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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살았을까_요9:1~15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3.07.01|조회수43 목록 댓글 1

눈을 떴다고 표현합니다. 뭔가 깨달았을 때 하는 말입니다. 이해되지 않던 게 이해 됐을 때 하는 말입니다.
 
이해 없이 깨달음 없이 사는 건 위험합니다. 그래서 배우고 궁리합니다. 먼저 이해한 사람들에게 듣고, 앞서 깨달은 이에게 배우기 위해 학교에 다니고, 학원을 찾고, 도서관에 갑니다. 요샌 인터넷을 통해 먼저 이해하고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 넘쳐납니다.

 

이해하고 깨닫는 통로가 무엇이든, 눈을 뜨는 경험은 소중합니다. 학교이든, 학원이든, 도서관이든, 인터넷이든 어디에서든 누구를 통해서든 배우고 궁리하는 노력은 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우고 궁리해도 눈을 뜨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방향이 틀리면 눈을 뜨지 못합니다.

 

빛을 향해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암흑에 빠져버립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보면 오히려 눈이 멀어버립니다.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빛을 향해 눈을 뜨면 오히려 흑암에 빠집니다. 빛을 향하는 게 아니라 빛이 비추는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빛이 비추는 곳으로 우리 시선을 둘 때 보입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보면 눈을 뜰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눈을 높이 계신 하나님을 보려하면 정작 하나님을 볼 순 없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하늘을 쳐다보는 이들을 천사가 책망한 까닭입니다(행1:11).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쳐다본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려하는 건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이 보는 것에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는 것에 시선을 둘 때 비로소 보입니다. 하나님의 눈빛이 닿는 자리가 사람이 찾을 수 있는 가장 환한 자리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이들은 하나님을 보려하다가 눈 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려할 때 하나님은 우상으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어 볼만한 무언가를 새기놓은 게 우상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사람들을 만날 때 마주보지 않고 나란히 앉습니다.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라기보다 나란히 앉아 같은 방향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란히 걸으며 같은 방향을 향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옆에 계십니다. 내가 걸을 때 나란히 걸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걷는 것,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향하십니다. 땅에서 가장 어두운 데를 하나님은 보십니다. 가장 낮고 가장 어두운 데를 찾아 우리 시선을 둘 때, 비로소 눈이 뜨입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위대한 권력을 향하는 게 아니라, 이 낮은 곳에 처한 가난한 세상을 향할 때, 눈이 환해지고 깨어납니다. 
 
화가 밀레는 가난한 농부를 그렸습니다. 그림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의 돈을 지닌 사람들이라, 가난한 농부가 그려진 밀레 그림은 상품성이 없었습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밀레는 빛이 비추는 사람들을 그렸던 것입니다. 밀레 작품의 위대함은 기술이 아니라 시선입니다. 밀레보다 기술 좋은 화가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가난한 농부를 향한 시선때문에 밀레 작품은 오늘날 걸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세상을 볼 때, 비로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며 비춘 세상을 보는 이에게 하루가 열립니다(창1:3).  백년을 살았어도, 하나님 옆에서 하나님 보시는 자리를 보지 못했다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산 것입니다. 백수를 누려도 하루도 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나에겐 하루가 시작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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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빛나리다 | 작성시간 23.09.17 하나님께 시선을 두기보다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보는, 그런 삶이 되기를, 그런 하루가 되기를 다짐하고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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