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국과 지옥을 소망한다. 죽음 후에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때가 있어 죄인(罪人)들과 악한(惡漢)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시간, 죄인들은 용서를 받고 영생에 이르며 악한들은 벌을 받고 소멸한다는 바울과 요한의 편지를 진지하게 읽는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사망입니다.
_요한계시록 20:12-14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사망과 지옥마저 죽는다. 악한이 죽어 영벌에 처해지는 게 아니라, 지옥과 함께 소멸해버린다. 나는 요한이 보았다는 사후 세계에 대한 환상을 해석할 재간이 없다. 또한 성서를 비롯해 고대와 중세에 다양하게 존재했던 천국과 지옥에 관한 신학을 서술하거나 비교할 식견도 없다. 다만 소망한다. 역사를 상하게 하는 악한들이 지옥으로 추락하길, 상한 역사 속 약하고 비겁한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천국에 닿게 되길, 소망한다.
이런 거창한 소망 이전에 평범한 일상이 있다. 병들고, 다치고, 늙어가는 평범한 일상은 늘 죽음과 닿아있다. 병들었을 때 회복되고, 다쳤을 때 치료되고, 늙어서도 일상이 무너지지 않길 원하는 평범한 소망이 있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거창한 천국과 지옥 이전에 모든 사람이 병들고 다치고 늙어 경험하게 될 죽음이라는 의미의 ‘스올’이 나온다.
스올은 죽은 몸을 매장하는 땅 아래 공간이다. 낯선 단어여서 무덤이나 구덩이 보다 더 스펙터클한 상징일 성 싶지만 그렇진 않다. 스올은 인생을 마친 이가 벌 받는 특별한 공간도 아니며 지옥만큼 깊거나 뜨거운 곳은 아니다. 마그마가 흐르는 깊숙이 매장하진 않으니까 말이다. 스올은 죽음의 은유다, 거기까지다. 시인은 스올에서 건져 주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죽지 않고 살게 두신 것에 대한 감사를 노래에 담은 것이다.
죽음을 죽음이라 표현하는 게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스올이라 하지만, 결국 살아있는 사람은 스올에 죽음 이상의 의미를 담지 못한다. 살아서 건강하게 오래 살면 아직 스올에 가는 게 아니어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했다.
주님,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_시30:3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를 받는 천국에 닿은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이 오래 살다가 죽었다. 게임하듯 시민들을 사냥했던 전두환이 90년을 살다가 죽었다니 화난다. 사죄도 하지 않고 처벌도 받지 않고 죽은 전두환에게 나처럼 화난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장례가 끝났는데 장지를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화난 사람들이 전두환의 무덤을 파 그 시신을 훼손할까 염려하는 것일 게다. 옛날 송덕비에 돌을 던지던 것에서 비석치기가 유래했다는데, 그 비석에 돌이라도 던지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전두환의 가족은 잘 아는 게다. 죽은 전두환이 스올, 즉 무덤에 아직 가지 못했다면 스올은 분명 악한의 거처는 아니겠다. 악한(惡漢) 전두환은 스올에 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평범한 죄인들이 묻히는 스올을 지옥이라 오해하지 말자. 전두환이 죽어 가야 할 곳은 스올이 아니라 지옥이다. 전두환의 유해가 장례 후에도 그의 집에 있다면, 전두환의 집이야말로 지옥이다. 전두환의 집이 지옥이길, 나는 소망한다.
단테(Dante Alighieri,1265-1321)도 지옥을 소망했다. 단테는 신곡을 통해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소개하는데, 지옥이 젤 앞이다. <신곡>의 처음을 ‘지옥’여행으로 시작한다. 단테가 상상한 지옥은 9개의 원(층)으로 구축되어 있다.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제 1원은 신앙이 없었으나 특별히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제 2원은 음란한 자들을 가둔 지옥, 제 3원은 탐식한 자들을 가둔 지옥, 제 4원은 인색한 자들을 가둔 지옥, 제 5원은 교만하여 분노하는 자들을 가둔 지옥, 제 6원은 이교도 혹은 이단을 가두는 지옥, 제 7원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가둔 지옥, 제 8원은 경제 사범들을 가두는 지옥, 제 9원은 배반한 자들을 가둔 지옥이다.
제 7원,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가둔 지옥엔 끓는 피가 강이 되어 흐른다. 가장 나쁜 악한은 눈썹 위까지 끓는 피에 삶아지는 징벌을 받고, 조금 덜 악하면 가슴까지 잠겨 삶아진다. 눈썹 위까지 잠겨 삶아지고 있는 가장 악한 폭군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B.C.356-323)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끓는 핏물을 견딜 수 없어 머리를 내밀라치면 반인반수 괴물이 기어 나오는 머리를 향해 화살을 쏘아댄다. 단테가 상상한 지옥, 있으면 한다. 앉아 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했던 군대의 최고 책임자 전두환이 눈썹까지 끓는 피에 잠겨 얼굴을 내놓을 수 없는 지옥, 전두환이 끓는 피를 견디기 힘들어 머리를 내밀라치면 반인반수의 괴물이 앉아 쏴 자세로 M16을 쏘아대는 지옥, 있으면 한다. 나는 간절히 지옥을 소망한다.
내 진한 소망과는 달리 지옥에 관한 신학적 입장은 합의되지 않고, 경합하는 모양이다. 물론 여러 신학 사상 중 지옥에 관한 입장만 다른 건 아니지만, 특히 죽음 이후의 지옥에 관한 견해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죽지만 누구도 죽음에 관한 경험을 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이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바람, 지옥 죽음이 영원하다는 입장과 죄 값을 치르면 옮겨진다는 의견 등 지옥 사상은 여러 갈래다. 왜 안 그렇겠는가. 죽어보지 않은 사람이 죽음 이후의 시공간을 확실히 알 수 없고, 죽은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정보를 줄 수 없으니 말이다. 에피쿠로스(Epikuros, 주전341-270)가 이런 현실을 간파했다.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 죽음은 아직 있지 않다.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죽은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김균진,『기독교조직신학Ⅴ』,연세대학교출판부,2000,128쪽 재인용)
그래서다. 나는 지옥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 나에게 믿음은 신비롭지만 경험되는 것이다. 씨앗이 나무가 되는 것이다. 씨앗이 나무가 되는 걸 믿는다. 나에게 믿음은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지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누룩이 온 반죽에 퍼진 걸 믿는다. 믿음은 이렇게 실상에 관한 것이다.
나는 다만 지옥을 소망할 뿐이다. 적어도 사람을 학살한 사람이 추락해 벌 받는 공간이 반드시 있으면 한다. 단테가 여행한 지옥에서 보았던 알렉산드로스 같이 자신의 야망과 영토의 무한 확장을 위해 뭇 사람들을 죽였던 사람을 위한 지옥을, 나는 소망한다. 로마 황제의 꼭두각시로서 알량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들들을 죽이고, 갓 태어난 아기들을 학살했던 헤롯 대왕처럼 폭정을 일삼았던 악한 권력자들이 떨어져있는 지옥을, 나는 소망한다.
헤롯 대왕의 아들과 손자도 폭군이었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죽였고, 헤롯 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고,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옥에 가두었다. 헤롯 대왕과 그 아들과 손자는 자신의 권력과 ‘로마의 평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헤롯 가문의 사람들은 정통성 없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들이었다. 헤롯 가문의 사람들은 세금 조공만 바치면 왕이 될 수 있는 로마 체제에서 하나님나라를 말하고 살아보려는 사람들을 박해했다. 이런 폭군이라면 신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사도행전 12장엔 헤롯 아그립바가 교회의 두 기둥 야고보와 베드로를 박해하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안타깝게도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의 칼에 죽고, 천만 다행히 베드로는 탈옥한다. 로마 체제에서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가 주님이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교회는 반국가단체였고, 불령선인들의 모임이었다. 칼을 들 수 없는 교회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도할 뿐, 교회 식구들이 죽어나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다만 소망했다. 지옥이란 게 있어, 교회를 박해하는데도 승승장구하는 헤롯 가문의 사람들이 죽어서라도 심판받기를 말이다. 지옥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고대하는 마음이 이렇게 표현됐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_사도행전12:21-24)
헤롯 아그립바는 벌레에 물려 죽는다.(행12:23) 언뜻 허망해 보이는 결말이다. 악한(惡漢) 헤롯이 이렇게 가볍게 죽어도 되는가. 야고보를 죽인 칼에 맞아 죽든, 베드로처럼 감옥에서 처절하게 고통을 겪든, 뭔가 처절하거나 찌질하게 단말마의 고통 속에 비참하게 죽었으면 하는데, 그냥 벌레에 물려 죽어버린다. 이 대목만 읽으면 뭔가 허망하고 아쉽다.
신약 외경을 통해 허망하고 아쉬운 마음을 풀 수 있겠다. 베드로 묵시록 10장이다.
살인자들과 그들과 작당한 이들이 사악한 파충류들로 가득한 좁은 곳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 짐승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는데, 그런 벌을 받으면서 그곳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벌레들이 어두운 그림처럼 그들을 뒤덮고 있었다.
살해당한 이들의 영혼들이 거기 서서 그 살인자들이 벌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하나님, 당신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 묵시록에 따르면 살인자들이 가는 지옥은 구름 같은 벌레들로 덮여있다. 헤롯이 벌레에 물려 죽었다는 건, 살인자들이 가는 지옥에서 심판 받을 것을 암시한다. 로마 체제에서 고통당하고, 헤롯 가문의 박해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이렇게 지옥이 있기를 소망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어 죽이려했던 헤롯 아그립바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지옥에서 짐승들에게 두들겨 맞기를 사도행전의 저자는 소망했다. 헤롯이 벌레에 물려 죽었다는 게 소망의 성취였는지, 소망의 표현이었는지 단정하긴 어렵다.
2021년 10월 26일, 노태우가 죽었다. 그의 아들이 518 희생자 비석 앞에서 사죄했다는데 노태우 본인은 사죄한 적이 없다. 노태우가 죽고 달포도 지나지 않은 11월 23일, 전두환이 죽었다. 전두환이 죽은 날 그의 측근이라는 이가 전두환이 잘못한 증거를 대보라며 볼멘 소리했다. 염치없는 이 광경을 미리 예견했을까. 전두환이 죽기 몇 시간 전 11월 23일 새벽 이광영 님이 죽었다. 이광영 님은 518 당시 척추에 총알이 박혀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42년간 매일 진통제를 먹어야했다. 이광영 님의 유서다.
나의 가족에게. 어머니께 죄송하고, 가족에게 미안하고, 친구와 사회에 미안하다. 5.18에 원한도 없으려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가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나의 이 각오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바,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은 내가 지고 떠나감이다. 아버지께 가고 싶다.
학살자 전두환은 구순을 누리며 한 마디 사죄 없이 집에서 죽었는데, 피해자 이광영은 하반신이 마비되고 40년 넘게 통증에 시달리다가 “죄송하고...미안하고...미안하다”며 저수지에서 죽었다. 518당시 이광영 씨는 스님이었다. 나는 고통 중에 죄송하고 미안하고 미안하다는 스님 이광영의 천국이 여기 너머 저기에 있으면 한다. 끝내 뻔뻔하고 평안했던 전두환의 지옥이 여기 너머 저기에 있으면 한다. 나는 천국과 지옥을 소망한다.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 씨가 구치소에서 수감되었을 때 예수를 영접한 후 신학을 공부했고 목사가 될 거라고 한다.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 씨는 “2006년 경기도 오산 토지를 445억원에 팔고도 325억원에 판 것처럼 다운계약서를 작성해 양도소득세 27억원을 내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40억원이 확정됐다. 그러나 벌금 미납으로 2016년 7월부터 노역장에 유치됐고, 2년 8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국민일보2021.3.8) 양도소득세 27억원을 내지 않아, 벌금 40억원을 내지 않기 위해, 수감되었을 때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 씨는 “교도소에서 있을 때 어디선가 찬송가 소리가 들렸는데 눈물이 났다”고 한다. 교도소 내에서 회중 찬양 인도나, 성가대, 예배 영상 제작 등을 했다고 한다.(한겨레2021.3.6.)
회심하여 목사가 될 거라는 전재용 전도사의 아버지 전두환을 위한 지옥과 총에 맞은 시민들 살피려다가 자신도 총에 맞은 스님 이광영의 천국을 소망한다면, 이상한가. 교리가 엉키는 이런 이상한 생각이 현실이 되는 이상한 나라를 나는 소망한다. 진리는 교리에 갇히지 않는다. 교리를 초월해야 진리에 닿는다. 나는 스님이었던 이광영 님이 천국에 가기를, 전도사의 아버지 전두환이 지옥에 가기를 소망하는 이상한 생각 위에 내 신학을 정초하겠다. 내 일천한 신학으론 천국과 지옥에 관해 알지도 못하고, 천국과 지옥의 비밀을 깨달을 수도 없다. 다만 소망한다, 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이 닿게 될 천국을, 악하고 잔인한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지옥을, 나는 소망한다.
글/ 김영준
김포에 산다. 민들레교회와 협동조합 달팽이학교가 모이는 공간 ‘민들레와달팽이’를 지킨다. 교회 목사, 협동조합 조합원이다.
복음과상황 2022년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