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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마법의 사중주(고병권,그린비,2005)중에서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05|조회수67 목록 댓글 0

제아무리 많은 물건을 가진 제조업자라 해도 내일 돌아올 어음을 막을 수 없다면, 오늘 시장에 물건들을 버리듯이 내놓아야 한다.

 

만 원이 만 원인 이유는 우리 모두가 그것을 만 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내민 '그것'이 다른 이에게 만 원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맑스)는 생산수단(P), 공동체(G), 개별자들(I)이 배열되는 방식(구성)을 비교하고, 그것에 따라 사회가 얼마나 다른 성격을 갖는지 해명했다. 그가 '고대적'이라고 부른 로마 사회의 경우, 생산수단(P)의 사적 소유는 공동체(G)의 구성원으로서 자신(I)을 재생하기 위하 생활수단을 확보케 해준다. 도시공동체의 목적은 그 구성원들을 소유자로서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봉건적'인 게르만 사회의 경우엔 생산수단(P)을 사적으로 소유한 개인들(I)이 상호관계를 통해 비로소 공동체(G)를 구성한다. 이미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이 특수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본주의에 들어오면 노동자(I)는 생산수단(P)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신분적 예속(전통적 공동체)에서도 오나전히 분리된다. 과거의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은 진정한 주체가 된다. 이제 개인과 개인의 연결은 공동체가 아니라 화폐(G)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사회는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자신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다지 화폐의 생산이 목적이며 화폐를 통해서만 사회적 관계맺음이 이루

 

최소한 기원전 6세기에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에서, 흔히들 서양 최초의 주화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졌다....오늘날 일부 토착 부족들에게서도 확인되는 이 화폐들은 "근대 서양의 화폐라는 개념과 심각한 차이가 있어 비록 따옴표로 표시하기는 했지만 '화폐'라는 단어를 써도 될지 의문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화폐 기능인 '교환의 등가물'이 아니었다.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교환되지 않는 화폐들'이었다. 베버나 폴라니는 교환수단이 아니라 "지불수단으로서 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초기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화폐 용도였다"고 말한다

 

고대 제국들에서는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거대한 궁전이나 사원의 창고관리에 필요한 가치척도로서" 이용된 것이다.

 

고대 제국들은 중앙의 거대 창고로부터 재분배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래서 기자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그리스 사신에게 '도시 한복판에다 터까지 잡아놓고 떼로 모여 서로를 속이고 거짓 맹세를 하는 자들' 이라고 그리스인들을 비난했다고 한다. 헤로도투스는 이것이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빌미로 그리스인들을 싸잡아서 비아냥거린 것"이라며,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시장의 관습이 없어서 결코 열린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법이 ㅇ벗고, 실로 전국에 단 하나의 시장터오 갖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수메르와 이집트 고왕국부터 함무라비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를 거쳐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고대 세계의 주요 도시 유적에는 시장터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홍기빈,『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p. 53).

 

16세기 ...화폐를 사용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그는 "완전히 딴 세상에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16세기 무역,금융,은행업의 대소유주들이 대개 외국이었던 것으 화폐의 이방인적 성격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16세기까지 대외교역이 국내교역과 분리되어 있었고, 국가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았다는 증거는 곳돗에서 확인된다...국내교역과 대외교역은 별도로 생겨나고 별도로 운영되었다. 교역이 자연스럽게 번져 나거거나 뒤섰인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폴라니)에 따르면 심지어 대외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대도시들조차 자체의 국지시장은 대외교역과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분리해서 가두었다.

 

브로델은..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그것은 17세기 그르노블에 갔던 한스트라스부르인이 푸줏간 주인들이 고기를 시장에서 팔지 않고 상점에서 파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는 장면이다. 당시 상점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브로델,『물진문명과 자본주의』2-1, p.74)

 

유럽의 바깥인 원격지에서는 금과 은으로 만든 정화나 금속괴들이 사용되었는데, 엄격히 말해 이것들은 화폐가 아니었다. 대체로 그것들은 후추나 염료 등과의 물물교환에 사용될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독자적인 화폐네트워크를 구축하고서 어음과 크레딧을 자유럽게 사용했던 환은행가들은 누구이고 어떻게 출현했는가. 학자들 사이에서 환어음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그것을 조직하고 사용한 이들인 환전상이 아니라 대외교역을 관장했던 은행가들이라는 사실에는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당시(13세기) 상법은 상인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사업을 수행한 나라의 화폐로만 값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가령 프랑스에 온 포르투갈 상인은 물건을 팍고 포르투갈 화폐가 아닌 프랑스 화폐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채권을 기초로 어음을 발행하고 그것을 화폐로 유통시킨 은행가들의 활동을 일종의 '화폐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볼수 있다.

 

Seigniorage. 과거 봉건영주(Seigneur)들이 자유롭게 화폐를 자주한 것에서 연원한 말로, 원래는 주화의 제조비용(금속가격+세공비)과 주화의 실제 유텅가치의 차이를 가리켰다. 영주들은 화폐 발행을 통해 이 같은 차액을 수입으로 얻었다. 19세기 이후에는 은행권이 주화를 대체하면서 정부가 이런 발행차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정부는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다 씀으로써 세뇨리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정부가 화폐를 빌릴 때의 가치는 그 화폐가 발행되기 이전의 것이지만, 갚은 때는 인플레로 인해 그만큼 저하된 가치이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세금'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코헨,『화폐와 권력』, pp.86~87).

 

통일된 환율 시세표와 그것의 금속 주화로의 표현이 그런 화폐적 보편 언어가 될 수 있을 터인데, 이것의 출현은 실제로 환은행가들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런 장소들(정기시) 중에서도 특히 중심적 역할을 하는 곳이 있는데, 그것을 '중심 정기시' 라고 부른다.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후반까지는 리옹이 이런 역할을 했다.

 

1572년까지 세 니이션(피렌체인, 제노바인, 루카인)들안 각각의 시세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는 단일한 콘토(각 화폐들의 교환비율)가 만들어졌다.

 

대외교역에 종사하는 상인이나 은행가들에게 영토국가의 성장은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다.... 국가는 자국 상인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했고, 대외상인이나 은행가들에게 부여했던 혜택을 대부분 최소했다.

 

리옹의 정기시를 주도하던 피렌체인들을 쫓겨났고, 비센초네의 제노바인들은 나아갔다....국가의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었던 제노바 사업가와 은행가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통치자들과 결탁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제노바인들은 자신들의 화폐네트워크를 통해 스페인 국왕에게 금융 지원을 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스페인 권력을 활용해 유럽의 화폐질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재편했다.

 

제노바 체제는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새로웠다. 그 하나는 국가-비록 외부 국가이기는 했지만-와의 사호작용 속에서 화폐를 발행했다는 점이다. 스페인 정부가 발행한 '아시엔토'를 화폐로 사용한 것은 과거 리옹에서 일반 무역업자가 발행한 어므을 화폐로 사용한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폐(아시엔토)를 금속주화와 직접적으로 연계시킨 것이다.

 

처음에 아시엔토 체제를 책임진 것은 독일 은행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스페인 재정의 파탄과 더불어 금격히 몰락하고 말았다. 16세기 중반부터 본겨적으로 아시엔토 체제를 주도했던 제노바인드른 스페인 재정을 직접 떠맡는 것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위험을 감당하는 쪽은 어음을 음으로 결제해야 하는 스페인 정부와 스페인 정부로투버 은을 직접 받아야 하는 상인들이었다.

 

스페인 국왕에 대한 대부의 대가로 제노바 은행가들은 세비야에서 스페인 재무성으로 들어온 은에 대한 권리를 얻는다. 제노바 은행가들이 구해야 할 금을 쥐고 있던 쪽은 이탈리아 상인들이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동방과 몇몇 상품 및 은을 주고 금을 받는 교역글 하고 있었다...은행가들은 이들을 통해서 전쟁이 일어나는 저지대 국가로의 화폐 송금과 금으로의 전환을 동시에 이루려고 했다. 방법은 과거의 환어음 체제와 비슷했다. 비센초네의 정기시에서 제노바 은행가들은 이탈리아 상이들에게 스페인 정부가 발행한 은교환 어음을 주고, 대신 네덜란드 인근 저지대에서 지급받을 수 있는 어음을 발행케 한다. 이 어음에는 저지대 상인들이 제노바 은행가들에게 해당 액수를 금화로 지불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 상인들이 저지대인 안트베르펜에서 지급될 어음을 발행할 수 있으려면, 먼저 안트베르펜에서 받을 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앞서 리옹의 환어음 체제에서도 확인한 내용이다. 이탈리아에 대한 플랑드르의 막대한 무역 적자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플랑드르의 무역 적자는 이탈리아 상인들이 그곳에 대해 실제로 채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시엔토에는 환율이나 채무의 지불에 관한 이행조항들이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은행가들은 반드시 금화인 피스톨화나 에퀴화로 지불해야 하며, 스페인 정부는 은화인 레알화로 상환한다.

 

아시엔토는 콘토처럼 교환의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대부'를 교환으로 위장하는 장치이다. 즉 아시엔토 체제는 교환 장치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대부 장치였던 것이다.

 

아시엔토 체제에서 우리는 사적인 어음 회로와 공적인 주화 회로가 통합된 것을 볼 수 있다.

 

은행가들의 구성을 보면 17세기 부터 디아스포라 은행가들이 몰락하고 점차 정착민 은행가들이 득세한다. 새로운 국제질서는 디아스포라 상인과 은행가들의 지위를 크게 흔들었다. 프랑스 대상인들의 팽창은 다른 한편으로 예전에 프랑스를 떠났던 신교들이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졌다. 그와 같은 귀화 현상은 독일의 궁정 유대인들, 스페인의 카탈로냐 및 바스트에서 성장하던 상인들, 나아가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상인들로 성장했던 마드리드의 5대 주요 길드 상인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화폐 유통만 하더라도 잉글랜드 은행권을 18세기 후반까지도 런던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장 보댕) 주권을 "신민들의 동의 없이 신민들에게 법을 부과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하며,...

 

"1490년대에 미래가 열렸다." 틸리의 이 과감한 선언이 지목하는 것은 15세기 말~16세기 초의 스페인-프랑스 전쟁이다. 이 전쟁이 장원, 촌락, 도시, 수도원 등으로 뒤얽힌 채 잠들어 있던 유러블 깨우고, 근대 국민국가를 향한 거대 장정의 시작을 알렸다는 것이다.

 

화폐질서의 변동과정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는 다른 읨에서 이 전쟁을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16세기 중반까지 대외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던 화폐네트워크에 고장이 생긴 게 이때이기 때문이다....16세기 말부터 도시들의 연결체제가 불안정해지고, 각 도시들이 영토국가에 의해 안으로 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앤더슨은 "16세기 중엽 스페인 국가 수입의 80%가 군비로 지출되었다"고 말한다....1789년 직전, 그 평화로웠던 시기에도 프랑스 재무총감 [자크] 네케르는 국가 지출 중 3분의 2가 군대에 할당되었다고 했다."

 

"근대 초기 유럽의 군사 지출을 보면 재정적 군국주의로 옮겨가는 경햐이 다분하다.....재정 지출 규모는 전쟁 시기에 항상 최고에 이르렀다. 가령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영국의 군비 지출 비용은 1560~85년 사이에는 20%였지만, 1585년 이후에는 스페인과의 전쟁 때문에 79%까지 상승했다. 17세기 네덜란드 예산의 약 90%가 스페인, 영국과의 전쟁을 위한 지출이었다"(퍼거슨,『현금의 지배』pp.48~49).

 

프랑스에서 부과된 최초의 정규적이 국세인 '국왕 타이유세'가 유럽 최초의 정규 부대인 15세기 중엽의 '칙령군' (스코틀랜드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의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부과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앤더슨,『절대주의 국가의 역사』p.30).

 

국가가 조세를 통해 얻을 수익을 나중에 주기로 하고 우선 상인이나 은행가로 부터 돈을 빌리는 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적자 예산'인 '공채'였다. 이런 제도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16세기에 중요한 의의를 획득한 것은 사실이다. 전쟁 등으로 항상 돈에 목말랐던 16세기 국가들은 하는 수 없이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공채] 정책을 발전시켜야 했다". 스페인의 왕가는 특히 공채제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543년경에는 (스페인) 국왕의 정규 세입의 65%가 채무에 대한 연간 이자로 지불되었다.

 

1690년대 말 영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프랑스 정부는 조세 수입에 대한 재무성의 예상을 기초로 공채를 팍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9년 전쟁, 1689~97)과 연이어 터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1702~14)으로 군비와 외교비용의 지출이 파격적으로 상승하면서 프랑스 정부는 채무의 연쇄 속으로 빠져든다.

 

 

근대 이전 서유럽의 국가장치들은 아주 허약했고..."국가장치가 발명된 곳은 아프로-아시아와 동양이었다.....

 

참고문헌

 

빌라르,『금과 화폐의 역사 145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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