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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_요4:27~34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3.09.23|조회수263 목록 댓글 0

옛날에 임금이 보낸 사람을 사또라 불렀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사도(使徒, ὁ ἀπόστολος)라 부르며, 하나님이 자신을 보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또가 되어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있습니다. 바울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께서 여기 세상으로 보낸 사람입니다. 임금이 사또를 보낸 이유는 임금의 뜻을 각 고을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각 현장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보낸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나를 보낸 하나님의 뜻은 뭘까요. 예수께선 식사를 잡수라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게 밥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대답하십니다(4:32). 제자들과 대화하기 직전에 예수께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습니다(4:27). 도대체 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지 제자들은 의아했지만, 예수에겐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은 옛 유대인들이 통과하기도 꺼리는 땅이었습니다. 거기 혐오 받는 땅에 사는 사람과 예수께선 기꺼이 대화하셨고, 그렇게 대화하는 게 하나님 뜻이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선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형상이니까요.

 

사람을 가리지 않는 예수를 헤롯 같은 정치지도자, 사두개인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싫어했습니다. 정치권력이든 종교권력이든 권력은 그 유효기간이 십년입니다(花無十日紅 權不十年). 권력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십 년 이상 유지하긴 여간 어려운 일입니다. 유효기간이 지나 변질되고 약화된 권력을 방부처리하고 강화하기 위해 권력자들은 위기의식과 죄책감을 퍼뜨리곤 합니다. 예수 당시 유대교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 정체성을 깨뜨리고 예루살렘을 인정하지 않는 반민족 세력이라 정죄했습니다. 예수는 이런 괴담에 개의치 않으시고,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대화합니다. 우물은 성적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물에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만났고, 도망자였던 야곱이 눈이 좋은 라헬을 만났고, 십보라가 양에게 물을 먹일 때 모세가 도왔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건, 수군대는 사람들에게 빌미가 될만한 일종의 스캔들이었겠습니다오해받을 걸 감수하고 예수께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며 식사도 거른 채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합니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 호바르트 플린크 , 20.4×22cm,  루브르 박물관

 

주류 권력에 역행하며 하나님 뜻에 순종하시던 예수께선 결국 반역자를 처형하는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서 호흡하는 마지막 순간, 예수께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19:30).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뜻을 행하는 이의 마지막은 처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요새 종교 권력은 빨갱이들이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게 위기라고 말했던 정치권력을 흉내 내, 동성애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인구가 감소하고 국가가 흔들릴 거라는 괴담을 퍼뜨립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11:6),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모든 죽어가는 것사랑하고, 사랑하다가 죽는다해도 부활이 있다는 믿음’을 품은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종교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외합니다.

 

예수의 몸으로서 교회는 누군가를 희생양 삼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이북과 이남이, 이주민과 선주민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비주류와 주류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 함께 하나님나라를 향해 도약하도록 추동합니다. 종교권력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입니다.

 

 

글/ 민들레교회 목사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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