에게 붙잡힌 이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자빠져, 땀을 흘리고 땅에 벌벌 기면서 종이 되겠다고 빌었지만 화를 모면하지 못하였다. 견훤은 또 그들 군사를 풀어놓아 공공의 것이나 사유물이거나를 막론하고 재물들을 거의 다 약탈하였으며, 궁궐에 들어앉아서 좌우의 휘하를 시켜 왕을 찾게 하였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군에 잡혀왔다.
견훤은 왕을 핍박해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휘하들을 풀어놓아 비첩들을 유린하게 하였다. 이윽고 왕의 족제를 세워 임시로 나라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니, 이가 경순왕이다.
56대 경순왕
경순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부이다. 문성대왕의 자손이고 효종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전왕의 시신을 옮겨 서쪽 대청에 빈소를 마련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냈다.
원년 12월에 견훤이 대목군에 침입하여 들에 쌓아둔 노적가리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2년 봄 정월에 고려의 장수 김상이 초팔성의 도적 흥종과 싸우다 이기지 못하고 주겅ㅆ다. 여름 5월에 강주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에 견훤이 장군 관흔에게 명해 양산에 성을 쌓게 하니, 태조가 명지성 장군 왕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 쳐서 쫓아버렸다. 견훤이 대야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보내 대목군의 곡식을 베어갔다. 겨울 10월에 견훤이 무곡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3년 여름 6월에 천축국의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다다랐다.
가을 7월에 견훤이 의성부성을 치자, 고려의 장군 홍술이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이를 듣고 노하였지만, 원봉은 지난 달의 공로가 있다 하여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거쳐 현으로 만들었다. 겨울 10월에 견훤이 가은현을 에워쌌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년 봄 정월에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항복하니, 태조가 두터운 예로 대우하고 '상보'라고 불렀다. 처음에 태조가 신라와 우호를 맺으려 했을 때 선필이 이를 인도하였는데, 이 때 와서 항복한 것이다. 태조는 그가 공로를 세운데다가 이제 늙은 것을 생각하여 은총을 베풀고 칭찬한 것이다. 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겼으며, 죽이고 잡은 성과가 매우 많았다. 영안, 하곡, 직명, 송생 등 30여 군과 현이 차례차례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2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와 승전을 알리자, 왕이 회답하는 사신을 보내고, 아울러 서로 만날 것을 청하였다. 가을 9월에 나라 동쪽 바닷가 주와 군의 부락들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5년 봄 2월에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도 부근에 이르러 뵈올 것을 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이하고 궁궐에 들어와 마주하여 서로 마음과 예우를 곡진하게 다하였다. 임해전에서 잔치를 열어 주흥이 무르익자, 왕이 말하기를 "내가 하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해 차츰 환란을 불러들이고, 견훤은 의롭지 못한 일들을 제멋대로 하여 나의 국가를 없애려 드니,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이 어디 있겠소!"라고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좌우에서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태조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태조가 수십 일을 머물다가 돌아가자, 왕은 혈성까지 나가 전송하고 당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수행하게 하였다. 태조 휘하 군사들이 엄숙하고 공정하여 털끝만큼도 침범함이 없으므로 도성의 남녀가 서로 즐거워하며 말하였다. "옛날 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오늘 왕공께서 와 보니 부모를 뵙는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가을 8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과 안장을 얹은 말을 증여하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베와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8년 가을 9월에 노인성이 나타났다. 운주 경내 30여 군과 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9년 겨울 10월에 왕이 생각하기를 사방의 영토가 모두 다른 이의 차지가 되어 나라는 약해지고 형세는 외로워서 스스로 편안할 수 없다고 하여, 마침내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혹은 옳다 하고, 혹은 옳지 않다 하였다. 이 때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가 보전되고 멸망하는 것은 반드시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다만 충신, 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건히 하고 힘을 다한 다음에야 그만둘지언정, 어찌하여 천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주는 것이 옳은 것이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그 형세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성하지 못한 터에 게다가 겸허하지도 못하여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가 땅에 나뒹굴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곧 시랑 김봉휴를 시켜 편지를 가지고 가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을 하직하고, 그 길로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과 나물 음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11월에 태조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 왕철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이 30여 리에 이어져 기을 막아 메우니, 구경하는 이들이 담을 두른 듯하였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 왕을 영접하고 위로하였으며, 궁궐 동쪽에 으뜸가는 저택 한 구역을 주고, 맏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에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여 그 지위가 태자의 위에 있게 하고 녹봉 1천 석을 지급하였으며, 시종하던 권원들과 장수들은 모두 그대로 채용하였다. 신라를 고쳐서 경주라 하고, 이를 정승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가 몹시 기뻐하여 먼저 두터운 예로 대우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였다.
"이제 왕께서 나라를 과인에게 주시니 그 은혜가 매우 큽니다. 종실과 혼인을 맺어 장인과 사위의 우호를 길이 하고자 합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나의 백부 억렴 잡간이 지대야군사로 있는데 그 딸이 품행과 얼굴이 다 아름다우니, 이가 아니고는 내정을 감당할 만한 이가 없습니다."
마침내 태조가 그녀를 맞이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현종의 아버지로서 안종으로 추봉된 이이다.
경종 헌화대왕 때에 와서 정승공의 딸을 불러들여 왕비로 삼고, 아울로 정승공을 상보령으로 책봉하였다.
공이 송 흥국 4년 무인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