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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사] 3. (쉬어가기) 기자조선은 정말로 존재했을까?
[고조선사] 4. 패기가 넘치던 왕국(王國), 고조선(기원전 4세기)
[고조선사] 5. 우리 역사 최초의 전쟁 -고조선의 대몰락- (기원전 3세기 초반)'
[고조선사] 6. 고조선 부활하다(기원전 3세기 후반)
[고조선사] 8. 고조선, 전성기를 펼치다(기원전 2세기 초중반)
1. 위만왕 이후의 임금들
위만왕은 패수(압록강)를 건너 고조선으로 망명을 하였고,
준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국과의 외교적 안정을 취한 후
주변국을 정복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이로써 고조선은 전성기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문헌상 위만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무난하게 왕위를 물려준 것으로 확인이 되나,
안타깝게도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아들은 사서상 이름이 남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아들인 '우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우거왕은 고조선의 마지막왕입니다.
최소 기원전 128년엔 그 재위가 확인이 되므로
고조선이 멸망하는 기원전 108년까지
대략 20년 이상을 왕위에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거왕의 치세를 살펴보시지요.
2. 우거왕의 대중국 정책
위만왕은 한과의 관계에서 '우호'를 선택하였습니다.
우호의 조건은 아주 간단하였습니다.
'고조선이 그 근방의 군장들과 한의 교류를 막지 않는 것'
'한나라의 국경을 어지럽히지 말 것'
위만왕은 이 조건을 잘 지켰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이러한 외교적 안정 속에서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자인 우거왕은 어떤 정책을 펼쳤을까요??
기록을 살펴보시지요.
<사기> 조선열전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孫子)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漢)나라 망명자(亡命者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天子)에게 입현(入見)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에게 알현(謁見)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우거왕은 할아버지 위만왕과는 달리 한에 대해서 강경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우거왕은 준왕부터 이어진 중국 망명자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덕분에 위만왕 시절보다 국력이 더 강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감이 생겼던 것일까요?
그는 한과의 관계를 딱 끊어버렸습니다.
한에 보내던 사신도 끊어 버리고
심지어 주변의 여러 세력이 한과 교류하는 것도 막아버렸습니다.
이것은 위만왕과 한 사이의 약조
'고조선이 그 근방의 군장들과 한의 교류를 막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입니다.
3. 고조선의 외교
우거왕은 왜 중국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사기>에서는 고조선에 망명한 중국인이 많다는 단서를 제공하여
일단 우거왕이 국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거왕은 한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고조선은 혼자의 힘으로 한을 막아낼 국방력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덩치로만 본다면 한이 워낙 크기 때문에
고조선 혼자서는 한이라는 세력은 위협적인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고조선은 모자란 국방력을 외교력으로 보강해야 하는데
그때 좋은 협력자가 된 것은 흉노입니다.
<사기> 흉노열전
(흉노의) 모든 좌방(左方)의 왕과 장(將)들은 동쪽에 살며
상곡군에서부터 동쪽을 맡아 예맥(穢貉)과 조선(朝鮮)에 접해 있었다.
<한서> 위현전
(한무제는) 동으로는 조선(朝鮮)을 정벌해
현도군과 낙랑군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
고조선과 흉노가 교류를 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사기> 흉노열전에서 흉노가 고조선과 접해 있었다는 기록과
<한서> 위현전에서 고조선을 흉노의 왼팔로 표현한 것을 보았을 때
고조선과 흉노 사이에 나름의 우호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현대의 학자들은 추론합니다.
흉노는 한으로부터 한 황실의 여인을 받고
매년 막대한 물자를 제공받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이었습니다.
고조선은 그 흉노와 우호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4. 기년의 문제
사실 우거왕이 한과의 관계를 언제 끊었는지 기록상 불분명합니다.
우거왕 자체도 기원전 128년에 재위중이란 것만 확인이 되지
언제부터 왕을 하였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고조선이 언제부터 흉노와 우호관계를 맺었는지도 불명확합니다.
필자는 위에서 흉노와의 관계가 믿음직 스러워서
마음놓고 한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였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흉노는 기원전 129년부터 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119년이 되면 거의 무너지다시피 하는데
이미 무너진 흉노를 믿고 한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건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사견).
그래서 필자는 흉노가 그나마 건재한 시기에
우거왕의 대중국 단절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시기가 아니라면 우거왕은 흉노가 다 무너진 시기에
자신의 힘만을 믿고 대중국 관계를 끊었다는 것인데
흉노가 무너지는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한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너무 무모해 보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그나마 흉노가 건재한 시기에 한과의 관계를 끊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록상으로 우거왕의 대중국 단절 조치의 기년이 명확하다면
그가 왜 한과의 관계를 끊었는지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었을테지만
지금은 기록의 한계가 있으므로 이정도로만 서술하고자 합니다.
5. 내부의 반발
우거왕은 흉노를 택하고 한과의 관계를 끊는 외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내치는 어떠하였을까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몇가지 기록이 있으니 살펴보시지요.
<후한서> 동이전
원삭(元朔) 원년(B.C.128)에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 하였다.
<후한서>에 따르면 기원전 128년 오늘날 동해안가 지방인
동예 지방의 남여라는 사람이
28만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요동군에 항복해 버립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우거왕에 대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28만명이 요동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고,
자신이 살던 자리에 그대로 머물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동예 지방과 요동 지방은 너무나도 멀고 영토가 이어져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한 무제는 이곳에 창해군을 설치합니다.
하지만 이름뿐인 설치였을 것입니다.
실질적인 통치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몇년뒤에 곧바로 폐지하는 것을 보아
고조선의 제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창해군 사건은 우거왕에 대한 내부 반발을 알 수 있는 지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이 또 있습니다. 다른 기록을 살펴보시지요.
<위략>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右渠)에게 간(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朝鮮)에 조공하는
번국(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연도가 미상이긴 하지만
조선상 역계경은 우거왕에게 무엇인가를 간하는데
우거왕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역계경은 자신을 따르는 2천호를 거느리고
고조선을 이탈해 버립니다.
창해군, 역계경 사건은 고조선 내부가 안정적으로 통합되어있지 않고,
우거왕에 대한 반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이들이 왜 우거왕에게 반발하였는지는 기록의 한계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우거왕 시기에 고조선의 내부가 통합되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 전쟁의 서막
우거왕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위만왕은 한에게 주변 집단이 한과 교류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였는데
우거왕은 이 약속을 깨버리고
고조선 스스로도 한과의 교류를 끊어버립니다.
이에 한 무제 유철은 기원전 109년 섭하를 보내
우거왕을 회유하려고 하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기> 조선 열전
원봉(元封) 2년(B.C.109)에 한(漢)나라는 사신(使臣)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우거(右渠)는] 끝내 [한(漢)나라]
천자(天子)의 명(命)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우거왕은 한 무제의 회유를 거절합니다.
이때는 이미 흉노가 무너진지 10년이 지난 시기이고,
마침 한 무제가 먼저 회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거왕은 외교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습니다.
사실 자신의 국방력만 강하다면 얼마든지 이런 선택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거왕은 자신의 실력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섭하의 우발적인 행동이 나옵니다.
<사기> 조선열전
섭하(涉河)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朝鮮)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드디어 천자(天子)에게 ‘조선(朝鮮)의 장수(將帥)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天子)가 그 공(功)을 기려 꾸짖지 않고
섭하에게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의 벼슬을 내렸다.
섭하는 우거왕을 회유하라는 임무를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을 하나라도 만들려고 한 것일까요?
국경인 패수(압록강)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자신을 전송나온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곧바로 패수(압록강)를 건너 요새에 숨고,
한 무제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합니다.
이에 한 무제는 섭하를 요동동부도위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우거왕으로서는 충분히 화가 날 상황입니다.
한의 사신이 자신의 장수를 죽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거왕도 만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곧바로 군사작전을 감행하여
패수(압록강)를 건너 섭하를 사살합니다.
<사기> 조선열전
조선(朝鮮)은 하(何)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습공격해 하(何)를 죽이니,
천자(天子)는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朝鮮)을 치게 하였다.
우거왕은 기습적으로 패수(압록강)을 건너
요새에 숨은 섭하를 사살합니다.
이 정도면 우거왕의 성격이 꽤나 강성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무제 유철도 성격이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제(武帝)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흉노를 짓밟고 서역을 정복하고,
남월까지 쳐서 없앤 업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국경까지 넘어와 자신의 신하를 죽인 우거왕을 가만 놔둘까요?
한 무제 유철은 죄인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고조선을 정벌할 것을 지시합니다.
우거왕은 한 무제의 회유도 거부하였고,
심지어 한의 국경까지 넘어와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한 무제의 공격 명분은 충분했습니다.
흉노까지 제압한 한 무제입니다.
그는 고조선도 제압할 수 있을까요??
또 우거왕은 한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 역사의 향방을 가른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화에서 계속..
한울리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