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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 심은 나무_시1편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4.05.19|조회수69 목록 댓글 0

아이가 아플 때 부모는 대신 아프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라도, 어떤 부모도 아이 대신 아플 순 없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각자 몫입니다. 육체를 지닌 사람은 스스로 육체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에 갇혀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육체에 갇혀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다시 태어납니다.3:1~21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우리가 육체를 초월하기도 합니다. 내 육체를 초월해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내 육체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기어코 성령을 받으라고 권하십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주시겠다고 보증하십니다. 누가복음 119절부터 13절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육체와 육체는 연결될 수 없으나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과 사람이 하나로 엮여 고통의 연대를 이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19805월에 문용동 전도사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문용동 전도사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전도로 광주제일교회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호남신학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군대에서 문용동 전도사는 폭탄을 다루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1980년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자, 시민들이 무장해 저항했습니다. 문용동 전도사는 쓰러진 시민을 업어 나르며 5·18현장에 참여했습니다. 시민들이 무장하는 과정에 총기와 폭탄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시민군들은 TNT폭탄을 확보했고 전남도청 지하에 보관했습니다. 반경 6km를 폭파할만한 양이었습니다. 폭탄 전문가였던 문용동은 계엄군에 연락해 뇌관을 제거했습니다. 폭파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프락치라는 오해를 감수한 행동이었습니다. 뇌관을 제거했지만 폭탄이 터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도청 지하를 지켰습니다. 527일 계엄군이 도청에 들어올 때까지 만일을 대비해 폭탄 옆을 지켰습니다. 문용동 전도사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폭탄 옆을 지켰습니다. 전남도청 지하 폭탄 옆에서 계엄군 총에 죽임당했습니다. 당시 저희 형들이 광주 학동 외가에 살았습니다. 전남도청과 외가는 8백 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문용동 전도사가 지키던 폭탄이 터졌다면 외가는 파괴되고 형들도 그때 죽었을 것입니다.

 

종교적 엑스타시를 통해 성령은 임하실 수 있습니다. 혹은 깊은 고뇌의 시간을 거쳐 성령은 임하실 수 있습니다. 종교적 엑스타시롤 통해서든 깊은 고뇌를 겪든,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성령강림주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내려주시실 소망합니다.

 

문용동 전도사에게 성령이 임했기에 문용동 전도사는 자기 육체를 초월합니다. 자기 육체를 초월해 다른 사람과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신비가 덮치면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문용동 전도사가 전남도청 지하 폭탄 곁을 지켰던 건 6km 내에 있는 광주제일교회 식구들, 얼굴 모르는 사람들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은 내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내 육체에 내가 갇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고통, 다른 사람에게 일아날 수 있는 위험에 내가 참여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모든 사람과 내가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모두에 속해있는 줄 아는 것이 영성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있을 때,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온몸으로 위험을 막아서기도 합니다. 문용동 전도사가 그랬습니다. 문용동 전도사는 반경 6km 이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과 연결되었기에 폭탄 옆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행여라도 있을 수 있는 폭파를 막기 위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폭탄 옆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법을 아침과 저녁으로 묵상했을 문용동 전도사는 자기가 서 있어야할 자리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Wadi Degla canyon, which used to be the bottom of the sea at some time in the past, now turning into a part of the desert. by Bassant Meligy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1:1~3

 

팔레스타인에는 와디라는 물길이 있습니다. 와디는 건기에 물이 흐르지 않는 시내여서 건곡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탄강 계곡과 전혀 다른 와디가 시1편에 소개된 시내입니다. 건기에 와디는 물리 흘러간 흔적만 보일 뿐 물이 흐르진 않습니다. 와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는 비가 오지 않는 시기엔 마른 땅에 서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시냇가라는 지리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하늘에서 내리는 비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는 시냇가에 서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 하나님의 법과 뜻을 생각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는 현실, 땅에서 보이지 않는 뜻과 법, 그런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과 법을 묵상하는 이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뿌리 내린 자리가 어디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면,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팔레스타인 동쪽엔 유프라테스강이 흘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일어났습니다. 팔레스타인 서쪽엔 나일강이 흘러 이집트 문명이 세워졌습니다. 유프라테스강과 나일강은 마르지 않는 큰 강입니다. 마르지 않는 큰 강에서 위대한 문명과 거대한 나라를 세운 세력 사이에 시인은 살고 있습니다. 시인은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이 흐르지 않는 와디라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 선언합니다. 주기적으로 범람하기 때문에 비옥한 나일강이 아니라, 인류 최초의 법전을 만드는 토대가 된 유프라테스 강이 아니라, 비가 오지 않으면 말라 갈라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복 있는 사람이라 고백합니다.

 

19805월 문용동 전도사에겐 TNT 폭탄 있는 전남도청 지하가 시냇가였습니다. 문용동은 와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가난했고, 의에 주려 목말랐고, 슬퍼 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우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전자오락실에 가곤했습니다. 어느 날, 전자오락실에서 나오는데, 또래일 것 같은 아이들 세 명이 계단을 막아섰습니다.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니 그 중 하나가 초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이름도 기억납니다, 이름 머릿글자가 CK. CK는 운동장 조회 시간에 교장상을 받은 적 있었습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습득한 3백만 원을 경찰에게 신고해 주인에게 돌려준 선행이 교장 선생님 마이크를 통해 운동장에 울렸습니다. 교과서에 실릴만한 이야기의 주인공 같던 CK였습니다. 당시 사립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이 50만 정도였습니다. 잃어버린 돈 3백만 원을 찾아주었던 아이가 전자오락실 계단에서 5백원짜리 동전을 빼앗고 있었습니다.

 

선도 악도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누구나 악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악하지만 어느 순간 반짝였던 과거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을 성급하게 단죄하거나 정죄할 수 없고, 선해 보이는 사람을 지나치게 숭앙할 이유도 없습니다. 사람을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으로 잘라내듯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하나님의 뜻과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읇조리는 이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복 있는 사람 반대편에 악인을 말합니다. 악인은 때로 선하기도 할 것입니다. 악인도 한 때 빛나는 과거를 지니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과 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때때로 선해도 악인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과 법을 읇조리며 실천하지 않는다면 빛나는 과거를 지녔어도 악인입니다.

 

마른 시내 와디가 아니라, 마르지 않는 큰 강에 심어진 나무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법을 묵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곳에 서 있는 권력은, 나일 강이 흐르는 곳에 서 있어 풍요로운 이들은 악인이 되기 쉽습니다. 유프라테스 같은 큰 강, 나일강 같은 풍요로운 강에선 하나님의 뜻과 법을 묵상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거대한 문명이 흐르는 곳에서 본디 어린아이에게 있었던 선함은 쓸려갑니다. 건기에 물이 흐르지 않는 와디 시냇가에서 근근이 사는 이가 어쩌면 하나님의 뜻과 법을 키웁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19805월에 TNT 폭탄이 있던 전남도청 지하는 와디 시냇가같은 곳이었습니다. 폭탄 옆을 지키던 문용동 전도사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나무는 자기 열매를 먹지 않습니다. 다른 이가 나무의 열매를 먹습니다. 죽음의 땅 같이 바닥이 갈라진 시내 와디 옆을 떠나지 않고 지켰던 문용동 전도사가 있어, 1km도 채 떨어지지 않았던 곳에 살고 있던 저희 형들과 외조부모님이 살 수 있었습니다.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이 쓴 시몽의 아빠를 읽습니다. 시몽은 엄마와 삽니다. 아빠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학교 아이들이 아빠 없는 시몽을 괴롭히면서 아빠한테 일러라고 말합니다. 이야기 속 아이들 세계는 잔인합니다. 시몽은 강에 빠져 죽고 싶었습니다. 강으로 뛰어들고 싶은데, 강가에 죽은 개구리를 발견하곤 슬퍼집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죽음의 흔적을 보는 게 슬프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죽으면 남겨진 엄마가 슬퍼할 것이 생각나 그냥 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는데, 피부가 검고 곱슬 수염을 기른 키 큰 남자가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에겐 아빠가 없지만, 누구에게나 아빠는 있단다.” 아빠가 없지만 아빠가 있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시몽은 큰 사람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없지만 있습니다. 없는 이에게 있음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현실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 없음에서 있음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들은 결핍을 메워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증인입니다. 아빠가 없는 이에게 아빠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겐 아빠가 없지만, 이렇게 모든 사람은 아빠를 갖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건기에 흐르지 않는 와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습니다. 우리들 형편이 어슷비슷합니다. 그럼에도 제 자리를 지키며 더 깊숙이 뿌리를 내려 보이지 않는 수맥을 찾고, 조금씩이나마 가지를 뻗어 하늘을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믿음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삽니다. 믿음으로 세상은 창조됩니다. 하나님은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막에 하나님나라를 창조하십니다. 사막에 정원을 만드십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교회는 시몽같은 아이들에게 아빠 노릇도 했습니다. 넉넉한 아빠는 못됐지만, 교회가 할 수 있는 만큼 아빠 노릇 해왔습니다. KSH에게 하나남께서 아빠 되어 주시길, 시냇가에 심은 나무들이 무성한 숲이 되길 기도합니다.

 

19805월에 전남 광주는 대한민국에서 변방 중에 변방이었습니다. 섬 같은 곳이었습니다. 와디 시내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 변방입니다. 와디 시내는 나일강 동쪽 변방입니다. 변방에서 창조가 일어납니다.(신영복)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땅, 변방에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움직이십니다.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땅 변방에서 창조가 일어납니다. 흑암이 가득한 땅 변방에, 성령,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변방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을 창조하십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유프라테스강 같은, 나일강 같은 주류가 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흐름을 창조하시며 우리를 빛이라 부르십니다. 우리를 빛으로 창조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마른 골짜기 와디에 심어진 나무가 세상의 빛입니다.

마른 골짜기 와디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의 빛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4년 전 전남도청 지하에 있던 폭탄 옆을 떠나지 않았던 문용동 전도사를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며 교회와 사회를 위해 기도했을 문용동 전도사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른 골짜기 와디에 심어진 나무 되게 하소서

우리가 마른 골짜기 와디를 떠나지 않는 빛으로 창조되게 하소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결되게 하소서

우리 중리교회, 우리 새움교회, 우리 민들레교회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되어 성령의 열매 맺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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